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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하여 붙드심
분문<요6:60~71>
<60-62절> 60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61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이르시되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62 그러면 너희는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난 후 사람들이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라는 반응을 보입니다. 이들이 어려워서 알아들을 수 없다고 한 예수님의 말씀은 요6:54-58절의 말씀입니다. 그 중에서 두 구절(54~55)만 읽어 볼까요?
“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무리들이 “어렵도다 이 말을 누가 이해할 수 있느냐?”라는 반응을 보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세상의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지금 우리가 요한복음을 공부하고 있지만, 과연 4복음서 중에서 요한복음이 가장 어렵다는 걸 느낍니다. 단순히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7개의 표적이 주는 메시지가 비밀인 데다가, 매번마다의 주님의 말씀이 다 아리송합니다.
위의 읽은 말씀을 누가 이해하겠습니까? ‘내 살이 참된 양식이고 내 피가 참된 음료로다, 그래서 내 살을 먹고 내피를 마셔야 영생이다(???)
제가 요한복음을 강해하면서 느낀 것은, 정말 요한복음은 로마서와 함께 기독교의 핵심이 되는 십자가복음을 가장 압축적으로 응축시킨 보화 같은 성경이라는 생각이 물씬물씬 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을 일컬어 영의 복음이다. 혹은 독수리 복음이다라고 합니다. 세상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이지요.
(해서 제 개인적인 생각은 초신자들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부분이 로마서와 요한복음이라고 여겨집니다. 어렵다고 피할게 아니라, 신앙생활 입문부터 정확하게 복음의 뼈대를 이루는 중심축에 대해 설명해야 처음부터 바르게 신앙생활 할 것이기 때문이지요.)
여기에 착안 한다면, 역으로 이러한 요한복음과 로마서를 알지도 못하면서 무턱대고 열심을 내는 것을 좋은 믿음, 좋은 신앙으로들 여기며 살아가는 이시대의 기독교인들을 보면 번지수가 너무도 벗어난 다른 믿음 다른 신앙이라는 것인데 이것을 누가 알겠습니까? 오늘도 이러한 어긋난 신앙에 대한 예수님의 지적이 이어지며 예수를 임금 삼고자 쫓아온 무리들이 주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실망하여 떠나는 내용입니다.
66절을 봅니다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여기서 제자들이란 주님이 택하여 세운 12제자들이 아닌 자기들 스스로 주님을 왕 삼으려고 쫓아온 무리들을 말합니다. 방금 읽은 60절에도 같은 말이 나오지요? 자칭 제자로 나섰지만 나중에 예수라는 분이 이 세상 복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실체를 알고 나니까, 더 이상 추종해서는 죽도 밥도 안되겠구나 해서 떠나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 이러한 유대인들과 같은 반응을 보이며 교회를 떠나는 자들이 얼마나 될까요? 복음에 대해 어렵도다하는 자들이 있나요?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강단에서 선포되는 복음을 환영하며 ‘아멘’으로 화답하는 것처럼 보여 집니다. 이것을 왜 그럴까요?. 왜 복음에 대해 ‘어렵도다’라는 반응이 안나오고 오히려 모여들고 있을까요?
2천년 전의 사람들보다 오늘날 사람들이 지적으로 더 진화되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오늘날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모두 다 성령을 받은 자들이라서 그런 걸까요? 그들이 지적으로 더 진화되었거나 그들이 모두 성령을 받은 자들이라서 강단에서 목사가 전하는 복음을 환영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이유는 오늘날 목사들이 선포하는 복음이 모두 거짓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제사제도를 명시한 레위기 2장에 보면 소제 제물에 꿀이나 누룩을 섞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소제 예물은 곡식을 빻아서 가루로 만들어 바치는 제사입니다. 곡식을 빻아 가루로 만든다는 것은 IX의 고난의 삶과 십자가를 상징하는 제사입니다. 즉 복음 말하지요. 곡식 가루에 꿀과 누룩을 섞으면 단 맛을 내는 발효된 빵을 만들 수가 있습니다. 꿀을 넣은 잘 발효된 빵이 얼마나 맛있겠어요?
