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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앙받는 죽음과 조롱받는 죽음
- 조선조 문집에 기록된 자살을 보는 두 가지 시각 -
신 승 훈
동양한문학회 第40 輯 2015년 2월
<목 차>
I. 서론
II. 이분법적 시각과 이중적 기준
1. 죽음을 향한 추앙과 찬사
2. 죽음에 보내는 조롱과 저주
III. 결론
국문초록
자살은 평가되었고, 그것을 통해 상징적인 이미지가 된다. 상징적 이미지
는 기억을 통해 문학적으로 재생산되고, 사회의 결속력과 정체성을 유지하
는 힘이 된다. 傳의 방식으로 자살한 사람의 행적을 기록하는 작가의 의도
와 목표는 도덕적으로 완성되어 위대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이상형의 초
상화를 그리려는 것이었다. 이 힘이 이념적으로 결속력이 강한 사회를 만들
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는 체제를 유지시키는 힘으로 환원되었음은 물론이
다.
자살한 자의 행적이 윤리적 適否에 의해 판단되고, 그것을 기준으로 조롱
과 저주의 대상이 되느냐 아니면 추앙과 찬사의 대상이 되느냐가 갈라졌던
것이다. 윤리적·이념적 適否가 조선조 문집에 나타난 자살을 보는 두 가지
* 이 논문은 2014년 경성대학교 학술연구비지원에 의하여 연구되었음.(This research
was supported by Kyungsung University Research Grants in 2014.)
** 경성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 dlsubom@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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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기준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신분과 종교적 이유가 가장 중요
한 기준이 되었던 서양의 중세와는 명확히 다른 점이라 할 수 있다. 신분이
나 종교보다 이념과 윤리에 의한 이분법이 더 우월할 것도 없고, 더 열등할
것도 없다. 무엇에 의한 것이든 이분법적 사고와 시각이 엄존했다는 사실이
중요하고, 그 이분법의 이면에 집단의 결속력과 권력과의 연계를 고려하는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자살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각, 추앙과 찬사 그리고 조롱과 저주는 동양
과 서양이 공통적으로 견지했던 반사경이었다.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사물
을 빛으로 되비추어내는 도구였던 것이다. 이 이분법적 반사경을 통해, 자
살로 죽음에 이른 자가 아니라 살아남아 그들을 기억하고 그들을 자신의
삶에 그 무엇인가로 활용했던 이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면 다행이다.
주제어 : 자살, 죽음, 상징, 이미지, 사회, 결속력, 윤리, 이념, 종교, 신분, 이
분법
I. 서론
“세계 어느 문화권에서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윤리적 관습의 틀에
갇힌 금기 행위였다. 사회는 인간에게 스스로 삶을 끝낼 수 있는 자유로운
권리를 허락하지 않았다.”1) 그 이유가 종교적인 기반에서 나온 것이든, 사
회의 근간을 이룬다고 믿었던 윤리나 도덕의 기준에 의한 것이든 자유롭지
않았다는 점은 공통적이었다. 자살에 대한 자유로운 권리를 허락하지 않는
근저에 자살이란 행위의 끔찍함과 참혹한 정황이 주는 거부감과 사회와 주
변의 남은 사람에게 주는 당혹감과 고통이 용납하기 어려운 일차적인 이유
로 자리했기 때문이다.
1) 게르트 미슐러 지음, 유혜자 옮김, 자살의 문화사, 시공사, 2002,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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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자살은 한 자연인이 스스로를 죽임으로써 생을 마감한다는 단순한
의미뿐만 아니라, 죽음 그 자체와는 별개의 의미부여가 늘 있어왔다. 그 의
미부여에는 표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그 이유와 논의구조의 차원에서 동
양이나 서양이 다르지 않았고, 古今이 크게 다르지 않다. 서양에서는 종교
적 신념의 유지나 확산에 자살이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였고, 동양 특히 조
선과 같이 윤리화된 사회에서는 이념적 표상의 정립이나 사회적 결속력의
강화에 자살이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를 고려해야할 중요한 요인으로 삼
았다. 이 둘 사이의 차이는 종교적인가 이념적인가와 표현의 차원인 수사의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말하자면 자살의 외면에 있는 이유에 입각하여 의미
를 부여했다는 점에서 다를 것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의미부여한 결과
로 나타나는 공통점은 무엇이었는가?
바로 자살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각과 평가이다. 정황상 뻔히 죽을 줄 알
면서도 死地로 뛰어든 사람에게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책임과 결속력을
강조하는 집단에서는 늘 그 죽음에 찬사와 추앙을 보내거나, 또 그와는 상
반되게 조롱과 저주를 보냈다. 즉 “자살은 몇몇 드문 상황에서는 영웅적 행
위로 추앙받았지만 대개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2) 추앙과 지탄의
빈도나 정도는 별도로 논의가 있어야겠지만, 뚜렷한 것은 자살을 바라보는
두 가지 상반된 시각과 평가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특히 “문학은 이 이분법
적 시각, 즉 어떤 때는 자살을 저주하고 어떤 때는 자살을 칭송해 마지않는
태도를 잘 보여준다.”3) 자살을 바라보는 이분법적인 시각이 있다는 것은
당연히 자살에 이중적인 기준이 적용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자살에 대한
상반된 두 가지 시각과 이중적인 기준에 대한 관심이 본고의 출발점이다.
또한 우리의 과거 문헌에 적잖게 보이는 자살과 관련한 기록을 접하며,
“에밀 뒤르켐이 1897년에 저 유명한 자살론을 발표한 이후로 사회학자,
심리학자, 정신분석가, 의학자 들은 오늘날의 통계학을 이용하여 각자 자기
학문의 관점에서 자살을 연구해 왔다.”4)는 사실도 하나의 반성적 계기가
2) 조르주 미누아 지음, 이세진 옮김, 자살의 역사, 그린비, 2014, 12쪽.
3) 조르주 미누아, 위의 책, 28쪽.
4) 조르주 미누아, 위의 책,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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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인문학적으로 성찰한 적이 있었는가를 반성
하게 된 것도 본고의 또 하나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여러 매체들이 전하는
작금의 자살 현황에 관한 통계를 분석하려는 의도는 본고에 없다. 통계적
수치가 전하는 충격적 현실이 무의미하기 때문이 아니라, 포괄적으로 미디
어라 묶어 말할 수 있는 매체가 갖고 있는 편향성이라는 본연의 속성이, 그
것을 통한 인문학적 성찰이 과연 가능할까라는 의문이 들게 하기 때문이다.
또한 뒤르켐의 방법을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자살의 실태에
대한 기록과 보고가 서양과 동양, 특히 조선의 경우가 전혀 달랐다는 데에
일차적 난관이 있기 때문이다.
서양이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인구학적 통계 및 사회제도적 장치를 통해
개인의 자살을 사회적 이슈로 만들었던 반면에 동양 특히 조선의 상황은
특정인에 대한 기록과 특정한 상황에 대한 평가가 주를 이루었다는 차이가
엄존하기 때문이다. 서양은 “17세기 초부터 시·군 단위 행정기관은 매주
‘사망내역’을 발행했다. 사망 원인을 기재하여 일종의 ‘인과성’을 밝히려 했
던 이 보고서는 페스트가 창궐하면서 처음 시작되었으나 차차 정기적인 발
행물로 굳어졌다.”5) 그런데 이에 상응할 만한 사건이나 그 결과물이 동양
그리고 조선에 없다는 사실이 어려움의 하나가 되겠다.6)
또 다른 관점에서도 어려움이 있다. 통계에 대한 맹신은 소위 자살을 일
컫는 ‘영국병’이라는 신조어를 탄생시켰다. 18세기부터 늘어난 신문발행은
영국에서 이 참혹한 사회현상을 자세히 보도했고, 그로 말미암아 영국인이
특별히 더 자살을 많이 한다는 인식이 유럽전역으로 퍼졌으며, 자살을 이르
는 ‘영국병’이라는 신조어는 생명을 얻게 되었다. 이후 현재까지 ‘영국병’이
라는 어휘는 지속적으로 자살이라는 현상을 떠올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영
국이라는 나라를 연상하게 하는 이유가 되었다. 따라서 사망내역을 전하는
기록이라고 볼 수도 없는 우리의 문헌을 뒤르켐처럼 통계화한 수치를 통한
5) 조르주 미누아, 위의 책, 235쪽.
6) 正祖가 편찬한 審理錄이 예외적이다. 그러나 이 책은 범죄와 범인에 대한 審理의
기록이라서 자살을 특별히 다루고 있지 않으며, 지속적인 정기 간행물로써 분석이 가
능한 축적된 통계자료라 하기도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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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으로 유의미한 결론을 도출할 가능성은 지금으로서는 희박해 보인다.
따라서 본고는 자살의 통계적 수치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조선조 문집에
적잖게 기록된 자살관련에 드러나는 두 가지 시각에 주목한다. 자살을 바라
보는 이 두 가지의 시각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금을 관통하며 일정한 유
사성을 보인다는 점에 우선 착안하였고, 한문학적 접근으로서 쉽게 활용할
수 있는 자료가 문집이고, 가장 풍부하게 자살과 관련한 기록을 담고 있는
것이 조선조 문집이기 때문에 자료의 범위를 한정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의 DB가 활용하기에 편리하다는 점도 한 가지 이유가 된다. 본고의 제목으
로 삼은 ‘추앙받는 죽음과 조롱받는 죽음’은 자살을 보는 이분법적 시각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으로 게르트 미슐러가 자살의 문화사에서 한 장의
제목으로 쓴 ‘자살의 두 얼굴’의 부제인데, 그대로 가져왔다.7) 조선조 문집
에 산견되는 자살에 대한 두 가지 시각을 이보다 적절히 압축할 수 있는
더 나은 표현이 없기에 선택한 것이다. 나아가 한문학의 연구방법이 역사적
고증이라는 텍스트의 외적요인에 몰입하고 있는 현실의 상황에서 벗어나
보고자하는 방법론적 반성도 본고의 또 다른 목표이다.
II. 이분법적 시각과 이중적 기준
자살을 바라보고 평가하는 이분법적 시각에는 원초적으로 살아남은 자
가 한 인간의 죽음을 어떤 의도에서 보려고 하는가에 그 방향이 달려있다.
