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간길 : 24회차(도래기재 ~ 화방재)
2005. 11/11~11/12.
글쓴이 : 미스터리
1. 지난 곳/시간.
도래기재 (4:00 출발) ~묘 (4:11) ~임도1. (4;29) 4~5개 봉우리 지나, ~임도2. (5:10) ~구룡산 (5:51) ~헬기장 (5:55) ~고직령 (6:15) ~무명봉(1231봉) (6:25) ~곰넘이재 (6:42) ~헬기장 (6:55/7:34) ~신선봉 (7:55/8:08)
~차돌베기(각화산삼거리) (8:33) 두개의 무명봉 지나, ~깃대배기봉(백연봉) (9:37/9:43) ~묘 (10:19) ~부소봉 (10:30/10:38) ~천제단 하단 (10:47) ~태백산 정상 (10:52/11:05) ~유일사매표소 갈림길1. (11:37) ~유일사매표소 갈림길2. (11:49) ~안부 고갯길 (12:04) ~무명봉(1174봉) (12:07) ~사길치(산령각) (12:12) ~사길령매표소 (12:24) ~화방재 (12:31) 총 8 시간 31 분.
2. 이동 거리.
도래기재~구룡산 :5.46km. ~신선봉 :4.96km. ~깃대배기봉 :5.35km. ~태백산 :3.93km. ~화방재 :4.5 km. 총 24.2km.
3. (24 회차)
(도래기재~신선봉) 10.42km. (4:00/7:55)
도래기재 고갯마루에서 잘 다듬어 놓은 층계 진입로로 오늘의 산행을 시작한다. 고갯마루 위로 동물이동로 공사가 완료되어 어수선하던 고개는 어둠 속에서도 정비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마루금으로 접어들자 우측(남쪽) 아랫마을의 불빛이 보인다. 아마도 도래기, 곡내, 서벽 마을의 불빛일 것 같다. 좌측(북쪽) 우구치(牛口峙)마을의 불빛은 보이지를 않는다.
묘를 하나 지나 어느만큼 오르니 임도가 마루금을 가른다.(4:29) 아마도 방화선인가 보다. 그 곳에는 金剛소나무에 대한 설명판이 붙어 있다. 금강송은 이미 황장산을 지나올 때 소개했듯이 황장목, 춘양목으로도 불리던 특급 소나무이다. 이로 인해 ‘억지 춘양’이란 말이 생겨 났을 정도이니 대단한 나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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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양목을 돌아 보면.
대간길의 前구간 고치령을 지나오면서 간간히 하늘로 치솟은 赤松을 만나게 된다. 이 소나무들은 갈곶산, 봉황산에 많이 남아 있고 도래기재 아래 우구치에도 남아 있다. 일제 강점기에만 해도 구룡산에 이르는 대간길 좌우로 이 소나무들 밀림이었다 한다.
이 소나무들을 벌목하여 1차 집산한 곳이 도래기재 아랫마을 우구치였고, 이를 옮기기 위해 뚫은 터널이 지금은 패터널로 도래기재 아래를 관통하고 있는 금정터널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수탈의 흔적이다.
이렇게 실려 내려간 금강송은 아래 고을 춘양에 모여 낙동강 뗏목으로 떠내려가 대궐의 기둥도 되고, 사찰의 대들보도 되고, 왕족이나 고관대작의 棺으로도 씌였다. 춘양에서 나오는 최고의 소나무이기에 ‘춘양목’이라 불렀다. 영광굴비와 같은 맥락이다.
그러던 것이 1955년 춘양을 지나는 영동선 기차가 놓이게 되자 춘양 사람들은 직선으로 관통해야 할 노선을 억지를 부려 U字로 꺾어 읍내를 통과하게 하고 춘양역을 개설하였다. 이래서 ‘억지 春陽’이 되었다 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材木商들이 일반 소나무를 팔면서 폭리를 노려 억지로 춘양목이라 우겨 ‘억지 춘양’이 되었다는 말도 있다. 그나저나 춘양목의 명성에서 생겨난 말이다.
