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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장서운동의 전개와 영남지역의 숨은 협력자들*
47)徐東一**
Ⅰ. 머리말 Ⅱ. 영남지역 협력자의 구성과 특징 Ⅲ. 영남지역 협력자의 시기별 역할 Ⅳ. 1910, 20년대 유림 독립운동의 연속과 단절 Ⅴ. 맺음말
•국문초록 본 논문은 파리장서운동에 참여한 인물 가운데 영남지역에서 보조적인 역할을 수 행했던 인물들의 인적 구성과 활동 내용을 살펴본 글이다. 이들은 파리장서운동을 추진한 인물이나 파리장서에 서명한 인물에 비해 덜 알려져 있으나, 파리장서운동의 역동적 전개와 ‘제2차 유림단 의거’로 불리는 후속 활동에 기여한 인물들이었다. 따 라서 이들에 대한 연구는 1919년부터 1920년대 걸친 유림 독립운동의 연속과 단절 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이들은 파리장서운동에 협력하는데 있어 시기별로 역할을 달리 하였다. 제1기에 는 스승 또는 지방의 유림지도자에게 운동의 개요를 설명하고 참여를 권유하는 한 편 독립청원서의 집필을 요청하는 역할을 수행했고(곽윤․김황․장시원․송규선․ 송수근), 제2기에는 독립청원서 서명자 명단을 모으고 자금을 모집하며 각지의 운동 진행결과를 지도층에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으며(김황․송규선․정종호․하익진․이 기철), 제3기에는 김창숙의 국외파견활동을 지원하는 임무를 맡았다(이현덕․박돈 서․박광).
* 이 논문은 2014년 11월 28일 서울 서초구 심산기념관에서 열린 ‘파리장서운동 95주년 기념 학술회의’에서 발표한 것을 수정․보완한 것이다. ** 국가보훈처 연구원 大東文化硏究 제89집 - 506 -
이들은 파리장서 서명자들이 감당할 수 없는 세세한 영역까지 파고들어 서명자 규합, 자금 모집, 출국 지원 등 다양한 역할을 성곡적으로 수행함으로써 김창숙의 출국을 가능케 하였다. 뿐만 아니라 파리장서운동에서의 이런 다양한 경험은 이들 이 1925,6년 김창숙이 기획한 독립운동기지 건설운동에 주역으로 참여할 수 있는 경험적 토대가 되었다. 이들은 1920년대 초 유교계의 독립운동에 대한 소극적인 태 도에도 불구하고 영남 유림의 인적망을 최대한 활용하여 숙련된 기술로 자금 제공 을 요구하고 김창숙의 재출국을 도왔으며 나석주의거를 성사시키는 동력을 제공하 였다.
•주제어 독립운동, 파리장서운동, 협력자, 김창숙, 김황, 곽윤, 송규선 파리장서운동의 전개와 영남지역의 숨은 협력자들 - 507 -
Ⅰ. 머리말 비단 일제시기가 아니더라도 한 시대의 정치조직과 비밀결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는 행동강령과 함께 그 조직을 이끈 인물에 대한 분석이 필수적이 다. 그런데 이런 핵심적인 인물의 주변에는 이들이 지시하는 사항을 충실히 이행하는 인물들이 있다. 이들은 대개 피동적인 인물로 묘사되지만, 때로는 운동의 성패를 가르는 활약을 보이고, 일정한 시간이 흐른 뒤에는 한 조직을 이끄는 지도자로 성장하기도 한다. 따라서 조직의 운영 원리와 시대적 추이를 파악하고자 한다면 그 조직의 핵심적인 인물뿐만 아니라 주변부의 인물에 대 해서도 심층적인 조사가 필요하다. 한국근대사에서 파리장서운동1)은 흔히 근대 유림의 세계관과 독립운동 방 략의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으로 평가된다.2) 그런데 위에서 제기한 문 제의식은 파리장서운동의 연구에도 유용하다고 할 수 있다. 파리장서운동의 지 도자였던 곽종석․김복한․장석영․송준필 등이 높은 연령, 건강 악화, 개인 사정으로 인해 정상적인 표면활동이 어려웠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과거의 연구에서 이에 관한 문제의식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다. 1960년대 의 선구적 연구에서는 ‘連署人에는 들지 않았지만 경향 각지에서 모의․연 락․추진에 중추적 역할로써 진력한’ 인물로 成泰英․李中業․郭奫․金佑 林(金榥)․兪鎭泰․尹中洙․趙重憲․林敬鎬․李得年․金昌鐸․李敎 仁․李弼鎬․裵錫夏․安鍾黙․李潤․崔海潤등 16명이 언급되었다.3) 1) 본 논문에서는 1919년 김창숙․곽종석이 중심이 되어 펼친 유교계 독립청원운동을 상황에 따라 ‘파리장서운동’ 또는 ‘독립청원운동’로 나누어 표현했다. 김창숙․곽종석 계열 또는 유교계 독립청원운동이 단일화된 3월 하순의 시각에서는 ‘파리장서운동’ 이란 표현이 적절할지 몰라도, 3월 초 유교계의 여러 계열에서 독자적으로 준비한 독 립청원운동을 ‘파리장서운동’으로 통칭하는 것은 파리장서운동의 역사성을 과장하는 것이라 판단되기 때문이다. 2) 趙東杰, 巴里長書의 성격과 역사적 意義, 韓國近現代史의 理解와 論理, 지식산업 사, 1998, 96~99면; 권오영, 조선 후기 유림의 사상과 활동, 돌베개, 2003, 436면. 3) 許善道, 三․一運動과 儒敎界, 三․一運動50周年紀念論集, 東亞日報社, 1969, 298면. 大東文化硏究 제89집 - 508 - 또한 서울 장충단공원에 일명 ‘파리장서비’가 세워질 때 간행된 韓國儒林 獨立運動巴里長書略史(1973)를 보면 ‘서명자 이외의 활동자’로 김창숙 등 22명이 보인다.4) 1960,70년대의 독립운동사 연구성과를 압축적으로 소개했다 고 평가받는 독립운동사 제2권(1976)에는 ‘서명자 이외의 인물들’로 김창숙 등 20명이 소개되었다.5) 그런데 한국유림독립운동 파리장서약사와 독립 운동사 제2권에 소개된 20여 명은 1960년대의 연구에서 언급된 인물에, 충청 도 출신 3명(黃佾性․李永珪․田溶彧)을 추가한 것이다. 한편 2000년 이후 연구에서는 김황․곽윤 뿐만 아니라 金震相․朴膺鍾․尹正洙등 새로운 인 물도 일부 소개되었다.6)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인물에 대한 학계의 관심은 전반적으로 부족하다. 관심도 파리장서운동을 기획한 인물(김창숙․김정호․성태영․윤충하․이중 업)7)이나 이 운동을 도운 소수 인물(김황․곽윤)8)에 국한되어 있다. 최근에 는 이들을 세분화하여 ‘파리장서운동의 추진세력’(11명)과 ‘협력자’(52명)로 분류한 시도9)가 있었지만, 이름을 확인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이처럼 파리장서운동의 주변부에서 활동한 인물에 대해 관심이 부족했던 것은 이들의 역할을 과소평가하는 시각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또한 연구의 4) 김창숙, 성태영, 유진태, 임경호, 이중업, 곽윤, 윤충하, 윤중수, 조중헌, 이득년, 김창 택, 이교인, 이필호, 배석하, 안종묵, 이윤, 최해윤, 황일성, 이영규, 전용학, 김정호, 김 호연 등이다(韓國儒林獨立運動巴里長書碑建立委員會, 韓國儒林獨立運動巴里長 書略史, 1973, 44면). 5) 김창숙, 성태영, 유진태, 임경호, 이중업, 곽윤, 김황, 윤충하, 윤중수, 조중헌, 이득년, 김창택, 이교인, 이필호, 배석하, 안종묵, 이윤, 최해윤, 황일성, 이영규, 전용학, 김정 호 등이다(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8, 1976, 930면). 6) 林京錫, 파리장서 서명자 연구 , 大東文化硏究 38, 大東文化硏究院, 2001, 448~450면. 7) 서동일, 파리長書運動의 기원과 在京儒林, 한국독립운동사연구 30, 한국독립운동 사연구소, 2008. 8) 金龍基, 三․一獨立運動과 巴里長書事件에 對하여 , 文理大學報, 釜山大文理科大 學, 1959; 許善道, 앞의 1969 논문; 南富熙, 儒敎界의 巴里長書運動과 3․1運動, 한 국의 철학 12, 1984. 9) 서동일, 1919년 巴里長書運動의 전개와 역사적 성격 ,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 문, 2009, 102면. 파리장서운동의 전개와 영남지역의 숨은 협력자들 - 509 - 흐름상 ‘한국유교대표’를 자처한 파리장서 서명자에 대한 연구가 선행되어야 했던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관련 사료가 부족한 것도 아쉬운 점이다. 사료에 서는 이들의 이름만 단편적으로 언급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한계는 차츰 개선되어 가고 있다. 이제 파리장서운동에 관한 연구는 운동의 전개과정과 서명자의 활동에 대 한 사실적 이해의 수준을 넘어 파리장서 문안의 세부적인 수정과정,10) 파리 장서운동 추진세력의 형성 배경,11) 파리장서운동의 지역적 전개12) 등 미시적 인 분야로 확대되고 있다. 더욱이 새로운 사료의 발굴로 특정 시점, 사건에 대한 다면적 이해가 가능하게 되었다. 본 논문은 이러한 연구성과를 최대한 활용하면서 그동안 무관심의 영역에 있던 파리장서 非서명자들, 특히 영남지역에서 파리장서운동의 기획이나 파 리장서 서명 이외의 일을 맡은 ‘협력자’13)의 구성과 역할에 대해 살펴보고자 10) 林京錫, 유교지식인의 독립운동―1919년 파리장서의 작성 경위와 문안 변동 , 大 東文化硏究 37, 大東文化硏究院, 2000. 11) 서동일, 앞의 2008 논문. 12) 吳世昌, 巴里長書와 宋浚弼, 한국근현대사연구 15, 한국근현대사학회, 2000; 金 祥起, 金福漢의 洪州義兵과 파리長書運動, 大東文化硏究 39, 大東文化硏究院, 2001; 권영배, 성주지역의 3․1운동과 파리장서운동 , 계명사학 23, 계명사학회, 2012; 권영배, 경북지역의 파리장서운동 , 안동대 안동문화연구소, 경북독립운동 사 Ⅲ(3․1운동), 경상북도, 2013; 김희곤, 성주지역의 독립운동과 성격 , 한국독 립운동사연구 46,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3; 김상기, 林翰周의 思想과 獨立運 動, 한국독립운동사연구 47,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4. 13) ‘협력자’라는 용어는 사전적으로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하나는 일반적인 맥락에 서 어떤 활동에 이 활동을 주도하는 인물과 동등한 자격으로 협조한 인물(cooperator) 이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적인 맥락에서 戰時또는 식민지하에서 침략세력 에 자발적으로 협조한 인물(collaborator)이라는 의미이다. 이 논문은 전자의 의미를 취했는데, 일제시기 독립운동을 주제로 한 연구에서 ‘협력자’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자칫 친일세력을 의미하는 것으로 誤讀될 우려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이 용어를 사용한 것은 이들 중 일부는 ‘심부름꾼’에 그치지 않고 때로는 ‘기대 이상’의 적극적인 활동을 벌여 파리장서운동의 추진세력이나 파리장서 서명자 이상 의 활약을 보였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을 협조자, 조력자, 보조자 등 부 수적인 역할을 의미하는 용어로 제대로 담아내기 어렵다는 점도 고려되었다. 大東文化硏究 제89집 - 510 - 한다. 독립청원운동이라는 독립운동 형태는 단순히 서명행위나 문서내용에만 집중할 경우 자칫 독립운동의 성격과 이념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게 된다. 