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재사랑산악회-2012. 송년등반] 포천 백운산-도마치봉 (2012년 12월 16일) [1]
▶[제125차 산행] 광덕고개→ 백운산(904m)[점심]→ 삼각봉→ 도마치봉(937m)→ 흥룡산 능선 →[안부] 갈림길→ 봉래골→ 흥룡사→ 백운계곡→ 주차장:백운식당의 <파전과 도토리묵 >
▶[프롤로그] … 2012년 송년(送年) 산행(山行)
☆… 오늘은 2012년을 마감하는 12월 송년 산행일이다. 제125차 산행으로 포천의 백운산-도마치봉 능선을 주파하는 코스이다. 백운산 능선은, 한북정맥이 첩첩 산군을 거느리고 남으로 내리뻗는 산줄기로 산의 품새가 깊고 우람한 명산이다. 여름에는 깊은 골짜기에서 흘러내려오는 맑은 물이 철철철 흘러넘치는 백운계곡은 많은 사람들이 가족과 함께 찾아오는 명승지로 유명하다. 특히 겨울에는 능선을 걷는 산길이 호젓할 뿐 아니라 눈 내린 뒤의 설경이나 서리꽃[상고대]이 아름답기로 이름이 나있다. 북에서 남으로 내리뻗는 능선을 따라가면서 백운산 정상이나 도마치봉에서 바라보는 동서남북의 산세가 아주 장관이다.
☆… 오전 7시 46분, 군자역을 출발했다. 우리의 버스는 47번 국도를 따라 포천군 이동면을 향하여 북상해 갔다. 오늘 송년 산행을 맞아 장병국 회장이 버스 안에서 따뜻한 인사말을 했다. …지난 한해, 여러 가지 보람도 있었지만 어려움도 많은 임진년을 보내면서 누구에겐가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감사할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의미 있고 아름다운 삶을 살았다는 뜻이다. 그렇다. 감사는 사랑의 다른 이름이다. 장 회장은 오늘 중요한 회의가 있어 이동에서 하차하여 귀경했다. 우리의 버스는 포천군 내촌휴게소에서 잠시 쉬었다. 그리고 주행을 계속하다가 이동에서 372번 지방도로로 갈아타고 오전 9시 35분 오늘 산행의 들머리인 광덕고개에 도착했다. 경기도 포천군과 강원도 화천군의 경계를 이루는 고갯마루이다. 고개의 왼쪽이 광덕산이고 오른쪽이 백운산 능선이다. 일명 ‘사창리 고개’로 통한다. 고개 너머가 바로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사창리이기 때문이다. 사창리는 한국전쟁 때 중공군과의 최대의 격전지로 우리 국군이 엄청난 손실을 입고 퇴각한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 한국전쟁의 처절한 격전지,‘사창리(史倉里) 전투’
☆… 사창리 전투는 1951년 4월 22일부터 24일까지 광덕고개 북쪽 사창리를 중심으로 전개된 전투이다. 이른바 중공군의 춘계(春季) 1차 공세 때에 절정을 이루었다. 중공군의 2월 공세는 지평리전투에서 유엔군에게 처참한 패배를 당했다. 중공군은 이 전투에서 입은 손실을 만회하고자 이른바 ‘춘계공세’를 계획하여 5차례의 전투를 감행하는데, 그 첫 번째 전투가 사창리전투인 것이다. 중공군은 제20군 예하의 3개 사단(제58·59·60사단)과 제40군 예하의 제120사단 등 4개 사단을 동원하여 가평 북방의 사창리와 화악산 일대를 집중 공격하였다. 당시 국군의 상황은 제6사단이 중공군의 공격이 개시되기 이전에 미 제9군단의 작전계획에 따라 사창리 북방의 와이오밍선으로 진격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중공군의 공격(제1차 춘계공세)을 받게 되자, 사창리 부근의 명월리와 광덕리 일대에서 서둘러 방어 태세로 전환하게 되었다.
