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선명 평전
제10장 가정은 행복의 터전이다
4. 축복식은 종교를 뛰어 넘는다
축복결혼이 꼭 통일교인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종교를 가진 많은 사람들도 축복결혼식에 동참했다. 1989년 터키 이스탄불에서 '이슬람에서의 가정과 법'이라는 주제로 세계종교의회가 열렸다.
그때 참석한 사람 중의 한 명이 시리아의 쿠프타로(Sheikh Ahmad Kuftaro)이다. 쿠르드족의 종교 지도자인 쿠프타로는 통일원리에 심취해 지도자들과 함께 40일 원리강론 교육을 받았다. 교육이 끝나자 참석자들은 축복결혼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들은 신실한 이슬람 신자로 남으면서도 통일교의 축복결혼 받기를 원했다.
그리하여 문선명은 다른 종교를 지닌 사람일지라도 진실한 가정을 만들고 세계평화와 화합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축복결혼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통일교 신도가 되어야 한다는 조건을 걸지도 않았고 교리를 받아들이라고 강요하지도 않았다.
문선명이 언제나 중요하게 여긴 것은 종교 갈등의 치유와 세계평화의 실천이었다. 합동결혼식을 통해 이를 이룰 수 있다면 종교가 무엇이든 개의치 않았다.
이슬람 축복식은 1992년 4월 10일에 서울 올림픽경기장에서 열렸다. 축복식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은 이미 결혼한 부부들이었다. 그들은 이전에 자신의 방식으로 결혼식을 올렸으나 인생의 중・후반기에 또 한 번 결혼식을 올려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가정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1, 265쌍이 참여한 축복식에는 이슬람 신도뿐만 아니라 한국의 부부들도 여럿 참여했으며 일본에서도 많은 신랑신부들이 왔다.
이날의 축복식은 이슬람 세계의 핵심 지도자들을 교육하기 위해 진행된 40일교육의 열매라 할 수 있었다. 요르단에서 5쌍의 부부, 수단에서 13쌍의 부부, 예멘에서 11쌍의 부부, 터키에서 6쌍의 부부가 왔다.
또 시리아, 이집트, 파키스탄에서도 왔고, 유럽의 여러 나라와 미국의 이슬람 부부들도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서울까지 왔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이스라엘의 유대교와 그리스정교회도 동참했다. 그들은 '내 교리가 옳다, 네 교리는 잘못되었다'는 흑백논리를 모두 씻어낸 사람들이었다.
그날 이후로 축복식은 종교와 관계없이 활짝 문을 열었다. 전 세계적인 차원의 축복식은 진즉부터 이루어졌으나 그때까지만 해도 통일 교인을 중심으로 진행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 종교를 따지지 않는다.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사람들은 "교묘한 방법으로 통일교를 전도한다"고 비난했지만 문선명은 추호도 그럴 마음이 없었다.
종교는 강압이나 교묘한 방법으로 전도되는 것이 아니라는 게 문선명의 오랜 신념이었다. 마음에서 진정으로 우러나와야 진실한 종교가 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바로 행복과 사랑, 참된 가정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되어 전 세계적으로 수천만 쌍의 신랑신부들이 축복을 받게 되었다.
넉 달 뒤인 1992년 8월 25일에는 서울 올림픽경기장에서 성대한 축복식이 열렸다. 그동안 열린 축복식 중에서 가장 크고 의미 있는 결혼식이었다. 모두 3만 쌍이 참여한 지구촌 최대의 결혼 행사였다.
참석하려는 신랑신부들과 가족이 너무 많아 2만 쌍만이 직접 축복식에 참석했고, 1만 쌍은 각자의 나라에서 위성중계로 결혼식을 치렀다. 저 멀리 아프리카나 남미의 가난한 나라에 사는 신랑신부들은 오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형편이 그리 되지 못한 것이다.
기성축복을 받은 이들 중에는 문선명의 오랜 친구이며 지지자인 28쌍의 부부도 있었다. 그와 오랜 친구라 하여 당연히 통일교인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서로 다른 7개 종교를 믿고 있었다. 그들은 섬기는 신도 다르고 교리도 다르고 경전도 다르지만 문선명이 주관하는 행사에 언제나 즐거운 마음으로 참석했다.