이는 긍정적으로 추앙과 찬사를 보내든 부정적으로 조롱과 저주를 보이든
다를 것이 없다. 추앙과 조롱, 찬사와 저주가 표면적으로나 수사적으로 차
이가 있다손 치더라도 그 근원에 내재한 동인이란 측면에서 보자면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이는 자살뿐만이 아니라 죽음 전반에 공히 적용할 수 있
는 시각이다. 그 근원적인 이유는 자살을 비롯한 죽음이 권력과 밀접한 관
련이 있기 때문이다. “권력은 죽음을 기반으로 한다. 보편적으로 죽음은 권
7) 게르트 미슐러, 앞의 책, 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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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을 생성하고 강화하며 유지하는 힘을 발휘한다. 작게 한 집안의 제사는
물론이고, 정치인들의 현충사나 망월동 묘소 참배, 일본 수상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모두 권력 생성의 메카니즘이라고 볼 수 있다. 기독교는 예수
의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었으며, 조선조는 忠義孝烈의 이름으로 죽어
간 수많은 사람들의 힘으로 도덕적 권위를 유지했다. 수많은 사찰에 세워져
있는 진신 사리탑의 기능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조금 더 엄격하게 말
하면, 죽음 자체가 권력을 낳는 것은 아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죽음과 권
력 사이에는 고도의 연출과 정밀한 형식이 개제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
다. 이 연출과 형식을 우리는 보통 문화라고 한다. 문화는 죽음과 권력을
이어주는 매개 고리인 셈이다.”8) 자살을 바라보는 이분법적 시각의 기저에
도 바로 죽음과 권력을 이어주는 문화가 있고, 그 문화의 유지와 확대에 자
살한 자의 죽음이 어떻게 기여할 것인지의 여부가 추앙하거나 조롱하는 방
향을 결정하는 것이다.
자살한 자의 죽음을 기록하는 행위는 하나의 문화적 행위이며, 이 문화적
행위에 기대어 종교적 결속력의 강화나 도덕적 이념의 견고한 유지가 가능
해진다. 이것을 권력과 연관시켜 파악해온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미셸 푸코와 카를로 긴츠베르크는 권력을 대표한다는 것은, 무
엇을 나타냄이고, 무엇을 생각함이며, 그 무엇을 대변함이라고 정리하고 있
는데, 이 세 가지를 권력이라는 현상에 적용시켜보면 서로 복잡하게 얽히면
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9) 서양에서는 신의 섭리와 기독교적 세
계질서를 내세운 권력이, 자살이 그에 얼마나 부합하는가를 두고 집단의 지
도자나 종교의 대표자들의 입장에서 자살을 평가하는 방향을 정했고, 동양
특히 조선에서는 유가적 윤리와 이념에 입각한 권력이 그것에 얼마나 부합
하는가를 두고 유학자들과 문인들의 처지에서 자살을 바라보는 시각의 방
향을 정했다. 이제 추앙받았던 죽음과 조롱받았던 죽음의 몇몇 사례를 나누
어 논의하겠다.
8) 이승수, 죽음의 수사학과 권력의 상관성 , 대동문화연구50집, 성균관대 대동문화
연구원, 2005, 325쪽.
9) 울라프 라더 지음, 김희상 옮김, 死者(사자)와 권력, 작가정신, 2004, 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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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죽음을 향한 추앙과 찬사
자살과 관련한 기록은 한국문집총간 DB를 검색해보면, 2,000건을 훨씬
상회한다. 이 가운데 서술상의 필요에 의한 단편적 기록과 검색어의 동음이
의어 등을 제외하더라도 700건을 상회하는 기록이 있다. 이 자료들의 통계
와 분석이 일정한 의의가 있을지라도 앞서 말한 바대로 여기서는 주목하지
않는다. 대신 자살과 관련한 정황이 뚜렷하고, 그 행위의 결과가 자살이라
고 볼 수 있는, 즉 어느 정도의 서사구조가 정황과 행위의 결과를 알 수 있
도록 갖추어진 기록에 초점을 맞춘다. 이러한 조건에 부합하면서 자살자의
죽음을 잘 기록한 것으로 傳이 가장 두드러진다.
무릇 여자로서 남편을 여의고 누군들 죽어서 따르려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처음 죽었을 무렵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진 듯 애통하여 숨이 끊어질 것만 같
아 잠깐 사이에 죽음을 결심하는 사람은 있겠지만, 만약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지나면 사람의 마음 또한 거의가 조금은 느슨해지는데, 오히려 약속한 기한에 이
르자 다시는 한 톨도 먹지 않고 평소의 말을 져버리지 않았으니, 그 의리가 더욱
지극하고, 그 일은 더욱 어려운 것이다. 아! 아들을 기르는 7년 동안 어찌 하루라
도 죽은 남편을 잊었겠는가!10)
이 글은 李萬敷(1664~1732)의 孝子烈婦忠奴列傳의 한 부분으로 열녀
李氏傳의 論贊이다.11) 열녀 이씨는 생전의 남편이 했던 “나는 당신과 같은
날 죽을 거요.”라는 말을 필생의 약속으로 여기고, 남편이 죽을 당시 세 살
10) 李萬敷, 孝子烈婦忠奴列傳, 息山集권20, 韓國文集叢刊제178집, 432~433쪽.
“凡女子喪夫者, 孰不欲死從. 然其始死也, 崩隕慟絶, 决死於須臾者有之. 若時移歲去,
人情亦幾少弛矣, 猶至期不復粒, 以不負平生之言, 其義尤至, 其事尤難. 噫! 養子七年之
間, 何嘗一日忘死哉!”
11) 이만부는 인척인 盧聖器가 전해준 孝子奉漢禎, 烈婦李氏, 忠奴彦春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했다고 한다. 이만부의 이 기록이 없었다면 이들은 세상에 알려지지 못했을
정도로 한미했다. 이만부는 이들의 일을 사라지게 할 수 없다면서 立傳한다. 그리고
세 사람의 전을 列傳이란 제목으로 묶었다. 앞에서 말한 바처럼 이런 경우 ‘集傳’ 이나
‘合傳’으로 볼 수 있는데, 司馬遷의 사례를 원용하여 그대로 ‘列傳’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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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었던 아들 하나를 열 살이 될 때까지 기르고는 굶어 죽는 길을 택했다.
명백한 자살인 것이다. 이씨의 죽음을 기록하는 이만부의 시선은 지극히 우
호적이다. 이씨가 죽음의 방식을 굶는 것으로 택한 것을 두고 부모에게 물
려받은 몸을 훼손시키지 않으려했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서술한 대목에
서 정점을 이룬다.12) 이씨는 孝와 烈을 다 이룬 이상적인 여인상이 된 것이
다. 또 아들을 기르는 7년간 하루도 남편을 잊지 않았다는 서술은 이씨가
남편을 지극히 사랑했음을 드러낸다. 효와 열 뿐만이 아니라 부부의 사랑도
12) 李萬敷, 孝子烈婦忠奴列傳, 息山集권20, 韓國文集叢刊제178집, 432~433쪽.
“烈女李氏, 故縣監李延挺之妹也. 爲某家婦, 夫常與語曰: “吾與君同日死.” 生一子三
歲, 而夫病且死曰: “吾與君約同日死, 今吾死, 君必從死. 然兒誰依, 待兒年十歲, 君可死
從.” 李氏曰: “諾.” 夫死之日, 哭擗有節, 不爲毁形, 敦喪具多自執, 見者疑. 及兒爲九歲
而屬除夕, 李氏謂其母曰: “吾夫死謂女曰, ‘吾死與君約死, 然待兒十歲可死從.’ 女已許
矣. 明日兒年滿十, 女始可遂與亡人約者.” 母抱持泣曰: “是何言是何言!” 曰: “人一死
理也. 女當死而不死, 經七年日月, 夫臨死之言, 義不可負. 惟負我母氏不孝甚, 柰無兩全
理何.” 自厥明遂絶不食, 母爲守不離, 屛刀刃于左右. 李氏曰: “吾死豈敢毁我父母遺
體.” 起居言語視常, 惟口不近粒, 積十有二日自盡.” 譯文: 烈女李氏는 故縣監李延挺
의 누이동생이다. 아무개 집의 며느리가 되었는데, 남편이 항상 그녀에게 말하길 “나
는 당신과 같은 날 죽을 거요.”라 하였다. 아들 하나를 낳아 세 살이 되었을 때, 남편
이 병이 들어 죽게 되었을 때 “내가 당신과 약속하기를 같은 날에 죽겠다고 했는데,
내가 오늘 죽으니 당신은 반드시 따라 죽으려 할 거요. 그러나 아이는 누구를 의지하
겠소. 아이의 나이가 열 살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당신이 죽어 따른다면 괜찮을 것이
오.”라 하였다. 李氏가 말했다. “예.” 남편이 죽은 날 곡을 하며 가슴을 침에 절도가
있어 몸을 상하게 하지 않았다. 상을 치르는 기구를 돈독하게 하였는데, 스스로 장만
한 것이 많아 보는 사람이 의아해하였다. 아이가 아홉 살이 되어 섣달그믐 밤에 이르
자, 李氏가 자기 어머니께 말하길 “제 남편이 죽으며 저에게 말했어요. ‘내가 당신과
약속하기를 같은 날에 죽겠다고 했는데, 내가 오늘 죽으니 당신은 반드시 따라 죽으
려 할 거요. 그러나 아이가 열 살이 되면 당신이 죽어 따라도 괜찮을 것이오.’라 했는
데, 저는 이미 그 말에 허락했고, 내일이면 아이는 열 살이 되니, 제가 비로소 죽은
사람과의 약속을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라 하였다. 어머니는 그녀를 붙들고 울면
서 “이것이 무슨 말인고? 이것이 무슨 말인고?”라 하였다. 李氏가 말하길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이치입니다. 저는 마땅히 죽어야하는데도 죽지 않고 칠 년의 세월이 지
났습니다. 남편이 임종할 때 한 말은 의리로서 져버릴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 어머니
를 져버리는 불효가 심합니다. 두 가지 이치를 다 온전히 할 수 없음은 어쩔 수 없군
요.”라 하였다. 그 다음날 아침부터 마침내 전혀 먹지 않았다. 어머니는 곁에서 지키
며 떨어지지 않고, 주변에서 칼날을 멀리 치워버렸다. 李氏가 말했다. “내가 죽는데
어찌 감히 내 부모가 물려주신 몸을 훼손할 수 있겠는가.” 일상적인 생활과 말하는
것은 평범해 보였으나, 오직 입에 밥알 하나도 가까이 하지 않다가 12일 뒤에 목숨이
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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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룬 여인인 것이다. 이씨의 사랑과 열행과 효가 이 한편의 글로써 완성되
는 것이다. 이씨의 진실은 부정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이만부의 기록이
갖는 의미는 자살을 바라보는 추앙의 시각이라는 점에서 다시 음미해볼 필
요가 있다.
