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뱅의 신 인식론]
칼뱅의 신 인식론은 칼뱅 신학의 핵심사상이다. 따라서 칼뱅의 신 인식론을 살펴보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다. 아래의 글은 이오갑 교수의 저서 『칼뱅의 신과 세계』에서 신 인식론 부분인데 신 인식론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에 앞선 용어 설명이며, 전문을 게재한다. 조금 딱딱할 수도 있겠지만 신 인식론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작업이다. 용어 설명이 끝난 후에는 저작권 보호를 위해서 전문을 게재하기는 어렵고, 요약 발췌한 글을 올릴 것이다. 글을 조금 더 쉽게 접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책에 있는 각주 표기를 생략한다.
1. 칼뱅의 인식론적 용어들: ‘교리’, ‘지혜’, ‘인식’, ‘지식’
칼뱅은 1536년 『기독교강요』초판을 이렇게 시작한다. “거룩한 교리(doctrina)의 대요는 두 부분으로 이루어지는데, 즉 하나님에 대한 지식(cognitio)과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이다.” 이 명제는 1539년에 약간의 변화를 거치지만, 1559년 라틴어 최종판에 이르기까지 큰 변화 없이 계속 등장하게 된다. “참되고 확실하다고 할 만한 지혜인 우리의 지혜(sapientia)의 모든 대요는 두 부분으로 이루어지는데, 즉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이다.” 이 명제는 라틴어판들에서는 거의 변화가 없는 반면, 프랑스어 최종판은 좀 더 자세하고 친절한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모든 것을 볼 때 참되고 완전한 지혜라고 간주될 만한 우리 지혜의 거의 모든 대요는 두 가지 부분 속에 자리 잡고 있는데, 즉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또한 우리 각자가 자신을 아는 것이다.”
칼뱅의 신 인식론의 화두를 여는 이 본문들은 몇 가지 중요한 인식론적 용어들을 포함하고 있다. 더군다나 칼뱅은 그 용어들의 선택에 있어서 약간의 변화를 주고 있다. 그래서 그것들의 개념을 먼저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먼저, ‘교리’(doctrina)와 ‘지혜’(sapientia)라는 용어이다. 이 두 용어는 사실상 같은 내용을 의미하는 글 속에서 사용되었는데, 칼뱅은 초판에서는 ‘교리’를 쓴 반면, 2판부터는 그것을 ‘지혜’로 대체했다. 이는 칼뱅이 2판에서는 주제를 좀 더 전문적으로 끌고 가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해석된다. '교리'에 비해서 '지혜'는 인식론적으로 좀 더 분명하고 기술적인 용어이기 때문이다.
칼뱅에게 있어서 '교리'는 매우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으며, 따라서 비교적 평이하고 일반적인 용어이다. 더군다나 그것은 다의성을 가지고 있어서 다소 모호한 측면을 가진다. 그 점을 에밀 두메르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그 용어는 그의 글에 자주 등장하고 그의 말에는 더 자주 등장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칼뱅에게서 '교리'는 무엇인가? 그것에 대해 하나의 정의를 구하려는 사람은 곧 그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칼뱅은 교리라는 용어를 모든 확신이나 모든 가르침, 모든 권고, 모든 개념 등을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한다."
그렇다면 칼뱅이 했던 '지혜'는 무엇인가? 장 보아세는 그것을 당시의 세계관과 용례 등을 통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해주었다.
그에 따르면, '지혜'라는 용어는 고대 세계로부터 17세기에 이르기까지, 지식(savoir)이나 철학(philosophie)의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 지혜는 "과학의 일체(unité)로서 … 세계와 인간의 기원과 성격, 그리고 궁극으로서, 하늘에 존재하는 신의 현실로서, 이 세상의 섭리로서, 도시들의 구성으로서, 삶의 영위로서 나타나고 있었고, 지혜자는 한꺼번에 모든 문제들을 풀어 나갔다. …" 그런 의미 속에서, 지혜는 사람들이 대상에 관해서 오래 성찰해온 결과 생겨난 지식들이고 지식들의 총체라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에 관한 지혜는 사람들이 그때까지 경험이나 성찰에 의해 간직해왔던 하나님에 관한 모든 지식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혜는 거기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또한 인식대상에 대한 사고 행위 자체를 뜻하기도 한다. 지혜는 성찰로부터 비롯된 지식만이 아니라, 더 나가서 성찰 자체, 다시 말해서 대상의 인식 그 자체를 의미한다.
