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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 자료는 이사무의 Soft한 해군사(http://home.paran.com/grim1980/)에서 퍼온자료임을 밝힙니다.
1. 웨스트 버지니아의 탄생
1917년부터 기공되기 시작한 콜로라도급 전함들은 그때까지의 미국전함들이 탑재했던 14인치 45구경 포를 뛰어넘는 16인치 주포를 갖고 있었고 1930년대 말 이후 노스캐롤라이나 이하의 신형전함들이 등장할 때까지 미 해군의 마스코트와도 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설계적으로는 16인치 주포를 탑재한 것과 약간 더 두꺼운 장갑을 보유한 것 외에는 이전의 테네시급에 비해 큰 차이가 없었고, 보다 넓은 의미에서는 1912년의 네바다급 이래로 계속돼온 “표준전함”(타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속이지만 유틀란트 이전부터 원거리 교전을 상정하여 주포의 앙각 증대와 집중방어 개념을 도입한) 계획의 정점에 서있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진수되는 웨스트 버지니아]
그런 콜로라도급의 4번함이었던 웨스트 버지니아는 1920년에 기공되었으며 진수일은 1921년 11월이었습니다. 그녀의 진수 직후 개최된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에서는 한때 이미 건조가 완료된 메릴랜드를 제외하고 나머지 동급함 3척을 모두 폐함처분 하기로 예정되기도 했으나, 일본측의 무쓰가 살아남는 조건으로 웨스트 버지니아와 콜로라도 역시 살아남을 수 있었죠.(3번함 워싱턴은 결국 폐함 처분됨) 1923년 12월 1일, 드디어 웨스트 버지니아는 완공되어 정식으로 미 해군에 편입되었고 이후 수 개월간 뉴욕 해군공창 근처 해역에서 처녀항해와 각종 테스트, 오버홀 등을 받으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이 그리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취역 직후 행해진 테스트에서 그녀의 조타기에 문제가 있음이 밝혀졌고 복귀 후 해군공창에서 오버홀이 행해졌으나 그 후에도 크고 작은 설비 문제가 종종 발생하곤 했죠. 1924년 6월 16일 오전 10시경, 웨스트 버지니아가 대서양에서 훈련을 마치고 연안 수로로 진입하던 때의 일이었습니다. 조타수로부터 러더 지시기에 반응이 없다는 보고가 들어왔고, 그 즉시 조타기 모터실로 비상경보를 보냈지만 이 역시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함장은 재빨리 모든 기관을 정지하라고 명령했지만 기관실과의 함내전화 역시 불통이었죠. 훗날의 조사에 따르면 이 당시 기관실과 조타기 모터실에의 통신선로에는 전원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할 수없이 함장은 보다 원시적인 통신수단-전성관과 전령(!)-을 통해 기관실에 “좌현 기관 전진 전속, 우현 기관 정지”를 명령했지만, 이런 원시적 통신수단이 기관실에 닿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서 배는 그대로 수로 가장자리의 얕은 뻘에 좌초하고 말았습니다. 다행히 바닥이 부드러운 진흙으로 되어 있었기에 함체에 그다지 큰 피해는 없었지만 최신예 함이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고를 냈다는 것은 상당히 부끄러운 일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행해진 조사에서는 앞서 언급한 함내 시설의 전원 작동 문제 외에도 함장과 항해사가 수로의 넓이를 실제보다 더 크게 상정하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고, 군법회의를 통해 이들 둘이 직위 해제 됨으로써 웨스트 버지니아는 정식으로 함대에 편입되기도 전에 함장이 바뀌는 초유의 사태를 맞이하게 되었죠.
[사격 훈련 및 함대 기동훈련중]
다행스럽게도 저 사건 이후 웨스트 버지니아의 함생에 큰 문제는 없었고 오히려 그녀는 각종 사격 훈련 및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냄으로써 능력있는 장교들의 승진 코스로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1926년의 육․해군 합동 훈련에서는 하와이 방위군의 일원으로 참가했고 1927년에는 하와이-카리브해나 알래스카-파나마 등의 코스로 순항훈련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한편 1930년대에 이르면 기술의 발달과 전장 환경의 변화로 인해 전함들의 근대화 개장이 시작되는데, 웨스트 버지니아 역시 이 시기에 FCS를 신형으로 개량하고 고각포를 기존의 3인치에서 신형인 5인치 25구경 포로 교체하게 됩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웨스트 버지니아를 포함한 콜로라도급과 테네시급 전함들은(통칭 Big 5) 개장 우선순위나 개장수위에서 다른 전함들에 비해 뒤쳐진 편이었죠. 가장 후기에 건조된 이들은 상대적으로 개장의 필요성이 적었던데다 당시 전함 세력의 중추였기 때문에 오랫동안 전열에서 빼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덕분에 다른 전함들이 모두 삼각장 형태의 마스트로 개장된 후에도 이들 Big 5들은 구식의 새장형 마스트를 그대로 유지하게 되었죠.