(或者는 이도령과 성춘향을 생각하여 ‘억지 春香’이라 하는데 이는 맞지 않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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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도를 건너자 길은 가지런한 나무층계를 통과하여 능선길로 이어진다. 전망이 있는 무명봉(1020봉)을 지나는데(4:36) 나무 벤치 2개가 쉼터를 마련해 주고 있다. 이어 1030봉(4:44), 1049봉(4:49)으로 계속 오르고 드디어 1060봉까지는 오르막이다.(4:56) 이 곳에는 3-6 위치표시판이 서 있다. 이제 대간길은 잠시 내리막이다. 3-7 위치표시판이 서 있는 지점에는 역시 쉴 수 있는 나무벤치 두개가 능선길 옆 공간에 놓여 있다.
이윽고 다시 두 번째 임도에 닿는다.(5:10) 임도의 좌측(북쪽)은 작은 금정골 위를 지나 상금정마을로 내려 간다.
이 지역은 금광으로 유명한 ‘금정광산’이 있던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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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黃金으로 인해 생긴 일.
대간길 속리산 온천지역이 그러하듯 이 지역도 대표적인 지방자치 단체간 분쟁지역이다.
일의 발단은 일제강점기에 일어났다. 지금 지나고 있는 대간길 좌측지역은 본래 영월에 속하던 지역이었다. 여기에서 금정광산의 금이 쏟아지고, 금강송이 지천으로 깔려 있으니 일제가 침을 흘릴 만도 했다. 문제는 운반이었다.
영월로 내어가자니 강원 내륙 산간을 끝도 없이 운반해야 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우구치로 모아 도래기재를 넘어 춘양으로 보내고 다시 낙동강 水運을 이용하는 길을 택하게 된다.
그래서 뚫은 터널이 도래기재 아래 금정터널, 미처 춘양까지는 철도를 연결시키지 못하고 패망하고 말았다.
이 때 이들이 저지른 일이 행정편의를 위해 박달령부터 구룡산에 이르는 대간길 북쪽의 행정구역을 춘양이 속해 있는 봉화로 바꾼 일이다. 이리하여 영월은 졸지에 金과 금강송을 봉화에 내어 주게 되었다.
문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금정광산이 1990년 폐광되자 비만 오면 광미(폐광석 가루)와 중금속, 비소 등이 수시로 영월 淸淨川으로 흘러드니 영월은 참을 수가 없게 되었다.
광복 이후 대간길 좌우를 기준 삼아 행정구역을 되돌렸으면 별문제가 없었으련만.. 아직도 영월과 봉화는 서로 불편한 사이로 지내고 있다.
黃金의 끝은 찜찜한 것이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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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계단을 통해 가파른 구룡산 길을 오른다. 마른 갈잎(신갈나무)이 오르막길에 쌓여 있어 걸을 때마다 바스락거리고 미끄럽기도 하다. 눈 위 미끄러운 것과는 달리 나뭇잎과 나뭇잎 사이에서 미끄러지니 발바닥과 다리 힘이 많이 소모된다.
오늘도 먼 길 가는데 이렇게 힘빼면 안 되는데..
넓고 평평한 곳을 지나는데 나무벤치가 무려 5 개나 있어 뉘 집 자연정원 같은 느낌도 든다. 길은 다시 가팔라진다. 북서풍이 제법 귀를 시리게 한다. 11월 중순이니 예년 같으면 많이 추울텐데 그래도 날씨가 많이 봐 주고 있는 것이다.
드디어 어둠 속 구룡산에 오른다.(5:51) 1346m의 고도이니 임도에서 약 400m 오른 것이다. 대동여지도나 산경표에는 水多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마도 이 산 아래 계곡이 깊어 물이 많다는 느낌을 표현한 이름인 것 같다. 춘양태백산악회가 세운 정상석이 어둠 속에 서 있다. 사진도 한 장 찍어 둔다.
잠시 후 헬기장 지나(5:55), 길을 직각으로 꺾어, 동남향 내리막길로 들어선다. 저 멀리 하늘이 약간 흰빛을 띄기 시작한다. 평평한 안부까지 내려온다.
