|
월평 –수필
‘실감의 보수’와 ‘실감의 유리’
2018. 2 (문학도시)
권대근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1.
엄밀하게 말하면 수필은 나름대로 수필의 형식이 존재한다. 그래서 문학인 것이다. 비문학적 에세이의 특징인 설명적인 글은 수필의 본 맛을 주지 않는다. 2월호에 실린 몇몇의 글은 독자의 의식 속에 어떤 사실을, 다시 말해 객관적인 지식을 좀 얻었다는 느낌만 줄 뿐, 이성이나 감성에 호소하는 주제의 서정적 구체화나 그 미학적인 훈기는 전혀 드러나지 않고 있다. 이런 글들이 수필이란 이름으로 발표된다는 것은 문제라 아니 할 수 없다. 수필은 문학이기에 ‘격’을 요한다. 수필 창작에 있어서 정해진 어떤 법이라는 것을 굳이 말한다면, 그것은 메시지를 어떤 방법에 의해 미적으로 구체화할 것인가 하는 의미의 조형화를 말한다. 수필은 조금이라도 지식의 냄새를 풍기면 안 된다. 설명적인 언술로 주장만 늘어놓는다면 굳이 문학적 에세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문학은 형상과 인식의 복합체라는 측면에서 수필로서의 격, 즉 문학성을 유지해야 한다. 사상과 철학 같은 정신적인 요소가 문예미학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도 알아야겠다. 다시 말해, 지식은 사과 속의 영양분처럼 정서화된 지성으로 작품의 배면에 아련하게 나타나야 할 것이다.
수필창작에서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경험으로 글을 쓸 것이 아니라 체험으로 글을 써야 한다는 점이다. 체험이란 집단적 인과율의 산물인 경험과는 구별되는 개인적 감상의 파편들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체험에서 얻은 정신적 반응이 작품 속에서 ‘실감의 보수’와 ‘실감의 유리’라는 미적 경로를 거친 미적 정서로 유로될 때, 진정한 수필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문학성을 확보하는 한 방안으로 ‘실감의 유리’와 ‘실감의 보수’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두 가지 전략은 ‘우회성’이란 용어로 문학가와 더 친숙하다고 하겠다. 제한된 지면과 언어의 부피 속에 부푼 표현 욕망을 압축하는 데, 그것은 더없이 좋은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문예문은 ‘전달소통성’보다는 ‘전달 차단성’을 추구해야 할 운명을 안고 태어났다. 현대수필의 잡문성이 바로 이 표현 기술의 부재에서 온다고 하면 너무 지나친 진단일까. 이번 월평에서 다룰 작품은 우회성이 드러나 문예미학을 안겨주는 두 분의 수필, 박말애의 <테왁>과 류창희의 <아름다운 세상>이다. 문학은 사물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통해서 승화시켜진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이 문학적 기법을 통해 문예미학을 완성시킬 때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수필은 ‘문악’이 아니라 ‘문학’이기 때문이다.
2
박말애의 <테왁>은1월호에 실린 작품 중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잘 쓴 수필’이다. 박말애의 <테왁>은 높은 문학적 성취도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수필에는 해녀로서의 인생사에 대한 세련된 인식이 드러나 있다. 그녀가 화두로 삼고 있는 ‘인생사’의 이야기가 신뢰감과 설득력을 가지고 독자에게 전달될 수 있는 까닭은 자신이 걸어온 삶을 압축하는 단축키로서 가장 적재의 화제인 ‘테왁’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세상살이는 바다에서 물질하는 모습으로 드러난다. 그냥 풍경이 아니라 그것이 개성적인 심미안으로 파악되어 문학적 형상화 과정을 거치면서 절경이 된다는 데서 박말애 수필의 남다른 매력을 찾을 수 있다. <테왁>은 한마디로 인생사에 대한 작가의 세련된 인식과 사유가 빚어낸 결정체다. 삶의 무게를 제재를 통해 바라봄으로써 작품의 내포를 다졌다. ‘삶과 죽음이 상존하는 바다에서 유일하게 떠다니는 동그란 부표 하나! 그를 의지하면서 날리는 해녀의 숨비소리에는 꿈을 향해 피우는 불씨가 살아있다.’라는 진술은 비장함을 안겨준다. 문학적 형식이라는 구조와 관계 속에서 수필의 소재가 되는 해녀의 테왁은 다른 직업인의 시각으로 보면, 누구에게나 익숙한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해녀의 삶이 '낯설게 봐야 한다'라는 명제와 만나면서 손맛을 우려낸다.
