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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원고를 정리하다가 나는 몇번씩이나 글쓰기를 멈췄다. 태준식(31) 감독의 활동 궤적을 이해하느라고 그가 만든 작품들을 보다가 눈물이 맺히고 목이 잠겨 한동안 글을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미리 밝히지만, 내가 아무리 이 글을 잘 정리한다 해도 태준식 감독이 만든 작품의 단 몇 장면을 보는 것보다 그를 더 잘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감독은 작품으로 말한다”는 말의 뜻을 이 글을 쓰면서 나는 몇번이나 실감했다. 그가 만든 작품들의 몇분의 일 만큼도 그를 설명할 수 없으면서도 알량한 나의 ‘글’로서 그를 설명할 수밖에 없다는 낭패감이 그의 작품을 보는 동안 내내 밀려왔다.
아주 잘 만든 ‘트레일러’
간간이 이름을 들어왔던 태준식 감독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그가 ‘인디다큐페스티벌2001’(SIDOF2001)영화제의 ‘트레일러’(trailer)를 제작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이다. 영화에 대해 거의 문외한이라는 배짱으로 감히 말하건대 영화제의 ‘트레일러’는 그 의미가 보통의 ‘트레일러’(예고편)와는 사뭇 다르다. 영화제 모든 영화의 앞머리에서 ‘트레일러’가 상영되는데 글자 그대로 거대한 화물트럭의 앞머리처럼 영화제 전체를 ‘이끌어가는’ 역할을 한다. 영화제에 참여한 관객은 자신이 본 영화의 편수만큼 똑같은 ‘트레일러’를 여러 번 봐야 한다. 요즘 영화 관객의 수준이 얼마나 높은가. 어줍게 만들어진 ‘트레일러’에 대해서는 관객이 야유를 퍼붓기도 한다. 그러니 일단 ‘트레일러’를 제작하려면 실력이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영화제 전체의 성격을 꿰뚫고 있어야 한다. 더욱이 태준식 감독이 만들었던 트레일러는 사람들로부터 “아주 잘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나처럼 좁은 노동운동 바닥에서만 적당히 인정받는 사람이 아니었다.
태준식 감독이 가진 공식 직함은 ‘노동자뉴스제작단’(대표 김명준)의 제작부장이다. ‘노동자뉴스제작단’을 줄여 부르는 ‘노뉴단’은 이제 사전에 올라야 할 만큼 우리나라 노동자들에게 익숙한 용어가 되었다. 내가 “노동자 영상패들 중에서는 ‘노뉴단’이 원조가 아니냐?”고 물었더니 그는 “원조라고까지 할 수는 없고, 다만 살아남은 팀 가운데 제일 긴 역사를 갖고 있다”고 정확하게 설명했다.
‘노뉴단’의 작품들은 거의 대부분 ‘1인 제작 시스템’으로 만들어진다. 태준식 감독이 만든 다큐멘터리에는 보통 영화처럼 마지막 장면에서 올라오는 ‘엔딩 크레디트’나 ‘스탭 롤’이 없다. 하기는 연출 태준식·촬영 태준식·진행 태준식·편집 태준식·음악 태준식·대본 태준식, 이렇게 적을 수도 없는 노릇일 것이다.
96년 말과 97년 초를 뜨겁게 달궜던 총파업투쟁의 내용을 재빨리 담아낸 <총파업투쟁 속보 2호>(1997)를 시작으로, 폭력에 대한 공포를 이기고 동료들에 대한 애정으로 뭉쳤던 청구성심병원 노동조합 승리의 기록 <꼭 한 걸음씩>(1999), 현대중기산업 노동자들의 450일간에 걸친 고용보장투쟁을 담은 <인간의 시간>(2000),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눈물겨운 삶과 투쟁을 조명한 <노동자는 노동자다>(2001), 전태일 열사와 (주)마마 노동자들의 투쟁을 함께 엮은 <전태일 30주기 옴니버스>의 ‘마마 노동자들’(2001). 그가 지금까지 만들어낸 작품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 땅 노동자들의 현실과 소망이 교차하면서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눈물이 솟구친다. 극영화에만 익숙해 있던 사람들에게 그야말로 ‘논픽션의 위력’이 무엇인지 단번에 깨우쳐준다.
<인간의 시간>, 500일이 넘는 대장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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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진학한 뒤, 당연히 영화동아리에 들어갔고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그는 “그 사람들과의 만남이 지금의 삶을 결정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고 했다. 내가 만났던 다른 사람들처럼 태준식 감독 역시 자신의 일이 특별히 고생스러운 일이라거나 많은 희생과 수고를 감수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어떻게 이쪽 분야의 일을 하게 되었느냐?”는 내 질문을 그는 오히려 아주 황송해했다. 자신은 다른 사람들처럼 ‘엄혹한 세월’을 거쳐온 것도 아니며, 학생운동의 경험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운동의 중심에 섰던 것도 아니며, 지금 하는 일을 시작한 이래 “밥 먹고, 차 타고 다니면서 작품을 만들 수 있었고, 아무도 옆에서 작품에 대해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잔소리를 하지도 않았으니 ‘너무 고생스러운 이 일을 포기해야 하나’ 하는 고민을 해본 적도 없었다”고 했다.