[1940년의 순항훈련 중에 행해진 적도제]
1930년대 후반부터 전 세계적으로 무력분쟁이 잦아지고 전운이 깊어짐에 따라 미국 역시 서서히 전쟁에 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미 해군으로서는 태평양 방면의 최대 가상적국인 일본 해군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고 이후 태평양 함대를 진주만으로 전진배치 한다거나 함선 세력의 중심을 태평양으로 전환한다거나 하는 조치들을 취했습니다. 웨스트 버지니아 역시 이에 편승하여 1939년부터 진주만을 모항으로 하여 인근 수역에서 훈련-정비-대기의 사이클을 반복하게 되었죠. 이때 해상에서의 훈련을 마치고 진주만에 복귀한 후에 전함들은 으레 포드섬 남동쪽 연안의 부표에 계류된 채로 대기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1941년 11월 말, 훈련을 마친 전함들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포드섬 부근에 정박하여 일상을 보내고 있었죠.
2. 진주만 공습
[진주만 공습 당시 웨스트 버지니아의 위치]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웨스트 버지니아는 포드섬 남안의 “전함열” 2번째 바깥쪽에 계류되어 있었습니다. 수심은 그녀의 용골 밑으로 약 13m 정도였고 그녀의 안쪽에는 전함 테네시가 위치해 있었죠. 승조원들은 여느 일요일과 마찬가지로 6시 30분에 기상하여 아침을 먹은 후 제각기 이발을 하거나 세탁을 하거나 침상에서 잡지를 읽는 등 한가로운 휴일 일과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한편, 갑판과 일등수병 로버트 벤튼은 식사후 곧장 마스트로 올라가 동료들과 함께 장비를 점검하고 사격 지휘소 내부를 청소하는 등의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전략) 그때 누군가가 갑자기 우현쪽을 보라고 외쳤다. 고개를 돌렸을 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포드 비행장에 급강하 폭격을 가하고 있는 일군의 항공기들이었다. 전함들이 포드섬 부근에 계류되어 있었기 때문에 마스트 꼭대기에 있었던 우리들은 공습의 첫 국면을 아주 잘 관찰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공습을 받고 있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보고있던 것의 충격이 잠시동안 내 사고를 정지시킨 것만 같았다.
그 다음, 뇌격기가 아주 낮게 수면 가까이 날아와서 어뢰를 떨궜고 기뢰 부설함 오글라라를 날려버렸다. 그때까지도 나와 동료들은 그것이 미군기일꺼라고 생각했다. 사실 내가 있던 위치에서는 그것이 그렇게 보이기도 하긴 했으니까. 하지만 뇌격을 마친 그 항공기가 우리 머리 위를 지나쳐 갔을 때 우리는 그것의 날개 밑에 있는 붉은 원을 아주 생생히 알아볼 수 있었다. 누군가가 “일본놈들이다”라고 외쳤고 그제서야 비로소 나는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후략)“
이처럼 대다수의 승조원들에게 “일본이 진주만에 공습을 가한다는 것”은 현실과는 먼 낯선 관념이었고 그게 실제로 눈앞에 일어나고 있다는걸 믿는 것 또한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때문에 공습 직후 웨스트 버지니아, 아니 진주만에 있던 함선 전체의 대응은 침착하지 못했고 지휘체계도 잡혀있지 못했으며, 한동안은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 수병 자신들 역시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감이 잡히지 않는 실정이었습니다.
[공습해오는 일본의 뇌격기 (사진은 영화 「도라도라도라」에서]
함 주변에서 일본기들이 어지럽게 날아다니고 동료함들에서 폭발이 일어나고 있는데도 웨스트 버지니아의 좌현에 최초의 어뢰가 명중할 때까지 비상경보는 발령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비상경보가 발령된 후에도 여전히 일부 승조원들은 쇼크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그저 안절부절할 뿐이었지만요.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하부의 승조원들의 경우 이런 경향이 더욱 심했습니다. 함의 군악대원이었던 러셀 티피츠는 아침 식사후 자기 침상에 누워서 「Mountaineer」라는 잡지를 읽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비상경보가 울리자 그는 평소에 하던 화재진화/구조 훈련이 시작됐다고 생각하여 (일요일에 왜 갑자기 예정에도 없던 훈련을 하는지는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자기의 담당구역인 의무실로 이동하고는, 거기서 다시금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잡지를 읽기 시작했죠.
