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만남이다(serendipity).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이라는 말이 실감 난다.
삶의 소중한 시간을 놓쳐서는 안 되었기에, 아내와 먼 길을 동행 한다.
새벽에 나선 멀고 먼 발왕산은 생소한 곳이다.
그저 친구 좋아 따라나선 이곳이, 나를 이렇게 감동시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런 것이 세런디피티(serendipity).
3.2km의 긴 케이블카에 놀라고, 그 길이 만큼이나 긴 대기 줄에 놀란다.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 관광 이후 가장 긴 줄이다.
숨 막히는 오랜 기다림은 무언가에 대한 강한 호기심을 유발한다.
과연 무엇이 있기에 이토록 많은 사람이 몰리는가?
에베레스트에 등정한 힐러리경한테 “산을 왜 오르느냐”고 물으니 “산이 거기 있어 오른다.”라고 했다지만,
우리는 왜 오르는지도 모르고 가는 것 같다.
하지만 그곳엔 엄청난 장관이 우릴 기다리고 있다.
시간을 아끼려고 스카이워크에 걸어서 올라갔는데,
많은 인파로 약간 흔들거린다.
먼 산 풍력과 산을 감싼 구름이 조화롭다.
“발왕산엔 오래된 주목이 가장 많다”라는 등반대장 말에 재빨리 내려와,
천년주목숲길로 들어섰다.
가파른 산길에 만들어진 구불구불한 산책로를 따라가니,
‘일주목’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
숨이 콱 막힌다.
아름드리 큰 주목이 왕성한 기운을 내 뿜는다.
이렇게 큰 주목은 처음이다.
기껏해야 지리산 고사목 정도라 생각했던 마음이 부끄럽다.
넋 놓고 멍하니 쳐다봤다.
주목朱木이 “주~~목注目”하라며 고함을 지르니, 정신이 번쩍 든다.
참 마음을 갖으라는 해인사 일주문인데 이곳 일주목은 무슨 뜻일까,
기대감이 더욱 커진다.
얼마나 더 멋진 주목이 나를 놀라게 할까?
아니나 다를까 ‘참선주목’이 천년을 거스르게 만든다.
천년의 강한 기운氣運이 느껴진다.
숨을 천천히 깊게 들이마시고 멈췄다가, 오래도록 내뱉는다.
버스 안에서 누군가 “우린 이제 몸이 아니라 감感으로 살아야 한다.”고 했듯이 느낌이 온다.
이렇듯 좋은 기운 받아서 머리가 맑아지고 마음이 가벼워졌다.
무엇에 홀렸는지 강시 되어 자꾸 숲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러다 시간 내에 못 가는 것 아니요”라는 아내의 두려움은 들리지 않는다.
그렇게 한참을 가니 ‘왕발주목’이 나온다.
밑둥치가 멸종된 ‘곧은상아코끼리’ 발을 보는 듯하다.
어마어마한 힘을 느낀다.
시간이 많이 흐른 것 같다.
하지만 산행대장 부부와 함께하니, 걱정 없다.
마음껏 향유한다.
좀 더 내려가니 행운의 숫자 ‘8자주목’이 나온다.
훈남의 목에 걸린 나비넥타이처럼 나뭇가지가 8자로 꼬였다.
정말 이름을 나무 형태에 따라 잘도 갖다 붙인다.
한참 구경하다 보니 궁금한 점이 하나 생겼다.
과연 ‘서울대 나무’는 어떻게 해서 붙였을까?
빨리 가서 확인하고 싶긴 한데 천년을 꿋꿋하게 살아온 웅장한 주목들의 아름다움에 헤어나지를 못한다.
‘고뇌의 주목’이다.
번뇌의 모습을 보니, 살아온 삶이 반추된다.
산신께 땅에 닿을 듯 머리를 조아리고 있다.
자비로운 모습이다.
아마 그분 덕에 주목들이 오랫동안 잘 자라주었는지 모른다.
‘승리주목’ ‘고해주목’ '팔눈이 주목'도 잘 지어진 이름이다.