따 라서 이들 인물에 대한 연구를 통해 파리장서운동의 역동적인 전개과정과 더 불어 이들의 활동이 지닌 역사적 의미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Ⅱ. 영남지역 협력자의 구성과 특징 1. ‘협력자’의 개념과 범위 파리장서운동에 참여한 인물들은 활동시기와 내용에 따라 대체로 추진세력, 서명자, 협력자의 세 집단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들의 역할은 다음과 같다. 첫째, 파리장서운동의 추진세력은 파리장서운동을 기획했다. 이들 중 한 부 류(윤충하․김창숙 등)는 1919년 2월 하순~3월 초순14) 경성15)에서 유교계 의 독립청원운동을 기획하고 지방의 유림지도자에게 자신들의 의사를 피력한 후 이 운동을 표면화시켰다. 다른 한 부류(유진태․이득년 등)는 3월 하순 곽 종석 중심의 유림단과 김복한 중심의 유림단이 독립청원운동을 준비하고 있 는 모습을 목격하고 양측의 만남을 주선하여 단일화시켰다. 둘째, 파리장서 서명자는 파리장서운동을 기획한 인물들의 권유에 따라 훗 날 ‘파리장서’라 불린 독립청원서에 서명했다. 총 137명16)이었다. 셋째, 파리장서운동의 협력자는 파리장서운동을 기획한 인물이나 파리장서 서명자의 요청에 따라 실무적인 역할을 맡은 인물을 총칭한다. 과거에는 흔히 ‘연락책’, ‘자금모집책’으로 불렸다. 이들은 서명자에 비해 대외적인 명망도는 14) 이하, 날짜는 양력을 사용하고, 원자료에 음력으로 기재된 것은 양력으로 환산하여 기술하였다. 15) 이하, 일제시기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16) 137인의 성명은 俛宇集 4, 附錄, 俛宇先生年譜권3, 亞細亞文化社, 1984, 762~763면 참조. 파리장서운동의 전개와 영남지역의 숨은 협력자들 - 511 - 낮았으나, 이들의 기여로 말미암아 파리장서운동의 확산이 가능했다. 즉 파리 장서운동의 이념은 이들을 통해 지방유림에게 확산된 것이었다. 위의 세 집단 중 ‘협력자’에 포함되는 인물들의 행적은 일부 사료에서 발견 된다. 박은식은 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서 파리장서운동의 ‘초기 모의자’로 郭大淵즉 郭奫을 언급했다.17) 이 책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료편찬위원회 가 편찬한 韓日關係史料集과 사료편찬위원회의 특별위원으로 활동한 金 秉祚의 韓國獨立運動史略을 참고18)했으므로, 이를 통해 상해에 도착한 김창숙이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 인사들을 상대로 파리장서운동을 적극 선전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934년 경상북도경찰부가 편찬한 高等警察要史에는 파리장서운동이 ‘儒 林代表의 獨立請願事件’으로 명명되어 있는데, 체포된 ‘사건관계자’ 20명의 성명이 언급되어 있다.19) 이 중 협력자로 분류할 수 있는 인물은 金熙琫, 宋 圭善, 李基完, 張鎭洪, 李柄喆, 呂相胤, 李定基등 7명이다. 경찰서․검사국 의 조사기록이나 법원의 재판기록이 파리장서운동의 실체를 정확히 보여준다 고 보기는 어렵지만, 총독부 사법기구가 베일에 가려져 있는 협력자들을 어느 선까지 파악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운동을 주도한 김창숙은 어떤 인물들을 언급했을까. 이에 대해선 김창 숙 사후에 간행된 躄翁一代記(1968)가 참고된다. 이 책은 김창숙이 남긴 회고기를 토대로 서술된 것으로 보이는데, ‘137인 이외에도 음으로 양으로 독 립운동을 도왔던지 혹은 독립운동의 주동자로 가담하여 활약하다가 대옥사 사건에 관련되어 많은 고생을 한 사람’으로 16명이 언급되었다.20) 이 중 협력 자로 구분할 수 있는 인물은 郭大淵(곽윤), 최해윤, 이교인, 이필호, 배석하, 金昌鐸, 안종묵, 이윤, 김우림 등 9명이다. 대체로 한국유림독립운동 파리장 서약사(1973)와 독립운동사(1976)에 언급된 인물과 중복된다. 달리 말하 17) 朴殷植, 朴殷植全書 上, 韓國獨立運動之血史, 檀國大出版部, 1975, 602면. 18) 김희곤, 해제 ,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7, 국사편찬위원회, 2005, ⅴⅱ~ⅹⅵ면. 19) 慶尙北道警察部, 高等警察要史, 1934, 252면. 20) 心山記念事業準備委員會編譯, (心山金昌淑先生鬪爭史) 躄翁一代記, 太乙出版社, 1965, 108면. 大東文化硏究 제89집 - 512 - 면, 한국유림독립운동 파리장서약사 등은 김창숙의 회고를 근거로 하여 기 술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처럼 파리장서운동에 참여한 인물들을 세분화하는데 있어서 정 확히 어느 인물군에 있다고 규정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곽윤과 김황의 경 우가 그렇다. 이들은 3월 초 김창숙으로부터 독립청원운동에 관한 계획을 전 달받고, 거창으로 내려가 곽종석에게 김창숙이 발의한 독립청원운동의 구심 점이 되어줄 것과 독립청원서를 작성해 줄 것을 요청하도록 부탁받았다. 이들을 파리장서운동의 추진세력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협력자로 볼 것인 가. 필자는 협력자로 분류하였다. 이들은 기획의 주체가 아니라 선배 김창숙 이나 스승 곽종석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한 인물에 가깝다고 여겨지기 때문이 다. 즉 이들은 협력자 가운데에서도 비중 있는 인물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운동을 기획하고 운동의 방향까지 설정한 인물은 아니었다. 한편 협력자의 범주에는 흔히 ‘연락책’, ‘자금모집책’이라고 불릴 수 있는 정형화된 인물들 뿐만 아니라 보다 다양한 인물들을 포함시킬 수 있다. 원래 서명의사를 밝혔지만 최종 명단에는 포함되지 못한 인물들이 있다. 이들은 송 준필家에 전해지는 서명자 명단(143인), 김황의 記巴里愬書事, 판결문 등 에서 확인된다. 이들이 137명의 최종 명단에 포함되지 않은 이유는 다양했다. 河泳斗는 나이가 어렸고,21) 李定基(조부 李德厚서명)․이현덕(부친 이수 안 서명)은 1家1人의 서명 원칙에 따라 제외되었다.22) 柳遠重은 가정형편으 21) 重齋先生文集 13, 附錄, 己未日記, 음력 2월 24일, 千字族譜社, 1998, 41면. 22) 이정기는 외조부 李斗勳에게 배웠다고 하나(碧珍李氏監務公派世譜, 譜典出版社, 1983, 203면.) 이후 상경하여 중동중을 다니며 신식학문을 습득했기 때문에 유림으 로 분류하기는 어렵다. 또한 1919년 당시 나이가 22세에 불과했는데, 파리장서운동 의 지도부는 일반적으로 40세 이상의 인물에게 서명을 허용했으므로, 서명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김창숙의 며느리 孫應喬(1917년생)가 할아버지(孫晋仁)에게 서 들은 얘기에 의하면, 김창숙이 서명을 권유하기 위해 ‘李氏’ 12명을 자택 사랑방 으로 불렀고 모두 선뜻 나서지 않았는데 나이가 가장 어린 24살의 ‘이정기’라는 인 물이 유일하게 도장을 찍었다고 한다[손응교 구술(2012.4.20, 경북 성주군 대가면 칠 봉리 김창숙생가)]. 이정기가 1919년에 22세였으니 손응교의 기억과도 큰 차이가 없 다. 더욱이 高等警察要史에 수록된 서명자 명단에 그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고(慶 尙北道警察部, 高等警察要史, 1934, 248면), 관련 체포자 명단에도 그의 이름이 보 파리장서운동의 전개와 영남지역의 숨은 협력자들 - 513 - 로 자진해서 서명의사를 철회했다.23) 이밖에 河泳奎․河載國24)․金瀁模․ 宋晦根․呂輔會․呂相胤․鄭宗鎬25) 등도 서명의사를 밝혔지만 최종 명단 에 포함되지 못했다. 또한 외곽에서 활동한 인물들도 있다. 金應燮은 김창숙이 중국 상해에 도 착한 직후 김창숙이 가지고 온 파리장서와 같은 문건을 소지하고 상해에 도 착했다. 朝鮮國權恢復團소속이었던 그는 “김창숙의 신변에 어떠한 위험이 닥칠지 몰라” 동일한 문건을 가지고 왔다고 밝혔다.26) 또한 孫晋衡은 李中 業과 장석영의 요청에 따라 조카 孫厚翼을 보내 돕고자 했으나 실패했다고 전한다.27) 구체적인 행적은 확인되지 않으나 파리장서운동에 관여했을 것으로 추정 되는 인물도 있다. 고등경찰요사의 137인 명단에 성명․나이․본적․주소 가 정확히 기재된 李明均,28) 김창숙이 영주를 방문한 뒤 영주지역의 운동의 확산 방안을 논의했던 李敎仁,29) 파리장서운동이 진행되는 동안 김황이 자주 접촉한 金震相․尹正洙,30) 김창숙이 성주를 떠난 뒤 만나기로 했던 李吉 浩31)가 바로 그들이다. 인다(高等警察要史, 252면.). 따라서 이정기는 최종 서명자 명단에는 포함되지 않 았으나 일정한 역할을 했던 인물로 추측된다. 23) 重齋先生文集 13, 附錄, 記巴里愬書事, 음력 2월 25일, 80면. 24) 重齋先生文集 13, 己未日記, 음력 2월 24일, 41면. 25) 儒林團獨立運動實記編纂委員會, 國譯儒林團獨立運動實記(瀋中日記), 대보사, 2001, 원문, 21면. 26) 躄翁一代記, 103면. 김응섭이 상해에 도착한 것은 음력 3월 15일 즉 양력 4월 15일 이었다. 그런데 김응섭의 회고에 의하면, 이 시기 김창숙이나 파리장서운동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金應燮, 七十七年回顧錄, 1954, 8~21면.). 이는 아마도 김응섭과 김창숙 간의 이념적 갈등에서 기인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두 인물은 해방공간에 서 유도회(김창숙)와 유교동맹(김응섭)을 조직해 심한 갈등을 보였다. 27) 孫厚翼, 文巖先生文集 권22, 仲父瑚峯府君遺事, 35a~b면. 28) 慶尙北道警察部, 高等警察要史, 1934, 250면. 가까운 친족인 李鉐均․李璟均은 137 인 서명자의 한 명이다(俛宇集 4, 俛宇先生年譜권3, 762면). 29) 躄翁一代記, 74면. 30) 重齋先生文集 13, 記巴里愬書事, 78~79면. 大東文化硏究 제89집 - 514 - 이처럼 협력자의 성격을 띤 인물들은 매우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1차 사료 에 기술되지 않은 단순 참여자까지 포함하면 숫자는 수백 명에 이르렀을 것 이다. 파리장서운동에 관계하여 체포된 이가 ‘수백 명’이라는 설32)이 사실이 라면 그 중 협력자도 다수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1차 사료에서 확인되는 인물은 58명으로 한정된다.33) 이들을 정리하면 논문 말미에 있는 별표 1 과 같다. 2. 영남지역 협력자의 특징 파리장서운동의 협력자 중 영남 출신은 55명으로 파악된다. 그런데 아쉽게 도 김복한 계열의 인사들은 3명34)을 제외하면 사료에서 파악하기 어렵다. 하 지만 결과적으로 파리장서운동의 참여자 중 영남지역 출신이 월등히 많았고, 협력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아쉬움은 다소 줄 어든다. 따라서 영남지역 협력자들의 활동을 정밀하게 분석하면, 파리장서운 동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영남지역의 협력자들은 다음과 같은 구성상의 특징이 발견된다. 