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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다말의 실제계 이탈, 믿음계 진입>의 줄거리 :
시아버지 유다와 며느리 다말 사이에 벌어지는 이 어처구니없고 패륜적이고 기이한 사건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다름 아닙니다. 실제 세계에서 이탈하여 믿음의 세계로 진입하려는 다말의 몸부림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몸부림이 삶의 현장에서 보여야 진짜 믿음입니다. 종교는 실제 세계 안에 굳세게 머무르면서 신을 만들어 내지만 참믿음은 실제 세계를 이탈하여 진짜 신이 중심에 계시는 믿음의 세계로 진입해 들어가 체류하며 삶을 삽니다.
다말의 실제계 이탈, 믿음계 진입
(창세기 38:19~30)
19. 그가 일어나 떠나가서 그 너울을 벗고 과부의 의복을 도로 입으니라
20. 유다가 그 친구 아둘람 사람의 손에 부탁하여 염소 새끼를 보내고 그 여인의 손에서 담보물을 찾으려 하였으나 그가 그 여인을 찾지 못한지라
21. 그가 그 곳 사람에게 물어 이르되 길 곁 에나임에 있던 창녀가 어디 있느냐 그들이 이르되 여기는 창녀가 없느니라
22. 그가 유다에게로 돌아와 이르되 내가 그를 찾지 못하였고 그 곳 사람도 이르기를 거기에는 창녀가 없다 하더이다 하더라
23. 유다가 이르되 그로 그것을 가지게 두라 우리가 부끄러움을 당할까 하노라 내가 이 염소 새끼를 보냈으나 그대가 그를 찾지 못하였느니라
24. 석 달쯤 후에 어떤 사람이 유다에게 일러 말하되 네 며느리 다말이 행음하였고 그 행음함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느니라 유다가 이르되 그를 끌어내어 불사르라
25. 여인이 끌려 나갈 때에 사람을 보내어 시아버지에게 이르되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나이다 청하건대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누구의 것이니이까 한지라
26.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27. 해산할 때에 보니 쌍태라
28. 해산할 때에 손이 나오는지라 산파가 이르되 이는 먼저 나온 자라 하고 홍색 실을 가져다가 그 손에 매었더니
29. 그 손을 도로 들이며 그의 아우가 나오는지라 산파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터뜨리고 나오느냐 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베레스라 불렀고
30. 그의 형 곧 손에 홍색 실 있는 자가 뒤에 나오니 그의 이름을 세라라 불렀더라
시아버지 유다는 며느리 다말을 창녀로 착각하여 잠자리를 갖습니다. 그리고 약속한 화대를 주려고 했는데 직접 가기에는 부끄러웠는지 가나안 지역에서 사귄 친구를 통해서 염소 새끼를 전하고자 했지만, 창녀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태어난 베레스가 예수님의 계보에 올라가게 됩니다. 베레스는 나올 때 어머니 다말의 회음부를 찢고 나옵니다. 본문에서는 그것을 터뜨리고 나왔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이야기는 참 기이하고도 보고 있기가 낯이 뜨거워 수치스럽기까지 합니다. 역겹기까지 할 수도 있는 패륜적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통하여 태어난 베레스는 유다를 이어 예수님의 계보에 들어갑니다. 이 기괴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다말의 실제계 이탈, 믿음계 진입’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유다의 며느리 다말은 실제 세계를 이탈해서 믿음의 세계로 진입하고자 합니다. 이것이 본문에서 읽은 대로 다말은 창녀로 변신하고 시아버지를 유혹하여 아기를 낳는 기괴한 몸부림의 이유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참믿음이 있다면 반드시 이렇게 실제 세계로부터 이탈해서 믿음의 세계로 진입하여 머물며 살아야 합니다. 믿음은 단순히 실제 세계를 살고 있는 상황에서 믿음을 보태서 계속 살아가는 게 아닙니다. 믿음을 가지게 된다는 것은 실제 세계를 이탈해서 믿음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 머무는 삶을 말합니다. 이렇게 세계를 바꾸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실제 세계를 이탈해서 지금 믿음 세계에 진입하여 살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실제 세계를 어떻게 이탈했습니까?
