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학아세(曲學阿世)-학문(뜻)을 굽혀 세상에 아부한다 이상호(전 천안아산경실련대표, 소소감리더십연구소 소장) 1. 돈과 권력, 시류에 흔들리는 지식인들 우리가 사는 사회와 나라가 건강하고 미래가 밝으려면 적어도 이 부류의 사람들만은 사람들의 존경과 신뢰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한국의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그들은 이 사회의 정신문화를 이끌어 가는 주체들이다. 이름하여 교사, 교수 등을 포함한 학자와 지식인 그룹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요즈음 한국 사회의 현실을 보면 초․중등학교 교사들은 물론 대학교수까지 존경과 신뢰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은 것 같다. 초․중등 교사들에 대한 신뢰도는 이미 땅에 떨어진 지 오래이며 교사의 가르침과 지도 대하여 대드는 학생들도 많고 교사를 함부로 대하는 학부모들도 부지기수다. 그야말로 교권이 땅에 떨어졌다고 한탄하는 목소리가 들린 지 오래다. 대학도 예외는 아니다. 상당수의 대학교수는 지식 유목민이 되어 버린 것 같다. 그들은 돈과 권력이 있는 곳을 기웃거리며 지적 양심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비단 우리나라만 아니다. 미국 등 선진국도 그런 것 같다. 석박사 학위 논문과 관련한 표절 논란 역시 지식인의 지적 양심과 관련이 된다. 특히 정치적 권력을 지향하는 사람들의 논문 표절 논란은 그의 정치적 양심과 관련이 된다. 그런데 세상은 그토록 시끄럽게 떠드는 것만큼 그의 내면의 양심의 문제는 크게 문제 삼지 않는 것 같다. 기이한 일이다. 그만큼 부정의한 관행이 만연해 있다는 증거가 아닌가? 많은 지식인이 성숙되지 않은 지식을 이용하여 포장하는 바람에 진실이 왜곡되고 지식은 설익은 과일처럼 세상이란 자판 위에 올려진다. 몽테뉴가 이렇게 말했다. “마치 새들이 모이를 찾으러 나가서 그것을 새끼에게 먹이려고 맛보지 않고 입에 물고 오는 것과 똑같이 우리 학자들은 여러 책에서 학문을 쪼아다가 입술 끝에만 얹어주고 단지 뱉어서 바람에 날려 보내는 짓밖에는 하지 않는다.(수상록)” 오늘날은 말들이 넘쳐나는 것만큼 지식인이 넘쳐나고 지식도 넘쳐난다. 그러나 정작 곱씹어 내면화한 지식보다는 표피적인 지식이 넘쳐난다. 내면화된 지식은 그 사람의 말과 행동, 양심을 지탱하는 힘이 되지만 표피적인 지식은 한갓 지식 장사를 위한 도구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다. 몽테뉴가 말하는 맛보지 않고 입에 물고 와 내뱉는 음식과 같다. 그러기에 그것은 그저 바람에 날려 보내는 것밖에는 되지 않는다. 지식인의 지적 양심과 지조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 된다. 지식인의 사명과 양심은 진리를 탐구하고 진리를 존중하며 진리 앞에 겸허한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세상은 점점 자본주의적 기능주의에 물들어 진실과 정의, 양심과 도덕보다는 기능적 지식에 매진해 왔다. 대학에서도 인문학은 쇠퇴하고 기능적인 기술학과 처세학 등은 발달하여 왔다. 어떻게 보면 먹고사는 문제와 직결되니 그럴 수 있고 욕하거나 탓할 수 없지만, 그들 기능적인 지식인도 지식인의 사명인 진실과 양심 앞에 겸허할 줄 알 때 비로소 세상은 건강해진다. 그러나 상당수의 지식인이 깊이 있는 지식보다는 당장 활용하는데 용이한 지식만 탐닉한다. 그런 가운데 지식인이 가져야 할 지적 양심과 지조는 먼 나라의 이야기가 되어 버린 것 같다. 이제 지식은 자신의 처세에 얼마나 유용하게 활용되며 정치와 권력에 얼마나 유효하게 작용하는가에 집중하는 것 같다. 