3만 쌍 축복식은 제1회 세계문화체육대전(World Culture and Sports Festival:WCSF)행사의 하나였다. 그 기간에 많은 행사와 국제대회가 치러졌는데 세계종교총회(AWR)는 세계 각 나라 종교 지도자들이 대거 참여한 중요한 행사였다.
28명도 그 총회에 참여한 후 축복식에 동참했다. 이 축복식은 초종교적 축복식이 크게 확대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세계의 모든 종교인들이 통일교에 입교하지 않고도 축복식에 참여하고 축복가정이 된 역사상 첫 번째 축복식이었다.
하나님의 뜻을 이어받는 합동 축복결혼식은 쉬지 않고 이어졌다. 1992년 다종교 축복식이 열리고 3년 만인 1995년 8월 25일에 전 세계적인 36만 쌍 성혼식이 열렸다.
축복결혼식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 신랑신부들의 숫자가 엄청나게 증가한 것이다. 3만 6천쌍의 신랑신부를 포함해 10만 명 이상의 축하객들로 서울 올림픽경기장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축복식에 직접 참석하지 못한 33만 쌍의 신랑신부들은 전 세계 160개국, 553곳에서 위성중계를 통해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여러 모로 상황이 나빴다. 3일 전부터 한반도에 폭풍이 몰아쳤고 거센 비가 계속 내렸다. 가공할 여름장마가 한반도를 덮친 것이다. 산사태가 난 곳이 많았으며 홍수, 도로 폐쇄, 인명 피해 등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축복식 아침에도 비가 내려 많은 사람들이 근심했다. 그러나 그 무엇도 그들을 단념시키지 못했다.
오전 11시에 애국가와 함께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궂은비가 내려 운동장에 도열한 신랑신부들이 불편했으나 놀랍게도 문선명이 단 위로 올라섰을 때 비가 그쳤다. 하늘이 결혼을 축하해주는 것이었다.
문선명은 젊은 국제 커플들에게 성수를 뿌렸다. 그들은 통일교회 2세 청년들이었다. 이어 캐나다 전 수상 에드워드 슈라이어(Edward Schreyer)가 축사를 했다. 세계 여러 나라의 전・현직 대통령, 총리 등이 보내온 축전도 낭독되었다. 그렇게 축복식이 끝나자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날의 축복식도 초종교적이었다.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 시크교를 비롯해 여러 종교를 믿는 이들이 동참했다. 이제 통일교회의 축복결혼식은 한 종교단체 혹은 종파의 단순한 행사가 아니게 되었다. 세계인을 하나로 만들고 종교 갈등을 치유하고 평화를 가져오는 세계인의 주요 행사가 된 것이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36만 쌍 결혼이 실패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일본 정부마저 개입해 은근히 방해 공작을 펼쳤다. 그러나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일본 국영방송인 NHK가 실황 방송을 처음부터 끝까지 중계해 36만 쌍 결혼이 어떻게 성대히 치러졌는지를 입증한 것이다.
반대하러 왔던 160여 명의 언론인들이 진정으로 아름답고 하나로 화합하는 결혼식을 보고 절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하여 비판의 시각을 거두고 결혼식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도했다. 이처럼 36만 쌍 축복은 전 인류를 새로운 시대로 인도해 주었다.
축복결혼식은 한국에서만 열린 것은 아니다. 그동안 한국에서 주로 열린 이유는 한국이 세계인들에게 평화와 화합의 성지이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이 통일교 신랑신부들은 한국 땅에서 축복결혼 받는 것을 평생의 소원이자 영광으로 여겼다.
그러나 여러 사정으로 한국까지 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그들을 위해 해외에서도 축복결혼식을 여러 차례 열었다. 일본과 미국에서도 열렸고 유럽과 아프리카 등지에서는 인터넷 생중계를 통해 그곳 인도자들에 의해 결혼식이 집전 되었다.
1980년대와 90년대 초까지 한국에서 축복결혼식을 집전한 문선명은 이제 미국에서도 대규모의 결혼식을 올릴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미국인들에게 가정의 참된 의미와 세계평화의 가치를 널리 전하고 한국의 위상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1997년 11월 27일 세계평화연합 주최로 워싱턴 DC에서 제3세계평화회의가 열렸을 때 문선명은 축복의 의미에 대해 연설했다.
