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일정씨 포은공파의 소파중에서 종중 활동이 가장 활성화 되어 있다는 주부공파 종친회의 파조 (派祖)이신 주부공 휘(諱) 충전(忠傳)의 자(字)는선술(善述)이시고, 포은 선조의 8세손이시며 조선 시대 명종(明宗) 22년 1567년에 부친이신 사과공림(霖)선조의 둘째 아들로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 나시었다. 현존하는 조선시대 사마방목(司馬榜目)의 기록을 보면 공은 1606년(선조39년)에 진사시험에 2등 으로 합격하셨고 관직에 출사하여 인조(仁祖) 때 호조 광흥창(廣興倉) 주부(主簿)를 지내셨다. 묘소는 7대조이신 포은묘소 우측 능선 5대조 설곡(雪谷)묘소 바로위에 있다. 공의 행적을 살펴 보면 종묘 직장으로 계실 때인 1624년 인조 2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 인조(仁祖)가 공주로 피난 갈 때 공께서는 어가를 호위하셨는데 평택의 진위현 에 이르러 가마를 메고 가던 가마꾼들이 피로와 추위에 지쳐 달아나자 공께서는 직접 가마를 메고 피난지인 공주(公州)까지 가셨다는 기록이 있으 며, 경기도 관찰사였던 월사 이정구가 1616년에쓴 충렬서원 강당기를 살펴보면 월사가 포은선조 묘소에 참배 갔을 때, 포은 선조와 정암 조광조의 위패를 봉안하고 향사(享祀)를 지내오던 사우(祠 宇)인 죽전서원이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져 우리나라 오천년 충절의 대명사이며 동방성리학자의 표상인 포은선조를 배향(配享)할 수 없음을 후손으로서 안타깝게 생각하여 6촌지간인 현감 종선 (抱川公) 선조와 함께 관찰사인 월사에게 서원건립에 필요한 도움을 요청하였다는 기 록을 보면
충렬서원(忠烈書院)의 건립이 주부공으로 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며, 아울러
우리 포은공파 문중종사(門中宗事)에도 깊게 관여 하셨던 것같다.
1. 세거지(世居地)와 후손 주부공파 세거지(世居地)는 포은선조 묘 역 인근인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청덕동 이며 현재까지
후손들이 400여 년 동안 뿌리를 내려 생활하고 있다.
이곳에는 숙인 남양홍씨(南陽洪氏) 묘소를 비롯하여 전, 답, 임야, 세거지비(世居地碑), 그리고 종친회 의 상징인 청덕재(淸德齋)가 있으며, 또한 주부공 후손들의 묘소, 종인들이 사후(死後) 영면(永眠)할 수 있는 영일정씨주부공파묘원이 조성되어 있다.
주부공파 묘원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이곳에 문중의 종토(宗土)가 100만평 이상이 있었다고 한다. 공(公)의 후손으로 배(配)인 숙인(淑人) 남양홍씨로 부터 4형제의 아드님을 두셨으며 그 후손들 이 번성하여 현재 1,000여명이 주부공의 유덕(遺德)에 감사하며 생활하고 있다.
시제(時祭)는 음력10월 초사흘 주부공을 비롯하여 25대 채(采)자 항렬까지 80명을 청덕재(淸德齋)에서
2. 주부공파의 활동 수백 년 동안 성문화된 규약 없이 종중이 운영되어 오다가 일부종토가 매각됨을 계기로 1984년 계축보를 근거로 주부공파종친회를 결성하여 파조이신 주부공을 숭상하고 종친간의 화목번영과 후 진육성을 도모하며 사회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하는 18조에 이르는 정관(定款)을 중심으로 이사회 규정, 운영위원회 규정등 10여 개의 규정을 두어종친회의 근간을 삼았다.
경기도 광명시 철산동에 대지 400평, 건평 1,500평의 빌딩을 건립하여 수익(임대)사업의 주체인 청덕
실업주식회사를 설립한 후 지난 20여 년 동안 위선사업(爲先事業), 경로위로사업(敬老慰勞事業),장학
사업(奬學事業), 제례봉행비(祭禮奉行費)보조사업, 경조사 보조사업, 그리고 2003년 인터넷에 홈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