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 이어 아메리카를 열강의 대륙으로 바꿔놓은 감자는, 이들의 무역선에 실려 아시아 연안국에 전해졌지만, 주식 자리를 넘보지는 못했다. 곡류를 주식으로 하는 동양인에게 탄수화물 덩이인 감자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해서 몇몇 요리의 부재료나 간식거리로 주로 쓰였다. 그러나 어둡고 서늘한 곳에 보관하면 해를 거뜬히 넘기는 뛰어난 저장성 덕에, 감자는 기근을 대비한 구휼 식량으로 곳간 한편을 굳게 지켰다.
감자가 한반도에 전해진 것은 조선 말 순조 때 만주 간도에서라고 알려졌지만 정확한 기록은 없다. 중국에서 뱃길로 들여왔을 가능성이 더 크다. 어쨌든 감자는 일제의 수탈 곡물 대용으로 보급되면서 서민에게 긴요한 양식이 됐고, 기근에는 구황식품으로 더할 나위 없었다. 그런데도 한국인에게 감자는 고맙고 은혜롭기보다 슬프고 억척스러운 식물로 여겨진다. 그 연유는 아무래도 김동리 소설 '감자'에서 비롯한 듯하다. 감자밭을 무대로 벌어지는 주인공 복녀의 기구한 인생과 죽음이 너무 절절한 나머지 한국인의 가슴에 한으로 맺혔기 때문인 성싶다.
오늘날 감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옛 영화를 잃었다. 얄궂게도, 비만 식품 순위에 감자가 빠지지 않기 때문이다. 감자는 유럽인의 주식 자리에서 밀려났고, 빵 없이는 살아도 감자 없이는 못 산다는 독일사람조차 감자를 점점 멀리한다. 그런데도 감자농업이 몰락은커녕 흥성한 것은 가공식품 원료인 전분의 수요 증가와 함께 세계인이 즐기는 햄버거의 감자튀김 덕분이다. 하지만 햄버거가 비만 식품으로 찍힌 탓에 감자튀김도 운명을 같이할 처지이다.
감자만큼 의식동원(醫食同源)에 적합한 식물도 없다. 감자의 효험을 한둘이 아니다. 감자의 생즙은 염증을 가라앉히고 화상을 치유하는데 뛰어나다. 감자의 찬 성질과 갈면 진득한 성분이 열을 낮추며 감염을 막고 새 살을 돋게 돕는다. 통풍환자가 감자를 매끼 먹으면 치유에 도움이 된다. 감자가 요산 분비를 늘려 통풍의 원인물질인 동물 단백질 생성을 억제하기 때문이다. 감자는 고혈압 환자에게도 좋은 음식이다. 감자에 풍부한 칼륨이 체내 나트륨 배출을 촉진해 혈압을 낮추고 소변량을 늘려 부기를 뺀다. 감자의 사포닌은 기침 감기를 완화할 뿐만 아니라 콜레스테롤을 녹여 피를 맑게 한다. 또한, 수용성 섬유인 펙틴은 혈중 콜레스테롤의 수치를 낮춘다고 한다. 감자의 생즙에 함유한 알기닌은 위장 점막을 강화하여 위염·위궤양·십이지장궤양의 치료에 좋다. 단, 생즙을 먹을 때 독성 솔라닌이 있는 씨눈이나 푸른빛 부분을 피해야 한다.
요즘 극장가 화제작 '마션'의 주인공은 화성에서 살아남기 위해 감자를 심는다. 우주시대 감자가 또다시 인류 문명사를 바꿀지 궁금해진다. 다음 회(10월 30일 자)는 '식물의 경이로운 생존전략, 단풍과 겨울나기' 이야기이다.
박중환/'식물의 인문학'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