밥알 하나도 먹지 않고 12일을 버티다가 목숨이 끊긴 이씨에게 이만부는
최상의 찬사를 보내며 추앙하고 있지만, “시대와 문화를 불문하고 자살의
이면에는 언제나 강요 내지 부자유가 있었다.”13)는 관점에서 보자면 이씨
의 12일은 참혹하고 비정하다고도 볼 수 있다. 더욱이 딸의 죽음이 진행되
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던 老母의 심경은 이루다 말할 수 없으리라 본다. 또
하나 이만부는 이씨의 결행이 자발적인 의사인 것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자살이 개인적인 결정에 의해 삶을 그만두는 행위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역사적으로 살펴볼 때 어느 누구도 그것을 자유롭게 선택한 것은 아니었
다.”14)는 면에서 보자면, 하나의 이상형을 만들기 위한 기록이라는 사실은
부정하기 힘들 것이다.
이만부의 우호적이고 긍정적인 시각이 문제될 것은 없다. 이만부가 그러
한 시각으로 이씨를 그려내게 된 근원적인 이유가 문제적인 것이다. 우선
儒者로서의 사명감과 책임의식을 떠올려 볼 수 있다. 사명감과 책임의식을
자기화한 지식인으로서 이씨의 부부애와 열행과 효는 사회의 결속력과 도
덕성의 유지에 긍정적인 효과를 줄 수 있는 기제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그
렇기에 이씨에게 이 셋 모두를 이룬 여성이라는 찬사를 보내도 아깝지 않
았던 것이다. 기록하는 자로서의 의식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만부 스스
로도 밝히고 있듯이 이씨와 같은 인물의 행적이 사라지지 않게 하여 후세
에까지 전하는 것15)을 임무로 여긴 그 의식 말이다. “당대와 후손이 무덤을
섬기는 것은 해당 사회집단이 가야 할 역사의 방향성을 잡기 위해서다. 시
13) 게르트 미슐러, 앞의 책, 231쪽.
14) 위의 책, 237쪽.
15) 李萬敷, 孝子烈婦忠奴列傳, 息山集권20, 韓國文集叢刊제178집, 432쪽. “戚弟
盧聖器, 錄孝子烈婦忠奴三人事, 來曰: ‘此吾先大人所耳目, 嘗以謁紫峰先生, 先生爲之
歎賞, 欲序列之而未暇焉. 今以屬諸子, 子其念哉!’ 曰: ‘何敢當, 然事誠有不可沒者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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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를 불문하고 무덤은 역사의식을 고취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16) 이만부
는 조선이란 사회가 지향해 가야할 방향으로 이씨의 행위에 드러나는 이념
들을 제시하고자 한 것이다.
또한 전근대사회에서 의사소통의 방식과 매체가 지식인들에 집중되었던
사실을 고려하면, 이 기록이 나타내고 대변하려는 가치, 즉 이념이 당시 사
회에서는 하나의 권력으로 작용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한 사회의 커뮤니
케이션이 이루어지는 매체를 상징적으로 장악하는 것, 다시 말해 니클라스
루만의 주장대로, 사회가 작동하는 체계인 정보의 전달방식을 선점하는 것
이 권력이다.”17) 이만부는 이씨를 기록한 작품을 통해 정보의 전달방식을
선점함으로써 유가의 이념이 제대로 작동하는 사회를 이루려고 노력한 것
이다.
“하늘은 높고, 땅은 넓구나. 슬프다 이 내 몸, 갈 곳이 없네.” 탄식을 오래 하다
가, 또 일어나 한숨 쉬며 말했다. “남편은 나를 받아주지 않고, 어머니는 다른 뜻
이 있으니, 내 마음의 비통함은 죽지 않고 어쩌겠습니까.” 드디어 치마를 뒤집어
얼굴을 덮고 물로 뛰어들어 쓸려 내려갔다. 최씨의 이웃 처자가 돌아와 최씨 집
식구에게 알리고 또 그 유품을 전하니, 최씨 집은 크게 놀랐다. 박씨의 어머니와
형제들도 비로소 모두 슬프고 애처롭게 여겨, 낙동강 가에 가서 찾아보았다. 물
가에 고려 충신비가 있었다.18)
이 글은 李鈺(1760~1813)이 쓴 尙娘傳의 끝부분이다. 상랑의 姓은 朴
이고, 실제 1702년에 善山에서 자살한 여인이다. 이 글이 문제적인 것은 상
랑의 죽음이 보편적인 열행과 다른 점이 있기 때문이다. 상랑은 선산에 사
는 최씨에게 시집갔지만, 그 남편은 어리고 사나워서 상랑을 용납하지 않았
다. 상랑이 현숙하면서도 출중하였기 때문이라고 이옥은 전한다.19) 부부관
16) 울라프 라더, 앞의 책, 53쪽.
17) 위의 책, 72쪽.
18) 李鈺, 尙娘傳, 역주 이옥전집2, 실시학사 고전문학연구회 역주, 소명출판, 2001,
209쪽.
19) 李鈺, 尙娘傳, 역주 이옥전집3, 실시학사 고전문학연구회 역주, 소명출판, 2001,
194쪽. “年及字, 適善山崔氏. 崔氏子, 冲且暴, 不相容, 尙娘賢而出.”
추앙받는 죽음과 조롱받는 죽음 - 신승훈 151
계가 원만하지 못했던 것이다. 남편을 의지할 수 없어 친정으로 돌아오지
만, 계모와 남자 형제들은 그녀를 다른 곳으로 개가시키려한다.20) 그랬기
에 상랑은 하늘을 보며 탄식했던 것이다. 남편이 있는 시집으로도 갈 수 없
고, 개가시키려는 친정으로도 갈 수 없는 신세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상랑
이 물에 몸을 던진 것은 여느 열부의 사연과는 좀 다른 점이 있는 것이다.
남편을 따라 죽는 從死도 아니고, 급박한 상황에서 정절을 지키려했던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랑의 죽음을 기록하고 있는 이옥을 비롯한 몇몇 작가들은 모두
열행으로 묘사하고 있다.21) 특히 竹軒金民澤(1678~1722)은 烈婦尙娘傳
이라고 제목에서부터 상랑의 열행을 드러내고 있다.22) 김민택은 논찬에서
상랑이 교육을 잘 받은 명문거족 출신이 아니라 민간의 여염집 아녀자라는
사실을 지적하며, 그녀가 열행을 한 것은 천성의 아름다움이라고 칭송했
다.23) 이옥도 이 점에 대해서는 의견을 같이 한다.
세상 풍속은 여자가 왕왕 예를 지키지 않는데, 저 상랑은 미천한 사람으로 순
하고 정숙하라는 가르침이나, 효경·논어·열녀전을 배운 적이 일찍이 없었
는데도 그 이룩한 바가 마침내 저와 같이 뛰어났다. 자질이 순순한 자는 꾸밈이
없어도 아름다운 것인가? 시경에 ‘옥과 같은 여인이여’라는 말이 있는데, 박씨
의 딸이 그러한 사람이다.24)
20) 李鈺, 尙娘傳, 역주 이옥전집3, 실시학사 고전문학연구회 역주, 소명출판, 2001,
194쪽. “旣歸, 後母謀兄弟, 將奪其志.”
21) 당시 선산부사로 그 일에 관한 보고를 직접 들은 조귀상(趙龜祥)의 향랑전(香娘
傳) 을 비롯, 이광정(李光庭)의 임열부향랑전(林烈婦薌娘傳) , 이안중(李安中)의
향낭전 등 그에 관한 전이 여러 편이 있다. -以上은 李鈺, 尙娘傳, 역주 이옥전집
2, 실시학사 고전문학연구회 역주, 소명출판, 2001, 208쪽, 각주 55번의 내용을 옮긴
것이다.
22) 김민택, 烈婦尙娘傳, 竹軒集, 한국문집총간속집 제62책, 한국고전번역원,
2008, 47~48쪽.
23) 김민택, 烈婦尙娘傳, 竹軒集, 한국문집총간속집 제62책, 한국고전번역원,
2008, 48쪽. “論曰: 古者女敎備矣. 有師傅保姆之戒, 詩書圖史之訓, 至於珩佩巾帨, 靡不
有禮. 是以蹈義守節者, 多出於貴人鉅族. 及覩東國州郡誌, 往往遐裔僻壤, 投厓赴河, 奇
巍卓絶之行接跡也. 貴人鉅族, 反鮮覯焉. 余竊異之. 嗚呼! 娘亦窮閻賤婦耳, 能修身潔
行, 從容就死如此, 若娘者, 豈非得於天者耶? 噫! 豈盡由師傳詩書之敎也哉!”
152 第40輯(동양한문학회 2015.02)
상랑의 죽음은 열부로서 평가받았지만, 그녀가 겪었을 심리적 고통과 정
황상의 맥락으로 보자면, 궁지에 몰린 인간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결행이
사실에 가깝다. “대개의 사람들은 절망감으로 세상을 등졌고, 자기 생각대
로 편안하게 살아갈 수 없도록 강요했던 사회의 도덕적 폭력에 대한 항의
표시로 죽어갔다.”25) 상랑의 죽음은 어쩔 수 없이 이렇게 기록될 수밖에 없
었다. 불화한 남편에게 버림받고 친정으로부터는 개가를 강요받는 상황이
상랑에게 폭력적이었다는 것은 분명하기에, 상랑은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굴레 같은 것을 느꼈을 것이다.
문제는 상랑의 심리적 상태나 그 진정성이 어디에 있는냐가 아니라, 상랑
의 자살을 기록하는 작가들의 목표와 의도가 무엇이었나에 있다. 그들이 사
회의 도덕적 폭력을 은폐하려는 의도까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들도 상랑을 烈이라는 이념에 충실한 이상형으로 묘사하는 수밖에는 상
랑의 죽음을 표현할 길이 없었다고 보는 것이 당대적 맥락에 가까울 것이
다.26)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을 목표하고 어떤 의도를 갖고 상랑을 기렸는
가? “거창한 의식으로 시신께 경배하며 부복할 때, 해당 집단은 자부심과
소속감을 갖게 되기 때문에, 각 집단은 무덤을 기념과 회상의 성지로 섬기
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자. 시신은 죽었을 뿐 사라지지지 않는다.”27) 상
랑의 죽음을 기록한 작가들은 공히 조선이란 사회를 유지하고 있는 이념의
차원에서 그녀를 기념하고 찬사를 보냈던 것이다. 이는 조선이 고도로 윤리
화된 사회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식인으로
서 동참할 수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겠다.
즉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죽음에 대한 문학적 수사가 국가의 제도
24) 李鈺, 尙娘傳, 역주 이옥전집2, 실시학사 고전문학연구회 역주, 소명출판, 2001,
209~210쪽.
25) 게르트 미슐러, 앞의 책, 52쪽.