우선, 연령 상 20, 30대가 많았다.35) 서명자 대부분이 40대 이상이었던 것36)과 대비가 된 다. 이명균․최해윤 등 40대 이상인 인물도 있었지만 전체 비율은 40%에 머 31) 國譯儒林團獨立運動實記(瀋中日記), 28면. 32) 金昌淑, 心山遺稿 권5, 躄翁七十三年回想記(上篇), 316면. 33) ‘58명’이라는 숫자에 연연할 필요는 없다. 이 인원은 1차 사료를 통해 확인된 인물만 계산한 것이다. 이 역시도 현재까지 발굴된 사료에 근거한 것이므로, 차후 사료가 추가 발굴 됨에 따라 인원수는 더욱 늘어날 것이다. 이밖에 윤충하, 김정호, 김창숙, 성태영, 유준근, 이중업, 임경호, 윤중수, 李貞秀, 유진태, 이득년, 조중헌 등은 성격 상 파리장서운동의 추진세력으로 분류할 수 있다. 34) 김복한이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기 위해 경성에 파견했던 黃佾性․李永珪․田溶學이 었다. 이들 중 황일성은 비용을 조달했다고 한다(金祥起, 앞의 2001 논문, 362면). 35) 영남지역의 협력자 55명 중 연령이 확인되는 인물은 45명이다. 이 중 20, 30대가 60%(20대-14명, 30대-13명, 총 27명), 40대 이상이 40%(40대-10명, 50, 60대-7명, 총 17명)로 20, 30대의 비중이 높았다. 36) 林京錫, 앞의 2001 논문, 435면. 파리장서운동의 전개와 영남지역의 숨은 협력자들 - 515 - 물렀다. 당연한 결과이겠지만, 협력자들이 이들에게 임무를 부여한 인물의 아 들, 동등 이하 연령․항렬의 친족, 제자, 후배인 관계로 파리장서운동에 참여 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학문적, 사회적 배경으로는, 역시 유학을 학습한 지방 사족가문의 후예가 많았다. 김창백(봉화 의성김씨), 이명균(김천 연안이씨), 李基元․李基轍(성 주 성산이씨), 河益鎭(진주 진양하씨)이 그들이다. 그러나 예외도 있었다. 김 창숙의 국외파견활동에 관련된 인물들인데, 尹顯振은 일본 메이지대학을 졸 업했고, 김응섭은 법관양성소를 졸업했고, 이정기는 중동중에서 수학했다. 朴 洸은 중국 안동에서 곡물상점을 운영했다. 이처럼 신학문을 학습하고 실무경 험이 풍부한 이들은 유림이 국내외 정세를 이해하고 출국을 준비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한편, 파리장서운동에 참여하게 된 계기는 혈연관계에 의한 경우가 압도적 으로 많았다. 이는 유림이 주도한 독립운동에서 자주 확인되는 특징이다. 파 리장서운동에는 가족이나 친족뿐만 아니라 외가와 사돈 등 가용 인력이 총동 원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곽윤은 경성에서 김창숙으로부터 독립청원운동에 관한 설명을 듣고 거창으로 내려가 곽종석에게 이 소식을 전했던 인물인데, 그는 곽종석의 조카였다. 張始遠은 장석영이 작성한 파리장서 초안을 곽종석에게 전달했던 인물이었는데, 장석영의 조카였다. 이밖에도 하익진은 서명자 河載華의 1남, 文存浩는 서명자 文鏞의 1남, 宋壽根은 서명자 송준필의 3남이고, 金昌百은 김창숙의 從弟, 宋圭善은 송준필의 族叔, 金震相은 김황의 從兄이었다. 이들은 주로 단순하면서도 신속한 처리를 요하는 일을 맡았다. 특정 의사 나 문건을 전달하는 일이 주된 임무로, 파리장서운동의 참여를 권유하는 편지 를 전달하거나(곽윤), 특정 지역이나 문중에서 수합된 서명자 명단을 전달하 고(하익진․송규선), 파리장서 초안․완성본을 淨書․보관․전달하는 일을 맡거나(곽윤․장시원), 자금을 제공․전달하는 일을 맡았다(여보회). 물론 송규선처럼 이런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경우도 있었다. 한편, 학연도 중요한 참가 계기였다. 같은 학맥에 속한 인물들은 평소 정기 적인 의례(鄕飮酒禮․士相見禮․釋奠祭), 講學, 지방유람 등을 함께 하는 大東文化硏究 제89집 - 516 -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친분이 두텁고 현실인식을 공유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 런 유대관계는 파리장서운동에도 유용했다. 혈연이 지역적으로 제한되어 있 는 경우가 많은 반면 학연은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있어 보다 넓은 지역에서 동지를 규합하기 수월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김황은 곽윤과 함께 3월 초 경성에서 윤충하․김창숙 등을 접촉 하고, 귀향 후 경남 일대에서 동지를 규합하고 서명을 독려했는데, 그는 곽종 석의 제자였다. 金銖, 문존호, 박응종, 裵文昶, 이기원, 이명균, 이현덕, 최해 윤, 하영규, 하익진, 하재국 등도 곽종석의 제자로 확인된다. 이밖에 李基允은 張錫英의 제자이고, 송규선, 송수근, 李達馝, 장진영은 송준필, 배석하는 李 晩燾의 제자였다. 이들은 상대적으로 복합적인 사무를 맡았다. 장거리 파견도 마다치 않았다. 한편 협력자의 학맥을 살펴보면 곽종석 제자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는 사료의 한계이기도 하지만, 곽종석의 제자인 김창숙이 이 운동을 실질적으로 주도하고, 곽종석이 파리장서운동의 대표로 추대된 점을 감안한다면 당연한 귀결이라고도 하겠다. Ⅲ. 영남지역 협력자의 시기별 역할 1. 제1기: 유림지도자 접촉과 독립청원서 집필 요청 파리장서운동의 추진세력은 우선 이 운동을 지도해 줄 만한 인물을 선정한 뒤 지방을 몇 개의 구역으로 나누고 각자 맡은 곳으로 가서 동지 규합에 나서 기로 결정했다. 사안이 중대하고 비밀리에 진행해야 하는 만큼 교섭대상을 직 접 만나 의사를 타진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으나, 시간은 부족했고 만나야 할 사람은 많았다. 전국 곳곳이 3․1운동의 소용돌이에 휩싸임에 따라 일본 경찰의 감시가 삼엄해졌다. 더욱이 김창숙처럼 반일운동의 경력이 있는 인물 이 움직이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접촉대상이 원거리에 있다면 문제는 파리장서운동의 전개와 영남지역의 숨은 협력자들 - 517 - 더욱 심각했다. 여기에 또 다른 인물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게 되었다. 그들에게 주어 진 첫 번째 임무는 김창숙 등이 기획한 독립청원운동의 개요를 숙지하고, 그 요구사항을 지방의 유림지도자에게 신속히 전달한 후 참가를 종용하는 일이 었다. 요구사항이란 운동의 지도, 동지의 규합, 독립청원서의 집필에 관한 내 용이었다. 이런 일을 맡은 대표적인 인물은 곽윤(1881~1927)과 김황(1896~1978)이 었다. 이들은 스승 곽종석의 지시에 따라 기차를 타고 2월 27일 경성에 도착 했다.37) 고종 인산일이 3월 3일로 발표되자 병석에 있던 곽종석이 대리인으 로 이들을 파견한 것이다.38) 그런데 곽윤 일행에게는 보다 중요한 임무가 부 여되었다. 곽종석은 2월 19일 尹忠夏란 인물의 갑작스런 내방을 받아 긴밀한 대화를 나누었는데, 윤충하에게 조만간 사람을 경성에 보내 독립청원운동에 관한 일을 처리케 하겠다고 약속하였다.39) 곽윤 일행은 약속대로 3월 4일 윤충하와 만났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협상 은 소득 없이 끝났다. 곽윤은 경성의 인심과 물정이 상경하기 전에 예상했던 것과 다르다며 “감히 내 叔父를 이들과 함께 하도록 하지 못하겠다.”고 난색 을 표명했다.40) 이때 곽윤 일행의 움직임을 주목하는 이가 있었다. 김창숙이 었다. 김창숙 역시 곽윤 일행에게 독립청원운동에 관한 제안을 했다. 친근한 동문 선후배 간이었던 이들의 대화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41) 37) 重齋先生文集 13, 記巴里愬書事, 79면. 38) 곽종석은 병을 이유로 고종 인산에 나아가지 않았으나, 제자들에게는 인산이 명분 상에 문제가 있어 참여하기 곤란하다고 토로했다. 명분상의 문제란 고종의 장례에 일본식이 가미된다는 점, 고종이 대한제국의 황제였음에도 불구하고 銘旌에는 ‘李太 王’으로 격하된다는 점, 나라를 멸망시킨 역적들이 장례에 참석한다는 점이었다(서 동일, 앞의 2009 논문, 144면, 주13). 39) 俛宇集 4, 俛宇先生年譜권3, 1919년 음력 2월, 763면; 重齋先生文集 13, 己未 日記, 음력 1월 20일, 18면. 40) 重齋先生文集 13, 己未日記, 음력 2월 3일, 35면. 41) 윤충하 역시 곽종석의 초기 제자인데(俛宇集 4, 附錄, 俛門承敎錄, 804면) 오랜 세월 고향(거창)을 떠나 경성에서 활동을 한 까닭에 스승과 동문들이 그를 경계했 大東文化硏究 제89집 - 518 - 사실 김창숙 뿐만 아니라 3월 1일 전후에 독립운동을 준비하던 세력들은 곽윤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유교계의 명망가인 곽종석이 자신들이 기획 한 독립운동에 합류할 경우 독립운동의 파괴력은 한층 강화될 수 있었다. 2월 말 곽윤이 상경하자 장안에는 그가 곽종석의 ‘信章’을 지니고 상경했다는 소 문이 돌았다.42) 이는 곽종석이 모종의 거사에 참여하려 한다는 관측을 생산 했다. 결과적으로 곽윤 일행은 다른 세력의 제안에는 신중을 거듭하면서도 김창 숙의 제안에는 매우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로써 김창숙의 독립운동에 관 한 계획, 즉 곽종석과 전우를 전면에 내세워 유교계의 명망가를 총동원한 독 립청원운동을 추진하겠다는 계획은 표면화의 국면에 접어들었다. 곽종석의 합류가 기정사실화되자 김창숙은 3월 4일 곽윤 일행에게 다음의 요구사항을 전달했다. 선생(김창숙-이하 괄호안 필자)은 다음날 …… 오후에는 같은 동지인 李 鉉德․金榥叔을 선생의 처소로 불러 일일이 거사 계획을 설명한 다음 급히 남으로 내려가 郭俛宇(곽종석)를 찾아 그의 지도를 받을 것과 郭俛宇에게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서한을 미리 작성하여 줄 것까지 부탁을 한 뒤 각 방 면으로 유림을 동원하는 등 일은 착착 신속한 진전을 보였다.43) 위에서, 김창숙이 요청한 사항은 3가지였다. 사안이 급하니 얼른 거창으로 내려가 곽종석에게 경성에서 자신의 계획을 알리고, 이후 독립청원운동의 지 던 것 같다. 반면, 김창숙은 이승희․곽종석의 제자로 곽윤․김황 뿐만 아니라 평소 이진상-곽종석 학맥의 인사들과 교류가 잦았던 친근한 인물이었다. 윤충하의 1900,10 년대 대외활동에 대해서는, 서동일, 한말~일제하 改新儒林尹忠夏의 계몽운동과 太極敎운동 , 한국민족운동사연구 44,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05 참조. 42) 2월 말 李俊錫이란 인물은 곽윤에게 “어떤 이는 영감(곽종석-필자)께서 금번 城中 에서 장차 일이 있을 것이므로 公으로 하여금 대표가 되어 信章을 가지고 오게 하 였다고 하는데,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라고 질문하였다(重齋先生文集 13, 己未 日記, 음력 1월 29일, 29면). 43) 躄翁一代記, 72면. 