이로써 이 수필은 간접화, 내면화, 완곡화라는 예술적 특성을 구축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제재인 ‘테왁’을 인생의 동반자로 비유해서 의미화해내고 있는 이 수필은 화소가 특별해서 문학적 가치를 지닌다기보다 물 속에서 생활하는 해녀의 일상을 다양한 의미로 직조해내고 있어 나름대로 문학성을 확보하고 있다. 특히 정서를 표현함에 있어 ‘우회적 수법’을 잘 활용하고 있어 미적 쾌감을 준다. ‘테왁’은 이 수필 속에서 ‘동그란 부표’, ‘생명의 끈’ ‘정겨운 파수꾼’, ‘그림자’로 그려진다. 그녀의 진술처럼, ‘해녀가 물질하기 위해 갖춰야 할 도구 중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은 없지만, 테왁은 특별한 존재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보호자 또는 배우자와 같이 살아가지만, 해녀는 말을 할 줄 모르고 표정도 없는 테왁과 동행을 한다. 해녀의 안전을 책임지는 테왁은 망사리를 매달고 있다. 그물로 짜진 망사리는 그 안에 채취한 해산물을 담아 해녀가 뭍으로 나올 때까지 살아있게 하는 공간이다.’ 테왁에 의지해서 내는 숨비소리에는 꿈을 향해 피우는 불씨가 살아 있다고 작가는 말한다. 그러면서 작가는 자신과 테왁의 관계를 ‘아이와 보호자’ ‘아내와 남편’, ‘바늘과 실’, ‘사람과 미물’ ‘사랑의 노래를 부르는 다정한 연인’ 등으로 표현하면서 정서의 간접화를 위해 최선의 노력하고 있다.
나는 바다 한가운데 혼자 남아 있었다. 사방이 아득한 사막과도 같은 물속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숨을 고를 수 없는 그때 죽음의 두려움이 내 곁으로 다가오는 아득함을 느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한 그 순간의 기억이 한동안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날따라 유난히 환한 물속으로 무심하게 멀어져 가는 망사리를 망연히 내려다보는 안타까운 그 심정이 지금도 화인처럼 남아있다. 하루해가 서서히 기울고 망사리 속은 자연의 베풂으로 가득하다. 테왁은 종일 바다와 씨름을 한, 나비처럼 가벼워진 해녀를 태우고 뭍으로 향한다. 해녀의 안녕을 비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며 둘은 사랑의 노래를 곧잘 부른다.
- 박말애의 <테왁> 중에서 -
위의 인용 단락은 수필의 결말부다. 이 단락의 앞에는 오래 사용해 온 테왁이 짠물에 닳고 삭아서 매듭이 끊어진 바람에 테왁을 잃어버렸던 경험이 기술되어 있다. 작가는 그 당시 죽음의 두려움을 느꼈다고 한다. 망사리는 깊은 바닷속으로 떨어지고 자유의 몸이 되어 물살을 타고 그녀 곁을 떠나는 테왁을 붙잡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헤엄을 쳤지만, 작가를 조롱이라도 하듯 테왁은 그녀에게서 멀어져갔던 것이다. 이 지점에서 그녀는 냉정하게 임과 이별하는 장면을 떠올린다. ‘돌아오라고, 다시 한 번만 내게 돌아오라고 간절히 애원하며 붙잡으려고 애를 쓰는 안타까운 마음을 뿌리치고 돌아서는, 무정하기 그지없는 임을 보듯 애달픈 심정이었다.’는 표현에는 안타까움은 물론 절박함이 놓여 있다.멀어져가는 테왁을 헤엄쳐 잡으려고 한 데 대한 작가의 후회는 인생사의 비정함이 녹아 있다. 이는 작가의 치밀한 치환원리의 적용 능력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려는 심정으로 자신의 심사를 변심한 연인의 냉정한 이별장면으로 이미지화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비유를 통한 함축은 우회적 수법의 대표적인 방법이다. 치환원리를 써서 비유적으로 상황을 제시하는 우회적 표현 능력이야 말로 모든 문학가가 먼저 가져야 할 소질이 아닐까. 박말애는 그런 능력이 충분해 보여 든든함을 안겨준다.