26) 열녀가 권력의 메커니즘에 의해 만들어지는 과정과 그 사례들에 관한 정밀한 분석
과 해석은 다음의 저작을 참고하라. 강명관, 열녀의 탄생, 돌베개, 2009.
27) 울라프 라더, 앞의 책, 373쪽.
추앙받는 죽음과 조롱받는 죽음 - 신승훈 153
적 뒷받침을 얻어 권력 생성의 메커니즘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조선시대
에 있어 祠宇의 건립과 주기적인 제향은 보이지 않게 그런 의도를 내포하
고 있다. 병자호란 뒤 숙종 시기에 집중적으로 사우를 건립하고 사액한 것
은 사자들의 권위를 빌려 위기를 타개하고 현실의 질서를 세우려는 재건기
사회의 고유한 현상이었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旌表가 많아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28)라는 지적은 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잘 설명하는 것이다.
적병이 사방을 에워싸자 벗어날 수 없음을 알고 화약 상자에 걸터앉아 윗옷을
벗어 하인에게 주어 돌아가 그것으로 장례를 지내게 하였다. 庶孫인 壽全이 곁에
있었는데, 옷깃을 끌어당기며 떠나지 않고 말하였다. “원컨대 할아버지와 함께
죽겠습니다.” 별좌 권순장과 생원 김익겸이 말하길 “공께서만 아름다운 일을 하
시려고 합니까?”라 하며 역시 떠나지 않았다. 마침내 불이 붙자, 사람과 누각이
모두 날아가 버렸다.29)
이 글은 李光庭(1674∼1756)이 쓴 鄭蘊(1569~1641)의 연보 안에 실린
金尙容(1561~1637)에 관한 기록으로, 김상용은 1636년 병자호란 때 廟社
의 신주를 받들고 빈궁과 원손을 수행해 강화도에 피난했다가, 이듬해에 성
이 함락되자 성의 南門樓에 있던 화약 상자에 불을 지르고 순절하였다. 이
부분은 김상용이 폭사한 정황을 묘사한 대목이다. 김상용의 죽음에 대해서
는 실화라는 설도 있지만, 여기서는 旌閭까지 세워진 김상용의 史實를 더
왈가왈부할 생각이 없다. 다만 이광정이 後人으로서 기록하여 묘사한 것에
만 주목하고자 한다. 김상용과 그의 손자 김수전 그리고 권순장과 김익겸은
사세가 벗어날 수 없음을 알았다. 胡兵을 피해 달아나는 것도 살 수 있는
길이지만, 그들의 안중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사력을 다해 싸우다가
28) 이승수, 죽음의 수사학과 권력의 상관성 , 대동문화연구50집, 성균관대 대동문화
연구원, 2005, 339쪽.
29) 李光庭, 文簡公桐溪先生年譜, 桐溪集 桐溪先生文集年譜[附錄], 한국문집총
간75집, 한국고전번역원, 401쪽. “敵兵四圍, 知不得免, 踞火藥樻而坐, 解上衣付從者,
使歸葬. 庶孫壽全年十三, 在側, 牽衣泣不去曰: ‘願與大父同死.’ 別坐權順長·生員金益
兼曰: ‘公獨能辦佳事乎?’ 亦不去. 遂火之, 人與樓俱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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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가 완전히 기운 것을 알고 그들이 선택한 것은 暴死였다. 물론 주도적
으로 일을 감행한 것은 김상용이었다.
김상용에 관한 유사한 기록이 몇 편 전해지고 있는데,30) 그 골자는 위의
기록과 다를 것이 없어서 굳이 여기서 비교할 필요까지는 없겠다. 마지막
순간의 장렬한 모습을 묘사하는 것으로 거의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
다면 이제 왜 이광정이 김상용 등의 장렬한 죽음을 묘사했는가를 말할 차
례이다. 우선 불굴의 항전정신을 말하고자 했다. 아무리 중과부적의 상황이
목숨을 위협해도 결코 굴하지 않는 정신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죽을 수
는 있어도 질 수는 없다는 불굴의 정신을 김상용의 마지막 모습으로 그려
내고 있는 것이다. “문학은 수사학의 힘을 발휘하여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31) 이 이미지는 旌表나 祠宇의 건립과 주기적인 제향의 보장 등으로 확대
되고 재생산된다. 그러므로 김상용을 비롯한 불굴의 인물들은 하나의 고착
화된 이미지가 되어 문학적으로 계속해서 재생산되고, 그것을 통해 형성된
상징적 이미지는 현실에 영향을 주는 힘과 생명을 갖게 되며, 기록이 계속
해서 기억할 수 있게 만드는 계기가 되게 한 것이다. 이러한 메커니즘을 이
해하고 활용했다는 것으로 이광정의 기록이 추구한 목표와 의도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짚고 가야할 문제가 있다. 자살의 범위이다. 스스로 자신
을 죽인 행위의 경우는 재론의 여지가 없이 자살이겠지만, 여러 가지 정황
을 고려하여 자살로 볼 수 있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서양의 경우 학자에
따라서는 십자군전쟁을 순수한 자살출정이라고 보기도 했다.32) 그들이 출
정하여 전쟁을 벌이기도 전에 대부분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두고 이렇
게 평가한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죽을 것임을 알고 출정했기 때문이다. 출
정에 나선 병사들은 대개가 하층민이었고, 행실이 훌륭하다고 할 수 없는
밑바닥 인생들이었다. 그러나 이교도를 응징한다는 명분, 즉 종교적 신념과
신의 섭리를 이루기 위해 떠났다는 이유로 중세의 교회는 평소 자살자를
30) 예컨대 국조인물고권62에 김상용의 기록이 실려 있다.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31) 이승수, 앞의 논문, 345쪽.
32) 위의 책, 58~60쪽.
추앙받는 죽음과 조롱받는 죽음 - 신승훈 155
저주하고 조롱하던 태도를 바꾸어 찬사를 아끼지 않는 모순적인 면모를 보
였다. 또한 유럽의 17세기에 주로 나타났던 귀족들의 결투도 명예를 지키기
위해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행했던 타인의 손을 빌린 자살이라고 규정
하였다.33) 결투를 자살의 대체물로 보았던 것이다.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死地에 뛰어든 행위를 자살로 간주하는 서양의 사례들을 참고해본다면, 조
선조 문집에 기록된 자살은 그 사례가 대폭 확대될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은 천성이다. 한정이 아버지를 따라 죽었으니 천성에 돈
독한 경우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죽음에 다다라서도 의로움이 어지럽지 않
았으니, 타고난 성품이 더욱 잘 갖추어졌음을 볼 수 있다. 아! 옛날 曺娥만 어찌
홀로 아름다움을 독차지하겠는가?34)
이 글도 앞서 본 이만부의 孝子烈婦忠奴列傳의 한 부분이다. 이만부가
인척인 盧聖器가 전해준 孝子奉漢禎, 烈婦李氏, 忠奴彦春의 이야기를 듣
고 기록했다고 한다.35) 봉한정의 행동은 자살을 의도한 것이라기보다 죽음
을 무릅쓰고 아버지를 구하려한 행동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36) 다만 어린
33) 조르주 미누아, 앞의 책, 242쪽.
34) 李萬敷, 孝子烈婦忠奴列傳, 息山集권20, 韓國文集叢刊제178집, 432쪽. “父子
之愛天性也. 漢禎從父而死, 可謂篤於性者也. 然其臨死之義不亂, 可見其資稟尤備. 噫!
古之曺娥, 豈獨專美哉!”
35) 이만부의 이 기록이 없었다면 이들은 세상에 알려지지 못했을 정도로 한미했다. 이
만부는 이들의 일을 사라지게 할 수 없다면서 立傳한다. 그리고 세 사람의 전을 列傳
이란 제목으로 묶었다. 앞에서 말한 바처럼 이런 경우 ‘集傳’ 이나 ‘合傳’으로 볼 수
있는데, 司馬遷의 사례를 원용하여 그대로 ‘列傳’이라 하였다.
36) 李萬敷, 孝子烈婦忠奴列傳, 息山集권20, 韓國文集叢刊제178집, 432쪽. “奉漢
禎, 世居陽城縣德山里, 父爲田間氓也. 漢禎年十有三, 父赴日中之會, 兒從, 父還兒又從.
至漢川上, 父邊岸觀新漲, 兒又從, 岸缺父溺, 兒猶岸矣. 跳號無奈何, 旣有鄰人過者, 兒
謂曰: ‘兒而從父, 父溺不可獨還, 爲言我母氏狀.’ 言已, 身在水中, 與波濤無極. 後二日,
兒抱父而出, 兩尸如結然, 士人哀之, 拯出, 歸葬厥里, 父子一麓. 事聞, 朝命㫌之.” 譯文:
奉漢禎은 대대로 陽城縣德山里에 살았다. 아버지는 농사짓는 백성이었다. 한정이 13
세일 때, 아버지가 한낮의 모임에 가니 한정이 따라갔다. 아버지가 돌아오니 한정도
또 따라왔다. 漢川가에 이르러 아버지가 강변언덕에서 물이 막 불어난 것을 보자,
한정도 또 따라갔다. 언덕이 무너져 아버지가 물에 빠졌는데, 한정은 그대로 강변언
덕에서 펄쩍펄쩍 뛰며 큰 소리로 부르짖었으나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웃 사람 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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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의 힘으로 급류에 휩쓸린 아버지를 구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점과 격류 속에서도 끝까지 아버지를 놓지 않고 있었던 행동은 그가 자신
의 죽음을 알고도 행한 일이라는 점은 고려해볼만하다. 특히 “從父而死”라
는 표현에 주목한다면 봉한정의 죽음은 자살과 무관하다고 하기 어려울 것
이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일이 알려지자 조정에서 旌閭하기를 명하였다.”는
사실이다. 봉한정의 의로운 행위는 孝의 실현으로 인정받았고, 조정은 그에
상응하는 표창을 내린 것이다. 봉한정의 행위가 숭고하다는 것은 결코 부정
될 수 없다. 다만 사고로 볼 수 있는 일에 대해 조정이 정려한 사실은 곱씹
어볼 필요가 있다. 부득이한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라 할지라도 그 행위가
사회와 집단이 지향해야할 이념을 드러내고 있으며, 그 행위를 기림으로써
파생되는 학습효과로 말미암아 사회와 집단의 결속은 다져지는 것이다. 그
리고 이러한 사실을 많은 사람이 확실히 볼 수 있는 방식으로 알려야, 그
사회와 집단을 결속하는 이념이 더욱 공고해지고 확산될 것이라는 판단이
조정에서 정려를 내린 이유일 것이다. 또 봉한정의 죽음은 傳이라는 기록의
문화적 장치에 의해서 이념의 상징이 된 것이다.