파리장서운동의 전개와 영남지역의 숨은 협력자들 - 519 - 도와 독립청원서 집필을 부탁한다는 것이었다. 3월 9일 곽윤 일행은 거창에 도착해 곽종석에게 復命했고, 곽종석은 제안을 수락했다. 그런데 2월 말 곽윤 일행이 상경할 때부터 3월 초 復命할 때까지는 곽윤의 비중이 컸던 반면, 이후에는 김황의 역할이 커졌다. 곽윤은 병석에 있는 숙부 곽종석의 인장을 가지고 상경할 만큼 곽종석이 신임하는 인물이었지만, 귀가 후 병석의 곽종석을 간호해야 하는 처지여서 운신의 폭이 좁았다. 반면 김황 은 곽종석의 평소 의중을 잘 이해하고 있을 뿐 아니라 집이 곽종석의 제자들 이 많이 거주하는 경남 서남부(산청)에 있어 왕래가 자연스럽고 다양한 역할 을 수행하기에 적합했다. 실제로 그는 곽종석의 지시에 따라 독립청원서를 ‘試草’했고,44) 경남 산청․진주 일대를 돌며 서명자를 규합하는 등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다.45) 한편 영남지역에서 김창숙․곽종석과 더불어 파리장서운동을 지도한 인물 로 장석영과 송준필이었다. 장석영 계열에서 확인되는 협력자는 조카 張始遠 (1870~1950)46)이었다. 일명 ‘張博士’로 불리는 장시원은 3월 14일 경47) 곽종 석에게 숙부 장석영이 작성한 독립청원서 초안을 전달하고, 곽종석이 보내는 답장과 곽종석이 “부득이 자신이 작성했다.”고 한 독립청원서 초안을 장석영 에게 전달했다.48) 44) 重齋先生文集 13, 己未日記, 음력 2월 9일, 38면. 45) 손후익은 파리장서운동을 주도한 인물로 곽종석, 김황, 김창숙, 이중업을 들었다(경 상북도경찰부, 손후익 경찰 신문조서 (제1회), 1926.5.14(南富熙編譯, 제2차 유림 단 사건―독립운동사 자료집, 불휘, 1992, 77면). 46) 장석영은 3형제 가운데 막내로, 위로 형 張錫藎과 張錫薰이 있었는데, 장시원은 秘 書院丞을 지낸 張錫藎의 2남이었다(仁同張氏大同譜 3, 권3, 回想社, 1998, 245면). 47) 이 논문에서는 날짜를 정확히 쓴 곳도 있지만, ‘3월 5일 경’처럼 추정치를 기술한 경 우도 적지 않았다. 이는 김창숙․장석영․송인근이 훗날 파리장서운동에 관한 연대 기를 남기면서 날짜를 정확히 쓰기보다는 ‘다음날’, ‘이튿날’처럼 상대적인 시간개념 을 자주 사용한 까닭에 정확한 날짜를 파악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연대기를 작성 한 사람의 입장에선 정확한 날짜보다는 중요한 날을 기점으로 ‘전후’의 시간개념이 그나마 온전히 기억에 남았을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여러 사료를 교차 검토해 가급 적 정확한 날짜를 고증하되 확실치 않은 경우에는 ‘경’이란 표현을 사용했음을 알려 둔다. 大東文化硏究 제89집 - 520 - 또 다른 인물은 송준필 계열의 宋圭善(1887~1948)과 宋壽根(1896~1969) 이었다. 이들의 역할은 영남 일대를 순방하고 있는 김창숙의 사무를 분담하는 일이었다. 김창숙이 경성을 떠나 처음 도착한 것은 자신의 거주지인 성주였 다. 그런데 성주로 돌아온 이후 김창숙의 3일간 행적은 집에서 병석의 모친을 간호한 내용을 제외하면 대부분 베일에 가려져 있다. 이 부분은 김창숙의 회 고기인 벽옹일대기에도 빠져 있어 궁금증을 부채질한다. 벽옹일대기는 김창숙의 3일 간 행적을 귀가(성주)→모친 간호→3일 뒤 봉화 방문으로 압축 해 묘사하고 있을 뿐이다.49) 그런데 이 점에 대해서는 송준필측(宋仁根)의 기록인 瀋中實記와 최근 발굴된 장석영의 기록인 黑山日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송준필은 3월 9 일 경 冶城宋氏忠肅公派종택인 百世閣에서 문중의 청장년들을 모아놓고 회의를 열고 독립청원운동에 참여할 의사를 밝혔다.50) 이때 族叔인 송규선이 가장 먼저 동조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다음날인 3월 10일 경 김창숙이 백세각 을 방문했다. ① 다음날(3월 10일 경-이하 괄호안은 필자) 오후 金昌淑어른이 百世閣을 방문했다. …… 大人(송준필)이 말하기를 “ …… 내일 응당 圭善과 함 께 茶田에 가서 의견을 수렴한다면 이 어른(곽종석)도 기꺼이 前矛가 될 것이다. 이 어른으로 하여금 ‘巴里章書’를 작성하게 한 후 분담하여 각처에 가서 유명인사의 명첩을 거두되 반달로 제한한다면 성취가 어 떻겠는가?”라 하였다. 金어른은 “네” 하고는 圭善어른과 함께 다전 을 향해 떠났다.51) 48) 張錫英, 先文別集 智, 黑山日錄, 필사본, 간행연대 미상, 장세민 소장, 7a면. 49) 躄翁一代記, 75면. 50) 심중실기에 의하면, 송준필은 곽종석측의 요청에 따라 독립청원운동에 참여한 것 이 아니라 3월 5,6일 경 자택을 방문한 李達馝로부터 경성에서 독립청원운동이 진행 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3월 9일 경 문중회의에서 독자적으로 독립청원운동을 펼 칠 의사를 밝힌 뒤 곽종석․장석영 등에게 협조를 당부했다고 하여(國譯儒林團獨 立運動實記(瀋中日記), 원문, 25~28면) 오히려 독립청원운동의 발의 주체를 송준 필로 보았다. 파리장서운동의 전개와 영남지역의 숨은 협력자들 - 521 - ② (3월 14일 경) 俛宇가 보낸 편지를 回見하니, 이 문장이 과격하여 사용 하기에 적합지 않으므로 부득이 자신이 작성한 문서 1통을 사용한다 며 내(장석영)게 點化를 요청하였다. …… 이 서한(곽종석이 보낸 독 립청원서 초안)을 보고 내가 첨삭을 가하여 高山의 宋圭善으로 하여금 茶田에 보내게 했다.52) 위 인용문을 보면, 심중실기와 흑산일록 모두 김창숙이 송규선의 도움 을 받아 거사를 진행했다고 밝혔다. 즉 송규선은 송준필의 지시를 받아 김창 숙과 함께 다전에 가서 곽종석과 독립청원운동에 관해 협의했을 뿐만 아니라 곽종석이 ‘준비’하고 장석영이 수정한 독립청원서 초안을 곽종석에게 전달했 다. 이것이 바로 벽옹일대기에 기록되지 않은 김창숙과 송규선의 행적이라 고 하겠다. 한편 李達馝은 고종 인산을 참관하러 상경했다가 성주에 돌아온 뒤 송준 필에게 경성에서 논의되고 있는 독립청원운동에 관한 정보를 전달했다.53) 또 한 송준필의 3남인 송수근은 3월 9일 경 송준필이 문중회의 직후 거사 동참을 요청하기 위해 작성한 편지를 장석영에게 전달했다.54) 다만 이 과정에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김창숙이 살고 있는 성주 사 도실마을의 반응이다. 사도실마을은 600년 전통의 의성김씨 동족마을이고, 김 51) 國譯儒林團獨立運動實記(瀋中日記), 원문, 27면, “明日午後, 金昌淑丈, 來訪于百 世閣. …… 大人曰: …… 明當與圭善, 同往茶田收議, 則此丈亦樂爲之前矛矣. 使作巴里 章書, 然後分往各處, 收有名人士, 限半月, 成就如何? 金丈曰: 諾. 同圭善丈, 向茶田去.” 다만, 필자가 확인한 원본 瀋中實記(송재소 소장)에는 송준필이 송규선으로 하여 금 김창숙에게 가서 독립청원운동에 관해 협의하라고 지시했다는 내용과 송규선․ 김창숙이 그로부터 10여 일 지난 후 각지에서 수합한 서명자 명단을 가져왔다는 내 용만 기술되어 있고 다른 내용들은 생략되어 있다. 이처럼 심중실기 원본과 간행 본 간의 내용 차이에 대해서는 차후 자세한 고증이 요구된다. 52) 先文別集 智, 黑山日錄, 7a~11a면, “其回見俛書曰, 此文過激, 不合於用, 不得已 用自己所作文書一本以來, 而要我點化之. 其文曰, …… 旣見此書, 余略加筆削, 而使高 山宋奎善, 送于茶田.” 53) 國譯儒林團獨立運動實記(瀋中日記), 원문, 24면. 54) 國譯儒林團獨立運動實記(瀋中日記), 원문, 26면. 大東文化硏究 제89집 - 522 - 창숙은 文貞公派(東岡金宇顒) 14세 종손으로, 이 마을의 중년 지도자(1919 년 당시 41세)였다. 그러나 파리장서운동에 대한 사도실마을의 반응은 어디 에도 발견되지 않는다. 김창숙이 자서전에서 봉화 바래미(海底)마을을 방문 했을 때 의성김씨 친족들로부터 환대받은 사실을 상세히 기록한 것과 대비가 된다.55) 이는 아마도 김창숙의 아버지 金頀林과 김창숙 부자의 성주 정착 기간이 짧았던 점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김창숙은 성주 사도실마을 출 신이지만, 부친은 봉화 바래미마을 출신으로 開巖公派(金宇宏)의 후손이었 다. 김창숙의 부친은 당시의 관행과 달리 혈통이 다른 성주 사도실의 문정공 파 종손으로 입양되었다.56) 이런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김창숙은 성주의 토 착 사족인 송규선(야성송씨)․정종호(청주정씨) 등의 도움이 절실하지 않았 나 추측된다. 2. 제2기: 독립청원서 서명자 규합과 자금 모집 독립청원운동의 세부계획이 수립되었다면, 독립청원서에 서명할 인사들을 물색하고 이들을 만나 서명을 권유해야 했다. 이 일은 언뜻 간단해 보이지만 생각처럼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일본 경찰은 3월 초 만세시위의 급속한 지방 확산에 당황하며 주요 도로를 통제하고 낯선 외지인의 방문을 주시하기 시작 55) 김창숙의 회고기에는 사도실 의성김씨 문중의 협조에 대해 전혀 언급이 없다. 이런 상황은 김창숙이 1925,6년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군자금을 모집했던 시기 나 1940년 총독부의 창씨정책에 반대했던 시기에 대한 기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25,6년 김창숙의 독립운동기지 건설운동에 참가했다가 유죄를 받은 인물 중 의성 김씨는 대부분 봉화 바래미마을 출신이었다. 또한 최근 연구에 의하면, 1940년 사도 실마을의 의성김씨들이 종손인 김창숙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80% 이상 창씨를 신고 했고, 김창숙이 이에 실의하며 창씨를 한 친족들과 관계를 단절했다는 점이 확인되 는데(徐東一, 성주 사도실마을의 창씨 실태와 유림 김창숙의 반대 논리 , 한국근 현대사연구 70, 2014) 김창숙과 사도실 의성김씨 문중 사이에 이상기류가 있었음을 추측케 한다. 56) 최미정, 경북 봉화 義城金氏문중의 儒林團義擧참여 , 한국독립운동사연구 49,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4, 94면. 파리장서운동의 전개와 영남지역의 숨은 협력자들 - 523 - 했다. 독립청원서 서명의 경로는 다양했다. 李能學의 경우처럼 서명자 본인이 독 립청원운동에 관한 소식을 듣고 자발적으로 곽종석․장석영 등 지도자에게 찾아와 서명의사를 밝힌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는 김창숙 등이 지방을 순방하 면서 서명을 권유한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접촉대상이 먼 곳에 거주하거나 서명자 규합에 소요되는 시간을 단축하고자 한다면, 김창숙을 대신해 서명의 사를 타진하고 서명 또는 서명을 위한 논의를 독려할 인물이 필요했다. 경찰 의 감시와 추적을 의식한다면 더욱 그래야 했다. 이런 점에서 김창숙의 지방 방문→동지 규합→타지방 방문 준비→경찰 추 적→임무 분담 등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예가 있다. 다음은 벽옹일 대기에 기술된 3월 16일~3월 18일 경 김창숙의 행적이다. 