즉 십자가 복음에 사람이 듣기 좋은 말을 섞지 말라는 경고를 이미 율법에 명시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거짓 선지자 거짓 목사들은 대대로 인간이 듣기 좋은 말을 섞어서 가르칩니다. ㅎ님은 사람의 열심과 정성을 보시고 복도 주고 구원도 주신다. 그러니까 어떻게 사는 게 맞습니까? 하며 교인들로 하여금 사람의 가능성을 부추기며 열심과 충성을 독려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죄로 죽은 인간이기에 ㅎ님이 원하시는 선과 의를 행할 수 없다고 고발하는데, 반대로 거짓복음은 인간의 의를 부추기는 일을 합니다. 그래서 가능성을 가지고 더 열심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경대로 살아야 구원이라고 하는 게 거짓 복음이고, 심은 대로 거둔다는 사고방식을 교인들에게 세뇌시키는 것이 거짓 복음입니다. 이런 복음이 사람들에게 걸림이 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가르침이 세상의 정신사조와 정확히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거짓 복음은 육에 속한 것이기에 육에 속한 사람들의 귀에 쏙쏙 들어오고 환영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복음은 사람의 의를 총체적으로 부정합니다. 너희 인간들의 의는 다 더러운 것들이기에 하나님이 절대로 받지 않으신다. ㅎ님은 오직 IX의 십자가 공로만 의로 여기신다. 그리고 너희들의 충성과 열심에 따라서 하나님이 복 주시는 분이 아니시다-라는 게 꿀도 누룩도 안 섞인 순수한 복음입니다.
이렇게 복음은 아무 것도 섞지 않고 인간의 무능과 무가치함을 까발리는 데서 출발합니다. 이것이 바로 꿀도 누룩도 섞지 말라는 말씀의 실제입니다. 그러니 육에 속한 자들의 귀에는 거슬리고 적대감이 생깁니다. 아니 예수 믿으면 복은 고사하고 돈도 안 생기고 떡도 없다는데 뭐 하러 믿노? 하면서 하나둘씩 떠나가야 맞습니다.
하나님은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등을 돌리는 자들을 붙잡고 믿을 것을 구걸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이 복음을 듣고 구원 받을 수 있는 모든 통로를 차단하시는 분입니다. 어느 누가 구원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구원의 길을 그에게 닫아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마13장 13~15절을 볼까요?)
<13~15> 13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비밀)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 14 이사야의 예언이(사6:10인용)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성경: 7인으로 인봉됨)
그러나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음으로 생명을 얻을 자들은 따로 있습니다. 이들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로 이끄시는 자들입니다(요6:37). 이 일에 있어서 하나님은 추호의 실수가 없으십니다. 영생이 작정된 자들은 영생을 받게 될 것이고, 영생이 허락되지 않은 자들은 그들이 제아무리 교회를 다니고 예수를 믿는다 해도 구원에서 제외될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입니다(마13:16~17 읽고/성도의 위치: 대박 맞은 사람들임)
복음이 선포될 때 드러나는 일은 양과 염소의 분리입니다. 양과 염소를 분리하는 일에 ‘설득’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단지 복음을 ‘선포’하는 일만 요구될 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목사들은 사람들을 예수 믿고 교회 다니게 하려는 일에 모든 노력을 쏟아 붓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니 복음의 기능과 능력을 알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오늘날 목사들의 최대 관심사는 ‘자기 교회의 부흥’입니다. 이들에게 복음은 교회성장의 수단일 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걸림이 되는 복음을 사람들의 입맛에 맞는 다른 복음으로 왜곡시켜 그 거짓 복음을 판매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팔아야 하니 당연히 마케팅 기법이 등장하게 됩니다.
마켓팅의 포인트는 고객만족, 고객설득, 고객감동이 핵심입니다. 예수를 팔고, 복을 팔고, 천국을 팔아 이득을 많이 남겨야 교회가 커지고 성공한 목사 반열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경건한 삶, 윤리 도덕적인 삶, 응답 받는 비결, 천국 가는 비결을 가르치는 설교가 난무하는 것입니다. 교회부흥이라면 뭐라도 하겠다는 자들이 오늘날 창녀로 전락한 한국 교회 목사들입니다. 이러한 목사들의 설교를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복음은 지옥 갈 자들을 천국 보내기 위한 수단으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천국이 예정된 자들을 천국으로 부르는 나팔이고, 지옥이 예정된 자들을 천국에 오지 못하게 막는 화염검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경륜을 알지 못하는 목사들이 사람들의 입맛에 맞는 복음을 전하고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전도랍시고 쓸데없는 짓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무리를 향해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걸림돌이 된 것입니다. 이같이 복음은 사람들을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입니다. 사람들을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 역할을 하지 않는 복음은 거짓 복음일 뿐입니다.