이와 관련하여 너무나도 유명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을 보면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일은 실제 세계 안에서는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라는 말씀이 뜻하는 바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실제 세계를 벗어나서 믿음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 머무는 상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느냐? 어떻게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느냐?’라고 질문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은 실제 세계에 머물러 있기에 할 수 있는 질문입니다. 말씀드렸듯이 믿음은 실제 세계를 이탈하여 따로 존재하는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기에 이와 같은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실제 세계를 이탈하여 믿음 세계로 진입하고자 몸부림을 치는 한 여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말이 창녀로 변신하여 시아버지를 유혹하는 장면은 12절부터 시작됩니다. 12~30절까지는 다말의 몸부림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정말 기이하고도 극단으로 치닫는 패륜적 행동이 나타납니다. 이것은 유다가 지시한 대로 불에 태워 죽일만한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다말은 목숨을 걸고 시아버지를 유혹하여 잉태한 것입니다. 계대결혼법에 의하면 시아버지 유다는 막내아들 셀라를 다말에게 남편으로 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셀라가 장성했음에도 유다는 다말에게 셀라를 주지 않았습니다. 다말은 가나안 족속입니다. 그리고 유다는 유랑민으로서 다말이 살고 있는 곳으로 이주해 온 이민자였습니다. 이렇게 보면 다말이 왜 그토록 유다 집안의 씨를 잉태하고 싶어 하는지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저의 아버지가 결혼하실 때 만주에 계시다가 피난을 오셔서 경상도 진영이라는 곳에서 어머니를 만나셨습니다. 어머니의 고향은 거창이었는데 어머니 쪽에서 결혼을 반대하셨다고 합니다. 삼팔따라지와는 결혼시킬 수 없다는 거였습니다. 삼팔따라지란 삼팔선 이북에서 월남한 사람을 놀림조로 이르는 말입니다. 유다의 입장이 이와 비슷한 이주민이었습니다. 다말은 대체 왜 이러한 유다 집안의 씨에 목을 맸던 것일까요? 화형당할 수도 있다는 위험을 무릅쓰고 시아버지를 유혹하여 잉태하려고 할 정도까지 해야 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민자였던 유다는 그 지역의 세도가가 아닙니다. 막강한 재력을 가진 것도 아닙니다. 다말이 유다에게 남성적인 매력을 느꼈던 것도 아닙니다.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관계라니 상상만 해도 끔찍하고 역겨운 일인 것은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유다의 막내아들 셀라 또한 다말이 시집을 왔던 시점에서는 어린애였을 뿐이었습니다. 셀라가 비록 장성했다고는 하나 젖비린내 나는 어린애라는 기억이 있는데 이러한 셀라를 남편으로 삼아 아기를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다말이 좋아서 이런 짓을 했을 것이라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히려 다말은 너무나도 지긋지긋하고 끔찍하고 역겨운 일을 무릅써야만 했습니다. 화형을 당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알고서 이러한 일을 저지를 때에는 필유곡절입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유다 때문도 아니고 유다의 막내아들 셀라 때문도 아닙니다. 다말이 권력이나 재산에 욕심이 있기 때문도 아닙니다. 이유는 하나뿐입니다. 다말의 이야기 속에서 비롯된 베레스는 예수님의 계보에 오릅니다. 남자들의 이름만 등장하는 예수님의 계보에서 여인은 다섯 명의 이름이 등재되었습니다. 그중에서 첫 번째 이름이 다말입니다. 한 마디로 다말의 행동은 신앙을 위한 것입니다. 그것도 예수님과 깊이 연관된 신앙의 행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말의 이름이 예수님의 계보에 오른 것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의미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기이하고도 패륜적인 행동을 한 다말은 예수님의 계보에 올랐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패륜적인 행동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화형을 당할 수도 있는 패륜적 행동까지 감행한 다말의 마음을 염두에 둘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마음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추적해 보아야 합니다. 어떻게 다말에게서 여호와 하나님이 이유가 될 수 있었는지, 어떻게 지긋지긋하게 역겹고 토가 나올 정도로 패륜적 행위를 오직 여호와 하나님 때문에 감행하게 되었는지 궁금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이방 여인이 도대체 어떤 과정과 경위를 거치면서 여호와 하나님 때문에 이런 일을 하게 되었는지 추적할 필요가 있습니다.
38장 본문 전체를 통해 실마리를 찾아봅니다. 15절을 보면 ‘창녀’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15~16절을 보면 “그가 얼굴을 가리었으므로 유다가 그를 보고 창녀로 여겨 / 길 곁으로 그에게 나아가 이르되 청하건대 나로 네게 들어가게 하라 하니 그의 며느리인 줄을 알지 못하였음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언급된 창녀는 말 그대로 성매매를 하는 여성을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유다는 성매매의 대가로 화대를 주고자 합니다. 친구를 통해 염소 새끼를 보냈는데 창녀를 찾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장면이 기록된 21절을 보면 “그가 그 곳 사람에게 물어 이르되 길 곁 에나임에 있던 창녀가 어디 있느냐 그들이 이르되 여기는 창녀가 없느니라”라고 합니다. 그런데 원문을 보면 15절에서 언급된 창녀와 21절에서 언급된 창녀가 다릅니다. 21절에서 언급된 창녀는 단순히 성매매를 하는 여성이 아니라 신전 창녀를 뜻합니다.