이 수필의 압권은 마지막 대목이다. 그녀에게 ‘테왁’은 인생의 동반자다. ‘하루해가 서서히 기울고 망사리 속은 자연의 베풂으로 가득하다. 테왁은 종일 바다와 씨름을 한, 나비처럼 가벼워진 해녀를 태우고 뭍으로 향한다. 해녀의 안녕을 비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며 둘은 사랑의 노래를 곧잘 부른다.’라는 결말부는 이 수필에서 가장 중요한 지배적 정황이 된다. 둘이 부르는 사랑의 노래에는 무슨 의미가 담겨 있는가. 언어는 결핍의 표현인 것이다. 종일 바다와 씨름을 한 나비처럼 가벼워진 해녀를 태우고 테왁은 뭍으로 향한다. 살아있음에 대한 감사와 가장으로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안도감, 그리고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해준 자연에 대한 고마움을 작가가 ‘사랑의 노래’로 구체화함으로써 삶의 무게 가볍게 하기가 문학적으로 잘 형상화되었다고 하겠다. 작가는 바다에서 테왁을 놓쳐 가장 힘들었던 때를 회고하며 삶의 희노애락을 수필 속에 녹여낸다. 상징과 비유 등의 수사법을 최대한으로 활용하고, 주제를 의미화하는 문학적 수법을 통해 그녀는 독자로 하여금 상상과 연상의 세계로 안내하고 있다. 진정한 문학적 감동은 여기서 싹을 튀우는 것이다.
류창희의 <아름다운 세상>은 작가의 친구 미카엘라가 지휘하는 ‘아름다운 세상’ 연주회를 보러 가다가 일어난 자동차 접촉사고를 화소로 해서, 아름다운 세상 풍경이 어떠한지를 잘 보여준 수필이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우리 속담이 진리라는 것을 보여주듯, 그녀는 사고를 내고 먼저 내려 깍듯하게 인사하며 잘못을 인정하는 택시기사를 보험처리도 하지 않고 그냥 보내준 체험사례를 수필로 썼다. 일상적 사건을 문학적 사건으로 전환한 것이다. 사실 작가의 선행이 수필의 화소로 설정되는 경우는 자칫 잘못하면, 수필을 버리는 수가 있다. 잘못 구상하면 자랑질이 될 수도 있고, 그냥 이야기로 흘러가면 문학이 아닌 글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류창희는 이런 위험성을 전부 비껴나갔다. 작가의 선행이 전혀 자랑질을 하려는 의도로 나타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작가가 그려내고자 하는 ‘아름다운 세상’과 그날의 사건은 적재적소의 위치성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어 가면 이 세상이란 스스로 선택하기에 따라 아름다워질 수도 있다는 그녀의 인생관이 읽힌다. 적재적소의 삽화와 지배적인 정황은 우리의 미적 인식을 자극한다. 삽화와 예화는 아름다운 세상을 환기하는 미적 인식을 제시하며 독자에게 미적 사유의 세계를 열어준다고 하겠다
“스타치오statio, 숨 고름 시간.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이 총총하다. 작은 산골마을, 그곳에서 봐주는 이 알아주는 이 없이도 별을 바라보던 풀꽃을 닮았던 여린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래 잘했어, 잘했고 말구.’ 셀프위로를 했다.”라는 이 진술은 ‘아름다운 세상'이란 주제를 잘 헹궈낸 대목이라 하겠다. 우리가 수필을 쓸 때, 가장 조심해야 할 부분이 주제의 통일성인데, 다시 말해 구성의 각도와 초점을 한 곳으로 모으는 일인데, 이 작품은 구성의 각도와 초점을 주제의 구체화에 맞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정의 문학이라는 수필의 성격을 정확히 관통하고 있어서 수필의 맛을 준다. 제재를 통해 주제를 겨냥하는 수법도 그렇고, 모든 문단이 전체 주제를 향해 일사 분란하게 응집되고 있는 등 작가로서 갖추어야 할 문단 구성 능력이 탁월하다고 하겠다. 다양한 설득적 자료와 만난 간접화된 주제의식이 햇살 같이 밝게 빛날 뿐만 아니라 사과 속의 영양분처럼 문맥에 녹아있다는 점은 이 수필의 가장 큰 매력이다.