그리고 지식인의 상당수가 돈과 권력을 위해 부역하는 처지에 이른 것 같다. 미국에서 오랜 기간 담배의 유해성 논쟁 같은 것도 지식인들의 돈과 권력에 대한 부역의 한 사례가 된다. 그러나 세상은 늘 그토록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래도 세상이 이 정도의 정의와 양심을 지키고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것은 끝까지 지식인의 양심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기에 가능한 것 같다. 지식인이 지식이 요구하는 진리와 양심, 정의를 바탕으로 시세에 굴복하지 않고 지조를 지키는 일은 무척 어려운 일이지만 그런 지식인들로 인해 세상은 늘 건강해지고 정의를 위한 끝없는 담론이 형성되고 발전하기 때문이다. 지식인은 곡학아세(曲學阿世)하지 말아야 하지만, 많은 지식인이 삶이라는 이름하에 곡학아세(曲學阿世)하는 경우가 많다.
2. 곡학아세(曲學阿世)의 유래와 의미 곡학아세(曲學阿世)란 말은 “학문(뜻)을 굽혀서 세상에 아부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는 출세에 눈이 멀어서 학자의 양심을 지키며 배운 대로 실천하지 않고 세상에 아부하며 지식을 왜곡하는 경우를 말한다. 이 말은 중국의 전한(前漢) 시대 제6대 황제 경제와 7대 황제 무제때부터 유래되었다. 중국 전한의 제6대 효경황제 경제 유계(B,C 188년 ~ B,C 141년)는 아버지 문제 유황의 뒤를 이어 한 왕조의 기틀을 아주 튼튼히 다진 인물이다. 그는 왕조의 기틀을 다지고 선정을 베풀었기에 「문경지치(文景敬之治)」라 불리는 성세를 이루었다. 그가 뛰어났기에 뒷날 후한을 일으킨 광무제나 촉한을 세운 유비도 스스로 경제의 먼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내세웠다. 이를 볼 때 경제의 치적은 대단하였다. 경제는 선정을 베풀기 위해 인재를 널리 고르게 등용하기 위해 노력했다. 곁에서 아부하는 신하가 아니라 정사를 곧게 돌볼 신하를 원했다. 그때 산동(山東) 지방 제나라 사람으로 시인이자 학자인 ‘원고생(轅固生)’이란 자가 있었다. 그는 나이가 많았는데도 그 지조가 대단하였으며, 옳은 일은 굽히지 않는 대쪽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경제는 그 원고생이 마음에 들어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황제는 그가 시와 예에 능했기에 그에게 청하왕 태부에 봉하고 박사 벼슬을 주고 존중하며 대접했다. 그는 황제인 경제의 면전에서도 바른말을 서슴 없이 하였다. 히루는 황생(黃生)과 경제의 면전에서 탕 임금과 무왕에 관한 논쟁을 하였다. 황생이 말했다. “탕 임금과 무왕은 천명을 받은 것이 아니라 걸(傑)과 주(紂)를 시해한 것입니다.” 이에 원고생이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대체로 걸과 주는 포학하고 황음(荒淫-황망하고 음탕)하여 천하의 마음이 모두 탕 임금과 무왕에게로 돌아가 탕 임금과 무왕은 천하의 마음과 함께 걸과 주를 토벌한 것입니다. 또 걸과 주의 백성은 그들의 지배를 받지 않고 스스로 탕임금과 무왕에게로 들어갔으니 탕 임금과 무왕은 백성의 뜻을 따라 행한 것입니다. 따라서 천명을 받은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에 황생이 다시 반문했다. “모자는 낡아 헤져도 반드시 머리에 쓰고 신발은 새것이라 해도 반드시 발에 신습니다. 어째서일까요? 아래와 위의 구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걸과 주가 아무리 도(道)를 잃어버렸다고 하나 어쨌든 왕이고 탕 임금과 무왕이 아무리 성스럽다고 해도 신하일 뿐입니다. 