<벧전2:7-8절> 6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IX)을 시온(ㅎ님의 교회/주님의 교회)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심판 날에-벌거벗음-죄로 드러남-지옥)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7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8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라고 말합니다.
* 7절~ 건축자들이 버린 돌(구원을 위해 신앙생활하는 것을 건축으로 비유함)
버리다(유대인들이 구원을 위해 율법행함에 가치를 두고 살다보니 예수의 십자가복음을 외면하고 거부하다가 급기야는 예수를 죽임), 그러나 ㅎ님은 그 예수를 부활시켜서 참된 교회를 세우셨지요(머릿돌, 교회의 머리가 되심)
(좀 더 구체적으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소망했던 메시아에 대한 자기 나름대로의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등장하여 자신이 그 메시아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유대교의 메시아 기준에 예수가 하나도 맞는 것이 없습니다. 율법을 존중하지도 않고, 성전을 헐라는 말이나 하고, 유대교의 선봉장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험악한 저주나 쏟아 붓고, 하나님께서 천국을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인들에게 주실 것이라는 말을 하고 돌아다니는 예수를 이들이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가차없이 버려버렸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나라 백성 삼으시는 자들은 이러한 자들이 아닙니다.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자들은 따로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음성을 알아듣는 자들입니다. 오직 그분의 음성을 듣고 인간 조직화된 종교에서 나와 예수 한 분만을 따라가는 자들입니다.
복음이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으라는 것입니다. 자기 의를 내세우며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에 머물러 있든지, 자기 의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의를 붙들든지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자들은 이러한 복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고 자신의 죄에 눈이 열려 있는 자들에게 이 복음은 생명수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리고 성벽 같이 높아져 있는 인간의 마음을 무너뜨리는 복음의 능력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교만의 철옹성이 무너질 때 비로소 자신의 비참한 영적 상태를 보게 됩니다. 그때 비로소 하나님의 진노에서 자신을 막아주는 피난처 되신 그리스도를 보게 되어, 예수가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임을 알게 됩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지 않는 자는 그 안에 생명이 없느니라는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예수의 살을 뜯어 먹고 예수의 피를 마시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요6:63절>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영과 육, 육과 영...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육이 땅이라면 영은 하늘입니다. 육이 보이는 세상을 말한다면, 영은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를 말합니다. 육이 마귀의 속성이라면 영은 ㅎ님 자신이고 ㅎ님의 속성이며 ㅎ님의 정신입니다. 따라서 육적인 존재인 인간이 영의 세계를 스스로 알 수는 없습니다. ㅎ님이 계시로 알게 해 주셔야 영의 세계를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ㅎ님의 간섭이 없는 자들이 성경을 보면 ㅎ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여 문자대로 읽고 그대로 행하는 종교인이 되고 맙니다. 종교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아무리 성경을 연구하고 성경대로 산다고 할지라도 사망의 한계를 벗어나질 못합니다. 종교가 무엇입니까? 사람의 필요에 의해 자신들의 복과 구원을 위해 만든 조작된 신을 섬기는 조직을 말합니다. 4대 종교라고 하면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 유교 등에 여기에 해당 하지요.
그래서 자신들이 만든 신에게 소원을 빌며 그 신을 섬기는 우스꽝스런 모습을 연출하는 곳이 종교입니다. 다 사단마귀의 속임수에 놀아나는 행태이지요. 사실 모든 종교는 근원이 샤머니즘, 즉 미신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미신이나 종교나 그 정신사조는 동일한데, 규모가 크고 조직화 되어 있으면 종교라고 공정성을 부여하고, 규모가 없이 개인적인 차원에서 빌고 섬기면 무속이라고 폄하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눈으로 볼 때는 50보 100보, (도찐개찐)인데요. 이처럼 모든 종교의 뿌리는 무속신앙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래 기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사람이 만들지도 아니했고,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소원을 들어주는 ㅎ님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기독교가 벌써부터 종교가 되었습니다. 과거 이스라엘이 제사장들의 변질 때문에 망하였듯이, 작금의 기독교 역시 거짓 목사들 때문에 세속화되고 변질되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야말로 말라기서에서 제사장들에게 질타하시는 ㅎ님의 말씀처럼, ㅎ님의 상에 더러운 떡을 드리고도 우리가 언제 ㅎ님께 더러운 떡을 드렸나이까 반문하는 실정입니다.