그날(3월 16일 경-이하 괄호안은 필자) 선생(김창숙)은 奉化郡海底里에 다달아 四從姪金鴻基집에 들어가 昌百과 門親諸人이 모두 모여 밤이 늦도 록 촛불을 돋우어가며 심충을 풀으니 여기서도 동지로서 제휴한 門親중 漢 植․賞植․昌洵․昌道․홍기 등 7,8인과 밀실에서 회합하여 선생이 여기 온 뜻을 전하니, 모두가 오히려 먼저 나서지 못한 것을 서운해 하며 크게 동의 하며 각자 힘 있는 대로 일을 분담하니 …… 다음날(3월 17일 경) 창백․홍기 두 사람과 선생이 문중에 어른을 찾아 뵙고 거사에 관하여 말씀드린 후 이튿날(3월 18일 경) 창도의 집에서 일가 30여 명이 한 자리에 둘러앉아 술자리가 벌어져 이야기에 꽃을 피우는 중 갑자기 나온 일경 한 명이 선생을 불러내어 맹렬한 기세로 무엇인가 의혹의 실마리를 끄집어내려고 하였으나 거사의 내용은 추호도 알지 못하고 한 시 간 반 동안 취조한 끝에 술자리를 해산시키고 돌아갔다. 이러한 광경을 목 격한 여러 사람들은 두려움이 생겨 선생의 여행을 중지하라고 만류하였다. 다음날(3월 19일 경) 선생은 정오가 되자 權相元․權命燮과 만나 의논한 후 전날의 형사의 동태를 묻고 安․禮행을 극력 반대하여 安․禮․奉․榮 등 각 곳의 연락은 자기들이 할 것을 약속한 뒤 한시 바삐 선생이 성주로 해서 상경할 것을 종용했다.57) 57) 躄翁一代記, 75면. 大東文化硏究 제89집 - 524 - 위 인용문을 보면, 김창숙은 성주를 거쳐 봉화 바래미마을에 도착했다. 김 창숙을 맞이한 것은 의성김씨 친족들이었다. 할아버지代로 거슬러 올라가면 피를 나눈 친족들이었다. 그런 만큼 이들은 ‘맹목적’으로 김창숙을 환대했다. 김창숙은 평소 가까이 지내던 金昌百(1879~1942)․金鴻基(1884~1954)와 金漢植․金賞植․金昌洵․金昌道등을 따로 불러 자신의 계획을 털어놓았 다. 이들은 흔쾌히 동참의사를 밝혔고 역할을 분담했다. 그런데 낯선 외지 인물의 오랜 체류와 문중의 심상치 않은 공기를 수상히 여긴 일본 경찰이 이 마을을 방문하여 김창숙을 급거 취조하였다. 김창숙은 위기를 유연하게 넘겼지만, 친족들은 김창숙의 다음 순방일정을 적극 만류했 다. 옆 마을인 닭실(酉谷)마을에서도 안동권씨 지인들은 김창숙의 순방을 만 류하며 안동․예안․봉화․영주 일대 연락은 본인들이 맡겠다고 자청했다. 김창숙은 조언을 받아들였다. 그 결과 벽옹일대기에는 경북 중북부 일대의 서명자 규합 활동에 관해 구체적인 언급은 없지만, 안동의 金秉植․金翊模․柳淵博․柳必永, 예안의 李晩煃, 봉화의 權命燮․權昺燮․權相道․權相元․權相翊․金建永․金順 永․金昌禹, 영주의 金東鎭․金澤鎭․丁泰鎭등 다수의 서명자가 배출되었 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김창백 등이 서명자 규합에 일정한 역할을 했을 것으 로 추측된다. 그런데 김창숙이 지방순방의 일정을 성주에 이어 봉화로 잡았다는 점은 중 요한 의미를 지닌다. 사실 김창숙은 상경했다가 성주로 돌아오면서 지방유림 의 협력을 확신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지방유림은 과거 국권회복운동이나 독립 운동에 참가한 후 멸문지화를 겪는 사례를 자주 목격하여 자신의 요청에 소극 적으로 나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창숙은 고향이나 다름없는 봉화에 서 문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음으로써 다음 행보를 자신있게 이어갈 수 있었 다. 경북 중북부 일대에서 서명자 규합에 나설 ‘인력’과 이 거대한 사업에 필요 한 ‘자금’을 확보함으로써 운동에 필요한 최소한의 동력을 확보했던 것이다. 이밖에 김창숙과 마찬가지로 문중 단위의 활동에 협력한 인물로는 진주의 河益鎭(1878~1947)이 있다. 그는 서명자인 河載華의 아들로, 3월 25일 河載 華․河載國․河謙鎭․河泳奎․河鳳壽․河泳斗등 晋陽河氏문중의 서명 파리장서운동의 전개와 영남지역의 숨은 협력자들 - 525 - 자 명단을 수합해 김황에게 전달했다.58) 한편, 파리장서운동의 지도자들은 젊은 제자들을 직접 각지에 파견해 서명 을 권유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을 잘 보여주는 것이 3월 14일 곽종석이 제자 들에게 임무를 맡기는 모습이다. (음력 2월-이하 괄호안 필자) 13일 乙丑. 文佐公(김창숙)을 기다렸으나 오지 않았다. 또 허송세월을 보낼 수가 없기에 드디어 귀갓길을 출발하였다. 俛宇翁(곽종석)께서 진주 서부(晉西)에 가도록 명하시고 長書일을 수개 처 에 알리라고 하셨다. 또 士文(金銖)은 宜寧, 李子剛(李泰植)은 漆原, 裵文昶 (裵炳翰)은 수처에 가도록 명하셨다. 명을 받들고 나갔다.59) 위의 기록은 김황이 남긴 것이어서 주로 경남권의 상황을 기술하고 있다. 내용을 보면, 곽종석은 경남 서부 일대에 주로 20, 30대의 젊은 제자들을 파견 했다. 이들은 각지를 분주히 오가는 ‘현장 일꾼’이었는데, 만난 사람은 주로 이진상의 初傳, 再傳제자였고, 그 대표적인 인물은 진주 士谷의 河謙鎭(서 명자)이었다.60) 곽종석이 이들 제자를 파견한 시기(3월 중순)와 지역(경남 진주․의령․칠원), 이들에 대한 곽종석의 신뢰도, 그리고 나중에 최종 확정 된 서명자 명단을 고려할 때, 김황․김수․배문창 등의 주요 임무가 서명자 규합이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들도 짧은 시간 내에 많은 서명자를 규합할 수는 없었다. 이들은 더 많은 서명자를 규합하기 위해 또 다른 동조자를 동원해야 했다. 경남 산청 에 사는 朴膺鍾(1893~1919)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61) 김황은 3월 20일 박응 종의 집에 머물다 다음날 박응종과 함께 진주에 가서 召南의 趙顯珪(서명 자), 사곡의 하재화․하겸진을 만났다. 이어 3월 22일 김황은 하동의 이수안 58) 重齋先生文集 13, 己未日記, 음력 2월 24일, 41면. 59) 重齋先生文集 13, 己未日記, 음력 2월 13일, 39면, “待文佐公, 不至. 又不可曠日, 遂發還. 俛翁命往晉西, 以長書事, 告于數處. 又命士文往宜寧, 李子剛漆原, 裵文昶數 處. 奉命而出.” 60) 林京錫, 앞의 2001 논문, 449~450면. 61) 林京錫, 앞의 2001 논문, 449면. 大東文化硏究 제89집 - 526 - (서명자)을 만나러 갈 예정이었는데, 그곳으로 통하는 대로가 연일 시위로 경 계가 삼엄하고 통행하기 어려웠다. 이에 박응종은 홀로 사잇길로 가겠다고 자 청했다. 김황은 이수안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대로를 피해 산청 자택으로 귀 가했다.62) 그런가 하면 영남 일대를 순행하고 있는 김창숙에게는 각지에서 진행되는 상황이 신속히 보고되어야 했다. 이런 임무를 맡은 인물도 일부 확인되는데, 김창숙이 성주를 떠나 봉화로 향할 때 성주의 연락 사무를 부탁한 李基轍 (3.11경),63) 김창숙이 경남(嶺右) 일대의 연락 사무를 부탁한 송규선(3.18)64) 등이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3월 하순이 되면 독립청원서와 서명자 명단의 준비는 거의 마무리되고, 독 립청원서를 프랑스(국제평화회의)에 발송하는 일만 남겨두게 되었다. 여기에 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였다. 자금의 모집․제공․전달 역시 협력자의 몫이 었다. 자금 모집에 관한 내용은 사료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데, 3월 20일 경 宋 晦根(1877~1949), 呂輔會(1861~1942)가 출국을 앞둔 김창숙에게 자금을 제 공했다는 내용이 일부 확인된다. 그 후 10여 일 만에(3월 20일 경-이하 괄호안 필자) …… 곽종석이 지은 파리장서가 갖추어지고 모든 名帖준비가 끝나니 金心山어른이 巴里에 가 겠다고 자원하였다. 그의 의기는 이미 생명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감복하였다. 從兄晦根이 말하기를 “산하가 만 리인데 어찌 자금 없이 도달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며, 노자 1,000원을 내어 壽根을 시켜 전달하였다. 출발시기에 이르러 大人(송준필)께서 수근에게 말씀하기를 “내 가 알기로 復明洞呂輔會는 뜻있는 사람이다. 네가 즉시 찾아가서 말씀드려 보라”고 하여, 수근이 밤을 이용하여 呂氏어른께 찾아가서 그 사실을 모두 이야기하니, 여씨 어른은 흔쾌히 聽從하며 2,000원을 도와주었다. 다음날 새 벽에 心山을 찾아가 전해주니, 심산은 전대에 넣고, 진주 李吉浩의 처소로 향하여 갔다.65) 62) 重齋先生文集 13, 己未日記, 41면; 重齋先生文集 13, 記巴里愬書事, 79면. 63) 金昌淑, 己未儒林團事件에 關한 追憶의 感想, 독립기념관 소장. 64) 己未儒林團事件에 關한 追憶의 感想. 파리장서운동의 전개와 영남지역의 숨은 협력자들 - 527 - 송회근은 야성송씨 충숙공 宋希奎의 14세 종손으로 송준필에게는 조카였 다. 그는 18세(1905년)라는 이른 나이에 부친을 여의고 모든 개인사와 문중일 을 숙부 송준필에게 의지하며 살았다. 이처럼 그가 의지하는 큰어른인 송준필 이 독립청원운동에 나섰으므로, 선뜻 많은 자금을 제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복명동의 여보회는 어떤 계기로 김창숙에게 자금을 제공하였을까. 우 선 여보회는 서명의사를 밝힌 인물이다.66) 아마도 송준필의 처가가 성산여씨 라는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67) 나아가 송준필의 매형은 呂相武인데, 그 의 동생 呂相胤(1856~1942) 역시 서명의사를 밝힌 인물이었다.68) 이밖에도 김창숙은 지방순방을 통해 다액의 자금을 모집했을 것이다. 3. 제3기: 국외파견활동 지원과 독립청원서 발송 파리장서운동의 최종단계는 독립청원서를 국제평화회의에 전달하는 일이 었다. 파견대표에는 이 운동을 시종일관 주관한 김창숙이 자천․타천으로 임 명되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는 서양은 물론이고 중국여행의 경험도 없었다. 김복한 계열의 유림단에 속하여 출국을 준비했던 임경호가 1910년대 초중반 에 중국과 러시아를 자주 오가며 활동했던 경험을 지닌 것과 대비된다. 따라 서 이 문제에 관한 한 김창숙은 곽종석의 조언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했다. 65) 國譯儒林團獨立運動實記(瀋中日記), 원문, 27~28면, “厥後十餘日, 昌淑圭善二丈, 各收國內諸某某名帖而至. … 郭鍾錫所作巴里書, 具諸名帖旣畢, 金丈自願赴巴里, 其 義氣已覺捨生, 令人感服. 從兄晦根曰: ‘山河萬里, 豈無資金而可達者耶?’ 乃捐所帑金 壹仟圓, 使壽根傳達. 臨發大人魚壽根曰: ‘吾知復明洞呂輔會有志人, 汝直往探聽焉’ 壽 根乘夜訪呂丈, 具言其實, 呂丈欣然聽從, 以二仟圓金助之. 翌曉, 赴金丈收□, 而向晋 州李吉浩處去.” 66) 國譯儒林團獨立運動實記(瀋中日記), 원문, 21면. 67) 송준필은 종손 宋祺善의 2남으로 태어났으나 후사가 없는 宋大善에게 입양되었다. 송준필과 송회근․성산여씨(여보회)의 혈연관계에 대해선, 冶城宋氏忠肅公派譜 권上, 大譜社, 1995, 64~65; 71; 77~79면 참조. 68) 呂相武(1874~1946)는 여상윤의 형으로, 성주 樹村伯派종손인 呂永冑에게 입양되 었다. 그런데 그의 첫째 사위가 바로 송준필이었다(星山呂氏大同譜 권2, 譜文社, 2006, 333~337; 814~821면). 大東文化硏究 제89집 - 528 - 김창숙은 3월 21일 경 상경을 앞두고 거창의 곽종석을 찾아갔다. 