"어떻게 하면 가정이 근본적으로 건강해질 수 있을까요? 그 해답은 바로 초국가적 축복결혼식에 있습니다. 나는 1960년에 세 쌍의 축복결혼식을 집전했습니다. 만약 그때 앞으로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축복결혼식에 참석할 것이라고 말했다면 누가 믿었겠습니까?
그러나 이제 국경과 인종, 종교를 초월해 3,960만 쌍의 부부들이 순결과 정절을 약속하는 축복결혼식이 거행됩니다. 축복결혼은 거짓된 사랑을 끊고 결혼의 성스러움과 가치에 생명을 불어넣습니다. 이 의식은 참된 부부의 사랑, 참된 부모의 사랑, 참된 자녀의 사랑을 발견하게 합니다. 축복결혼식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소중한 선물입니다."
그리고 이틀 후인 1997년 11월 29일에 3,960만 쌍 축복식을 집전했다. '축복97'의 본 행사는 워싱턴DC의 RFK스타디움에서 열렸으며 4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모였다. 또한 세계 각 지역에서 위성중계를 통해 진행되었다.
이 축복결혼식은 다양한 신앙을 지닌 종교 지도자들이 연단 위에 올라 부부들에게 자신의 종교 전통에 따라 축도를 해준 첫 번째 결혼식이었다. 예전에는 종교는 달랐어도 하나의 의식으로 진행되고 문선명이 마지막에 축도를 했지만 이제 각자의 종교에 따라 축도를 받았다.
다음 해인 1998년 6월 13일에는 뉴욕의 매디슨스퀘어가든에서 축복식을 거행했다. 이때는 전 세계적으로 1억 2천만 쌍이 참여했다. '축복98'이라 명명된 이 행사에는 세계 각지에서 국적과 종교가 다른 신랑신부들이 참석했으며 세계적으로 전개된 제1차 3억6천만 쌍 축복결혼의 하나였다.
또 영계에 있는 160억 쌍의 부부들이 동시에 축복을 받았다. 축복결혼은 꼭 살아있는 사람만 올리는 것은 아니다. 이미 고인이 된 사람도 그 후손들이 원하면 축복결혼을 할 수 있다. 그들은 살아있을 때 각자의 종교와 전통에 따라 결혼식을 올렸겠지만, 또 결혼식을 올리지 못하고 평생을 살다가 삶을 마감한 사람도 있었겠지만 축복결혼을 받아 영계에서 새로운 영혼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많은 신도들은 조상들이 축복결혼 받기를 원했으며 그 숫자가 160억 쌍이 되었다. 축복 98의 본 행사는 매디슨퀘어가든에서 열렸으며 2만여 명이 참석했다. 200개 이상의 교회에서 성직자들이 신도들을 데리고 결혼식장으로 왔다. 그날 77개 교회 성가대로 구성된 2,000명의 합동성가대는 큰 감동을 주었다. 처음에는 1,000명으로 성가대를 구성하려 했으나 많은 교회에서 참여하기를 원해 2배가 된 것이다. 지휘는 브루클린에 위치한 새생명교회의 안젤라 모세(Angela Moses)박사가 맡았다.
1999년 2월 7일에는 '축복99'를 집전했다. 결혼식의 모토는 '세계는 한 가정, 인류는 한 가족'이었다. 본 행사는 서울의 올림픽경기장에서 열렸다. 15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그야말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4만여 명은 행사에 참여하지 못하고 경기장 밖에서 결혼식을 지켜봐야 했다. 한국 전역에서 오는 참가자들을 실어 나르기 위해, 3,000대의 버스가 동원되었다. 한국에 오지 못한 전 세계의 신랑신부들은 위성중계나 인터넷 생중계를 통해 참여했다.
이날의 행사에도 세계 주요 종교를 대표하는 지도자들이 축도를 했다. 자가드구루 쉬바차르야(Jagadguru S, Shivacharya)는 힌두교를 대표하여, 몽골의 캄바 담바자브(Khamba L.C. Dambajav)는 불교를 대표하여, 랍비 헤르제 크란즈(Rabbi H. Kranz)는 유대교를 대표하여, 최고 회교 권위자 세이크 오스만(Sheik A. Osman)은 이슬람을 대표하여, 대주교 임마누엘 밀링고는 카톨릭을 대표하여, 만지트 자테다르(Manjit S. Jathedar) 교수는 시크교를 대표하여 축도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