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에 그린 그림 1
- 4·27 판문점남북정상회담을 보고
파란 페인트가 칠해진 판문점 도보다리를 걸어
문재인 김정은 두 정상은 마주앉았다
세상 눈과 귀가 판문점으로 달려왔어도
무성필름처럼 대화는 들리지 않았다
하얀 봄꽃이 두 사람을 보고 있다
단둘의 만남, 일대일의 만남
독대라 하였던가, 통역관이 없다
두 정상은 이 땅에서 태어난
우리 아이들이 쓰던 말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밀담이다
두 정상이 건넨 말들은 무엇일까
들리지 않아서 비밀스럽고, 비밀스러워
더 큰 의미로 전달되는 저 내용은 무엇일까
세상이 다 드러나는 대낮에 기자들을 불러놓고
카메라로 찍히지 않는 둘만의 소리로
어떻게 하면 알 것도 같은
알아도 형상화하기 어려운 비밀을 만들고 있다
건곤일척의 담론이 아니라도 촌부의 이야기라도 좋다
도보다리에서 두 정상의 만남은
구어체로 풀어내기 힘든 정치적 상징이다
드라마에서 연출할 수 없는 역사 한 장을
두 주연은 서슴없이 찍어내고 있다
북쪽의 찬바람이 가슴을 뻥 뚫고 내려오듯
남쪽 더운 바람이 DMZ를 지나 치닫듯
정치적 상징은 크고 위대하다
열강 틈에서 작고 초라했던 두 동강난 한반도가
광개토대왕 때처럼 크다
남루를 걸치고 살았던 동포의 자존심이
동해의 등뼈처럼 싱싱하다
들리지 않는 소리가 판문점을 지배한 사십 분
그 시간은 가장 찬란한 빛과 가장 질긴 그늘을
날금과 씨금으로 해서 짜낸 비단이다
정전협정 이후 육십여 년의 길고도 먼 여정을
사십 분이라는 시간으로 짜낸 피륙이다
우리 후손들이 누리고 갈 광음이다
소리가 있다
두 정상의 무성필름 속에서 소리가 있다
낮말을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 했던가
꽃그림자 속에서 풀숲에서 나무 위에서
배경음악처럼 새소리가 들린다
공개된 비밀장소의 밀담을 새들은 알고 있었을까
모른 체했을까, 새소리는 들리는데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도 역사의 아이러니다
조류학자는 열세 종류의 새소리가 들렸다 한다
꿩, 박새, 청딱다구리, 직박구리, 산솔새……
새들에게는 휴전선이 없으니 남과 북이 없다
어디 남한의 새가 있고 북한의 새가 있으랴
그들의 하늘은 자유의 하늘이고 평화의 하늘이다
새들은 DMZ에서 새끼를 키우며 남북을 오간다
새들뿐이랴, 풀꽃들도 풀씨를 날려 남북을 오간다
그 하늘은 미국이나 중국의 하늘이 아니라
우리의 하늘이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목쉰 소리가
백두와 한라를 넘나들었다
조류학자가 굳이 새소리를 찾아낸 것은
통일의 비원이 서린 우리의 마음을 알아서일까
보물상자 같기도 하고 판도라상자 같기도 한
밀담의 내용들이 열리기 전에 봄날은 갔다
하늘에는 알 수 없는 비구름 있고 볕이 있어
언제 천둥 번개가 치고 해가 들지 모르지만
마침내 경천동지할 대타협은 이루어지리라
통일은 봄볕처럼 오리라
일장춘몽이라는 말이, 남가일몽이라는 말이
봄날에 그리는 그림 속에는 없다
우리가 지금 그리는 산하에도 없다
봄날의 그림은 DMZ에 자빠져있다가
기어이 우리 곁으로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