지방순방 의 마지막 일정이었다. 이 자리에서 김창숙은 곽종석과 함께 파리장서 문안을 확정했다. 곽종석은 김창숙에게 국외에 파견할 대표단의 구성, 소지품 준비, 재중 조선․중국 인사와의 협력방안, 출국 후 비밀연락 방안 등에 관해 구체 적으로 자문했다. 대표단의 구성에 있어선, 곽종석은 김창숙을 도울 인물로 李鉉德(1887~1964)을 지목했다. (김창숙과 독립청원서의 문안 수정을 끝낸 뒤-이하 괄호안 필자) 俛宇는 …… 선생(김창숙)을 친히 불러 …… 이후로 유림 운동의 모든 책임이 군 의 양 어깨에 내려졌으니 군은 모름지기 千萬自重하여 매사를 어린싹을 보 호하듯 하라. 그리고 운동방책에 관해서는 해외에 파견할 책임자로는 李鉉 德군을 보내겠으니 현덕 군과 더불어 불일 출발하여야 한다.” 특명을 받은 선생은 모기 등에 태산을 진듯한 느낌이여서 …….69) 위의 인용문에 의하면, 곽종석은 국외에 파견할 대표로 김창숙, 부대표로 이현덕을 결정했다. 논란이 되는 것은 이현덕의 행적이다. 결과적으로 이현덕 은 3월 말까지 약속장소인 경성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자 김창숙과 함께 이 현덕을 기다리던 유진태․이득년 등은 계획차질을 우려해 김창숙에게 朴敦 緖만 대동한 채 떠나도록 재촉했다.70) 이처럼 이현덕의 약속불이행은 자칫 독립청원운동 전체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현덕은 애초에 독립청원운동의 참여에 소극적이었을까. 일설에 는 그가 상경을 준비하던 중 치한을 만나 금품을 빼앗겼고, 이로 인해 상경할 수 없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치한’ 운운은 그것이 실제 상황이었든, 경찰의 감시로 인해 이동이 불가능했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든 이현덕이 약속 을 어긴 사실을 변호하기 위해 만든 말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현덕이 국외파견을 회피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우선 이현덕은 李承熙․곽종석이 신뢰하는 제자로,71) 李震相학맥 내에서도 전도가 유망한 69) 躄翁一代記, 77면. 70) 躄翁一代記, 100면. 파리장서운동의 전개와 영남지역의 숨은 협력자들 - 529 - 젊은이었다. 이승희는 1910년대 중반 韓興洞경영의 실패를 거울로 삼아 남 만주에 새로운 한인촌을 건설하는데 몰두하고 곽종석에게 망명을 재촉하였 다. 이때 국내와 중국을 왕래하며 양측의 비밀서신을 전달하는 역할을 맡은 인물이 바로 이현덕이었다.72) 게다가 그는 파리장서 서명자인 이수안의 아 들이었다. 또한 이현덕은 파리장서운동 전 기간에 걸쳐 다양한 임무를 수행했다. 이 현덕은 3월 초 곽윤 일행과 마찬가지로 경성에 머물고 있었다. 김창숙은 곽윤 일행과 독립청원운동에 관해 협의하고 김황․이현덕에게 얼른 거창으로 내려 가 곽종석에게 자신의 계획을 전달할 것을 요청했다.73) 3월 말에는 부친 이 수안을 포함해 朴圭浩․河龍濟(경남 산청)의 서명의사를 김황에게 전했 다.74) 더욱이 그도 서명의사를 밝혔다.75) 따라서 이현덕은 예정대로 중국행 에 동참하지는 못했지만, 독립청원운동 참여에 소극적이었다고 보기는 어려 울 것 같다. 이밖에 김창숙의 출국과 재중활동에 도움을 준 인물들이 있었다. 경남 마 산에서 항구상인이었던 金昌鐸은 친족 김창숙이 국경까지 이동하는데 편의 를 제공했고,76) 중국어에 능통했던 朴敦緖는 김창숙이 경성에서 중국으로 출 발할 때 동행했으며,77) 중국 安東縣에서 곡물상점을 운영하던 朴洸(朴況․ 朴根浩, 1882~?)은 국내외 간의 연락을 약속했다.78) 상해에 체류하던 尹顯 71) 이현덕은 이승희와 곽종석의 문하에서 수학한 사실이 확인된다(金炳浩編, 儒學淵源錄, 大韓公報社, 1982, 708면; 俛宇集 4, 俛門承敎錄, 830면). 72) 서동일, 1910년대 韓中儒林의 교류와 孔敎運動, 한국민족운동사연구 77, 2013, 175면. 73) 躄翁一代記, 72면. 74) 重齋先生文集 13, 己未日記, 음력 2월 24일, 41면. 75) 重齋先生文集 13, 記巴里愬書事, 음력 2월 25일, 35면. 그런데 1家1人서명 원칙 에 따라 최종 명단에는 포함되지 못했다. 76) 重齋先生文集 13, 附錄, 隨記, 94면. 77) 金昌淑, 心山遺稿, 躄雍七十三年回想記(上篇), 國史編纂委員會, 1973, 313면. 김 창숙의 회고와 달리 김황은 박돈서가 중국 봉천에서 합류했다고 하였다(重齋先生 文集 13, 記巴里愬書事, 81면). 大東文化硏究 제89집 - 530 - 振(1892~1921)은 김창숙이 가져온 파리장서 원본(한문본)을 영문으로 번역 했다고 전해진다.79) Ⅳ. 1910, 20년대 유림 독립운동의 연속과 단절 파리장서운동의 국내 및 중국 활동은 이 활동을 기획한 인물과 파리장서에 서명한 인물들의 결단, 그리고 실무적인 역할을 수행한 인물들의 활약 속에 가능했다. 협력자들의 활동은 일부 서명자와 중복되었지만, 이들은 서명자들 이 감당할 수 없는 세세한 영역까지 파고들어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다. 무엇 보다 파리장서운동에 참여한 인물들이 짧은 시간 내에 비밀을 유지하며 활동 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이들의 유기적인 활약이 결정적이었다.80) 그런데 협력자들이 파리장서운동에만 몰두할 수 있었던 것은 곽종석․김 창숙 등 지도급 인사들의 영향이 절대적이었음을 부인하기 힘들다. 협력자들 은 파리장서운동에 참여한 뒤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면서도 유림이 ‘오랑캐’에게 독립을 호소한다는 것이 적절한 것인지 의문을 품었다. 이에 곽 종석 등은 파리장서운동이 ‘儒者의 본색’은 아니지만 “國家를 위한 義務일 뿐만 아니라 실로 역시 유림의 지위를 위해 부득불 그렇게 한 것”이라는 설 명81)을 하여 협력자들이 지닌 의혹을 해소시켰다. 이후 협력자들은 파리장서 78) 躄翁一代記, 101면. 79) 躄翁一代記, 107면. 80) 조선총독부는 협력자들의 역량과 조직을 과소평가했다가 김창숙 등의 자금모집활 동이 독립운동기지 건설운동과 나석주의거로 이어진 사실을 파악한 뒤 아연실색했 던 것 같다. 당시 신문은 “경찰당국자들이 이들 학자나 유림을 업신여긴 것으로 별 로 조사도 하지 않고 미심스러워도 생각지 않는 관계인 바 여덟 해 동안이나 되는 사건은 이번이 처음이라더라.”라고 오랫동안 비밀이 유지된 사실을 놀라워했다(朝 鮮日報 1927년 2월 12일, 前後18年동안 쥐도 새도 몰라 ). 81) 郭濎, 俛宇先生年譜 권6, 1956, 22b~23a면, “方議長書, 門人金銖金榥侍坐, 先生曰: ‘今日之挺身出名而冒禍患, 殆非儒者本色, 然顧今事體, 實有異於古昔者, 安可固守常 파리장서운동의 전개와 영남지역의 숨은 협력자들 - 531 - 운동의 명분과 가치를 분명히 인식하고 주어진 역할에 더욱 몰입할 수 있었 고, 1920년대 중반에는 전 시대에 스승이 제시한 독립운동의 방략을 충실히 계승하게 되었다. 이들의 파리장서운동의 명분에 대한 신뢰는 1921년 제3차 독립청원운동82) 으로 이어졌다. 1919년 제1차 독립청원운동(파리장서운동)이 서양열강의 무 반응으로 실패하고 1920년 중국 남경정부 대통령 孫文과 군벌 吳佩孚에게 독립청원서를 보내려던 제2차 독립청원운동이 파견대표 이중업의 병사로 중 지되었다. 이어 1921년 가을 孫文에게 독립청원서를 보내려는 시도가 있었고, 이번에는 김황이 파리장서운동에 이어 다시 한 번 독립청원서를 작성했다. 결 과적으로 3차례의 독립청원운동은 모두 실패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의 인적 연결망은 계속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1923년 김창백, 김창탁이 김창 숙의 지시에 따라 자금모집을 시도한 사실이 확인되는 것이다.83) 파리장서운동의 협력자들은 1925,6년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한 자금모집활 동84)의 주역으로 성장했다. 원래 김창숙은 기획 단계에서 파리장서 서명자를 주요 접촉대상으로 상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명자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파 리장서운동의 실패와 서명자들의 옥고, 파리평화회의와 태평양회의에 대한 독 립청원운동의 좌절은 유림과 부호들이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것을 주저하게 만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김창숙이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동지적 관계로까지 발전 한 혈연85)과 파리장서운동 때 2선에서 자신을 도운 협력자들이었다. 이들 협력자의 활동은 확실히 서명자들에 비해 두드러졌다. 이들은 김창숙 節而不一聲明哉? 吾所以爲此者, 非但爲國家義務, 實亦所以爲儒林地, 不得不然.’” 82) 제2,3차 독립청원운동의 용어 사용과 운동 개요에 대해서는, 김희곤 외, 봉화의 독 립운동사, 봉화군, 2007, 195~198면 참조. 83) 경상북도경찰부, 손후익 경찰 신문조서 (제1회), 1926.5.14(제2차 유림단 사건―독 립운동사 자료집, 80~81면). 84) 김창숙의 독립운동기지 건설운동의 경과에 대해선, 金喜坤, 제2차 유림단의거 연구 ―心山金昌淑의 활동을 중심으로 , 大東文化硏究 38, 大東文化硏究院, 2001을 참고하 였다. 85) 김창숙의 매부 李泳魯, 사돈 孫厚翼(둘째아들 장인)․李在洛(둘째딸 시아버지), 사 돈의 처남 鄭守基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大東文化硏究 제89집 - 532 - 을 대신해 전국 곳곳을 누비며 자금을 모집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김황, 곽윤, 김창백이었다. 김창숙은 입국한 뒤 경성에 숙소를 정했는데, 이때 처음 만난 인물이 김황과 곽윤이었다.86) 두 인물은 1925년 10월 김창숙이 모험적 수단 (권총)을 이용해 자금을 모집코자 결성한 新建同盟團의 구성원이 되었고,87) 곽종석 지지자들이 많이 사는 경남 진주, 거창 등지에 가서 부호에게 자금제 공을 요구했다. 특히 곽윤은 대구의 최해윤을, 김황은 진주의 하재화(서명자) 를 만났는데,88) 둘 다 이진상-곽종석 학맥과 유대관계가 깊은 인물들이었다. 즉 김황 등은 옛 파리장서 서명자들을 대상으로 한 자금모집이 여의치 않자 자신이 속한 이진상-곽종석 학맥 속을 깊이 파고들어 스승의 문집 간행과 동 문 김창숙이 주도하는 독립운동에 자금 제공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는 동문과 지인들을 회유했다고 하겠다. 김창숙이 가장 신뢰하는 친족(사촌동생)인 김창백89)도 자금모집에 참여했 다. 그는 영주의 김동진(서명자)에게 자금모집원이 될 것을 요구했고, 김창숙 이 자금모집을 독려하기 위해 동석한 1925년 12월의 대구 회합과 1926년의 부 산 범어사 회합에 참석했다.90) 그는 김창숙으로부터 ‘왜정기관의 파괴와 친 일파 부호 박멸’에 관한 내밀한 계획을 듣기도 했다.91) 한편 파리장서운동 때 김창숙을 국경 부근까지 안내했던 김창탁은 이번에도 김창숙의 출국을 도왔 다. 