[반격에 활약한 대표적 인물인 도리스 밀러]
물론 쇼크에서 빨리 벗어날 수 있었던 일부 승조원들은 기총 등을 사용하여 반격을 시도했으나 소구경 화기를 제외한 고각포나 기관포 등은 포좌에 탄약이 비치되어 있지 않거나 운용에 필요한 최소한의 승조원들이 모이지 않아 사격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일본의 뇌격기들은 계속해서 한발, 두발씩 어뢰를 발사하였고 웨스트 버지니아는 좌현에 총 5~7발의 어뢰를 맞아 좌측으로 서서히 기울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냥 내버려두면 이미 다수의 어뢰를 맞고 전복돼버린 오클라호마와 같은 운명을 맞이할 판이었으나, 천만 다행으로 함교에 남아있던 중위 1명이 재빨리 역침수를 명령했고 또 함 내부의 승조원들이 이 조치에 따라 적절히 주수를 실시함으로써 웨스트 버지니아는 가까스로 좌현 35도 선에서 더 이상 기울어지는 것을 멈출 수 있었습니다.
[지근탄을 맞는 웨스트 버지니아]
[어뢰와 폭탄을 맞고 화염에 휩싸임]
피해는 어뢰뿐만이 아니었습니다. 2번째 어뢰를 맞은 직후 일본의 99식 함상폭격기에서 투하한 1발의 철갑폭탄이 상갑판을 관통하여 좌현측 포곽에서 폭발했고 이곳에 화재를 일으켰습니다. 두말할 나위없이 불길은 곧장 근처에 쌓여있던 부포탄들에 인화해서 더 큰 폭발을 일으키고 한 갑판 아래의 주방에까지 이르는 큰 균열을 만들었죠. 두 번째 폭탄은 3번 포탑위에 설치돼있던 수상기 캐터펄트와 OS-2U 킹피셔 수상기에 명중했으며 4인치 두께에 달하는 포탑 천정을 관통했으나 다행히 불발하여 큰 피해는 없었습니다. 다만 피격된 수상기에서 흘러나온 가솔린이 인화하여 포탑 내부와 주변에 화재를 내긴 했지만 말이죠.
이제 웨스트 버지니아는 빠른 속도로 가라앉고 있었고 함의 운명은 누가 봐도 침몰을 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승조원들에게 “퇴함” 명령이 내려져야 했으나 그런 명령을 내릴만한 책임자도 존재하지 않았고 (함장은 공습 초기에 사망) 3번째 어뢰가 명중한 후에 함내 전원이 끊긴 탓에 함내 통신 시스템도 작동하지 않았으므로 각 승조원들은 해당 부서 장교의 지시에 따라 개별적으로 탈출하거나 혹은 좀더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정말 딱한 것은 함내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승조원들이었습니다. 피해가 없었던 전방 포탑 등에서는 비상 탈출용 해치를 통해 많은 수의 수병들이 탈출했지만 어뢰 피격 구획 부근에서 응급수리 작업에 전념하던 승조원들 중에서는 미처 탈출하지 못한 사람이 많았던 것이죠. 공습 종결 후 1942년 5월에 함이 인양됐을 때 행해진 조사에서는 70구 가량의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한 격실에는 공습 이후부터 날짜가 표시된 달력도 발견됐는데 발견 당시 최종적으로 표시된 날짜는 12월 23일이었다고 하더군요. 약 2주 가량 밀폐되고 완전히 어두컴컴한 격실 속에서 죽음이 가까워 오는 것을 기다린다는 것은 정말 절망적이고 끔찍한 일이었을테죠.
한편 상갑판 쪽도 나름대로 혼란하긴 마찬가지였습니다. 무턱대고 바다로 뛰어드는 수병이 있는가 하면 밧줄을 걸어서 바로 옆의 전함 테네시로 건너가는 사람도 있었고 그때까지도 포기하지 않고 머리 위를 지나가는 일본기에 기총을 쏘거나 권총을 꺼내 난사하는 장교도 있는 상황이었죠. 한가지 재밌는 것은 바다로 뛰어드는 승조원들은 누구나 할 것없이 우선 신발을 벗어서 갑판 한 구석에 가지런히 정리한 후에야 바다로 뛰어내렸다는 것입니다. 비상 상황에서 저런 일상적인 행동을 보였던 것은 대체 무슨 심리에서 비롯된 것이었을까요? (몸에 배인 규율? 아니면 살고싶다는 무의식의 발로?)
[불타는 웨스트 버지니아]
[구난정에 의한 화재 진압]
어쨌거나 거의 모든 승조원들이 퇴함한 후에도 웨스트 버지니아는 여전히 격렬한 화재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조금 시간이 흐른 후 몇 명의 자원자들이 배로 돌아가 진화 작업을 재개했고 인근에 있던 구난정들까지 가세하여 소화수를 뿜어대기 시작했습니다. 최종적으로 화재가 완전히 진압된 것은 약 30시간이 지난 후인 12월 8일 14시경이었고 그때까지 발생한 웨스트 버지니아의 사망자는 장교 2명과 부사관․수병 32명이었습니다.(함내에 갇힌 70명과 부상자들은 제외) 배 역시 상갑판이 거의 수면에 닿을 정도로 가라앉아 있었으며 인양이 가능할지 여부는 불투명했지만 최소한 몇 개월간 전열에 복귀할 수 없다는 것만은 분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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