고직령이다. (6:15) 도저히 고갯길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좌측 천평(天坪, 川平)쪽은 아예 고갯길 흔적도 없고 우측 서벽쪽은 은 어느 해 토끼 한 마리나 지나갔을까? 길임도 알 수 없는 희미한 흔적이 있을 뿐이다. 예전 큰 고갯길이었다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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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직령(高直嶺)
1. 고려 때부터 경상도 안동쪽에서 춘양 지나 강원도 영월이나 황지, 삼척으로 통하는 길이었다 한다. 춘양에서 서벽으로 들어 와 고직령을 넘으면 지금 공군 사격장이 들어 선 천평에 이르고 여기서 좌로 가면 영원, 새길재(사길령) 넘어 동으로 가면 황지, 삼척에 이르는 큰 길이었다 한다.
고직령이란 이름은 높고(高) 곧게(直) 뻗은 고개라서 고직령이라 하기도 하고, 옛적 천평쪽에 倉庫(社庫)가 있었는데 이 庫를 지키는 庫직이가 있어 고직령이 되었다고도 한다.
영가지라는 책에는 高適峴이며 串積嶺(곶적령)이라는 이름도 있다.
2. 이 고개는 영동과 영서를 잇는 삶의 고갯길 중 하나였다. 보부상들은 바닷가 어물을 지고 이 고개를 넘어 내륙의 곡물과 바꾸어 가며 두 지역의 물물을 교환해 주던 고개였다.
보부상들은 이 고개를 넘으며 도둑과 호환이 무서워 고개 아래에 산령각을 짓고 산신령께 제를 올렸다 한다. 이 산령각이 지금도 남아 있고, 이제는 마을 사람들이 음력 4월 14일 제를 올린다 하는데 내려가 보지 못하고 그대로 지나간다.
밝은 날 다시 지날 기회 있으면 들려 보아야겠다.
3. 고직령 아래 춘양쪽 서벽2리에는 옛고대국가 구령왕국(九靈王國)이 있었는데 어느 해에 병사를 일으켜 召羅國(서벽 소라리)을 정벌하였다는 기록이 여지승람에 전해진다고 한다. ( 원문 못 찾아 보았음)
실제 이 동리에는 이 곳에 句利王이 나라를 세우고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이 곳을 皇터라 하고 1980년대까지 당집이 있어 구리왕에 대한 내력과 구리로 만든 말 두 마리가 전해지고 있었다 하는데..
말은 분실되고 당집도 화재로 소실되었다. 그 후 마을에서 구리왕을 모시던 당집 자리에 구리왕위패묘기성황위(句利王位牌墓基城隍位)라는 비석을 세워 놓았다.
이 첩첩산중 고직령 아래 있었다는 고대국가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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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직령을 지나자 길은 다시 나지막한 봉우리(1231봉)을 넘는다.(6:25) 내려선 길은 서서히 낮아지고 확연한 안부고갯길 곰넘이재에 닿는다.(6:42) 길안내판이 서 있다. ‘참새골입구’라고 씌여 있다. 지나온 구룡산은 5km, 차돌베기는 6km라고 씌여 있다. 내려가는 길은 참새골이라고 화살표가 가리키고 있다.
흙고갯길 걸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한 나무 줄기에는 둘산악회가 ‘곰넘이재’라고 쓴 종이를 감아 놓았다. 고도 1110m 표시도 해 놓고 ‘힘내세요’ 이렇게 응원도 해 준다. Thank You!
곰넘이재에는 과연 곰이 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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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곰넘이재.
1. 곰넘이재는 천평과 춘양의 애당리를 넘나드는 고갯길이다. 주 용도는 무엇이었을까?
大路는 이미 고직령이 있었기에 마을과 마을(천평~애당리)을 넘는 이외에는 주로 태백산을 오르는 출발점에 해당하는 고갯길이다.
그 이름은 ‘곰님이재’.
우리 옛말에 神, 신성한 것, 크고 높은 것을 나타내는 말이 곰, 검, 감, 고모, 고무.. 가미(일본으로 넘어가서 변형됨) 등이다.