중공군은 신정공세와 2월공세를 통하여 남한 전역을 석권하고자 기도하였으나 계속 실패하자 2개월여에 걸쳐 전투력을 복원하고 전력(戰力)을 정비하는데 전력(全力)을 기울여 중국 본토로부터 6개 군을 보충 받아 총 70만이라는 대병력을 한반도에 투입하여 5차에 걸친 춘계공세를 감행하게 된다. 이 춘계공세의 목적은 수도 서울을 재점령하여 저들의 군사적 우위를 과시하고 유엔군을 압박함으로써 유엔군이 스스로 한반도에서 철수하도록 강요하거나 향후 논의 되고 있는 휴전회담에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기 위한 정치적 계산이 있었던 것이다. 1차 공세라고 하는 이 ‘4월 공세’는 문산-화천에 이르는 약 110km의 전선에 중공군 12개 군 36개 사단과 북한군 1개 군단을 투입하여 서울을 포위 공격 하는 것이었다.
☆… 중공군의 공격은 경기도와 강원도의 경계지점인 광덕산 전방의 국군 6사단 전방에서부터 개시되었다. 이후 임진강 북쪽의 적성면(마지리)일대 그리고 강원도 인제 정면에서도 동시다발적으로 전개되어 일대 혼전이 벌어진다. 이때 국군 6사단은 김화를 확보하기 위하여 공격을 진행 중에 있었다. 그러나 사창리 남쪽의 화악산과 국망봉(1168고지), 복주산(1152고지)로 이어지는 험준한 연봉(連峰)으로 기동하여야 하였고 차량 기동로는 없었으며 신포리-사창리를 연결하는 단일 통로가 고작 있었을 뿐이었다. 국군 6사단은 사창리를 점령한 후, 김화를 공격하기 위하여 광덕산-복주산을 거쳐 약 10km를 진격하던 중 뜻하지 않던 중공군의 대공세와 만나게 되었다. 이때 국군 6사단은 험준한 지형을 타고 진격하는 과정에서 상하 인접부대가 적절히 연결되지 않았고 상호 지원도 되지 않았기 때문에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 앞에서 급편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방어로 전환하였다.
이날 밤, 드디어 중공군 특유의 야간 공격이 개시 되었다. 중공군은 험준한 지형을 이용, 국군의 간격을 뚫고 침투하여 전방과 후방에서 동시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문제는 국군 6사단 장병들의 암울한 기억 속에서부터 시작이 되었다. 즉, 북진작전의 최선봉에서 압록강 부근 온정리까지 진격했던 6사단이 중공군에게 퇴로가 막혀 엄청난 고난과 막대한 피해를 입었던 것이다. 이날 바로 이 악몽이 되살아나면서 중공군에게 포위 되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무질서한 철수를 감행하게 하였다. 이러한 사태는 예비 연대의 역습 기회마저도 상실한 채 중공군이 공격한지 몇 시간 만에 진지를 포기하고 서둘러 철수를 한 것이었다. 따라서 서쪽의 미 1해병사단과 동쪽의 미 24사단 사이에 대규모의 돌파구가 형성되고 말았다. 사단장은 이를 조기에 수습하고 사창리 남방을 방어선을 편성하고자 하였으나 여의치 않았다. 국군 제6사단은 저지진지를 구축하여 중공군의 대규모공세를 막으려 하였으나, 역부족으로 방어에 실패하고 사창리 남쪽으로 밀리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병력과 야포와 각종 차량 등이 협소한 사창리 계곡으로 밀려들어오게 됨에 따라 큰 혼란이 야기되었고, 체계도 와해되었다. 그 후 국군 제6사단은 일부 수습된 병력을 화악산과 석룡산에 배치하여 중공군의 진출을 저지하려고 하였으나 또 실패하여 가평까지 철수하고 말았다. 사창리전투는 한국전쟁 중 수많은 인명과 병기의 손실을 입은 ‘7대 패전’의 하나로 꼽히는 전투였다.