강대상에서는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예수, 오직 십자가’만을 전해야 하는데, 교회 부흥에 미쳐버린 목사들이 사람의 열심과 충성을 바쳐야 구원도 받고 복도 받고, 상급도 받는다고 꿀을 섞고 누룩을 섞어서 팔고 있습니다. (아까도 언급) 강대상에서 예수도 팔고, 복도 팔고, 천국도 팔아서 고객을 많이 유치해야 교회부흥을 이룰게 아닙니까? 교회성장이 그들이 섬기는 ㅎ님을 기쁘시게 하는 신앙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변질된 교회를 계2장에서는 ‘사단의 회’라고 폭로 하십니다. ㅎ님의 집이 아니라 사단의 집이라는 말이지요.
육으로 성경을 보면 땅의 복, 세상의 복을 받는 것이 좋은 믿음, 위대한 신앙처럼 보여집니다. 가령, 신28장 앞부분을 보면 ㅎ님 말씀을 잘 지켜 행하면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고,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가도 복,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야 그러는데 눈이 뒤집히질 않겠어요? 혹은 말3:10절 네가 온전한 십일조를 내면 ㅎ님이 하늘 문을 열고 복을 내려 쌓을 곳이 없도록 하겠다고 하니, 어찌 배팅을 하지 않겠습니까?
문제는 이런 구절이 다 영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함정인데, 그 속뜻을 아랑곳 하지 않고 복에 미쳐서 문자대로 액면대로 덤벼든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다른 여타 종교인과 똑같이 세상 복받기 경쟁 모드로 변질된 게 기독교인데, 그 첫 번째 원인이 바로 거짓 목사들 때문이라는 겁니다. 영의 말씀을 해석하지 못하니까 인간의 열심과 충성을 독려하는 것이 마치 목사의 책무처럼 되어버렸다니까요.
따라서 아무리 신학교를 나오고 신학 박사, 유학파라고 할지라도 ㅎ님의 계시가 없는 설교는 살리는 게 아니라 죽이는 것이 되고 맙니다. 이런 거짓 목사에게 속아서 온 평생 열심내고 재산 바쳐서 헌신봉사 했는데, 나중에 결국 지옥 갔다면 어찌 되겠어요? 속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억울하고 분통터진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묘사 합니다(어두운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차라리 이방인들처럼 아예 믿지나 않고 지옥 갔다면 당연시할 텐데, 잘 믿는다고 여겼는데 사기 당했으니 거짓 선생이 밉고, 속은 자신이 미워서 ‘이빨을 뿌드득 간다’고 하는 겁니다.
<65-66절> 65 또 이르시되 그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66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님께서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는 말씀을 다시 한 번 언급하십니다(얼마나 중요하면 6장에 3번 반복, 37, 44, 65). 무리들에게 이 말씀을 하는 것은 ‘너희들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보낸 자들이 아니다’라는 말입니다. 너희들이 내 아버지께서 보낸 자들이라면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고 내게 나왔을 것이고 그 가르침을 받은 자들이라면 나를 알아보고 나를 영접했을 거라는 뜻이었습니다.
이 말씀으로 예수를 따랐던 수많은 사람들이 떠나가고 다시는 예수를 따르지 않게 됩니다.
이들이 예수를 떠난 이유는 분명합니다. 자신들이 기대했던 것을 예수에게서 얻을 수 없음을 분명히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기대했던 것을 예수님이 주셨더라면 그들은 결코 예수를 떠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67-69절> 6:67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6: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6:69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예수를 따랐던 수많은 무리들이 더 이상 예수를 따르지 않고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이제 12제자만이 남아 있습니다. 참 난감한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서 “너희도 가려느냐?” 물으십니다. 너희들 역시 선택 하라는 것입니다. 이때 베드로가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오매 뉘게로 가오리이까?”라고 말합니다.
