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방학
기나 긴 여름방학의 영사기를 되돌리고 싶다. 아무래도 여름방학은 초등학교 때에 기억이 훨씬 많다. 저학년일 때보다도 4.5.6고학년일 때가 더욱 그런 거 같다. 여름방학 하면 일단 공부보다도 마음껏 놀았던 것이 먼저 떠오른다. 한 반의 아이들은 지금보다도 훨씬 많아 교육환경이야 좋지 않았지만 그땐 모두 그랬다. 그렇다고 지금 도시의 학생들처럼 태권도다 음악이다 미술학원이다 하여 부모에 성화나 내 자식 앞날에 잘 되기를 바라고 일등자녀로 만들려고 했던 경쟁이 치열했던 시절도 아니었다. 거의 그랬던 거 같다. 그렇다고 반에서 우등하려고 열심히 공부했던 기억은 결코 아니고 내 또래의 아이들도 물론 모두 그랬었기 때문이다. 일부 군인가족 아이들은 별도로 과외를 받았는지는 몰라도. 무슨 약속을 하지 않아도 집 밖에만 나가면 위아래 옆 집 할 것 없이 한 가정에 자녀들이 보통 형벌 누나뻘을 비롯해 동생뻘 되는 아이들까지 합하면 네댓 명은 되었기에 어떤 놀이를 하던 자연스럽게 그룹이 되어 있었다.
장소도 넓은 집 앞 마당은 물론이고 가을걷이가 끝나면 드넓고 울퉁불퉁한 논바닥에서 제멋대로 튕기는 공을 잡으려고 하는 축구는 재미있었다. 내가 사는 만가대라는 마을은 다른 동네보다도 작은 마을이다. 초가집 이십 여 호 정도의 작은 마을이었지만 아이들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아마 사오십 명 이상은 되었다. 또한 자치기와 말 타기 땅따먹기도 많이 하며 놀았으며 특히 신문지를 비롯해 종이로 접은 두꺼운 딱지는 물론이고 돈 주고 산 총천연색의 딱지 따먹기 놀이는 절정이었다. 여자 아이들은 고무줄과 줄넘기 등을 많이 하며 놀았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노는 시간도 하루 종일이었다. 저녁 해 질 무렵까지 어머니가 밥상 차려 놓고 응환아! 응환아! 하고 큰 소리로 부를 때 까지 어둠이 깔릴 때까지 말이다. 또 기억나는 것은 손바닥만 하고 납작한 돌로 십여 미터 되는 거리에 세워 놓은 돌을 뒤에 아이들이 던져서 밀어 넘어뜨리는 놀이도 꽤 많이 했다. 비 오는 날이면 집안에서 하는 놀이는 공깃돌 놀이다, 지금은 문방구에서 파는 플라스틱 재료로 만든 색색의 돌이지만 그때는 개천에서 주어 온돌 이었다. 잘 생긴 것을 주워다 깨끗이 닦아서 놀이를 했다. 무게도 적당했기에 심심하지 않게 논 기억이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는 여럿이 놀 수 있는 대표적인 놀이었다. 방학때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장마철이 왔다고 집안에만 있지 않았다. 어릴 적 장마철은 매우 길었던 기억이다. 아마 비가 많이 내리는 날은 어쩔수 없이 무료하게 지냈던 날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비가 멈추면 산에서 내려오는 실개천에 물도 많이 흐른다. 남동생 셋과 동네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모여 실개천 가장자리에 수초를 밟고 내려가면 수초 안에 물고기들이 밑에서 기다리던 동생 어구로 물고기가 들어가 잡히기 때문이다. 잡은 물고기에 배를 갈라 내장을 버리고 햇빛에 말려 구워 먹기도 했다. 우리 집 뒤에는 주라이산 이 있는데 매우 야트막한 산이다. 집 뒤에서부터 큰 개울가(지금의 영평천)로 이어지는 산 중턱까지 이리저리 오고 가고 산등성이를 오르락내리락 하며 작은 종댕이를 옆구리에 찬 채로 멍석딸기를 비롯해 산딸기 오디 등도 많이 채취해 먹은 기억도 아름답고 좋은 추억이었다. 특히 오디는 특유의 보라색이 우리들의 입술을 거무튀튀하게 물들였다. 집 앞에 있던 두 그루의 앵두나무의 많이 맺은 앵두는 따는 재미만으로도 잊히지 않고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방학숙제는 개학이 다가올 무렵 몰아서 대충 했다. 그런데 일기쓰기는 정말 하기 싫었다. 왜냐하면 아침에 일어나 아침밥 먹고 산에가서 딸기따고 하루 종일 실컷 노는 것만 했으니까. 지금이야 추억이지만 일기쓰는 자체는 하라고 하는 숙제이니까.
지금이야 형제들이 모두 객지에 나와 나서 자란 고향에 대한 연고는 없지만, 지금 내가 졸업한 초등학교는 어느 지방학교와 마찬가지로 아이들이 매우 적다. 농어촌 학생들이 부족해 교육경영합리화로 인하여 폐교도 많이 하는 추세다. 전교생은 6학년까지 해봐야 일백 명이 넘을까 말까하는 매우 적은 규모다. 교사와 근무하는 일반직원들 모두 해야 십여 명 정도이다. 어쩌면 내가 어릴 적 학교 다닐 때보다도 교육환경은 좋아졌다고 하지만, 정서적인 면과 그런 추억거리를 일부러 하지 않는한 도시 아이들처럼 부모가 시키는 데로만 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어쩌면 채우며 남기지 못하는 부족함이라고 할까? 넉넉하지는 못했고 방학때가 되면 할머니 집에 내려오는 개끗하고 하얀 도시아이들처럼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실컷 자연을 친구삼아 원 없이 놀았던 어릴 적에 모습이 아무것도 몰랐던 유년기였지만, 지금 존재함의 귀한 자양분이었다.
이바자니치 |쓸쓸한 강
첫댓글 하루속히 메르스가 사라지기를 마음입니다.
그렇지만 오늘도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