신전 창녀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케데샤는 ‘잘라서 구분하다’라는 뜻의 카도쉬에서 유래했습니다. 심지어 ‘거룩하게 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가나안에서는 신전 창녀를 거룩하게 구분된 여자들로 여겼던 것입니다. 이들은 신전에서 종교의식을 행할 때 성관계를 하는 자들입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당시 가나안 지방에서는 아스다롯 여신을 섬겼습니다. 아스다롯 여신은 통일왕국 시대에 큰 문제가 되었던 바알처럼 풍요와 다산을 관장하는 신으로 여겨졌습니다. 쉽게 말해 부자가 되고 하는 일마다 부흥하게 해주는 여신입니다. 여기서 실마리를 얻어서 다말이 왜 위험을 무릅쓰고 역겨운 패륜적 행위를 감행하면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찾고자 했는가에 대한 이유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에게 신이라는 존재는 선택사항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민족의 신이 있으며, 자기 집안의 신이 있습니다. 라헬이 훔쳤던 드라빔도 집안의 수호신입니다. 한두 개의 신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고도 마땅한 일입니다. 다말도 당시 가나안 지방의 풍습대로 아스다롯을 섬겼을 것이고, 그 외에도 어떤 우상을 섬겼을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다말이 시집을 온 유다의 집안은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신을 섬겼습니다. 여기서 다말은 참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을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신은 당시 풍요와 다산의 여신이라고 여겨지던 아스다롯과는 너무나 달랐기 때문입니다. 가장 큰 차이점은 형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신전에 가면 아스다롯 우상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유다 집안을 보면 증조할아버지 아브라함과 할아버지 이삭과 아버지 야곱과 유다에 이르기까지 자기의 신으로 고백을 하는데 형상이 없습니다. 게다가 아스다롯은 신전이 있습니다. 그런데 유다 가문이 자기들의 신이라고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은 예배를 위한 신전도 없습니다.
당시 신이라는 존재는 인간의 삶에 필수적인 관심사였습니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었을 때 다말이 유다 가문을 기이하게 여겼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른 모든 세상의 신들은 소위 풍요와 다산과 번영을 위해 인간이 만들어 낸 신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신은 특별했습니다. 시집을 와서 가문에 대한 이야기를 듣자니 하나님이 증조할아버지 아브라함을 찾아오셨다고 합니다. 신이 먼저 찾아와서 ‘내가 너를 선택했다.’라고 했다니 여태까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모든 종교는 인간이 신을 만들고 신을 선택합니다. 그렇기에 모든 신은 개인과 민족과 나라에 의해 선택을 받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신은 스스로 찾아와서 유다 집안을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다말은 이 여호와 하나님을 자기의 신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합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고 해서 저절로 하나님을 좋아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에 다말은 토가 나올 정도로 역겨운 패륜적 행위를 저지르고 불에 타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감행하게 됩니다. 결국 다말이 이러한 일을 벌인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집안에 남아있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시는 지금으로부터 사천 년 전입니다. 요즘처럼 예배당에 가서 등록하여 회원이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시대 배경에서 여인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집안에 남아있기 위해서는 아이를 갖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말은 두 번이나 실패합니다. 다말의 첫 남편이었던 엘은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여 죽이십니다. 계대결혼법에 의해 둘째 남편이 된 오난은 형에게 씨를 주지 않고자 했다가 마찬가지로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여 죽이십니다. 이제 다말은 계대결혼법에 의해 셋째 셀라를 남편으로 기다려야 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여호와 하나님을 신으로 받아들인 집안에 남고 싶어서 기다리는데 시아버지 유다는 셀라를 줄 생각이 없습니다. 이에 다말은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하고 역겨운 패륜을 감행합니다. 불에 타 죽을 가능성을 감수합니다. 시아버지의 아기를 가져서라도 이 집안에 남겠다고 할 정도로 여호와 하나님을 좋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말이 이렇게 여호와 하나님을 좋아하게 된 내적 경위는 무엇일까요? 다말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들었을 때 다른 신들과는 엄청난 차이를 느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다말이 알던 아스다롯을 비롯한 모든 신들은 형상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다말이 사람들과 아스다롯을 섬길 때는 공식이 있었습니다. 마음으로는 풍요와 다산을 봅니다. 눈으로는 아스다롯을 봅니다. 마음으로 보는 풍요와 다산을 아스다롯이라는 신을 통해 얻으려고 하며 실제 세계의 삶을 살았습니다.