곰넘이재의 본명은 곰님이재, 즉 神님(신령님, 일본어로 가미사마;神樣)이재이다. 태백산은 옛적부터 신성한 神의 산이었다. 이 神님을 만나 뵙기 위해 산에 올라야 하는데 그 출발점이 바로 곰(神)님이재인 것이다.
참고로, 검단산, 감악산, 점봉산(덤붕이, 검붕이) 등은 모두 신이 사시는 산이며 우리가 지나 온 곰넘이봉, 곰틀봉, 고모치.. 모두 여기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
한편 옛어른도 곰을 오해하시어 이 고개 이름을 ‘영가지’란 책에는 熊峴으로 적었다 한다.
지도에는 움막터가 표시되어 있는데 보이지를 않는다.
2. 참새골; 이정표에 씌여 있는 참새골은 곰넘이재에서 애당리에 이르는 골자기를 말하는데 곰넘이재 바로 아래 골자기는 失斗洞이라 하여 어느 스님이 태백산 오르다가 손에 쥔 콩을 잃었다 하여 실두동이라 한단다.
이 아래 골자기에는 차고 맛있는 찬(冷)샘이 있었다 하고, 어떤 이는 샘 중의 샘 참샘(眞)이 있어 찬샘골, 참샘골이었는데 소리가 변해 참새골이 되었다고 한다.
또 골자기의 모양이 참새 형상이라 참새골이라고 한다는 說도 있다.
아무렴 어떠냐, 이제는 태백산 등산로 중 하나가 되어 참새골~곰넘이재로 이어지는 參神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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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넘이재를 지나니 대간길은 방화선을 닦아 놓았는지 넓고 평평하다. 아직 해는 뜨지 않았다. 빨리 서둘러 산봉우리에 오르면 해오름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랴! 이랴! 앞으로. 나를 채찍질하여 몰고 간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널찍한 헬기장에 도착하고 전망도 틔여 있다.(6:55/7:34)
여기서 태백산 해를 맞는다. 붉은 기운이 동녘 가득 뜸들이더니 드디어 불쑥 해가 솟는다. 오늘의 해가 어제 떴던 그 해임을 뻔히 알건만 뜨는 해를 보면 공연히 새롭다.
이 곳에서 아침식사를 한다. 포천팀이 라면도 끓이고 김치도 넣어 라면 김치국도 끓인다. 얻어 먹으니 맛있다. 더 많이 먹고 싶으나 차마 염치가 없어 그만 그친다.
이제 배가 찼으니 다시 대간길에 오른다. 길은 오던 방향에서 U字를 그리며 돌아 진로를 北으로 향한다. 가야할 신선봉이 바로 눈 앞에 낮게 보인다.
고저차 별로 없는 길을 지나 신선봉 아래까지 닿는다. 좌측으로 묘가 한 기 있다.
간간히 흰밧줄이 매어 있는 가파른 길을 오른다. 멀리서 볼 때는 조그만 뒷동산 같아 보였는데 상당히 된비탈이다. 나뭇잎도 쌓여 있어 자꾸 발이 미끄러진다. 이제까지 안 보이던 山竹이 많이 보인다.
드디어 신선봉 도착.(7:55/8:08) 신선봉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다. 깃대배기, 부소봉, 장군봉 태백의 산줄기가 삥 둘러간 것이 한 눈에 들어오는 靈峰이다. 남쪽으로는 춘양의 산줄기 사이사이 마을과 골자기에 雲海가 산 사이 호수처럼 가득하게 보인다.
아래 마을 천평에 있는 옥녀봉의 옥녀가 가마봉의 가마를 타고 신선봉 신선께 시집왔다 하는데 옥녀아씨는 참으로 전망 좋은 집으로 시집을 오셨다.
그래 그랬는가? 處士 慶州孫氏의 墓가 이 곳에 자리잡고 있다. 얼마나 큰 염원이 있기에 1290m나 되는 이 높은 봉 정상에 조상님을 모셨을까?
흔히 풍수에서 말하는 명당은 좌우로 산줄기가 감싸고 내려 가면서 左靑龍 右白虎를 이루는, 가운데 산줄기(來龍)에 혈(穴)을 찾아 쓴다고 하던데 이런 고산의 정상에도 명당이 있는 것인가?