장 보아세는 이렇게 말한다. "지혜는 대상을 겨냥한 사고 행위를 … 그리고 인식해야 할 대상의, 그리고 대상에 관한 명료성(clarté)을 향한 욕망에서 비롯되는 사고 그 자체를 성격화한다. … 결국, 인식으로서의 인간의 인식은 인식할 대상의 고유한 명료성에 근거를 두며, 대상을 환하게 알기 위해서 그 명료성을 포착하려는 정신의 가능성에 근거를 둔다."
쉽게 말하면 '지혜'는 지식뿐만 아니라 지식을 얻으려는 사람의 인식 행위 자체로서, 그 안에는 인식의 과정, 대상에 대한 주체의 태도, 이해하고자 하는 열성 같은 것들을 포함한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어 "지혜로운 사람", "지혜자"라고 할 때, 그것은 "많이 알고 있는 사람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알아가고 있는 사람", "알 줄 아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는 미지의 대상 앞에서, 그것을 알고 싶어 하고, 알 줄 알아서 알아내는 사람이다. 사람들이 어떤 문제에 부딪치면 혼자 궁리하다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서 결국은 지혜 있는 사람을 찾아간다. 그러면 지혜자는 답을 가지고 있다가 주는 것이 아니라 곰곰이 생각한 뒤, 결국 그 문제를 현명하게 밝혀준다. 그와 같이 지혜란 단지 지식의 총량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론적으로 ‘열려' 있는 것, 그래서 인식할 줄 알고, 더 분명하게 인식하려고 하며, 그 결과 새로운 지식을 찾아내는 능력과 가능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지혜'라는 용어는 주체 인식의 행위와 과정을 함축함으로써, 인식 그 자체를 규명하고자하는 인식론적 주제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지혜는 곧 "인식"이라고 말해질 수 있다.
칼뱅의 인식론적 용어로서, '인식'(cognitio) 역시 해명을 필요로 한다. 칼뱅은 라틴어판에서 쓴 'cognitio'를 『기독교강요』 프랑스어 최종판에서는 동사 'connaître'를 써서 '아는 행위' 또는 '앎'이라는 뜻을 나타내기도 했다. 이 인식이라는 말은 영어로는 'knowledge'인데, 모두 이해, 인식, 앎, 알기, 지식, 정보 등의 의미를 내포하는 매우 포괄적인 용어이다. 우리말로는 '인식' 또는 '지식'으로 번역된다. 우리말은 인식과 지식, 그 둘 중 하나로 통일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서 지식과 인식은 의미의 차이가 커서, 인식은 주로 인식 행위를 가리키며, 지식은 인식이나 학습의 결과 획득된 지적 축적물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단어를 뉘앙스에 따라서 '인식' 또는 '지식'으로 각기 다르게 해석할 수밖에 없다. 나도 칼뱅의 cognitio/connaissance를 문맥에 따라 더 적절한 것을 찾아 지식 또는 인식으로 바꿔가면서 번역한다.
정리하면, 칼뱅의 신 인식론에서 사용된 주 용어들인 '교리'(doctrinae)와 ‘지혜’(sapientia)는 같은 의미로 쓰인 동의어이지만, 지혜는 좀 더 인식론적 용어에 가깝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지혜'는 '지식'이라는 의미를 갖기도 하지만, 그러나 지식을 얻는 데 필요한 인식 능력과 행위, 과정, 인식 대상에 대한 개방성 등을 포함한 의미로 사용되는 용어이며, 그 점에서 곧 '인식'(cognitio)이라고도 표현된다. '인식'은 인식의 결과 얻어지는 '지식'을 의미하기도 하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 '지식'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그러나 '지식'이든 '인식'이든 모두 원어는 'cognitio'이다.
출처: 이오갑, 『칼뱅의 신과 세계』(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0), pp. 62~65.
첫댓글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쓰던 칼빈이 라틴어로 저술을 하고 그것이 영어로 번역된 뒤에... 한국 신학자의 절대 다수는 영어 번역본을 가지고 칼빈을 연구한 측면이 있다고 봅니다. 그러던 차에 프랑스 신학교에서 프랑스어로 칼빈을 연구한 이오갑 교수님의 용어 설명은 정확성이 높고 우리가 귀담아 들을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글입니다.
네, 잘 알겠습니다.