그는 김창숙이 모집한 자금 3,550원을 소지하고 삼랑진역(마산)에서 김창 숙을 만나 기차 타고 경성을 거쳐 중국 奉天까지 동행했다.92) 이밖에 배석하, 이기원, 이길호도 이 활동에 참여했다. 86) 金喜坤, 앞의 2001 논문, 472면. 87) 金喜坤, 앞의 2001 논문, 474면. 88) 경상북도경찰부, 송영우 경찰 신문조서 (제2회), 1926.5.20, 제2차 유림단 사건―독 립운동사 자료집, 42~43면. 89) 경상북도경찰부는 김창숙이 입국할 경우 만날 가능성이 높은 친족으로 金聖林, 이 길호, 李在洛과 더불어 김창백을 지목했다(경상북도경찰부, 김창숙 소개 수사보고 서 , 1926.4.8, 제2차 유림단사건―독립운동사 자료집, 13면). 90) 金喜坤, 앞의 2001 논문, 475면. 91) 躄翁一代記, 187면. 92) 金喜坤, 앞의 2001 논문, 477~478면; 躄翁一代記, 186~189면. 파리장서운동의 전개와 영남지역의 숨은 협력자들 - 533 - 이들은 1919년에는 파리장서 서명자 명단에 포함되지 않은 까닭에 표면적 책임과 법적 처벌을 면했지만, 이번에는 권총을 이용해 자금제공을 요구한 사 실이 분명히 드러났기 때문에 ‘처벌’을 피할 수 없었다. 김창숙이 기획한 활동 에 연루되어 총 11명이 유죄(벌금형 포함)를 받았는데, 협력자 중에서는 김창 백이 징역 2년, 김창탁이 징역 10월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93) 징역 2년은 김 창숙(징역 15년), 金華植․宋永祐(징역 3년)에 이어 가장 높은 형량이었다. 한편 김황은 예심에서 면소를 받았고,94) 이기원은 7개월 옥고를 치렀으며,95) 곽윤은 체포되었으나 지인의 도움으로 간신히 도망하여 한동안 도피생활을 했다고 전한다.96) 파리장서운동 이후 서명자들의 연이은 체포와 옥고가 이들에게 독립운동 참 여에 대한 두려움의 기억을 남겼듯이 독립운동기지 건설운동에 참여했다가 체 포된 협력자들 역시 집단적 공포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무엇보다 좋지 않은 징조는 자금모집활동기간 동안 나타난 일부 협력자들의 비협조적인 태도였다. 김창숙은 애초에 자금모집목표로 20만원으로 삼고 이길호에게 6만원, 김교림에 게 1만원을 기대했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갔다. 이들은 ‘여비’ 수준의 돈을 제공 하는데 그치거나 이예 거부하기도 했다. 김창숙은 가까운 친족과 동문마저 자 금제공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폭탄 4개를 구입해 봉화와 진주에 폭탄을 던지지 않고는 못참겠다’며 분노를 표출하기도 했다.97) 1925,6년 자금모집활동에 참여한 협력자들이 대거 검거되자 이후 이들의 독립운동 참여는 많이 위축되었다.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이정기 등 극소 수의 인물을 제외하면 1920년대 중반 이후 독립운동 또는 사회운동부문에서 질적인 변화의 시도가 감지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1920년대를 풍미한 청년운 93) 宋永祐등 12인 판결문(대구지방법원, 1927.3.29); 金昌百판결문(대구지방법원, 1929. 9.30). 94) 宋永祐등 29인 예심종결서(대구지방법원 예심계, 1927.1.21). 95) 重齋先生文集 13, 附錄, 隨記, 90면. 96) 重齋先生文集 13, 隨記, 92면. 97) 경상북도경찰부, 송영우 경찰 신문조서 (제1회), 1926.5.14, 제2차 유림단 사건―독 립운동사 자료집, 86면. 大東文化硏究 제89집 - 534 - 동, 사회주의운동, 민족협동전선(신간회운동)에 참여한 사례는 찾기 힘들다. 김창숙이 1919년, 1920년대 국내외를 오가며 독립청원운동, 독립운동기지건설 운동, 의열투쟁 등 다양한 독립운동을 모색했던 것과 달리, 이들은 1920년대 초 여전히 독립청원운동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98) 이런 결과를 놓고 볼 때 문제의 근원은 사실 1919년부터 흐릿하게 확인되 고 있었다. 이 시기에 고양된 유림의 민족의식과 독립정신은 근대적 민족의식 과 거리가 있었고, 전 시대에 만연했던 유림의 충군애국의식과 유사했다. 이 런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2월 28일 경성에서 있었던 김황과 林有 棟99)(1900~1950)의 대화내용이다. 이들은 비록 과거에 같은 스승 밑에서 수 학했으나, 한 명은 구학문의 계승자가 되고 다른 한 명은 신학문의 수용자가 되었으며, 3․1운동이 막 발발한 시기에 피식민지화의 원인, 사대주의의 폐해, 유림의 무능, 군주의 존립근거를 놓고 매우 이질적인 시각을 표출했다. 김황은 오랜만에 후배를 만나기 위해 임유동을 찾아갔으나, 김황을 만난 임유동의 심기는 불편했다. 임유동의 눈에 비친 김황은 ‘古道’를 고수한 채 식민지문제를 외면하는 고루한 시골서생에 불과했다. 임유동은 김황에게 조 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이유를 묻고, 그 근본원인은 유림의 두뇌에 깊이 박 혀있는 事大의식과 자국문화 경시 풍조에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유림은 중 국사와 중국문화에 대해선 정통하지만 자국역사와 자국문화에 대해 정통한 이가 드물다고 질타했다. 이에 대해 김황은 “중국과 만방에서 법으로 삼을 만한 것이 하나라도 있다 면 그것을 취한들 무슨 해가 되”고, “어찌 (유림이 자국문화를-필자) 알지 못 한다고 하는가?”라며 반문하였다. 오히려 임유동에게 “君들의 내장에는 西國 精神이 있어 祖國精神에 병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고 반박했다. 이어 임유 동이 임금이 민족의 대표이지만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면 바꿔야 한다고 하 자 김황은 “그대의 말이 여기에 이르니 오히려 다시 어찌 하겠는가?”라며 대 98) 金喜坤, 앞의 2001 논문, 465~483면. 김희곤은 ‘제2차 유림단 의거’는 한국독립운동 사에서 유림이 집단적으로 벌인 마지막 활동이라고 평가했다. 99) 임유동의 형은 林有樑인데 곽종석의 사위였고, 임유량․임유동 형제는 곽종석 문하 에서 수학했다(俛宇集 4, 俛門承敎錄, 839~841면). 파리장서운동의 전개와 영남지역의 숨은 협력자들 - 535 - 화를 중단했다. 임유동 일행이 방을 나서자 김황과 동석했던 곽윤은 “미친놈 (突兀漢)”이라며 분노를 억누르지 못했다.100) 이진상-곽종석 학맥은 유림계열 중 서양과 근대문명에 대해 가장 개방적인 입장을 취한 학맥이었지만, 보수적인 유림으로서 근대문명과 식민지 현실을 바라보는 눈은 여전히 근본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두 인물은 젊어서 함 께 유교의 세례를 받았고 3․1운동에도 적극 동참했지만, 경성에서 신학문을 습득한 뒤 삼일운동에 참여하고 중국망명을 앞두고 있던 독립운동가․청년운 동가 임유동의 눈에 김황은 여전히 수구세력의 잔영에 불과하였다. 즉 김황과 곽윤은 곽종석이 주창한 독립운동의 명분에 공감하여 적극 참여 하고 이후에도 그 정신을 충실히 계승하는데 몰두했으나, 중화문명에 대한 여 전한 집착과 민족의식의 토대가 되는 國史, 國語, 國祖, 國土, 國魂에 대한 외면으로 인해 다음 시대에 적합한 새로운 독립운동의 방략을 제시하는 데에 는 실패했다고 하겠다.101) 100) 重齋先生文集 13, 己未日記, 음력 1월 28일, 26~28면, “榥曰: 君輩出去日久, 必 有所見, 爲我言學校之裏許. …… 棟曰: …… 吾輩曩時有國, 而今無國, 頃也揚揚, 固 萬國之一, 今則蹙蹙然, 爲人下之不免, 是何故? …… 吾國自有聖人, 吾國自有史冊, 吾 國自有制度, 何之不足而必事支那也? 一箇事大字, 其禍至於今日, 則子輩之罪也. 榥 曰: 事大者, 豈本心安乎? 抑勢之然也. …… 豈獨支那萬邦, 有一可法, 則取之何害? 棟曰: …… 吾邦則本無不足…… 其取之也, 不過大冠長袖, 褎然終日, 使之執一繩, 則已失之矣. 取之何爲? …… 曾有儒者, 識本國史者乎? 曰: 奚爲不知也? …… 榥曰: 君輩言吾人學華之非, 以要不失祖國精神也, 却恐君輩肚裏, 有西國精神, 其爲病於祖國 精神…… 棟曰: 君爲民族之代表, 如車火甬上人一般代表不善, 則自當易之, 何有於尊 重而世守之? 榥曰: 君言至此, 尙復奈何? 遂謝罷二人, 奫目送之曰: 眞突兀漢也.” 101) 다만 협력자들의 1919년 이후 행적과 사상에 대해선, 문집에 수록된 글만으로는 문 명, 시대, 체제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파악하기 힘들다. 따라서 앞으로는 관련 문중 에 소장된 근대문서의 조사에 대한 심도 있는 조사를 통해 이들의 내면세계를 온 전히 분석하려는 시도가 있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大東文化硏究 제89집 - 536 - Ⅴ. 맺음말 본 논문은 파리장서운동에 참여한 인물 가운데 영남지역에서 보조적인 역 할을 수행했던 인물들의 인적 구성과 활동 내용을 살펴보았다. 이들은 파리장 서운동을 추진한 인물이나 파리장서에 서명한 인물에 비해 덜 알려져 있으나, 파리장서운동의 역동적 전개과정과 ‘제2차 유림단 의거’로 논의되는 후속 활 동의에 크게 기여한 인물들이었다. 사료에서 확인되는 파리장서운동의 협력자는 58명인데, 이 중 영남 출신은 55명이다. 이들 중 郭奫․金榥은 잘 알려져 있으나, 宋圭善․鄭宗鎬등은 기 존 연구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은 인물들이다. 이들은 대개 파리장서운동의 지 도자나 주요 서명자들과의 혈연적, 학연을 토대로 파리장서운동에 참여하였 다. 곽윤은 곽종석의 조카, 송규선은 宋浚弼의 族叔이었다. 한편 이들 중 김 황․金銖등 9명은 파리장서의 서명자 대표인 곽종석의 제자였다. 이들은 세부 활동을 지시한 자와의 관계에 따라 맡은 역할도 달라지는 경 향이 있었다. 혈연을 토대로 투입된 인물들은 비교적 제한된 지역에서 단순하 지만 시급한 처리를 요하는 사안에 주로 투입되었다. 서신 전달, 파리장서(초 안․수정안․최종 완성본) 전달․淨書․보관, 서명의사 확인, 자금 전달 등 과 같은 사무였다. 반면 학맥을 토대로 투입된 인물은 거리를 불문하고 상대 적으로 복합적인 사무가 부여되었다. 이들은 상대적으로 보다 다양한 인사들 을 접촉하면서 운동 동참과 독립청원서 서명을 독려하고 자금을 확보하는 일 에 참여하였다. 이들의 활동은 3단계로 진행되었다. 제1기에는 스승 또는 지방의 유림지도 자에게 운동의 개요를 설명하고 참여를 권유하는 한편 독립청원서의 집필을 요청하는 역할을 수행했고(곽윤․김황․張始遠․송규선․宋壽根), 제2기에 는 독립청원서 서명자 명단을 모으고 자금을 모집하며 각지의 운동진행결과 를 지도층에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으며(김황․송규선․鄭宗鎬․河益鎭․李 基轍), 제3기에는 김창숙의 국외파견활동을 지원하는 임무를 맡았다(李鉉 德․朴敦緖․朴洸). 특히 송규선․정종호가 김창숙을 대신해 일부 지역에서 파리장서운동의 전개와 영남지역의 숨은 협력자들 - 537 - 서명자 규합 활동을 활발히 펼친 점이 주목된다. 