임금에게 잘못이 있으면 신하가 바로 잡아 천자를 높이지는 못할망정 잘못하였다고 죽이고 자신이 즉위하는 일은 살해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다시 원고생이 대답했다. “말씀대로라면 고제(한고조 유방)가 진나라를 대신하여 천자의 지위에 오른 것은 잘못된 것이지요” 이에 경제가 말하였다. “고기를 먹음에 있어서 말의 간을 먹지 않아도 맛을 알지 못한다고는 하지 못하며 학자가 탕 임금과 무왕이 천명을 받았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고 어리석다고 하지 못할 것이오” 이로써 논쟁은 끝났다.(사마천 사기열전 유림열전) 위의 논쟁을 보면 매우 의미가 크다. 우선은 황제 앞에서 당당하게 논쟁을 할 수 있음이다. 그리고 황제 또한 그 논쟁을 귀담아듣고 정리를 해 준 일이다. 고금의 모든 왕들은 자신이 혁명으로 왕위를 가졌어도 뒷날 왕의 자리를 노리거나 혁명을 정당화하는 자는 용서하지 않는다. 황생은 원고생에게 탕 임금과 무왕의 역성혁명을 부당한 것으로 말하고 있다. 이는 이미 한(漢) 왕조가 성립되어 번창하고 있는데 역성혁명을 정당화한다는 것은 한 왕조 또한 그렇게 무너져도 정당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황생의 견해에 원고생은 거침없이 그것은 역성혁명임을 정당화한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한 고조 유방이 진나라를 무너뜨리고 한나라를 세운 것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더 멋진 것은 황제인 경제의 태도이다. 경제가 이렇게 학자의 곧은 주장을 받아들이고 정리하여 줄 수 있었기에 경제 치하의 한나라는 번성을 거듭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의 연산군은 세조의 왕위찬탈을 간접적으로 비판한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빌미삼아 사림을 처참하게 도륙 내었다. 그런 조선은 혼란의 늪으로 빠져 들어갔다. 황제인 경제는 그런 원고생을 특히 두둔하며 신임하였다. 그리고 늘 곧은 지론을 펼치도록 격려했다. 경제의 어머니 두태후는 특별히 『노자(老子)』를 좋아했는데, 원고생은 『노자(老子)』를 폄하했다. 하루는 두태후가 원고생을 불러 “『노자(老子)』는 어떤 책인가?”하고 물었다. 원고생이 말하였다. “그것은 평민의 말일 뿐입니다. 하여 취할 바가 전혀 못 됩니다.” 원고생은 감히 태후의 면전에서 반론을 제기했다. 태후는 매우 불쾌하여 “어디서 사공의 형법서를 찾겠는가?” 하면서 원고생에게 강제 노역형을 처하였다. 원고생은 멧돼지 우리에 갇혀 멧돼지와 사투를 벌여야 했다. 이때 황제인 경제는 원고생이 아무 죄가 없음을 알고 어머니 몰래 원고생에게 비수를 건네주었다. 원고생은 우리에 들어가자마자 달려드는 멧돼지의 염통을 찔러 쓰러뜨렸다. 이후 황제가 원고생을 매우 신임하는 것을 안 태후도 어찌하지 못하고 원고생을 용서해 주었다.(사마천 사기열전 유림열전) 원고생은 태후의 면전에서 조차 곡학아세(曲學阿世)하지 않았다. 경제는 이렇게 곧은 신하인 원고생을 더욱 사랑하여 삼공(三公)의 하나인 청하왕(淸河王) 태부(太傅)에 승진시키고 우대하였다. 뒷날 원고생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사직을 청했으나 경제는 허락하지 않았다. 경제가 죽고 무제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가 바로 유명한 한무제다. 한 무제도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아흔의 나이가 된 원고생을 등용하여 중책을 맡겼다. 그때 곧고 고집 불통인 늙은 원고생을 돌려보내려고 황제 앞에서 젊은 신하들이 놀려댔다. “그 늙은이는 이제 쓸모가 없습니다. 시골구석에서 증손자나 데리고 놀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무제는 아버지 경제처럼 원고생을 끝내 등용하여 곁에 두었다. 