忠奴彦春의 경우도 생각해볼 만한 문제가 있다. 주인을 지키고 주인의
무고함을 알리기 위해 모진 매질을 견디다가 맞아죽은 노비 언춘의 경우도
자신이 죽을 것임을 뻔히 알고도 살 수 있는 방법을 버리고 죽음을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37)
지나가던 사람이 있자, 한정이 그에게 말했다. “아들이 아버지를 따라가다가 아버지
가 물에 빠졌으니 혼자만 돌아갈 수 없습니다. 나를 위해 어머니께 상황을 말해주십
시오.” 말을 마치자 몸이 물속에 있었는데, 끊임없는 물결 속에도 아버지와 함께 있었
다. 이틀 뒤에 한정이 아버지를 안고 있는 채로 나왔는데, 두 시체가 마치 줄로 엮어
놓은 듯하였다. 선비들이 슬퍼하며 건져 올려 그 마을에 돌아와 장례를 지내주었다.
父子를 한 산기슭에 장사지냈다. 일이 알려지자 조정에서 旌閭하기를 명하였다.
37) 李萬敷, 孝子烈婦忠奴列傳, 息山集권20, 韓國文集叢刊제178집, 432쪽. “忠奴
彦春者, 故應敎沈公大孚之奴也. 公之兄大復, 爲光海嬖臣, 所爲多無狀. 復妻性陰悍, 助
其惡滋益甚. 公數諫而不入. 公葢孝友有學, 學者稱泛齋先生者也. 大復嘗爲安城守, 幽
其母于別室棘圍之, 使不得與家人通. 公涕泣彷徨於外, 復妻言于復曰: ‘進士與奴彦春
謀, 將不利於君, 君其察之.’ 公時未釋褐. 故稱進士云. 復夜於寢門外, 鋪灰屑以察之, 妻
추앙받는 죽음과 조롱받는 죽음 - 신승훈 157
무릇 언춘이란 사람은 어떤 사람이던가? 즐거이 반드시 죽을 곳으로 달려가
죽음에 이르도록 변하지 않으면서 자기 주인의 원통함을 말하였다. 대저 선비로
서 책을 읽고 의리를 강론하여 국가의 두터운 은혜를 받았지만, 왕의 일에 능히
又潛取公履, 印灰以實其言. 明日復取家中諸履驗之, 大小果合於公履. 復大備刑具將治
彦春, 欲以及於公, 彦春逋. 復怒責公, 急使得彦春. 公出不知所爲, 彦春忽自迎伏且泣
曰: ‘奴逋, 欲緩公禍, 今禍益急. 請縳奴以歸, 庶少弛禍.’ 公亦泣曰: ‘汝不免於死, 吾不
忍爲也. 汝不急去不免.’ 彦春固請曰: ‘何愛奴一命, 自棄千金乎? 吾進士孝友, 陷此惡名,
非奴, 無以白矣, 速縳奴歸.’ 公黽勉繩其腰以歸. 於是大復施酷刑, 無所不至, 問: ‘汝與進
士謀害吾身, 汝無諱者, 惟釋汝.’ 彦春曰: ‘吾進士孝且悌如古人, 不忍誣以圖生, 剝皮剜
肉, 亦奚有哉!’ 每下一杖, 輒高聲言進士孝友, 至死聲不絶. 譯文: 忠奴彦春은 故應敎
沈大孚公의 노비이다. 공의 형 大復은 광해군이 총애하는 신하였는데, 하는 일이 글
로 표현하지도 못할 것이 많았다. 대복의 아내는 성품이 음흉하고 사나워 그의 악행
이 불러나게 함이 더욱 심했다. 공이 자주 충고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공은 효
성스럽고 우애가 있으며 학문이 있어서 학자들이 泛齋先生이라 일컬었다. 대복이 安
城의 수령을 지낼 때 그 어머니를 별실에 가두고 가시나무를 둘러 집안사람들과 통하
지 못하게 하였는데, 공이 울면서 그 밖에서 서성거리자, 대복의 아내가 대복에게 말
하길 “進士가 노비 彦春과 모의하여 장차 당신을 이롭지 않게 하려고 합니다. 당신은
그를 살펴보세요.”라 하였다. 공이 이때 벼슬에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진사라고 일컬
었던 것이다. 대복이 밤에는 寢門밖에 재 가루를 펴놓고 살피고 있었는데, 대복의
아내가 또 몰래 공의 신발을 가져다가 재에 찍어서 자기 말을 증명하려 하였다. 다음
날 대복이 집안의 여러 신발을 가져다가 증거를 찾아보니 크기가 과연 공의 신발과
맞았다. 대복은 크게 형틀을 갖추어 언춘을 치죄하고 죄를 공에게까지 물으려 하였
다. 언춘이 달아나자, 대복은 노하여 공을 꾸짖고 급히 사람을 시켜 언춘을 잡아오라
고 하였다. 공이 집 밖으로 나와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언춘이 갑자기 스스로
맞이하며 엎드려 울면서 말했다. “저는 도망쳐서 공의 화를 늦추려고 하였는데, 지금
화가 더욱 다급하게 되었으니, 청컨대 저를 결박하여 돌아가십시오. 아마도 화가 조
금은 늦춰질 것입니다.” 공이 또한 울면서 “네가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인데, 나는
차마 할 수가 없다. 너는 빨리 달아나지 않으면 죽음을 면치 못한다.”라 하였다. 언춘
이 거듭 청하길 “어찌 노비 하나의 목숨을 아까워하셔서 스스로 천금 같은 목숨을
버리려하십니까? 우리 나리께서는 효성스럽고 우애로우신데 이러한 악명에 빠지셨
으니, 제가 아니면 말하여 밝힐 수가 없습니다. 빨리 저를 묶어서 돌아가십시오.”라
하였다. 공은 하는 수 없어서 언춘의 허리에 줄을 묶어서 돌아왔다. 이에 대복은 혹독
한 형벌을 가하여 하지 않는 짓이 없었다. 대복이 묻기를 “너와 진사가 나를 해치려
고 모의했으나, 네가 숨김없이 말한다면 너를 풀어주겠다.”라 하였다. 언춘이 말하였
다. “우리 나리께서는 효성스럽고 또 공손하신 것이 옛 사람 같으시니, 차마 거짓을
말하여 살기를 도모하지는 않겠소. 살갗이 벗겨지고 살이 도려내어진다한들 또한 무
엇을 말할 것이 있겠소.” 곤장을 한 대 내려칠 때마다 문득 높은 목소리로 ‘우리 나리
는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소.’라고 말하였으니, 죽음에 이르도록 목소리가 끊어지지 않
았다.
158 第40輯(동양한문학회 2015.02)
죽었던 사람이 또한 드물거늘, 하물며 이러한 천한 노예로서 보잘 것 없는 부류
임에랴!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공이 효성스러움과 우애로써 옳은 일을 행하여
마음으로 따를 수 있도록 한 경우가 아니라면, 또 어찌 이런 사람을 얻을 수 있었
겠는가.38)
맞아죽으면서도 주인에게 충성을 다한 언춘을 기리는 이만부의 의중은
선비들을 향한 비판적 언급에 집약되어 나타난다. 언춘을 기리고 있지만,
사실은 언춘보다 못한 당대 士類의 행태를 비판하고, 언춘을 통해 忠의 이
념을 재확인하려 했던 것이다. 언춘을 기리는 전의 논찬이면서도 그 주인의
효성과 우애가 언춘을 그렇게 만들었다는 기록도 빠뜨리지 않고 있는 것은
이러한 이만부의 의식을 단면적으로 보이는 것이면서, 동시에 이 전의 궁극
적인 목표가 언춘을 묘사하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윤리적 도덕적 이
념을 유지하고 확대하려는 것에 있었음을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다.
대저 천하의 일 가운데 제일 흉한 것은 스스로 제 목숨을 끊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다. 자살하는 데 있어 취할 것이 뭐 있겠는가. 자살을 하려면 그것이 義에
합당한 경우여야 하는 것이다. 예컨대 남편이 猛獸나 盜賊에게 핍박당하여 죽었
을 때, 아내도 호위하다가 따라서 죽었다면 이는 열부이다. 혹 자신이 도적이나
癡漢에게 핍박당하여 강제로 욕보이려 할 때, 이에 굴하지 않다가 죽었다면 이는
열부이다. 혹 일찍 寡婦가 되었을 적에, 부모나 형제들이 자신의 뜻을 꺾고 남에
게 재가시키려 할 경우, 이에 항거하다가 역부족일 때 죽음으로 맞섰다면 이는
열부인 것이다. 또 남편이 원통한 한을 품고 죽자 아내가 남편을 위하여 울부짖
으면서 정상을 밝히려다 밝힐 수 없게 되어 함께 刑罰에 빠져 죽었다면 이는 열
부인 것이다. 지금은 이런 경우가 아니다. 남편이 편안히 天壽를 누리고 正寢에
서 조용히 운명하였는데도 아내가 따라 죽는다. 이는 스스로 제 목숨을 끊은 것
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이런 죽음이 義에 합당한 것이냐 하면 천부당만부당하
다. 나는 확고히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천하에서 제일 흉한 일이라고 여긴다.
38) 李萬敷, 孝子烈婦忠奴列傳, 息山集권20, 韓國文集叢刊제178집, 432쪽.“夫彦
春, 是何人者, 樂赴必死之地, 至死不變, 以白其主之寃. 夫士讀書講義, 受國家厚恩, 而
能死於王事者亦鮮, 况此賤隷下品者流乎? 雖然, 非公孝友行誼有以服其心者, 亦何以得
此哉!”
추앙받는 죽음과 조롱받는 죽음 - 신승훈 159
따라서 이미 의에 합당한 자살이 아니라면, 그것은 천하의 가장 흉한 일이 될 뿐
이다. 이것은 단지 천하의 가장 흉한 일인데도 官長이 된 사람들은 그 마을에 정
표하고 호역을 면제해 주는가 하면 아들이나 손자들까지도 요역을 감해 주고 있
다. 이는 천하에서 가장 흉한 일을 서로 사모하도록 백성들에게 권면하는 것이
니, 어찌 옳다고 할 수 있겠는가. 남편이 죽는 것은 한 가정의 불행이기는 하다.