혹시 태백산 신령님과 연관된 믿음과 관련 있는 것은 아닌가 모르겠다.
(신선봉~화방재) 13.78km. (8:08/12:31)
이제껏 북으로 오던 길을 우향우 120도 틀어 동남향으로 방향을 바꾼다. 내리막은 가파른데 그리 길지는 않다. 이 길은 고도는 높되 고저차는 그리 크지 않다. 그러기에 후반에는 궁금한 것 살펴 보면서 움직일 때는 조금 속도를 내 보기로 한다.
가는 길이 너무 평화롭다. 왼편으로 태백의 산줄기가 선명하다. 태백 정상의 천제단도 보인다. 이 산줄기를 카메라에 담고 싶은데 나무가 시야를 가려 단 한뼘의 빈 공간도 주지 않는다. 나무 없는 툭 터진 전망봉 하나 있으면 좋으련만.
결국은 끝내 사진 찍기를 허락 받지 못하고 각화산삼거리에 도착한다.(8:33) 이정표에 ‘차돌베기’라고 씌여 있다. 맞춤법으로 하면 차돌배기 아닌가 모르겠다.
이 곳은 중요한 역사적 삼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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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화산삼거리(차돌베기)
1. 차돌베기에서 뻗어나간 남쪽 산줄기에는 각화산(覺華山)이 있다.
이 산 아래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史庫가 있었다. 역사를 배울 때 흔히 ‘태백산 史庫’라고 배운 것은 이 각화산에 있던 사고를 말한다.
이 사고는 1606년 지어져 1913년 조선총독부가 여기에 보관해 오던 조선왕조실록을 회수해 갈 때까지 300년 동안 실록을 보관하였다. 그 후 이 빈 사고는 해방 후 소실되고 지금은 주춧돌만 남았다.
시대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조선왕조는 최종적으로 실록을 강화도 정족산, 오대산, 무주 적상산, 태백산(정확히는 이 곳 각화산)에 보관하였다.
지금 가장 완벽하게 남아 있는 실록은 이 곳 태백산본으로 국보151-2호로 지정되었다. (총 848책 중 문종실록 권11만 분실.)
2. 신라의 옛길.
新羅적 춘양에서 황지, 삼척으로 가려면 어느 길로 갔을까?
그 답은 바로 이 삼거리에 있다. 춘양에서 각화산으로 올라 산길을 걸어 삼거리(차돌베기)까지 오고 오늘 가는 대간길 깃대배기봉, 부소봉을 거쳐 태백산 정상에 이른 후 가는 방향에 따라 산을 내려 갔던 것이다.
태백산은 신령스러운 天山이었기에 ‘차돌베기~ 깃대배기~ 부소봉~ 태백정상’으로 이어지는 이 능선길을 天嶺이라 했다. 아마 우리말로 썼더라면 하늘고개, 하늘재 아니었을까.
고려시대, 지금의 사길재가 열리면서 이 길은 다니는 사람이 줄고 이제는 대간꾼들의 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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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여 이 곳이 차돌배기인가 궁금하여 곰곰 주위를 살펴 보다가 무릎을 쳤다. 이 곳에 있는 바위들은 거무퇴퇴한 편마암 종류인 것 같은데 어느 바위에는 흰색의 차돌이 선명하게 띠를 두른 듯 박혀 있다. 증거를 보존하려고 사진도 한 장 담아 본다.
누군가가 이런 모양을 차돌배기라 부른 것은 아닐까.
잠시 후 다시 길은 급히 좌로 틀어 1141봉 앞에서 북으로 향한다. 고도차는 별로 없는 길이다.
1160봉으로 여겨지는 무명봉 지나(8:48) 1174봉을 지난다.(8:55) 내려가는 길 희미하게 예전 산판길 같은 인간의 흔적도 보인다. 산판길이라면 아마도 수탈의 흔적일 것이다. 이제는 세월도 흘러 그 흔적 위에 나무도 제법 크게 자라 있다.