가톨릭센터 신부님의 설명도 들었다. 어려운 음악, 긴 음악을 함께 연주한 분들을 바라보며 친구가 한분, 한분 소개한다. 지휘하던 그 손끝의 소망이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 지난 날, 우리는 독서회를 했었다. 어린 아이들을 돌보며 외출조차 어렵던 시절, 다섯 명이 한 달에 한권씩 책을 읽고 토론하였다. 전문지식도 지도자도 없이 그저 기저귀나 갈고 이유식이나 만들던 손이다. 그때 우리가 읽던 교육문제나 사회문제의 씨앗이 발아한 걸까. 친구는 지휘를 한다. 나는 그 이전까지 지휘는 남자의 영역으로만 알았었다. 그래서 내 친구가 더 멋지다.
독서회 멤버들은 책 읽고 독후감을 발표하듯, 지금은 모두 꿈꾸던 자기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던 소녀의 꿈이 내려와, 내 머리를 쓰다듬고 내 어깨를 토닥인다. 신神의 경지가 높고 멀어서 나는 감히 다가갈 수 없지만, 기둥 뒤에서 두 손을 모은다. 종교에서는 ‘외인’인 나에게도, 음악의 아우라가 은하수 물결되어 연주한다. 아마도 미카엘라가 연주하는 꿈도, 몬테베르디도, 성모마리아도, 내가 존경하는 공자의 말씀을 빌리자면 “도는 하나로써 통한다.”는 ‘일이관지一以貫之’일 것이다. 아름다운 세상으로 가는 길은, 고향도 하늘도 멀지 않다. 수정터널을 무사히 지나간 건실한 택시운전사도 그러했으리라.
까만 밤, 온 세상이 피크닉 나온 듯 충만하다.
- 류창희의 <아름다운 세상> 중에서 -
모든 문학적 의미는 텍스트의 구조로부터 나오고, 그 구조는 문학적 감동을 생성하는 문학적 의미와 미적 울림을 결정한다는 점에서 대단한 중요하다. 류창희가 구조에 심혈을 기울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류창희의 이 수필은 한마디로 ‘조화’와 ‘융합’의 가치를 전면에 내세워 주제를 지향해나간다는 점에서 대단히 전략적인 구조를 띄고 있다. 작가의 시선은 자신의 외부에 머문다. 주로 자신의 벗이 지휘한 연주회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일에 몰두한다. 그녀의 가슴 속에 물결치고 있는 아름다운 세상은 조화와 융합의 공간이다. 작가적 현실 세계가 삶의 기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이라는 보편성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향으로 키를 틀고 있기 때문에 그녀의 작품은 문학적 향기를 발산한다고 볼 수 있다. ‘소프라노 테너 바리톤의 조화로운 음악’, ‘르네상스적인 구양식과 바로크적인 신양식의 융합’, ‘기악과 성악의 놀라운 융화’, 등의 표현에는 주제지향성을 우회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작가의 의지가 그대로 묻어난다.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던 소녀의 꿈이 내려와, 내 머리를 쓰다듬고 내 어깨를 토닥인다. 신神의 경지가 높고 멀어서 나는 감히 다가갈 수 없지만, 기둥 뒤에서 두 손을 모은다. 종교에서는 ‘외인’인 나에게도, 음악의 아우라가 은하수 물결되어 연주한다.‘라는 표현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인지에 대한 해답이라 하겠다.