그러나 늙은 시부모를 봉양할 사람이 없고 어린 자녀들을 양육할 사람이 없으면,
죽은 남편의 아내 되는 사람은 당연히 슬픔을 참고 생활에 힘써야 한다. 그리하
여 위로는 봉양할 사람이 없는 시부모를 봉양하다가 천수를 누리고 별세하면 장
사지내고 제사지내주며, 아래로는 양육할 사람이 없는 자녀들을 양육하다가 장
성한 나이가 되면 관례와 계례를 시키고 시집 장가보내주어야 되는 것이다. 이런
것인데 하루아침에 표독스럽게 ‘남편 한 사람이 죽었으니 내가 시부모를 위해 살
아야 할 이유가 없고, 남편 한 사람이 죽었으니 내가 자녀들을 위해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각박하게 생각하고는, 전후 사정을 전혀 돌아보지 않은 채 횃대
에 목을 매어 자살하고 만다. 이런 사람을 어찌 모질고 잔인하여 매우 효성스럽
지 못하고 자애롭지 못하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천하의 올바른 도리는 하
나뿐이다. 매우 효성스럽지 못하고 자애롭지 못하면서 유독 남편에 대해서만은
올바른 도리가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백성을 다스리는 관장이 되어 이런 사
람에게 그 마을에 정표하여 주고 호역을 면제해 주고 아들과 손자들에게까지 요
역을 감면하여 준다면 이는 매우 효성스럽지 못하고 자애롭지 못한 일을 백성들
에게 사모하여 본받도록 권면하는 것이 되니, 어찌 옳다고 할 수 있겠는가. 때문
에 열부가 아님은 물론이고, 소견이 좁은 소치인데 有司가 살피지 못한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살피지 못했다는 것은 그 죽음이 義에 합당한가에 대한 여부를 살
피지 못했다는 말이다. 혹 특별한 恨이 가슴속에 맺혀 있을 수도 있다고 했는데,
君子는 이런 점에 대해 말하지 않는 법이다.39)
39) 丁若鏞, 烈婦論, 與猶堂全書제1집 詩文集제12권, 한국문집총간제281집,
248~249쪽. “夫天下之事之凶, 未有甚於殺其身者也. 殺其身奚取焉? 唯殺其身當於義
是圖也. 夫爲虎狼盜賊所逼迫, 妻從而衛之死焉, 烈婦也. 或己爲賊人淫人所逼迫強之汚,
不屈而死則烈婦也. 或蚤寡, 其父母兄弟欲奪己之志以予人, 拒之弗能敵, 以死則烈婦也.
其夫抱冤而死, 妻爲之鳴號暴其狀不白, 竝陷刑以死則烈婦也. 今也不然, 夫安然以天年
終于正寢之中, 而妻從而死之, 是殺其身而已, 謂之殺其身, 當於義則未也. 吾固曰: ‘殺
其身, 天下之凶也.’ 旣不能殺其身當於義, 則是徒爲天下之凶而已, 是徒爲天下之凶者也.
而爲民上者, 且爲之綽其楔丹其榜復其戶, 蠲其子若孫繇役, 是勸其民相慕效爲天下之凶
也, 惡乎可哉! 丈夫死, 有家之不幸也, 或舅姑老無所養, 或諸子女幼, 無所乳育, 爲死者
妻者, 當忍其哀黽勉其生, 仰而養其無所養者, 至其死也, 爲之葬薶焉, 祭祀焉, 俯而育其
無所育者, 至其長也, 爲之冠笄焉嫁娶焉可也. 一朝悍然自刻于心曰: ‘一人死, 吾無所爲
160 第40輯(동양한문학회 2015.02)
丁若鏞의 이 글은 자살이 윤리적 도덕적인 문제를 반드시 수반하고 있음
을 잘 설명하고 있다. 정약용 역시 당대의 윤리적 이념에서 자유로울 수 없
었지만, 인간의 생명에 대한 존중의 입장에서 자살한 열녀를 논하고 있다는
점에서 示唆함이 있다. 또 고식적인 표창이 주는 문제에 대한 지적도 음미
해볼만하다고 생각한다. 자살에 대한 추앙과 찬사가 그 이면에 얼마든지 놓
치고 있는 진실이 있다는 점을 생각하게 한다는 점과 추앙과 찬사를 통해
자살한 열녀를 하나의 이상형으로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당대의 안목과 목
소리로 증언해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판단한다. 또 그 이상형이 잘못
된 허상일 수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자살은 평가되었고, 그것을 통해 상징적인 이미지가 된다. 상징적 이미지
는 기억을 통해 문학적으로 재생산되고, 사회의 결속력과 정체성을 유지하
는 힘이 된다. “列傳은 동일성을 후대에 전수하고, 국가를 위하여 사회적
지위와 합법적 신민을 생산하고 또 재생산할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역사
사건과 인물은 현재와 미래의 세대에게 본보기, 모델, 가치, 구실, 이상을 제
공한다.”40)는 지적은 위의 기록들에 드러나는 의도와 목표의 견지에서 음
미해볼만하다. 傳의 방식으로 자살한 사람의 행적을 기록하는 작가의 의도
와 목표는 도덕적으로 완성되어 위대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이상형의 초
상화를 그리려는 것이었다. 이 힘이 이념적으로 결속력이 강한 사회를 만들
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는 체제를 유지시키는 힘으로 환원되었음은 물론이
다.
2. 죽음에 보내는 조롱과 저주
舅姑矣. 一人死, 吾無所爲子女矣.’ 於是引吭自經于桁椸之下而弗與顧也. 若是者, 庸詎
非狼戾殘忍大不孝不慈者耶? 天下之道, 一而已. 未有大不孝不慈, 獨於夫得其道者也.
爲民上者, 且爲之綽其楔丹其榜復其戶, 蠲其子若孫繇役, 是勸其民相慕效爲大不孝不慈
也, 惡乎可哉! 故曰: ‘匪烈也隘也.’ 是有司者不察也. 不察也者, 不察乎其當於義否乎也.
或其別有恨在中者, 君子不言.”
40) 루샤오핑 지음, 조미원·박계화·손수영 옮김, 역사에서 허구로, 길, 2001, 160~161
쪽.
추앙받는 죽음과 조롱받는 죽음 - 신승훈 161
자살한 사람을 두고 절의나 열행, 효를 근거로 추앙하고 찬사를 보낸 것
에는 사회의 기강을 확립하고, 그것을 유지하여 확대시켜가려는 의도가 있
다. 그 반대의 경우 역시 자살자의 행적이 사회의 기강을 허물고, 그 사회가
추구해야할 이념적 가치에 훼손을 가한 것에 대한 징벌의 차원에서 저주와
조롱을 보냈다. 현상은 달라도 그 이면에 작동한 동인은 같은 맥락인 것이
다. 또 하나, 과거나 현재의 자살자에 대한 시각에서 드러나는 공통점은 자
살한 사람의 잘 알려진 정도에 관심의 크기가 좌우된다는 것이다. 이는 기
록의 유무와도 밀접하게 연관이 된다. 서양의 경우, 계몽주의 시대 이전의
유럽전역에서는 귀족과 성직자의 자살과 그 이외의 신분인 평민 또는 하층
민의 자살을 명백하게 이중적 잣대로 나누어 평가했다. 귀족과 성직자에게
는 고결한 죽음의 방식을 선택한 것으로 찬사를 보냈고, 평민이나 하층민에
게는 신의 존엄과 사회적 결속을 해친 중대한 범죄로 간주했던 것이다.
서양에서 신분과 종교적 위상을 기준으로 자살을 이분했다면, 동양 특히
조선의 경우에는 신분이나 종교적인 이유가 아닌 이념, 즉 사회와 집단이
추구하는 가치와 결속력을 근거로 판단하였다. 때문에 자살자의 신분이 아
무리 고귀해도 그가 살아서 행한 행적이 사회와 집단의 이념에 반하는 것
이었다면, 그는 어김없이 저주와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자살을 조
롱하거나 저주하는 사례는 반역을 도모했다가 실패하거나, 비윤리적이거나
부도덕한 행위에 대한 추궁에 압박을 느껴 자살한 사람들에게서 보인다. 조
선조 문집에 산견되는 많은 자살관련 자료 중에는 중국의 역사에서 일어났
던 사건을 하나의 典故로 활용하여 당대의 일을 논평하는 일종의 史評에
많이 등장한다는 사실도 특징적이다. 하지만 여기서 다루는 사례들은 우리
역사 그 중 조선조에 있었던 일을 기록한 것에 한정한다.
내가 늘 한스럽게 여기는 것은 하씨와 유씨의 장지를 모르는 것이네. 유씨가
목을 찔러 자살하자 관리가 추후에 그의 시신을 가져다가 찢었다 하는데, 처형된
시기가 같지 않아서 장지가 다른 것인지, 아니면 불행하게도 끝내 장지가 없는
것인지 그 당시의 일을 알 수가 없네. 그러나 이것은 애당초 강변 사람들의 전설
일 뿐 증거를 댈 만한 다른 고사가 없으니 후세의 의심이 어찌 꼭 없다고 할 수
162 第40輯(동양한문학회 2015.02)
있겠는가. 그러나 그 의심되고 의심되지 않는 문제는 논할 것이 없네. 우선 죽은
자를 위하여 묘를 수축하고 비석을 세워서 의심나는 점과 믿을 수 있는 점을 다
드러내어 영구히 소멸되지 않도록 해야 하네. 이렇게 하면 비록 천년 뒤에라도
그 의리를 비통하게 여기는 자가 당시의 일을 상상해 보고는 더욱 이에 대해 느
끼는 점이 있을 것이니, 또 자손을 위해서 이 일을 전할 필요가 있는 것뿐만은
아니라네. 이만 줄이네.41)
이 글은 許穆이 朴翊贊에게 死六臣의 무덤에 관한 질의를 받고 답해준
편지의 일부분이다. 윗글의 河氏와 柳氏는 河緯地(1412~1456)와 柳誠源
(未詳~1456)을 가리킨다. 유성원은 端宗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일이 발각
되자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하였다. 여기서는 癸酉靖難이나 단종의 복위를
도모한 일을 초점으로 삼지 않는다. 유성원이 자살하였고, 그의 시신이 훼
손되었으며, 그 묘소조차 만들어지지 않았던 일에 주목한다. 세조와 정난공
신의 입장에서 사육신은 逆謀를 꾀한 자들이었기에 무덤조차 만들어줄 수
없는 죄인이었다. 더욱이 유성원은 推鞫을 피해 자결하였기에 죄질이 더 나
쁜 것으로 판단되어 시신이 찢기는 가중처벌을 받았던 것이다.
