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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예수의 백해함, 무익함, 좋음>의 줄거리:
절대로 예수님을 믿을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절대로 예수 믿을 수 없는 조건에 갇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예수 믿음과 상극인 조건에 있으면서도 예수를 잘 믿고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만난 예수님은 백해하든지 무익하든지 좋든지 하나입니다.
예수의 백해함, 무익함, 좋음
(마가복음 14:1~11)
1.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며
2. 이르되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
3.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8.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10.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11. 그들이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줄까 하고 그 기회를 찾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예수의 백해함, 무익함, 좋음>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예수의 백해함, 무익함, 좋음’
백해무익(百害無益)이란 백 가지가 해롭기만 하고 어떤 유익도 없다는 사자성어입니다. 세상에는 예수님을 백해하게 느끼는 사람들이 있고 또 예수님을 무익하게 느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편 예수님을 마냥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이러한 세 가지 유형의 사람을 제시합니다.
여러분께서 납득하실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평생 예수님을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반응은 항상 세 가지로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님이 백 가지 해를 가져다주는 존재로 여기거나, 나에게 전혀 도움이 안 되고 아무 소용이 없는 무익한 존재로 여깁니다. 그리고 이와는 반대로 예수님을 참으로 좋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학적이고 교리적인 언어들은 구원이나 죄 사함 등으로 예수님과의 만남을 묘사합니다만 우리에게서 나타날 수 있는 예수님과의 만남은 보다 인격적입니다. 본문은 한 인간이 예수님과 만나게 될 때에 보일 수 있는 반응이 세 가지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먼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산헤드린공회원으로써 유대사회에서 최고의 기득권층으로 예수님을 죽일 흉계를 꾸미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 중에서도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같은 입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이유는 대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처럼 실제로 예수를 만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만났다면 반드시 예수님을 죽이고 싶어 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가룟 유다가 등장합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길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 중에도 가룟 유다와 같은 입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 또한 예수를 믿는다고 주장할 수 있는 이유는 실제로 예수님을 만나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룟 유다의 입장인 사람은 실제로 예수님을 만날 때에 반드시 팔아넘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을 가진 사람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이유는 종교화된 예수님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를 믿는 것을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로 예수님을 만난다면 본연의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백해한 존재이기 때문에 죽이고자 하거나 무익한 존재이기 때문에 팔아서 은 삼십 냥이라도 챙기고자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리아가 등장합니다.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려서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것은 당시 노동자의 연봉에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정말로 믿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을 만났을 때 마리아와 같은 반응이 나타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마리아는 기득권층도 아니었으며 재산가도 아니었으며 부모도 없이 언니 오빠와 함께 살았습니다. 이런 마리아가 노동자의 한 해 품삯에 해당하는 옥합을 깨뜨립니다.
옥합은 당시의 여성이 결혼을 위해 준비하던 가장 중요한 예물이었습니다. 이를 현재 화폐로 환산하면 족히 삼천만 원은 될 것입니다. 이 결혼예물을 깨뜨려서 예수님께 바쳤다는 것은 예수님을 좋아하여 마음으로 결혼하겠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에 대해서 마리아처럼 반응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같이 예수님을 백해로 여기거나 가룟 유다처럼 무익하게 여겨서 팔아버리고자 하는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어떠한 요소가 이러한 세 가지 반응을 나타나게 하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시기를 생각해보면 본문은 고난주간의 수요일 저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음날인 목요일 저녁에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마치시고 붙잡히시게 됩니다. 그리고 목요일 밤부터 금요일 새벽까지 빌라도에게 십자가형을 언도 받으신 후에 로마 병사들에게 맞으시고 수치와 곤욕을 당하시게 됩니다. 그리고 금요일 아침 9시에 십자가에 달리셔서 6시간이 지난 오후 3시에 돌아가시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임박한 죽음에 대해 알고 계셨고 필연적으로 죽음을 염두에 둔 말씀을 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다른 모든 사람들의 죽음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마음이 이 세상을 빠져나가 하늘로 향할 수 있는 길의 시작점입니다. 살아서 마음을 하늘로 보내지 못한 사람이 육체가 죽어서 천국에 갈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하늘로 보내기 위한 길 만들기였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다른 모든 사람들의 죽음의 차별점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의 모든 가르침도 십자가 사건을 기준에 두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산상수훈에서 “…누구든지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마음이 이 세상을 빠져나와서 하늘에 도착하고 있는 사람에게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근본취지는 살아있는 동안에 마음이 이 세상을 빠져나와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에 가서 머물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점에 대해서 세 가지 반응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렇다면 세 가지 반응을 보이는 이유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산헤드린 공회원이고 유대사회의 기득권층으로써 예수님을 백해로 여깁니다. 이 세상에서 지키고자 하는 가치가 많은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다면 예수님을 백해한 존재로 반응하게 됩니다.