12 제자들이 주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한 이유는 주님께 영생의 말씀이 있다는 것 하나였습니다. 여기서 핵심 포인트는 지금 베드와 제자들 역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는 매일반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신기하게도 예수를 떠나지 않겠다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리들이 예수 따르기를 중단한 이유는 예수에게서 얻을 것이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예수가 자신들이 기대했던 그 메시아가 아니라는 판단이 서자 즉시 예수에게서 등을 돌린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제자들은 예수를 떠나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나 제자들 역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아시다시피 제자들에게서 서로 ‘누가 크냐’라고 경쟁하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되는 것은 예수님이 장차 왕권을 잡으면 한자리씩 하려는 욕망으로 예수를 쫓았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생의 말씀이 계시오매 우리가 뉘게로 가겠습니까? 라고 말하며 예수를 떠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예수 따르기를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간 무리들과 12 제자들 간에는 다른 점이 하나 있습니다. 12 제자들에겐 아버지의 붙드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주님을 떠나지 않은 것이지 그들의 실력이 아닙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강력한 힘으로 12 제자들 붙들고 계십니다. 예수 따르기를 포기하고 돌아간 무리들에겐 이러한 아버지의 붙드심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둘의 운명을 이렇게 갈라놓았던 것입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이 예수를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붙잡아 예수에게서 떠나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 안에 붙들려 있는 교회의 영광된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이 붙드심이 우리의 구원이고 우리의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벧전1:5절을 보면)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라고 말합니다. 베드로가 믿음의 비밀에 눈이 열린 후 자신이 예수를 붙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붙드심이 자신을 끝까지 예수를 따르게 하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된 후에 한 고백입니다. 우리들이 지금 예수를 따르고 있는 이유 역시 이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우리를 붙들어 그리스도에게 이끌어 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70-71절> 7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71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그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자신을 떠나지 않겠다고 말하는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나의 택함 안에 거하는 너희는 결코 나를 떠나지 못할거야”라는 뜻이었습니다. 예수께서 택하셨다는 것은 이들이 하나님의 택함 안에 거하는 자들이라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아버지의 택함 안에 거하는 자들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 놓을 세력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께서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마귀는 다름아닌 후에 예수를 팔 가룟 유다를 지칭하는 말이었습니다. 가룟 유다 역시 하나님의 택함 안에 있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이 택함은 영생과 상관이 없는 하나님의 구원을 설명하는데 필요한 택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를 12제자 중의 하나로 선택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구원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은 ㅎ님의 구원을 우리에게 설명해주시며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가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설명하기 위한 수단이 대조되는 짝입니다. 가인과 아벨, 이삭과 이스마엘, 야곱과 에서, 다윗과 사울, 이같이 대조되는 짝으로 무엇이 구원이고 무엇이 구원이 아닌지를 보여주십니다. 이것은 한 교회 안에 육에 속한 자와 영에 속한 자가 있다는 말입니다.
가룟 유다를 12제자 중 하나로 선택하신 이유는 주님의 구원을 설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가룟 유다의 짝은 베드로였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가룟 유다를 마귀라고 하신 것처럼, 베드로 역시 예수님께서 사탄이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마1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십자가 죽음을 말씀하실 때 이를 가장 극렬하게 반대했던 자가 베드로였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해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하십니다.
이 베드로의 생각에 우리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 역시 마귀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룟 유다와 베드로의 운명은 한 사람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저주의 길로, 한 사람은 영생의 길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주님의 붙들어 주심의 은혜입니다. 이것이 바로 ㅎ님의 택하심의 사랑입니다.
(눅22:31절을 보면) 십자가를 앞두시고 베드로가 3번 주님을 부인할 것을 예언하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우리 모두 가룟 유다와 같이 마귀에 속한 자들이기는 동일한 사람들입니다. 매일 예수를 배신하며 내 욕망을 따라 손익계산하며 살아가는 삶에서 조금도 뒤쳐지지 않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웬 은혜인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어 그리스도의 비밀을 알게 하시고 그의 음성을 듣고 그것을 알아듣게 하십니다. 주의 음성을 들을 때 내 마음이 뜨거워지게 하시고 세상에서 나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쉬지 않으시고 우리를 이러한 길로 이끌어 가시기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벌건 대낮에 하늘에서 불이 쏟아져 소돔과 고모라를 태운 것처럼, 마지막 날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이 이 세상을 향하여 쏟아지게 되는 날, 우리를 붙들어 그리스도에게 붙어있게 하신 하나님의 간섭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분명히 보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 모두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두 손 높이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그날을 바라보며 우리 모두 이 주님의 붙들어 주심의 은혜 안에 있는 자들이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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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랑과 복음교회 | - Daum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