실제 세계의 삶이란 쉽게 말해 육체를 입고 있는 ‘실제 나’가 이 세상에서 만난 최고의 가치를 위해서 사는 삶입니다. 세상에서 최고의 가치란 언제나 풍요와 다산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80억 인구가 사는 이 지구 위에서 최고의 가치는 풍요와 다산입니다. 마음을 채우고 싶어 하는 좋음이 진짜 신입니다. 사람들은 풍요와 다산이라는 진짜 신을 가지기 위하여 아스다롯이라는 우상을 섬겼던 것입니다. 이것을 공식으로 표현하자면 ‘마음으로는 풍요와 다산을, 눈으로는 아스다롯을’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실제 세계에서 종교인들이 사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다말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니 문제가 발생합니다. 아스다롯을 숭배했던 때처럼 마음으로 풍요와 다산을 보면서 눈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보아야 하는데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이 보이지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할 신전도 없습니다. 이제 마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볼 수 없으면 여호와 하나님을 신으로 섬길 방법이 없습니다. 다말은 결국 마음으로 풍요와 다산 대신 여호와 하나님을 보기 시작합니다.
이제까지 풍요와 다산은 마음에서 가장 좋다고 여기는 것이 놓여야 될 자리에 있었습니다. 사람은 마음으로 지속해서 바라보며 그것과 관계된 소원을 갖게 됩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마음에서 바라보는 대상이 최고로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최고로 좋게 여기는 것이 진짜 신입니다. 그런데 다말은 여호와 하나님을 신으로 섬기기로 작정합니다. 이전의 공식은 마음에는 풍요와 다산이라는 진짜 신을 붙잡고, 육체의 눈으로는 풍요와 다산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한 수단으로 아스다롯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자 이 공식이 깨어집니다. 형상이 없는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신으로 섬기려니 마음에서 가장 좋은 것이라고 여기는 대상이 자리하게 되는 바로 그 자리에 여호와 하나님이 들어오실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이전의 다말에게 있어서 마음에서 가장 좋게 여기는 그 자리에는 풍요와 다산이 있었습니다. 풍요와 다산이 진짜 신으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이 그것들을 물리치고 들어오셨고 이제 다말은 여호와 하나님을 좋아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여호와 하나님을 지켜내게 됩니다. 아브라함 같은 믿음이 작동하는 것입니다. 가나안 여인 다말이 영광의 하나님을 지켜내는 방법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그것은 아이를 가져 가문에 남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마음에 소중하게 여겨질 수 있는 모든 대상들을 물리침으로 실제 세계를 벗어남으로써 영광의 하나님을 지켜냈습니다. 이를 통해 믿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말의 경우에는 풍요와 다산이 최고 좋음의 신의 자리에 있는 실제 세계를 살고 있던 사람입니다. 다말 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은 풍요와 다산이 중심에 자리 잡은 실제 세계를 살아갑니다. 그 과정에서 우상인 신을 만들고 종교를 만듭니다. 그러던 다말이 여호와 하나님이 최고 좋음의 중심에 서 있는 완전히 다른 믿음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 들어가는 방법이 아브라함과는 다른 방식입니다. 사천 년 전 다말은 이 집안의 씨를 잉태함으로써만 믿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다말이 낳은 베레스가 예수님의 계보에 들어갑니다.
예수님의 계보가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 비유적으로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오대산 줄기에 지하수가 흐르다가 지표를 뚫고 올라오면 옹달샘이 됩니다. 모든 옹달샘이 지하수에 근원을 두듯이 여호와 하나님을 관계하는 모든 사람은 예수님 안에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예수님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다말이 유다 가문의 씨를 가짐으로써 그렇게 낳은 아들이 예수님의 계보에 올랐다는 것은 결국 다말이 예수님을 붙잡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서 이삭과 야곱과 유다로 이어져 온 계보는 다말이 낳은 베레스로 넘어갑니다. 이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이라는 지하수가 흐르는 파이프라인입니다. 그리고 이천 년 뒤에 요셉과 마리아를 통해서 예수님이 육체를 입고 실제로 태어나십니다. 예수님이 육체를 입고 태어나시기까지 아브라함부터 시작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마주 보고 관계한 사람들 속에서 예수님은 바통처럼 이어져 내려갑니다.