프랑스어로 신학 연구를 한 분이 한국에 그 숫자가 유독 적은 것 같습니다. 불문학 전공 후 신대원 입학자 조차도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본문에서 다음 부분에 제 눈길이 갑니다: "칼뱅의 cognitio / connaissance를 문맥에 따라 더 적절한 것을 찾아 지식 또는 인식으로 바꿔가면서 번역한다."
라틴어 cognitio의 cog는 영어 recognize의 어원입니다. 프랑스어 connaissance에서 파생한 reconnaissance는 영어에도 수용이 돼서 영어 단어 reconnaissance는 정찰, 수색 정찰대의 뜻을 갖습니다. connaissance가 cognitio보다 더 적극적인 앎의 의미를 갖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옛날에 군복을 입고 휴가 나온 전방 수색대 장병들이 reconnaissance battalion(수색정찰 대대) 휘장을 단 것을 보고 영어 사전을 찾아보던 기억이 납니다.
수색대대에도 connaissance가 들어가 있군요. 풍부한 어학적 상식을 제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오갑 교수님이 프랑스어로 공부를 했기 때문에 문맥을 따라 적절한 해석이 가능한 것 같습니다.
재밌고 풍부한 어학 상식을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저도 알아가는 즐거움이 있네요.
일반학문에서 용어 설명과 이해가 중요한 것 이상으로 교리와 신학에서는 용어와 개념이 더 중요할 것 같아요. 칼빈이 위대한 신학자인 것은 용어를 정확하게 사용해서 그런 것도 같습니다.
깊이 있는 좋은 포스팅을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맞아요. 저도 공감합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몇 번 더 읽어 보면 의미가 더 잘 이해되고 깊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이단은 언어의 미숙함으로 성경과 신학을 해석하고 칼빈 같은 정통은 언어의 정확함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신학을 전개한다고 생각합니다.
코람데오님 본문의 내용이 깊고 장코뱅님의 댓글에서 언어적 지식이 많음을 느낍니다. 좋은 포스팅을 잘 읽었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교리, 지혜, 지식, 인식에 관한 설명에서 특히 지혜, 인식에 대한 설명에서 좋은 내용들이 많이 나온 것 같습니다.
지혜의 확장된 의미 설명에서 알아내고자 하는 열망과 가능성, 개방성의 의미를 가진다는 것에서 크게 와닿았습니다.
그리고 지혜자는 알아가는 사람, 알 줄 아는 사람이라는 설명에서도 성경이 말하는 지혜자를 잘 묘사하는 것 같아서 수긍이 많이 갑니다.
이 포스팅과 관련하여 차 한잔의 여유 같은 글을 하나 올렸습니다.
https://cafe.daum.net/1107/Y657/334
칼빈의 용어를 배울수 있는 내용이군요~
유익하게 읽었습니다. 장 보아세의 설명을 통에 하나님에 대해 배워가는 학생의 자세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아파르님의 자세 말씀에 매우 공감합니다.
우리는 모두 기독교라는 학교의 학생이고 교회라는 학교의 학생입니다. 여기에 예외는 없고요.
혹시라도 (예외가 되어) 배우는 학생의 신분을 망각하거나 버리는 자가 있다면... 그는 교만한 사람이거나 이단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장코뱅
네. 그렇네요. 보아세의 설명이 아주 좋습니다~
@장코뱅 잘 지적하셨습니다. 확실히 이단은 자기한테 와서 배우라고 합니다. 자기가 지시하고 시키는 대로 하면 부자되고 신앙적으로도 성공해서 자기 처럼 될 수 있다고 하면서 자기도 하나님께 몸도 마음도 물질도 다 바쳤더니 이렇게 큰 사람이 되게 해주셨다는 식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아서 하나님께 향하던 사람들의 마음을 자기 쪽으로 쓰윽 바꿔놓습니다.
각자가 성경을 읽고 다양한 방식과 다양한 때에 은혜를 받고 영의 양식을 공급받는 것으로 인도해주어야 하는데, 하나님께로 가는 통로를 열어주고 지켜봐주며 격려하면 되는데 그걸 틀어 막고서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남들도 못들어가게 합니다.
목회자가 교인들은 가난에 허덕이고 있는데 헌금으로 고급 차 타고 다니고 비싼 데 들락거리고 하면 지금 당장은 이단이 아닐지라도 이단 사이비 교주나 유사한 길을 가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