“그렇지만 앞으로 계속 이 일을 해서는 큰돈을 벌 전망은 없지 않느냐? 결혼도 했고 곧 아이도 생길 텐데 앞으로 남은 평생 지금 이 정도의 경제적 수준밖에 유지할 수 없을 것에 대해 걱정해보지 않았느냐?”고 짓궂게 물고늘어졌더니 그는 “그런 생각은 하기 싫어서 안 했다”고 간단히 답했다. 그 말 뒤에는 아마도 “생각하면 마음이 흔들릴까봐…”라는 속셈이 숨어 있을 것이다.
“같이 영화에 미쳐 살았던 친구들 중에 충무로에서 프로덕션을 하거나 유학 갔다 와서 ‘입봉’할 날만 기다리고 있는 친구들보다 내가 별반 더 고생하는 것도 없어요. 나는 오히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가고 싶은 곳에 가고, 만들고 싶은 작품을 만들고 있으니 그 친구들보다 훨씬 더 행복하다고 할 수 있지요.” 그는 마치 행복해서 미안하다는 표정이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인간의 시간>은 촬영기간만 450일이었고 그뒤 편집 등 마무리 작업까지 합하면 모두 500일이 족히 넘는 대장정이었다. 그렇게 만들어낸 작품이 사람의 마음을 때리는 울림을 갖고 있지 못하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인간의 시간>을 보노라면 노동자 육경원씨가 투쟁 과정에서 악화된 암으로 숨진 뒤, 동료들이 그를 떠나보내는 영결식·노제·장례장면이 차례로 나오는데, 화면이 이상할 정도로 심하게 떨리는 대목이 있다. 촬영을 나갈 때마다 “결코 울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실제로 거의 울지 않는 태준식 감독이지만 그날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쳐오는 울음을 참느라고 온몸을 떨었기 때문이다. 그는 특별히 그때 카메라를 잡은 손이 떨렸던 이유를 “세상을 오래 살아온 어른들이 그 내공에서 우러나오는 분노의 표출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작품을 보는 이 역시 그 장면에서 울음을 참을 수 없다.
노뉴단과 노동자들의 은밀한 커넥션?
그는 작업 내용을 설명하면서 “중요한 ‘택’이 걸리면…”이라거나 “타격을 나간다”는 표현들을 사용했다. 알 만한 사람들끼리는 다 아는 표현이다. 노동자들은 다른 곳엔 절대 비밀로 하는 투쟁계획을 그가 있는 ‘노뉴단’에는 은밀하게 알린다. 한국통신계약직 노동자들이 목동전화국을 점거했을 때에도 ‘노뉴단’의 카메라는 어김없이 그곳에 있었다. 얼마 전 세명의 노동자가 국회를 점거하겠다고 시도했을 때에도 태준식 감독은 그 계획을 미리 알고 있었다. 내가 “그 투쟁이 사실은 꽤 오래 전에 세워진 계획이었는데, 미국 뉴욕 테러사건 때문에 국민감정을 고려해 뒤로 미뤄졌었다는 것도 알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태준식 감독은 빙긋이 웃으며 “예”라고 짧게 답했다.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들 중에서 ‘저 사람처럼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존경한다는 표현을 사용해도 되느냐?”고 조심스럽게 되물은 뒤에 같이 일하는 명준 형, 인정 누나, 지영 누나를 모두 존경한다고 했다. 존경하는 사람들과 함께 일할 수 있으니 그는 참 행복한 사람이다. 한국독립영화협회 대표인 김동원 감독도 그가 존경하는 사람들 중의 하나다. <상계동 올림픽> 그 작품 때문에 그가 “다큐멘터리를 해야 되겠다”고 마음먹을 수 있었다고 했다. 그가 ‘동원 형’을 특별히 존경하는 이유는 “그의 삶이 바로 (그의 영화에서 보여주는 사람들과 똑같은) 그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김동원 형의 ‘뛰어난 사상’이 아니라 ‘살아가는 모습’ 때문에 감동을 받는다고 했다. 그렇다. 사람은 ‘사상’이 아니라 ‘삶’으로 평가받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어떤 ‘삶’으로 평가받을 것인가. 그의 카메라 앞에 당당할 수 있는 ‘삶’은 어떤 것인가.
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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