그때 함께 등용된 소장학자가 있었는데 그는 같은 동향인 공손홍(公孫弘)이었다. 공손홍은 원래 평민이었는데 황제의 삼공(三公)이 되어 평진후(平津候)에 봉해졌다. 그리고 학관(學官)이 되었다. 공손홍 역시 다른 소장 학자들처럼 원고생을 늙은이라 폄하하였다. 하루는 공손홍이 원고생을 대하면서 “송장 같은 늙은이가 알면 얼마나 안다고..” 비아냥 거렸다. 이에 원고생은 조금도 흔들림 없이 말했다. “지금 학문의 길이 어지러워지고 속설(俗說)이 유행하고 있소이다. 이대로 둔다면 역사 있는 학문은 요사스런 속설로 제 모습을 잃게 될 것이오. 다행스럽게 자네(공손홍을 일컬음)는 나이가 젊고 학문을 좋아하는 선비라고 소문을 들었네. 그러니 모조록 올바른 학문을 잘 익혀서 세상의 도가 바로 서도록 애써 주게나. 이를 위해 올바른 학문에 힘써서 말하고 학문의 뜻을 굽혀 왜곡된 학문으로 세상에 아부하지 말기를 바라오<무정학이신(務正學以信) 무공학이아세(無曲學以阿世)>”그 이후로 제나라에서는 시(詩 )를 말할 때는 모두 원고생을 거론하며 본받았으며, 제나라의 많은 시인들은 모두 원고생의 제자였다(사마천 사기열전 유림열전) 원고생은 학자들은 절대로 곡학아세(曲學阿世)해서는 안 되며 학자들이 곡학아세(曲學阿世)하지 말아야 세상의 풍습이 바로 선다고 하였다. 그야말로 지식인의 지조와 양심을 강조한 말이다, 그것이 무너지면 세상이 어지러워진다는 역설이기도 하다. 3. 선비정신을 지닌 관료와 지식인이 아쉬운 세상
전통적으로 선비정신은 학자의 양심에 비유된다. 학자는 어느 시대건 그 시대의 정신문화의 지주이며 양심이다. 동서고금의 모든 시대를 통틀어 학자들의 양심인 선비정신이 무너질 때 세상은 무너졌다는 사실이다. 선비정신이 무너진다는 것은 학자들이 곡학아세(曲學阿世)를 일삼는다는 것이며 곡학아세(曲學阿世)의 세상은 진리와 정의가 무너지고 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 전통에 녹아 내려온 그 선비정신을 살펴보자. 성균관 철학 대사전에 한국 선비는 4가지 정신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사전에는 청빈낙도와 안분지족을 하나로 묶어 4가지라고 하였으나 나는 나누어 5가지 정신이라고 구분한다. 첫째인 경리사의(輕利重義)는 이익보다는 의리를 중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이를 잘못 해석하면 선비는 이익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이것은 이익을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이익과 의리가 충돌할 때 이익을 버리고 의리를 택한다는 뜻이 된다. 둘째,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정신이다. 사적인 이익이나 일과 공적인 이익이나 일이 충돌할 때 사적인 이익보다 공적인 이익을 우선하며 사적인 일보다 공적인 일을 우선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선비는 대의명분이 우선이다. 사적인 권력으로 공적인 권력을 휘손해서는 안되며 사적인 이익을 위해 공적인 이익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공금도 철저하게 운용되어야 하며 조금의 횡령이나 활용도 용납되지 않아야 하였다. 셋째, 청빈낙도(淸貧樂道)의 정신이다. 이는 잘못 해석하면 가난하여야 하며 그 가운데 즐겁게 지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하기 쉽다. 이는 비록 가난해도 도를 즐기며 우선한다는 의미이다. 비록 부유하더라도 부당한 재물을 탐하지 않으며 나눌 줄 알아야 한다. 비록 가난하더라도 재물을 탐하지 않으며 주어진 봉록과 재물만큼 즐기며 도를 존중한다는 의미이다. 항산(恒産)이라야 항심(恒心)이 있다고 하나 재물이 없어도 도덕적인 마음인 항심을 지킨다는 의미가 된다. 