안부로 내려 오니 깃대배기봉 오르려는 지점에 희미한 갈림길이 있다.(9:05) 춤시리골로 이어지는 곳인데 이제는 그 아래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니 대간꾼들이 물구하러 내려다닌 흔적일 것 같다.
깃대배기를 향해 오른다. 이 지역이 그렇듯 산은 온통 신갈나무군락이다. 오르는 중간 숨 한 번 돌릴 편한 능선 구간이 나타나는데 마을의 堂木만큼 거목으로 자란 신갈나무와 상당히 큰 신갈나무 무리도 만난다.(9:19)
길은 계속 오르막이다. 정상이 보일만한 지점, 정상으로 향하는 길은 防護路처럼 인위적으로 움푹 판 도랑길로 해서 오른다.
등산안내판이 서 있는 평평한 정상에 도착한다. 깃대배기봉이다. (9:37/9:43) 백연봉이라는 이름도 있다 한다.
여기서 부소봉으로 향하는 길은 온통 산죽 군락지이다. 이처럼 많은 산죽군락을 만나기도 오랜만이다. 함양의 백운산, 영취산 이후 가장 많은 산죽 같다.
또한 이 길은 멧돼지 운동장이다. 얼마 전 멧돼지가 파 놓은 흔적이 가득하다.
1461봉으로 여겨지는 봉우리의 어깨 높이 우측 우회길로 가는데 산죽이 가득 자란 묘 하나가 길 옆에 있다. 이 높은 곳에다 조상님을 모셔 놓고 적어도 몇 년은 찾아 뵙지 않은 흔적이다. 보살필 형편 안 되면 이제 더 이상 이런 일 말아야 한다. 어이 후손된 자 어버이를 산속에 버려 둔단 말이냐.
부소봉에 앞에 이른다. 대간길은 정상으로 오르지 않고 봉우리 좌측 어깨높이 우회길로 간다. 주목도 보이기 시작한다. 잠시 앞 쪽으로 어머니 젖가슴 같은 태백산의 모습을 본다.(10;30/10;38) 정말로 준수하다. 천제단은 어머니 가슴 유두 같다. 카메라에 그 모습을 담는다.
아래로는 천평이 보인다. 하늘산(天山) 태백 아래 있어 天坪이 되었다 한다.
이 곳은 예부터 태백의 천신을 숭배하던 사람들이 살던 땅이다. 1980년 공군사격장이 이 곳에 생기면서 사람들은 흩어졌다.
부소봉 지나 천제단을 바라보는 갈림길까지 온다. 길안내판이 서 있다. 봉우리 이름을 ‘부쇠봉’이라고 기록해 놓았다.
이 봉우리 이름은 단군의 아드님 부소(夫蘇) 황자의 이름으로 붙인 봉우리 이름이다. 단군 왕검께는 네 아드님이 계셨다. 부루, 부소, 부우, 부여 이렇게 네 분이신데 부소황자는 의약과 병을 다스리는 일을 맡으셨다 한다. 아마도 이 부소봉 기운을 받으면 아픈 이들에게도 효험이 있지 않을까?
東으로 뻗어간 문수봉은 기도발이 잘 듣는 곳이라 한다.
이제 태백의 정상을 향해 오른다. 천제단 세 개의 壇 중 下壇(구을단)이 나타난다.(10:47) 그 앞에는 통정대부 병조참판 밀양박공의 묘도 있다.
잠시 후 천제단에 도착한다.(10:52/11:05)
태백은 신라 三山五嶽 중 北岳에 해당한다. 멀리는 고직령 아래 九靈王國, 召羅國 때부터 이 곳에 祭를 올리기 시작하여 신라, 고려, 조선을 거쳐 제를 올렸고, 일제 강점기인 1940년에는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천평에 들어 와 살던, 우국지사, 동학교도, 의병 등이 이 곳 천제단에서 ‘독립기원제’를 올려 일본 경찰에 무더기로 체포되기도 한 곳이다.
제단에는 ‘한배검’이라고 돌에 새겨 놓았다. 대종교에서 이르는 天祖 단군 왕검을 높여 부르는 호칭이다.