우리가 기득권층에 속하지 않았다고 해서 이들과 무관하지는 않습니다. 누구나 세상에서 가지고 있고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가치들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가짐에 대해서 예수님은 백해한 존재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살아있는 동안에 마음이 세상을 등지고 하늘에 도착할 수 있는 길을 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가치를 지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마음을 드린다는 것은 상극과도 같은 일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을 믿으려면 마음은 가지고 있는 모든 좋은 것들에 대해 떠날 준비가 되어야만 합니다.
세상에는 기득권을 잘 유지하면서도 예수도 잘 믿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많습니다. 돈도 있고 명예도 있고 권력도 있는데 예수도 잘 믿는다고 합니다. 예배당에서 장로님도 되고 권사님도 되고 목사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모조리 종교화된 가짜 예수를 믿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세상의 가치를 지키고 보존하기는 불가능합니다. 이들이 실제로 예수님을 만났다면 가장 먼저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 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입장에 서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가치를 마음에서 내놓아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예수를 죽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혹은 아예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 부르기를 포기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마음으로는 세상의 가치를 지키고자 하는 자들은 실제 예수는 죽이고 종교화된 예수만을 믿고자 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우리의 마음이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께 도착하는 길을 만들고자 하심이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마음 심장을 드린다는 것이고 이 세상에서 지키고 싶은 가치는 없어져야만 합니다. 세상의 가치를 지키고자 하는 이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압박일 수밖에 없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좋아한다면 입으로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로 마음을 보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이 땅의 가치를 좋아할 바에는 차라리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는 대단한 압박이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서 돈을 버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득권을 얻었으니 하나님의 이름을 포기할 수도 없거니와 그렇게 해서 얻은 기득권을 포기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온 결론이 압박을 주는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가치를 마음에서 내놓으라는 말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결코 사이비단체들이 재산을 바치라 요구하고 기성교단에서 헌금을 많이 하는 신도들을 우대하는 것처럼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가지고 있는 세상의 가치들을 어느 단체나 예배당에 바치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의식이 바뀌어야만 합니다. 내 은행계좌에 돈이 있다고 해서 내 돈이 아닙니다. 이러한 의식으로는 예수님을 제대로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배당에 다 바치라는 것이 아닙니다. 계좌에 묶여있는 돈을 내 마음에서 내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인정할 때에 돈에 대한 사용권리가 하나님의 주권으로 옮겨집니다.
내 명의로 된 집이 있다고 해서 내 집이라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이전에는 내 집이라 여기며 마음에 품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집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여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이니 하나님이 없애실 수도 있고 팔아서 다른 일에 쓰실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집을 남의 명의로 옮기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내 소유에 대한 주권을 하나님께 넘겨드려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되기를 바라는 고백을 할 수 없다면 절대로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도 예수를 잘 믿을 수 있다는 사람이 있다면 실제 예수님은 죽이고 종교화된 가짜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가짜 예수를 믿으면 세상의 가치를 많이 가지고도 편안할 수 있습니다. 기득권을 긁어모으면서도 목사 되고 장로 되고 권사 되고 집사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은 예수님을 죽인 상태입니다.