넷째, 안분지족(安分知足)의 정신이다. 이는 주어진 것에 만족할 줄 안다는 것이다. 주어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부당한 재물과 권력을 탐하게 된다. 선비는 그래서는 안 된다. 정당하게 주어진 재물과 권력은 가질 수 있으나 부당한 재물과 권력은 사양하며 주어진 만큼 만족하고 즐기며 살아갈 수 있어야 진정한 선비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엔 중요한 정신이 녹아 있다. 선비는 부지런해야 한다. 열심히 집안을 돌보며 주어진 공무에 최선을 다해야 하고 자기관리와 수양에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 모든 과정에서 항상 근검절약해야 한다. 옛날의 선비는 직접 생산에 참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이 누리는 모든 물질적인 것들은 생산자가 따로 있었다. 그 생산자들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절약하고 소중하게 사용하는 것이 인간적인 도리이며 선비가 갖추어야 할 정신이었다. 다섯째, 극기수양(克己修養)의 정신이다. 모든 사람에겐 삶의 과정에서 어려움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것을 이겨낸다는 의미가 된다. 특히 여기서 말하는 극기는 자기 자신을 이긴다는 의미이다. 자기 안에서 일어오는 욕심과 사악한 마음을 정화하고 이기며 게으름과 헛된 욕망을 이겨내는 것이다. 그것은 예를 존중하며 절제를 이루어야 가능하다. 수양은 자기 자신의 마음과 몸을 닦는 공부를 하는 일이다. 선비의 수양은 죽음의 순간까지 이어져야 한다. 이런 선비의 5가지 정신에 비추어 볼 때 오늘날 선비는 있을까? 조선 시대에 그 선비정신을 올곧게 지킨 사람이 얼마나 될까? 조선 시대를 보면 그 선비정신을 지키던 사람도 권력에 나아가면 권력의 편에서 선비정신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선비정신을 멍들게 하는 가장 큰 적이 권력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권력 앞에 선 선비는 권력을 지키고 보전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모함하였고 권력을 지키기 위해 재물을 모으기도 했다. 그러나 진정한 선비는 그것을 이겨낼 줄 알았다. 그런 점에서 과거에도 선비 아닌 선비들이 너무도 많았다. 옛날 선비들은 학문을 통해 정계로 나아가 국민을 구제하려 했다. 관직은 국민 구제의 길이었다. 그러나 관직에 나아간 많은 이들이 선비정신의 실현보다는 부귀영달을 위한 길을 택했다. 선비는 조선 시대의 관리와 학자들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오늘날 관리와 학자들은 거의 선비에 가깝다. 전통적인 선비정신은 한갓 형이상학적이고 관념적인 것이 아니다. 현실적인 것이다. 다만 사람들이 그것을 살리고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로마 시대의 노블리스 오블리제와 같은 것이었다. 살신성인하고 대의를 위해 자기를 희생할 줄 아는 정신이었다. 진리와 정의 앞에 올곧은 자세를 지키는 정신이었다. 말 그대로 곡학아세(曲學阿世)하지 않는 정신이었다. 그러나 지금 상당수의 관료와 지식인들에게서 그 선비정신은 어디로 갔을까? 관료와 지식인이 곡학아세(曲學阿世)하지 않을 때 세상은 바로 서고 올곧게 발전할 수 있다. 국가의 지도자는 원고생 같은 곡학아세(曲學阿世)하지 않는 참모를 기용할 때 더 올바른 정치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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