이곳의 모든 주목은 자기만의 고유 사명이 있나 보다.
우리의 기운을 보필하면서, 천년을 지켜주고 있다.
드디어 오늘의 하이라이트 ‘어머니왕주목’이다.
산에 있는 모든 주목의 어머니란다.
위대한 모성애를 느낄만하다.
부부가 늙어 막에 졸혼하셨는지,
조금 떨어진 곳에 ‘아버지왕주목’이 있다.
‘어머니왕주목’은 따스한 엄마 품속 같은데,
‘아버지왕주목’은 핫바지 입은 채로 다리를 벌리고 서 있은 모습이다.
아버지의 위엄도 느껴지면서,
어떻게 보니 막걸리 따라주시던 자상함도 보인다.
영험한 주목을 숨 막히도록 따라다니다 보니, 기운도 쇠하고 목도 마르다.
때맞춰 자리한 ‘발왕수가든’주목이 내 뿜은 시원한 물줄기가 네 곳이다.
보아하니 재미있게 꾸몄다.
‘재물.장수.지혜.사랑’중에 당연히 장수의 물을 마신다.
산대장이 “어~ 우리는 사랑이 없는 그네”라며 부인의 물 마심에 투정을 부린다.
‘서울대나무’는 주목이 아니라 참나무가 멋지게 꺾였다.
서울대 정문 형태를 닮았다.
여하튼 이름을 잘 붙여 더욱 친숙하고 다정스러웠다.
한 시간을 채우고 오후 3시 약속한 장소에 왔는데 아무도 없다.
약속을 저버리고 일찍 하산한 것이다.
그 좋은 주목의 기운도 받지 않고 내려갔다.
산이 좋아 온 건지, 거름지고 장에 가듯 온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려갈 일이 걱정이다.
긴 줄 끝에 서서 안절부절하고 있는데 산대장이 빨리 오란다.
안내자에게 자초지종 이야기하며 밀어붙인 덕분에 케이블카를 탈 수 있었다.
역시 산대장은 훌륭했다.
아침, 점심을 제대로 먹지 못한 허기는 무엇인들 맛이 없겠는가!
화기애애한 웃음 속에 황태소고기전골을 맛있게 먹는다.
좋은 문화인지는 몰라도 모이면 건배사다.
서울 멋쟁이들이 한마디씩 하는데 마음에 쏙쏙 들어온다.
“가을 단풍처럼 예쁘게 늙고 싶다”는 말은 멋진 싯귀 되어 뷰티풀하게 들린다.
발왕산發王山은 해발 1,458m로 우리나라에서 12번째 높은 산이다.
시작과 탄생, 성공과 성취의 산이자 왕이 태어날 기가 센 산이다.
예전엔 여덟분의 왕이 탄생할 영험한 산이라 하여 팔왕산八王山이라 했다.
일제 강점기 우리나라 산천초목에 서린 氣를 죽이기 위해 이름 바꾸고, 쇠말뚝 박을 때, 발왕산發旺山으로 바꿨다.
2002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되찾았지만, 발왕산은 ‘발아래 왕’이라는 의미로 바꿨을 것 같아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새벽 6시 물안개 품고 출발해 캄캄한 미로의 밤안개를 헤치고 도착하니 밤 9시다.
오랜만에 떠난 이번 가을 여행은 참 좋았다.
친구들이 있어 좋았고, 아내와 함께라서 더욱 좋았다.
멀리 있는 보고픈 친구와의 만남은 너무 뜻밖이라 감개무량했다.
서울마라톤 풀코스 도전할 때 응원하러 잠실운동장까지 왔던 그 깊은 정情 잊을 수 없다.
그렇게 멋진 친구의 만남이 있었기에 더욱 값진 여행이었다.
누군가 “10년을 더 함께 하자”라고 던진 덕담을 실현하기 위해,
삶의 목표로 삼고 열심히 운동하여야 할 것 같다.
다시 만날 그날까지 모두 모두 건강하세요.
오늘의 멋진 여행 추진 해준 집행부와 함께한 벗님들 너`무 감사합니다.
수고 많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