두 번째로 가룟 유다와 같은 마음가짐을 가진 사람은 예수님을 무익하게 여깁니다. 앞서서 예수님을 백해한 존재로 여긴 사람들은 세상의 가치와 기득권을 지키려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같은 입장에 놓여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한편 아직 세상의 가치를 많이 갖지 못하고 기득권이 없으나 그것들을 강하게 추구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무익하게 여기는 가룟 유다와 같은 입장에 서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이루고 싶은 일들에 대해 강한 비전과 꿈과 열정을 가진 사람들에게 자발적으로 십자가의 죽음을 향해 가신 예수님은 무익한 존재입니다. 이 세상에서 꿈을 향해 비전을 향해 이상과 목표를 향하고 있는 야심가의 마음을 가지고는 절대 예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이들이 실제로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이득이란 예수를 팔아서 은 삼십 냥을 챙기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이 대한민국 교회에서 잘 드러납니다. 대한민국 교회 역사 속에서 비전과 열정과 부흥에 대한 열망은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습니다. 심지어 인간세상에서 지위가 높으면 높을수록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할 수 있다는 고지론까지 존재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모두 거짓이고 사기입니다. 목회자들이 하나님 백성들의 영혼을 훔치는 도둑놈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교계에 이러한 목회자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향해 비전과 꿈과 열정을 가진 야심가들은 절대 예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야심가까지는 아니더라도 조그만 소원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순간에 믿음은 멈추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향하여 자발적으로 죽음을 맞이하십니다. 그리하여 마음이 세상을 빠져나가 하늘로 이르는 길을 내셨습니다. 이 세상을 향한 소원이 생긴다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멈출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예수님을 믿는 것을 제대로 배웠어야만 했습니다. 이것은 결코 엄청나고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라 마음을 하늘로 보내기는 비전을 가지고 달려가는 길의 어려움에 비하면 100분의 일도 어렵지 않습니다. 가지고 있는 것들 중 한 가지를 지키고자 하는 노력과 수고보다 훨씬 쉽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복음을 애초에 배워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의 입장에 서있음에도 예수님을 잘 믿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입장에 서있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실제 예수님을 만나본 적이 없고 가짜 예수를 믿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이야말로 모두 야심가들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자발적으로 십자가를 향하신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모두 좌절하고 뿔뿔이 흩어집니다. 더 이상 예수님을 쫓아갈 수 없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우리가 제자들과 같은 상태를 유지하면서도 예수를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입니다. 십자가를 향해 가시는 진짜 예수님을 만나본 적이 없기 때문에 세상에 대한 꿈과 비전을 가진 채로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진짜 예수님을 만난다면 가룟 유다처럼 무익하게 여겨서 팔아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이 가룟 유다만도 못한 이유는 가룟 유다는 적어도 진짜 예수님을 만나고 결정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진짜 예수님을 만난 적도 없이 가룟 유다와 같은 입장에 서서 가짜 예수를 믿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세상에 대해 꿈과 비전을 가질 수 있다는 이야기는 모두 거짓말입니다.
마지막으로 마리아와 같은 마음가짐을 가진 사람은 예수님을 진심으로 좋아합니다. 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행동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대해 학자들은 고대 로마나 히브리인들이 시체에 향유를 발라서 악취를 방지하던 장례 절차를 떠올렸습니다. 다만 신앙적인 관점에서는 이것이 마리아의 마음상태를 의미합니다.
현재 화폐 단위로 삼천만 원에 이르는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께 부어드린 사건은 마리아의 마음이 드러난 일이었습니다. 이 마음은 자발적으로 십자가의 죽음을 향해가고 있는 예수님께 맞추어진 마음의 모습이었습니다. 마리아는 대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과 같은 기득권층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이나 가룟 유다처럼 세상에서 이루고 싶은 일들이 있었던 야심가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예수님을 좋아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삼천만 원어치의 향유는 마리아의 전 재산이었습니다. 가장 소중한 물건을 내놓는다는 것은 마음을 다 드린다는 표현입니다. 예수님과 마음이 꽁꽁 묶이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좋아해서 마음을 묶었을 뿐인데 이 마음은 예수님의 길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9절에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 또한 마리아의 마음이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마리아와 같은 마음이 아니면 실제로 예수님을 좋아할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의 기득권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 이 세상에서 무엇을 성취하겠다는 야심어린 마음으로는 예수님을 좋아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좋아하여 예수님과 떨어지고 싶지 않아 마음을 드리자 예수님은 그 마음을 가지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으로 올라가십니다. 이것이 복음의 목표입니다.
예수님을 좋아하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좋아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좋아하며 승천하신 예수님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좋아하는 예수님과 마음을 꽁꽁 묶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복음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세상 떠나기가 복음을 받아들인 우리에게도 나타나야 할 올바른 반응입니다.
마음이 예수님과 함께 세상을 떠나면 삶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놓이게 됩니다. 내가 하는 일들은 나의 야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져 나갈 것입니다. 야심만만하게 살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부지런히 할 일은 오직 예수님과 마음을 꽁꽁 묶어서 세상을 빠져나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가는 것입니다.
실제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에게는 백해함 무익함 좋음의 세 가지 반응이 나타나게 됩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같은 입장이라면 예수님을 백해하게 여길 것이고, 가룟 유다와 같은 입장에서는 예수님을 무익하게 여길 것입니다. 그리고 마리아와 같은 마음이라면 예수님을 진심으로 좋아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마리아와 같이 예수님을 좋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주님이 약속하신 복음의 은혜를 기필코 내 것으로 만드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십자가를 바라보며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림으로써 마음을 예수님과 꽁꽁 묶었던 것처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내 마음을 꽁꽁 묶어서 하늘로 올라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가지고 있는 것들을 아까워하는 마음이 죽게 하시며, 세상에서 이루고 싶은 마음이 죽게 해주셔서 조금도 주저함 없이 예수님을 따라 세상을 빠져나가 아버지께로 갈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