정성들여 4拜를 올린다. 흔히 절을 할 때에는 산 분께는 1배, 돌아가신 분께는 2배를 드린다. 음양오행에서 홀수는 陽이며 짝수는 陰이다. 살아 있음은 양이고, 죽음은 음이다. 시산제에서 2배를 올리면 산신령을 돌아가신 사람의 영혼으로 대하는 것이니 아마 산신령께서는 맛진 음식도 드실 생각이 나지 않을 것이다.
절에서는 부처님께 3배를 드린다. 이는 아마도 3이 완전수이기 때문일 것이다.
마니산에서, 또 태백산에서 천신께 예를 올릴 때 보면 參靈이라 해서 4拜를 올린다. 나도 오늘 그 전례를 본밭아 4배를 드린다.
이제 장군단을 돌아보고 태백산을 떠난다. 오늘은 바람도 없고 날씨도 봄날씨라 상쾌하다. 한겨울 태백 정상의 능선길 그 칼바람 생각만 해도 추웠던 길이었다.
내려가는 길은 주목군락지이다. 천년 세월에 몸 상한 주목들을 몰딩하여 치료해 준 것이 곳곳에 보인다.
내려가는 길은 불규칙한 돌층계, 무릅도 아프고 힘도 든다. 저 작년 겨울 눈이 무릅까지 쌓인 날 비료푸대 깔고 앉아 이 길을 미끄러져 내려갔던 때가 그립다.
하산길이 끝날 즈음 안부갈림길에 도착한다.(11:37) 유일사 매표소로 내려가는 길이다. 좌측에는 물건을 실어 나르는 작은 트레일러가 있다.
여기서부터 대간꾼만 다니는 직진길로 나아간다. 길은 약간 오르막이다. 유일사 뒤 봉우리 작은 석탑이 서 있다. 편안한 길 가기를 잠시, 다시 매표소로 내려 가는 두 번째 갈림길이다.(11:49) 사길령 1.9km라는 이정표도 서 있다.
무명봉 하나 넘으니(12:01) 안부에 갈림길이 있다. 등산객들이 중간에서 올라온 길 흔적인 듯하다. 여기서 1174봉으로 잠시 치고 오른다.(12:07) 길은 평평해지고 앞 쪽으로 나뭇가지 사이로 기와 얹은 당집이 보인다.
이윽고 넓은 신작로 같은 고갯길에 닿는다. 사길치이다.(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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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길치.
사길치의 정확한 이름은 새길치(재)이다. 즉 새로 낸 고갯길이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신라적에는 천령을 넘어 춘양과 영월, 황지, 삼척을 이어 주었다. 고려시절 이 곳에 새길을 뚫으므로서 ‘춘양~고직령~천평~소도(당골)~새길재’를 넘는 새로운 route가 뚫리게 되고 더구나 당골에는 院도 열었으니 물류의 중심은 이 길로 넘어 왔다.
이 길은 자료에 따라 ‘새길’을 한자화하는 과정에서 끝도 없이 둔갑하였다. 新路치, 四吉치, 瑞吉령, 士吉령.. 심지어는 새(新)을 새(鳥)로 오해하여 鳥道령이 되기도 했다.
아직도 사길치, 사길령으로 쓰고 있으니 이제는 바로 잡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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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길 옆에는 산령각이 새로 단장하여 남아 있다.
보부상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소중한 곳이다. 이제는 보부상들이 없으니 주민들이 4월 보름에 제를 지낸다고 한다.
낙엽송잎 양탄자 같이 깔린 길을 길을 내려오니 사길령매표소가 있다.(12:24) 여기서 밭길을 지나 작은 봉우리 허리길로 우회한다.
저 아래 화방재가 보인다. 화방(꽃뱅이)은 花心이니 꽃의 한 가운데이다. 이 곳은 태백산 神이 되신 단종의 땅이라 어평재이기도 하다.
고개로 내려 선다. (12:31) 31번 국도는 조용하다. 앞쪽에 수리봉이 수려한 모습으로 내려다 보고 있다.
어서 오시게 다음 차에 만나세. 이렇게 이야기하는 듯하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