☆… 이 전투로 국군 제6사단은 큰 타격을 입었다. 중공군의 공격을 받고 분산 철수했다. 소총 2,263정, 자동화기 168정, 로켓포 66문, 대전차포 2문, 박격포 42문, 곡사포 13문, 차량 87대의 손실을 입었고, 6사단을 화력을 지원하던 미 지원포병도 105미리 곡사포 15문, 4.2인치 박격포 13문, 242대의 무전기 차량 73대 손실을 입었습니다. 이 사창리전투에서 국군 6사단은 최초 공격작전을 통하여 험준한 산악을 뚫고 광덕산-복주산 까지 확보하여 용맹을 떨치기도 하였으나, 결국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패하여 불명예를 받게 됨은 물론 이당시 한국정부가 추진하던 국군 10개 사단 증편 계획이 지연되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였다. 가평에 집결하여 부대를 재편성하게 되었으며, 중공 제20군은 가평과 청평간의 주보급로를 차단할 목적으로 가평 일대로 진출하게 되었다.
이 당시 유엔군의 편성을 보면 지형적으로 험준하고 기동이 곤란한 전투에는 주로 국군이 투입되었는데 이는 미군을 포함한 여타 군에 비하여 기동 장비가 없어 도로망이 없는 지역에서도 용이하게 기동하고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었기 때문이었으나, 화력 및 기동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국군이 중요 지역에서 전투를 치루는 기현상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국군장병들은 내 조국, 우리 땅은 내가 지킨다는 결연한 생각에서 전혀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 따라서 국군장병들의 투혼과 애국심만이 이를 지켜주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국군장병들은 여기에 굴하지 않았고, 국군 6사단은 사단을 재편성하여 전 장병이 심기일전, 전 장병이 삭발하고 용문산지구 전투에서 투혼을 발휘하여 중공군 1개 군을 도살하고 재진격함으로써 국군의 위용을 과시하였다.[참고 문헌] 韓國戰爭史(戰史編纂委員會)
▶한북정맥(漢北正脈)의 허리 백운산(白雲山)-도마치봉
☆… 한북정맥은 백두대간의 추가령(楸哥嶺)에서 갈라져 나와, 남쪽으로 한강과 임진강에 이르는 산줄기를 말한다. 조선 시대 우리 조상들이 인식하였던 산줄기 체계는 하나의 대간(大幹)과 하나의 정간(正幹), 그리고 이로부터 가지를 친 13개의 정맥(正脈)으로 이루어졌다. 신경준의『산경표(山經表)』에 근거를 둔 이들 산줄기의 특징은 모두 강을 기준으로 한 분수산맥으로 그 이름도 대부분 강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이 산줄기는 동쪽으로 회양·화천·가평·남양주, 서쪽으로 평강·철원·포천·양주 등의 경계를 이루는데 자연히 동쪽은 한강 유역이고 서쪽은 임진강 유역이 된다. 이 산맥은 우리나라 중부 지방의 내륙에 위치하여 비교적 높은 해발 1,000m급의 산으로 연결되었다. 이것은 의정부 북쪽에 이르고 있어 예로부터 교통과 산업의 발달에 크게 영향을 주었으며, 동서의 기후 차이에도 관계 깊은 산줄기이다.
신경준의『산경표(山經表)』에서 명명한 한북정맥을 이룬 주요 산은 현대 지도에서 찾아보면,
추가령·백암산(白巖山)·양쌍령(兩雙嶺)·적근산(赤根山)·대성산(大成山)·수피령(水皮嶺)·광덕산(廣德山)·백운산(白雲山)·도마치봉·국망봉(國望峰)·강씨봉(姜氏峰)·청계산(淸溪山)·현등산(懸燈山)·죽엽산(竹葉山)·도봉산·노고산·현달산(峴達山)·고봉산·일산의 장명산 등이다.『산경표』와 같은 시대의『대동여지도』와 비교해 보면 하구 쪽 파주시 교하면의 곡릉천(曲陵川) 유역을『산경표』는 임진강 유역으로,『대동여지도』는 한강 유역으로 대별한 것이 서로 다르다.
<계 속>
첫댓글 고문님의 후기를 읽으며 아름다운 경치가 눈앞에 다시한번 선 하게 다가옵니다
아름다운 경치와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