시신을 훼손시키는 일은 동양이나 서양이 모두 행해왔던 일로서 死者를
경건히 모시던 전통과 그 맥락이 같은 일이다. 사자의 시신이 경건하게 모
셔져 정기적인 제향을 받게 함이 마땅하지만, 大逆의 죄인에게는 해당이 되
지 않는다. 반대로 그 시신까지 처벌하는 행위는 경건히 모시는 전통에 위
배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자와 시신을 숭배하는 전통과 의식이 없다면 그
또한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에 같은 맥락의 일인 것이다. “우러르든 짓밟든,
자기 권력의 정통성 확보가 초미의 관심사인 것이다. 역사를 살펴보면, 무
덤 파괴의 빈도도 사자 숭배 못지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42) 시신을 훼손시
41) 許穆, 答朴翊贊書, 記言권17, 한국문집총간제98집, 한국고전번역원, 1992, 93
쪽. “僕常恨之, 河氏柳氏不知葬處. 柳氏剄自殺, 吏追取屍磔之, 施刑先後不同, 收葬處
異耶? 抑不幸而終無葬處耶? 當時事不可知也. 然此其初江上人傳說而已, 無他古事可
徵, 後世之疑, 又惡可謂必無也. 然其疑不疑, 不須言也. 爲之修墓刻石, 疑信俱著, 令不
沒於久遠, 則雖千載之後, 有悲其義者, 亦想見當時事, 尤有感於斯者矣. 又不特爲子孫
傳此事而已也. 不宣.” 번역문은 한국고전번역원 DB를 사용하였다.
42) 울라프 라더, 앞의 책, 321쪽.
추앙받는 죽음과 조롱받는 죽음 - 신승훈 163
키고 무덤을 파괴한 일은 조선조의 역사에서도 확인하기 어렵지 않은 일이
었다. 즉 ‘剖棺斬屍’이다. 그 일의 정당성은 논의의 초점에서 벗어나기에 언
급하지 않는다. 그런 일이 벌어지게 된 動因이 무엇인지를 살피는 것이 목
표이기 때문이다.
서양에서는 “일반인 자살자에게 무죄가 선고되는 일은 결코 없었다. 그
들의 시체는 중세기적 엄정함으로 훼손되고 처형당했다. 범죄자, 사회의 아
웃사이더, 여행 중인 외국인의 시체는 초기 근대 사회에서 무척 잔인하게
처리되었다.”43) 귀족이나 성직자에게 면죄시켰던 자살의 죄를 일반인, 즉
평민이나 하층민에게는 철저하게 적용하여 처벌하였던 것이다. 여기에는
이들의 노동력을 경제적 가치로 환산시켜 인식하던 사회경제적 이유도 있
지만, 그보다 본질적으로는 신의 섭리를 부정한 죄를 더 크게 적용시켰던
당대의 교회권력 때문이다. “자살이 신이 부여한 고통에 종지부를 찍는 일
이기 때문에 기독교는 자살을 거부했다.”44) 사는 동안 신이 부여한 고통을
감내하며 신의 섭리를 따라야만 하는 교리를 배반했다는 것이 처벌의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자살자의 처벌을 공개하
여 이러한 일, 즉 자살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한 조치는 비정하다 못해
참혹하였다.
자살의 죄와 영원한 저주를 많은 사람들에게 공개하기 위해, 교회는 무시무시
한 짓도 서슴지 않았다. 1718년, 프랑스 곤티에 성에서 열여섯 살 소녀 마리 자겔
랭이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 그녀는 임신 중인 미혼모였다. 그녀는 처음에 정상
적으로 장례를 치러 땅에 묻혔다. 그러나 그녀가 자살한 사실이 나중에 밝혀지자
사람들은 그녀의 시체를 다시 꺼내 거적에 둘둘 말아 온 마을을 질질 끌고 다녔
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형 집행인이 시체의 배를 갈라 태아
를 꺼냈다. 어미 뱃속에 있던 태아는 엄마가 저지른 죄와 상관이 없다고 판명되
어, 세례도 받기 전에 사망한 아이들을 묻는 교회묘지에 따로 묻혔다. 그러나 마
리 자겔랭의 시체는 나무에 거꾸로 매달아 놓았다가 화형시켰다.45)
43) 게르트 미슐러, 앞의 책, 95쪽.
44) 위의 책, 113쪽.
45) 게르트 미슐러, 위의 책, 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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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과 서양 중에 어느 쪽이 더 자살한 자의 시체를 잔혹하게 처리했나
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시체를 훼손함으로써 얻어내려는 효과에 대해 양
쪽이 모두 같은 생각을 했음을 말하려는 것이다. 유성원의 시신을 훼손시킴
으로써 얻으려했던 효과가 마리 자겔랭의 시체를 모욕하고 훼손함으로써
얻으려했던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一罰百戒, 그 이상
도 그 이하도 아니다. 다만 미세하게 보자면, 서양이 종교적인 이유를 근거
로 했고, 조선의 경우 忠逆의 구분을 근거로 했다는 차이가 있다. 忠逆의
구분은 사회가 지향하는 가치, 즉 이념에 입각한 판단이다. 이 판단은 영구
불변한 것이 아님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사육신의 경우도 마
찬가지이다. 당시의 집권세력의 판단, 다른 표현으로 권력을 가진 세력의
판단과 의중이 가장 중요한 이유이자 근거였다. 세월이 흐르고 당시의 첨예
한 구분이 느슨해지면, 바뀔 수도 있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모든 사례가 꼭
그렇지는 않았음도 우리는 알고 있다.
11월에 윤원형이 죽었다. 윤원형이 실직하자 백성들은 거리에 모여 욕하며 돌
과 기와조각을 던지고, 심지어 쏘아 죽이려 하는 자까지 있었다. 윤원형이 몰래
交河로 갔으나, 원한을 품은 집안에서 추적해올까 두려워, 다시 몰래 江陰으로
옮겨갔다. 그 첩 蘭貞과 매일 울분을 머금고 서로 마주보며 울었다. 이때 윤원형
의 전처 김씨의 계모인 姜氏가 刑曹에 글을 올려 난정이 金氏를 독살한 것을 고
발하였다. 인륜의 大變이니 형조에서 판결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義禁府로 넘
겨 연루자를 잡도록 임금께 아뢰었다. 兩司와 玉堂에서 난정을 禁府에 하옥시키
자 청했으나, 임금이 차마 처벌할 수 없어서 오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난정이
이 말을 듣고 몹시 겁을 먹고 있는 터에 어떤 사람이 禁府都事가 온다고 잘못
전하자, 난정이 놀라 약을 먹고 자살하였다. 윤원형이 몹시 애통해 하다가 오래
지 않아 그도 또한 죽으니, 듣는 사람들이 서로 慶賀하였다.46)
46) 李珥, 明宗大王二十年, 石潭日記上, 한국고전번역원 DB. “十一月尹元衡死. 元
衡旣失職, 百姓聚于街路, 罵詈投瓦石, 至有欲射殺者. 元衡潛往交河, 又恐怨家尋逐, 遂
潛徙于江陰. 與其妾蘭貞, 日日含憤對泣. 時元衡前妻金氏之繼母姜氏, 呈狀于刑曹, 告
蘭貞毒殺金氏, 刑曹以爲綱常大變, 非該曹所能決, 啓移于禁府, 追捕辭連者. 於是兩司
玉堂請下蘭貞于禁府, 上不忍寘法, 久未允兪. 蘭貞聞之甚懼, 人或誤傳禁府都事來矣,
추앙받는 죽음과 조롱받는 죽음 - 신승훈 165
매관매직과 전횡을 일삼던 윤원형, 그의 뒤에서 나쁜 일을 도모하고 행하
기를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저지르던 정난정, 이들의 죽음을 두고 당시
의 사람들은 서로 축하할 정도라는 것이 기록이 전하는 사실이다. 그들의
악행에 관해 사실여부를 재론함은 목표가 아니다. 그들 특히 난정의 자살을
두고,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서로 축하했다고 전하는 기록의 시각을 말
하고자한다. 권력의 말로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지만, 죽음을 두고 경하
했다는 기록은 조롱의 시각을 담고 있음이 분명하다. 李珥가 난정의 자살과
윤원형의 죽음을 간접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사람들이 경하하더라고 전한
이유는 일차적으로 그들이 사라진 권력이었기 때문이었고, 본질적으로 그
들의 행적이 사회와 집단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당
시 氣槪가 있어 저항하고 비판했던 몇몇의 예외를 빼고, 윤원형이 권력을
쥐고 있던 날에는 생각조차 할 수도 없는 일이었을 사태를 전하고 있는 것
이다.
사실 꼭 윤원형과 정난정이 아니라도 똑같은 일은 발생했을 것이다. “정
확히 말해서 그가 살아서 누구였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는 사실상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해당 인물이 소속 집단에 대해 갖는 상징성이다.”47) 윤
원형은 부패한 관료, 전횡을 일삼던 인척,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난
봉꾼의 상징이었고, 정난정은 권력에 기생한 표독스러운 여성의 상징이었
던 것이다. 이 상징에 돌팔매를 하고 욕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조선이
이념적 긴장을 통해 건강한 정화를 어느 정도는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문
제는 이러한 상징을 만들고 계속 재생산하는 문학의 기능이다. 이이의 기록
을 비롯하여 이후 윤원형과 난정은 계속적으로 이러한 상징의 대명사가 된
다. 기록을 통해 기억하고 다시금 사회와 집단의 이념적 정체성을 확인하는
계기로 작동하게 되는 것이다. ‘인척이 권력을 쥐면 안 된다.’ ‘사리사욕으로
정권을 농단한 자는 천벌을 받게 된다.’는 담론을 형성하는 데에 이들의 상
蘭貞大驚, 飮藥自盡. 元衡大慟, 不久亦死, 聞者相賀.”
47) 울라프 라더, 앞의 책, 375쪽.
166 第40輯(동양한문학회 2015.02)
징은 적극 활용된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부정적인 것도 반복했다.
柳西厓와 柳永慶은 첩 동서 지간으로 모두 영상이었다. 서애는 배척을 받고
파직되어 고향에 돌아가 죽었고, 영경은 죄를 짓고 외방으로 유배되었다가 자살
하였다. 姓도 같은 柳氏이고 벼슬도 같은 영상이었지만, 薰과 蕕의 구분이 있으
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48)
許筠(1569~1618)의 기록이다. 柳成龍(1542~1607)과 유영경(1550~16
08)을 비교하고 있는데, 유성룡에게는 찬사를 유영경에게는 조롱을 보내고
있다. 유영경은 小北의 영수로서 영창대군을 옹립하려하다가 大北이 정권
을 잡고 광해군의 집권이 이루어지자 유배되었다가 자살하였다. 그의 행적
에 구린내가 난다는 蕕를 들먹이며 조롱할 정도의 잘못이 있었는지는 논외
로 한다. 유영경의 姓과 비슷한 음이 나는 蕕를 거론한 것에 기록한 허균의
약간의 文才를 볼 수 있는 이외에 특별한 것이 없는 기록이다. 주목하려는
것은 허균이 유영경의 자살을 조롱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각한 領相으로
서 자신의 정치적 생명이 끝났다는 것을 안 유영경으로서는 달리 선택할
길이 없었을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이 왜 조롱거리가 되어야하는가는 짚어볼
필요가 있다.