다말이 유다 집안의 씨를 갖고자 했던 것의 영적인 내막을 보자면 예수님을 바통으로 이어갈 아이를 낳고 싶다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다말은 예수님을 바통으로 이어가는 아들을 낳지 못하면 여호와 하나님을 신으로 섬기는 집안에 속하지 못한다는 절박감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다말의 내면에서는 공식이 바뀝니다. 마음으로는 풍요와 다산 대신 여호와 하나님을 모십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진짜 나의 신으로 갖기 위해서 예수님을 바통으로 이어갈 고리가 되는 아이를 보고 싶어 한 것입니다. 이것이 다말의 사건이 보여주는 영적인 내막입니다.
다말이 의식적으로 이러한 생각을 하지는 못했을지라도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바로 이러한 영적인 내막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다말이 원했던 것은 마음으로 풍요와 다산을 보고, 눈으로는 아스다롯을 보던 공식이 마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보고, 눈으로는 예수님의 바통을 이어갈 아이를 보고 싶어 한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요한일서 1장 1절을 보면 예수님에 대해 묘사하기를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2절에서는 이 예수님을 증언한다는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님을 눈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증언 속에서 예수님을 볼 수는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 눈에 보이도록 실제로 육체를 입고 나타나셨기에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라는 말씀대로 증언을 통해 예수님을 보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형상을 갖고 있는 아스다롯과 같은 우상 대신 예수님을 봅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본 자들이 증언함으로써 우리도 눈으로 보는 것과 같은 효과로 예수님을 붙잡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모든 증언은 ‘모세가 장대에 구리 뱀을 매달았을 때 보았던 것처럼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을 보라.’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의식으로 보지만 그 의식은 눈으로 직접 예수님을 본 자들의 증언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말이 우리에게 만들어 준 복음과 신앙의 공식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으로는 실제 세계에서 가장 좋다고 여겨지는 풍요와 다산 대신 여호와 하나님을 보고 눈으로는 예수님을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아야만 실제 세계에서 이탈하여 믿음의 세계로 진입해 들어갈 수 있습니다.
믿음의 세계로 진입해 들어가면 실제 세계에 사는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실제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육체를 입은 상태에서 만나는 세상 것 중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신의 자리에 놓고 마음으로 봅니다. 그 마음에서 보는 것을 실제로 가지려고 이 세상의 신들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다말의 경우 여호와 하나님이 그 여인을 선택하십니다. 이로부터 다말의 마음에서도 공식이 바뀌게 됩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을 마음으로 봅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진짜로 만나고 가지고 관계하는 믿음의 세계로 진입해 들어가기 위해서 눈으로 보았던 예수님을 증언 속에서 바라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실제 세계를 이탈해서 믿음의 세계로 진입해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는 육체를 입은 사람들이 사는 지구라는 실제 세계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몸을 입은 사람들이 사는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세계에서 풍요와 다산 대신 내 마음속 신의 자리에 오시게 되는 여호와 하나님은 진정한 좋음이 되십니다. 그렇기에 다말은 이 역겨운 패륜적 행위를 감행하고 불에 타 죽을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면서라도 하나님을 붙잡고 싶어 했습니다. 본문은 이러한 하나님의 좋음이 어떤 것인지를 다말의 행동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시 한번 각인시키고 깨닫게 해줍니다.
예수님은 육체를 입고 오셨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다말이 예수님의 계보에 등재되는 베레스를 낳았다는 사실은 우리 또한 반드시 예수님을 보아야만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 살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다말의 사건은 복음입니다.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을 가지며,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을 좋아하며, 그 좋아하는 하나님을 실제로 가지고 관계하려면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복음 사건입니다.
마음으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며 눈으로는 육체를 입고 세상에 오셨던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다말의 공식입니다. 다말은 화형장에서 유다의 아이를 가졌음을 드러냅니다. 이에 모든 것을 깨달은 유다는 “그는 나보다 옳도다”라고 말합니다. 다말이 유다보다 옳다는 이야기는 화형 당해야 할 자는 자신이라는 고백입니다. 유다의 고백까지 다말 사건에 보태지고 있습니다. 실제 세계에서 육체를 입은 자로 살고 있는 나는 불에 타 죽어야 마땅한 자라는 유다의 의식을 가져야 됩니다. 마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보고 육체를 입고 계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을 눈으로 보면서 실제 세계를 이탈하여 믿음 세계로 진입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불가능한 이야기가 우리의 일상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다말의 자리에 서서 날마다 실제계를 이탈하여 믿음계로 진입하여 머물며 살아가는 진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