수필은 자아와 그리움을 찾아 나서는 작업이다. 현재는 과거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여기서 자신의 과거를 잃고 현재에 묻힐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회상을 하는 가운데서 자신을 찾아 바로 세우는 일이 바로 수필적 생활이다. 충만한 기운으로 가득 찬 의식의 산실이었던 독서회, 그 모임을 함께 했던 친구를 멋지게 그려내는 이유도 주제의식과 관련이 깊다. “도는 하나로써 통한다는 ‘일이관지一以貫之’일 것이다. 아름다운 세상으로 가는 길은, 고향도 하늘도 멀지 않다. 수정터널을 무사히 지나간 건실한 택시운전사도 그러했으리라. 까만 밤, 온 세상이 피크닉 나온 듯 충만하다.”라는 마무리 진술 또한 주제의미화로 지배적 정황에 상응한 역할을 한다. 대단한 ‘우회성’의 기법이다. 그녀가 가슴 속에 품고 있는 ‘아름다운 세상’이 문맥 속에서 이미지로 치환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아름다운 세상으로 가는 길, 도는 결국 하나로써 통한다.’는 명제의 제시도 유학을 전공한 분다운 깨달음이다. 그녀의 인생해석이 공감을 불러오는 것은 ‘일이관지’라는 사자성어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수필을 맛있게 읽어내는 데 중요한 키워드는 ‘독서회’라 하겠다. 인간적인 만남의 장을 열어주는 수필구조가 가진 그 가공할 만한 힘 때문에 독자들은 역지사지를 가치로 하는 이 작품을 읽는 것이다. 그리고 감동한다.
3.
위의 두 편 외에도 주목할 만한 작품들도 몇 편 더 있었다. 쌀을 피같이 여기셨던 시어머니가 병환으로 쌀농사를 못 짓게 된 사연을 그린, 안경덕의 <쌀>, 일간지에 실린 조성진 피아니스트의 기사를 통해 피아노에 열광할 수밖에 없는 어린 시절의 꿈 이야기가 녹아있는, 정양혜의 <멀어지는 꿈>, 시대가 변했으니 좁쌀에 대한 오해가 풀렸으면 한다는 좁쌀변호론을 자신의 호칭으로 연결시켜 재미있게 풀어낸, 정인호의 <좁쌀영감> 역시 전달차단성이 빛나는 수필이라 하겠다. 이 수필은 단순한 생활의 반성이나 느낌의 표현이 아니라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하는 인생의 본질을 관통하고 있기에 유익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글은 세상의 모순을 깊은 통찰을 통해 바로 보자는 메시지를 담고 있어 어느 다른 수필들과도 차별화된다고 하겠다. 쉽게 말해 인생의 모습과 우리 사회의 다양한 풍경을 작가의 눈으로 보고 적은 글이라서 정서적 감화까지 맛보게 한다고 하겠다.
언어인 말은 존재의 집이다. 인간은 누구나 말 속에서 산다. 마치 자연스럽게 다듬어진 홍도의 계란 같은 조약돌처럼 꾸밈이 없는 듯이 기교를 부려서 글을 쓴다면 분명 독자들을 감동으로 초대할 수 있을 것이다. 삶의 폭과 깊이는 자신이 지닌 어휘의 깊이와 폭을 넘을 수 없다. 화장하는 것이 자신의 외면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이라면, 외면에 드러나지 않는 정신의 표현인 말을 ‘우회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문학하는 생활이다. 문학하는 생활은 자신의 정신을 변형시키는 내면의 화장이다. 외면인 육체는 다만 정신의 하수인일 뿐이다. 언어의 변화는 곧 그 사람 정신의 변화요, 정신의 표현이다. 체험을 글로 표현함에 있어서 ‘우회성’을 살리는 것은 문예미학을 위한 수사적인 전략이다. 박말애가 ‘테왁’을 통해 인생을 그려내고, 류창희가 연주회와 자동차사고를 화소로 연결시켜 ‘아름다운 세상’의 지상명제를 풀어낸 것은 전부 실감의 유리와 실감의 부수라는 전략 때문이라고 하겠다.
자기의 사상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수필에도 기교가 요구되는 것은 그것이 문학의 한 장르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수필이 문학의 한 장르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설명의 나열에 그쳐서는 안 되고 표현되어져야 하는 바, 그 효과적인 표현을 위해서는 기교가 없는 듯하면서도, 실은 없는 듯한 기교가 내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수필에 있어서 기교가 두드러지게 드러나 보이게 되면 수필답지 못한 것으로 이해된다. 꾸밈이 없는 자연스러움은 수필의 생명이요, 최대의 강점이요, 인간의 의식과 삶의 형태를 글로써 변환시켜내야 하는 건 인류의 미래를 예지해야 하는 작가적 인식이다. 이 두 작품이 주는 쾌미는 인생을 보는 작가의 넉넉한 여유와 긍정의 자세다. 언제나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큰 관심사는 나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명제가 아니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