허균이 이 글을 쓴 시기는 그의 생몰연대와 유영경이 자살한 연도로 유
추해보자면 광해군집권기(1608∼1623)이다. 내용의 사실여부와 상관없이
이 기록은 새로운 권력에 동조하고 아첨하는 것임을 쉽게 알 수가 있다. 새
로운 권력집단/대북과의 동질감을 표현하고, 잠정적인 우군세력/남인에게
도 화해의 몸짓을 보내고 있는 글인 것이다. 허균은 이 기록을, 정확히는
유영경과 유성룡을 이용하여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확보하려는 의중을 담
아내었다. 여기서 허균을 비난하려는 의도는 없다. 이러한 글과 이러한 행
48) 許筠, 柳西厓柳永慶妾同壻俱官領相, 惺所覆瓿稿卷之二十三說部二, 한국문
집총간제74집, 한국고전번역원, 1991, 340쪽. “柳西厓與柳永慶妾同壻. 俱官領相, 而
西厓被斥, 罷官還鄕卒, 永慶以罪流外自盡, 俱是姓柳俱首揆, 而亦有薰蕕之分, 眞可笑
也.”
추앙받는 죽음과 조롱받는 죽음 - 신승훈 167
태가 일반적인 원리에 의해 작동된 결과임을 말하려는 것일 뿐이다. 과거의
권력이 사라지고 새로운 권력이 들어서는 즈음에, 새로운 권력을 창출하는
데에 주도적이지 못한 자가 새로운 권력으로 편입되는 방법은, “당대의 권
력 체계에 가능한 착 달라붙어 연계성을 과시하든가, 그게 아니라면 대중의
뇌리에서 권력에 대한 일체의 흔적을 말살해버려야 한다. 이게 어렵다면,
최소한 전임자의 신망에 큰 흠집을 내고 왁자하게 떠들어대야 한다.”49)는
것에 다름 아니다. 허균은 이러한 맥락에서 유영경을 조롱하며 대북정권과
광해군에게 신호를 보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근래 어떤 선비가, 그 아버지가 죽은 뒤에 계모가 음행이 있어 그 친정을 왕래
하면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 말이 퍼져나가자 마침내 목을 매어 자살했다. 선비
가 계모를 위해 服을 입지 않자, 사람들은 “어미가 죽어도 복을 입지 않는 자”라
하여, 그대로 그렇게 절교하여 왕래하지 않은 채 일생을 마치게 하였다. 이제 주
자가 말한, ‘그 아버지의 처지에서 생각해 보았는가’로서 따져본다면, 선비도 차
라리 관청에 고한 뒤에 복을 입지 않았다면, 죄가 없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
다.50)
계모의 음행을 드러내어 관청에 고발하지도 못하고, 음행이 밝혀져 소문
이 나서 계모가 자살하자, 그녀를 위해 복을 입을 수도 없는 처지의 士人을
두고, 李瀷은 그 아버지의 입장에서 생각하라고 비슷한 경우를 두고 언급한
朱子의 말을 근거로 말하고 있다.51) 이익은 선비의 처지에서 그가 관청에
49) 울라프 라더, 앞의 책, 328쪽.
50) 李瀷, 繼母, 星湖僿說권12 人事門, 星湖全書5, 여강출판사, 1984, 427~428쪽.
“近有一士人, 父沒後, 其繼母亂行, 往來其本家生子, 說播, 遂自縊死. 士人不爲之服, 人
謂: ‘母死不服.’ 遂廢錮終身. 今以朱子所謂與其父思量者, 論之, 士人寧告於官司, 然後
不服則爲無罪耶? 是未可知.”
51) 주자는 “옛날 절동창(浙東倉)을 맡고 있을 때 소흥(紹興)지방에 어떤 계모가 그 아
버지의 고종 아우와 정을 통해 그 고종 아우가 군서방[接脚夫]이 되어서 그 집 재산
을 제멋대로 사용하여 파산지경에 이르자, 그 아들이 분노하여 와서 하소연하기에,
처음에는 명분상 불편함을 내세워 기각했더니, 수십 리 밖까지 뒤따라오는 그 정이
너무 절박하므로 드디어 처리하기로 결정했는데, 양경중(楊敬仲)이, ‘아들로서 계모
를 소송하는 것은 미안하다.’고 말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일찍이 그 아버지된 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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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발을 먼저 했더라면 어땠을까 라고 동정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다. 사실
선비의 입장에서는 난처한 점이 분명 있었다. 또 주자의 말을 근거로 처신
했더라면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여기서는 시
선을 그 계모에게로 옮겨보자. 그녀가 자살한 것은 당대의 윤리적 기준에서
도저히 용납되지 못할 일을 저질렀고, 또 그 일이 소문으로 퍼져나갔기 때
문이다. 주자의 말대로 선비의 아버지가 살아있었다면, 간음으로 불륜을 저
지른 것이 된다. 이래저래 용납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또 문제적인 것은
그 선비가 계모를 위한 복을 입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종신토록 廢錮를 당
했다는 것이다. 음행을 저지른 계모를 위해 복을 입기가 난처했던 선비의
입장이 죽은 계모를 위해 복을 입어야한다는 윤리적·예학적 판단에 의해
논죄되었다는 사실이다. 당대인의 의식은 이유야 어떻든 어머니를 위해 복
을 입어야 한다는 쪽으로 기울었던 것이다. 난처하고 복잡한 문제를 주자는
명쾌하게 답을 주었지만, 그렇게 처신하지 못한 선비는 종신토록 용서를 받
지 못했다. 계모와 선비, 모두가 당대의 윤리적 판단에 의해 압박을 받고
논죄를 당했던 것이다.
자살한 자의 행적이 윤리적 適否性에 의해 판단되고, 그것을 기준으로 조
롱과 저주의 대상이 되느냐 아니면 추앙과 찬사의 대상이 되느냐가 갈라졌
던 것이다. 윤리적·이념적 適否가 조선조 문집에 나타난 자살을 보는 두 가
지 시선의 기준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신분과 종교적 이유가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었던 서양의 중세와는 명확히 다른 점이라 할 수 있다. 신
분이나 종교보다 이념과 윤리에 의한 이분법이 더 우월할 것도 없고, 더 열
등할 것도 없다. 무엇에 의한 것이든 이분법적 사고와 시각이 엄존했다는
사실이 중요하고, 그 이분법의 이면에 집단의 결속력과 권력과의 연계를 고
려하는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었다는 점이 더 중요하다.
에서 생각해 보았는가? 그 아버지가 죽은 뒤에 그 아내가 남과 정을 통하여 그 집
재산을 탕진했는데도, 관청에서 만일 근치(根治)해 주지 않는다면, 그 아버지가 땅
밑에서 원통하게 여기지 않겠는가?’고 하였노라.” 하였다. - 이익, 계모. 성호사설
인사문, 한국고전번역원 DB.
추앙받는 죽음과 조롱받는 죽음 - 신승훈 169
III. 결론
“문학 텍스트는 필연적으로 사회적, 역사적, 제도적 기원 안에서 배태된
다. 역사 문맥과 분리된 텍스트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우리는 남아있는 텍스트 기록을 통하지 않고는 역사적 과거를 직접적으로
접할 수 없다. 역사는 서사화와 텍스트화를 통해서만 자신을 드러낼 수 있
다.”52) 자신을 드러낸 역사를 우리는 제대로 읽어낼 수 있는가를 생각해보
려는 것이 본고의 최종적 목표였다. 우선 필자 자신이 맹렬한 자기비판 앞
에 서야겠다는 생각이 이 자리에 서는 무모한 용기를 내게 했다.
자살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각, 추앙과 찬사 그리고 조롱과 저주는 동양
과 서양이 공통적으로 견지했던 반사경이었다.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사물
을 빛으로 되비추어내는 도구였던 것이다. 이 이분법적 반사경을 통해, 자
살로 죽음에 이른 자가 아니라 살아남아 그들을 기억하고 그들을 자신의
삶에 그 무엇인가로 활용했던 이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면 다행이겠다.
끝으로 자살을 논제로 삼으며 끊임없이 괴로움을 선사했던 글귀를 인용함
으로써 마무리한다.
자살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은 자살을 경멸하고 이를 금지
하는 것만큼 인간을 모독하는 짓이다. 개인을 자살이라는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
넣는 사회는 개인에게 자살할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 사회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존엄성을 빼앗았다. 둘 다 개인이 자신의 운명을 주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권
리를 유보했기 때문이다.53)
투고일: 2015-01-09 / 심사기간: 2015-01-26~02-06 / 게재확정일: 2015-02-12
52) 류샤오핑, 앞의 책, 252쪽.
53) 게르트 미슐러, 앞의 책, 2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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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앙받는 죽음과 조롱받는 죽음 - 신승훈 171
Abstract
Respected Death And Ridiculed Death*54)
Shin, Seung Hun**55)
A suicide was valued and by valuation, it became a symbolic image.
A symbolic image was literally reproduced by memories, and it became
the power that maintained the social solidarity and identity. The writer
intended to record the achievements of suicide’s life time in a form of a
biography. So the writer intended to describe the ideal portrait that was
morally completed and that could demonstrate its great power. This
power could ideologically strengthen the social solidarity, so it was surely
restored to the power that maintained the system of the society.
By means of the judgement, the judgement was as following. The
achievements of suicide’s life time were in accord with moral principles
or not. By means of the standards, the standards were divided into two
objects. One was the respected and praised death. The other was the
ridiculed and cursed death. The moral and ideological accord or
inconsistence became two standards on suicide in the collection of works
in Chosun Dynasty. These standards were definitely different from the
standards of Western in the Middle Age. In the Middle Ages, Western
people put the highest value on the social position and religion. It was an
important fact that the dichotomy of thinking and view existed. And it
was a more important fact that the mechanism was closely connected
with group solidarity and authority, and operated inside of the dichotomy.
* This research was supported by Kyungsung University Research Grants in 2014
** Professor of Korean Literature in Classical Chinese, Kyungsung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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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 kinds of views on a suicide, the respected and praised death vs.
the ridiculed and cursed death, were the common reflecting mirror that
Eastern and Western societies maintained firmly. It was not the very
object, but the tool that turned back to reflect the object with light.
Through this dichotomous reflecting mirror, we could see the figure of
suicides and survivals who used the meaning of death in their lives as
well.
Key words : suicide, death, symbol, image, society, solidarity, moral
principle, ideology, religion, social position, dichotom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