이들 협력자의 활동은 1회성 활동에 그치지 않고 1925,6년에 김창숙이 주도 한 독립운동기지 건설운동의 토대가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金榥등 협 력자 집단은 파리장서운동 당시 체포나 장기간 옥고를 피했을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인적망을 형성하고 지지를 도출해내는데 필요 한 다양한 경험을 쌓음으로써 1925,6년의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한 자금모집 활동에 실질적인 주역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반면 다음 시기의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에 필요한 동력을 확보하는 데에는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곽종석․장석영․송준필 등이 지닌 역사의식, 세계관, 독립운동 방략을 충실히 계승했으나, 민족의식의 발양에 필요한 국 어, 국사, 국조, 국혼에 대한 관심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탓에 다음 시대의 독립운동 방략을 모색하는데 요구되는 사상적 토대를 구축하는 데에는 실패 하였고, 이는 1926년 이후 이들의 독립운동이 크게 위축되고, 파편적으로 진 행된 데에서도 잘 확인된다. 마지막으로, 본 논문은 자료적 한계로 인해 곽종석 계열의 인물들을 중심 으로 논의를 진행하는데 머물렀다. 또한 안동권, 경남 남동부권의 인물들을 자세히 분석하지 못한 점도 한계로 지적된다. 이에 대해서는 차후 연구를 통 해 보완해 가고자 한다. 투고일: 2015.01.19 심사일: 2015.02.22 게재확정일: 2015.03.09 大東文化硏究 제89집 - 538 - •참고문헌 ․朝鮮日報, 碧珍李氏監務公派世譜(1983), 星山呂氏大同譜(2006), 冶 城宋氏忠肅公派譜(1995), 仁同張氏大同譜(1998) ․郭濎, 俛宇先生年譜, 1956 ․郭鍾錫, 俛宇集 4, 亞細亞文化社, 1984 ․金魯東, 志山先生年譜, 1952 ․金炳浩編, 儒學淵源錄, 大韓公報社, 1982 ․金昌淑, 己未儒林團事件에 關한 追憶의 感想, 독립기념관 복제본 소장 ․金昌淑, 心山遺稿, 國史編纂委員會, 1973 ․金榥, 重齋先生文集 13, 千字族譜社, 1998 ․朴殷植, 朴殷植全書 上, 檀國大出版部, 1975 ․孫厚翼, 文巖先生文集, 홍익대 도서관 소장 ․宋寅建, 謙軒文集, 1985 ․宋仁根, 瀋中實記, 송재소 소장 ․心山記念事業準備委員會編譯, (心山金昌淑先生鬪爭史) 躄翁一代記, 太 乙出版社, 1965 ․儒林團獨立運動實記編纂委員會編, 國譯儒林團獨立運動實記(瀋中日記), 대보사, 2001 ․柳浩根, 四可集, 景仁文化社, 1993 ․張錫英, 先文別集 智, 필사본, 장세민 소장 ․張鎭永, 東山遺集 ․慶尙北道警察部, 高等警察要史, 1934 ․南富熙編譯, 제2차 유림단 사건―독립운동사 자료집, 불휘, 1992 ․金昌百판결문(대구지방법원, 1929.9.30) ․宋永祐등 12인 판결문(대구지방법원, 1927.3.29) ․宋永祐등 29인 예심종결서(대구지방법원 예심계, 1927.1.21) ․권오영, 조선 후기 유림의 사상과 활동, 돌베개, 2003 ․김희곤 외, 봉화의 독립운동사, 봉화군, 2007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8(문화투쟁사), 1976 ․趙東杰, 韓國近現代史의 理解와 論理, 지식산업사, 1998 ․韓國儒林獨立運動巴里長書碑建立委員會, 韓國儒林獨立運動巴里長書 파리장서운동의 전개와 영남지역의 숨은 협력자들 - 539 - 略史, 1973 ․권영배, 성주지역의 3․1운동과 파리장서운동 , 계명사학 23, 계명사학회, 2012 ․권영배, 경북지역의 파리장서운동 , 안동대 안동문화연구소, 경북독립운동 사 Ⅲ(3․1운동), 경상북도, 2013 ․金祥起, 金福漢의 洪州義兵과 파리長書運動, 大東文化硏究 39, 大東 文化硏究院, 2001 ․김상기, 임한주의 사상과 독립운동 , 한국독립운동사연구 47, 한국독립운 동사연구소, 2014 ․金龍基, 三․一獨立運動과 巴里長書事件에 對하여 , 文理大學報, 釜山 大文理科大學, 1959 ․金喜坤, 제2차 유림단의거 연구―心山金昌淑의 활동을 중심으로 , 大東 文化硏究 38, 大東文化硏究院, 2001 ․김희곤, 해제 ,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7, 국사편찬위원회, 2005 ․南富熙, 儒敎界의 巴里長書運動과 3․1運動, 한국의 철학 12, 1984 ․서동일, 파리長書運動의 기원과 在京儒林, 한국독립운동사연구 30, 한국 독립운동사연구소, 2008 ․徐東一, 1919년 巴里長書運動의 전개와 역사적 성격 ,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9 ․서동일, 1910년대 韓中儒林의 교류와 孔敎運動, 한국민족운동사연구 77,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3 ․徐東一, 성주 사도실마을의 창씨 실태와 유림 김창숙의 반대 논리 , 한국 근현대사연구 70, 한국근현대사학회, 2014 ․吳世昌, 巴里長書와 宋浚弼, 한국근현대사연구 15, 한국근현대사학회, 2000 ․林京錫, 유교지식인의 독립운동―1919년 파리장서의 작성 경위와 문안 변동 , 大東文化硏究 37, 大東文化硏究院, 2000 ․林京錫, 파리장서 서명자 연구 , 大東文化硏究 38, 大東文化硏究院, 2001 ․최미정, 경북 봉화 義城金氏문중의 儒林團義擧참여 , 한국독립운동사 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4 ․許善道, 三․一運動과 儒敎界, 三․一運動50周年紀念論集, 東亞日報 社, 1969 大東文化硏究 제89집 - 540 - The process of Pari Jangseo Undong (巴里長書運動) and the Hidden Cooperators of Kyoungsang-do in Colonial Korea Seo, Dong-Il In 1919, an strange independence movement, named Pari Jangseo Undong(巴里長書運動: so called the 1st Confucian Independence Movement), was led by a numerous Korean confucian. The Korea confucian over one hundred persons strongly asked the International Peace Conference in Paris for supporting the independence of Korea against Imperial Japan. But, now, we just know only the name and activity of the signers. Then, did they handle all the affairs related to the independence movement? Were such situations possible? According to documents related to those, our answer is no. Many persons were needed to help the leaders and the signers. Because the leaders was too old, sick to carry out urgent affairs, and sometimes could nothing for private things, for example wearing funeral rites for parents. Additionally, it's impossible to come and go to meet important persons using boulevards because Japanese polices watched out and prevents from Korean after 3.1 Movement. Then, who passed the important informations to many persons, met the famous confucian of province and encouraged them to sign, and gathered lots of money to need in many activities, and therefore led this independence movement possible? Now, let's call the persons to have helped the leaders and the signers 'cooperator' of Pari Jangseo Undong. According to several documents related to this independence movement, the number of the cooperators was about fifty eight and over, and one of the persons who worked in Gyoungsang-do 파리장서운동의 전개와 영남지역의 숨은 협력자들 - 541 - was fifty five. Did they participate in the independence movement for any reasons? How did it the reasons affect in their activities? And, what did the cooperators do in details? Key Words : Korean Confucianism, Imperial Japan, Independence Movement, Pari Jangseo Undong (巴里長書運動), Cooperators 大東文化硏究 제89집 - 542 - 성명 출생 년도 나이 (1919) 주소 학맥 주요 활동 근거 1 郭奫1881 39 경남 거창 곽종석 상경, 김창숙의 계획을 곽종석에게 전달, 장서 최종본 淨書 벽옹 108쪽 2 金敎林1865 55 경북 영주 김창숙과 영주지역 협조방안 모색 감상 3 金魯東1899 21 충남 홍성 김복한 유호근에게 서명 권유 사가 5a쪽 4 金銖1890 20 경남 합천 곽종석 곽종석에게 장서 작성 요청받았으나 사양. 곽종석 지시에 따라 의령 방문 기미 38,39쪽 5 金瀁模김흥락 서명의사 표명(탈락) 실기 21쪽 6 金愚植 김창숙이 출국 직전 차후운동방향 논의 벽옹 91쪽 7 金應燮1878 42 경북 안동 조선국권회복단을 대표해 장서를 휴대하고 상해 도착, 김창숙과 상봉 벽옹 103쪽 8 金震相1890 30 경남 산청 윤정수를 김황의 집으로 데려옴 중재 79쪽 9 金昌百1879 41 경북 봉화 봉화 해저 방문한 김창숙과 비밀회동 벽옹 75쪽 10 金昌鐸1881 39 경남 진주 상인. 김창숙 출국시 국경까지 인도 중재 94쪽 11 金鴻基1884 36 경북 봉화 봉화 해저 방문한 김창숙과 비밀회동 벽옹 75쪽 12 金榥1896 24 경남 산청 곽종석 상경, 김창숙의 계획을 곽종석에게 전달, 산청․진주 일대에서 동지 규합 벽옹 72쪽 <별표 1> 파리장서운동 협력자의 주요 활동 파리장서운동의 전개와 영남지역의 숨은 협력자들 - 543 - 성명 출생 년도 나이 (1919) 주소 학맥 주요 활동 근거 13 金熙琫1874 45 경북 창녕 관련 인물로 경찰에 체포 요사 252쪽 14 文存浩1884 36 경남 산청 곽종석 부친 문용(서명자)과 함께 체포 심산 280쪽 15 朴洸1882 38 중국 안동 상인. 중국 안동현에서 김창숙으로부터 국내연락 부탁받음 벽옹 101쪽 16 朴敦緖 경북 성주? 경성에서 김창숙의 중국행에 동행 벽옹 101쪽 17 朴膺鍾1893 27 곽종석 진주에서 동지 규합 기미 41쪽 18 裵文昶1864 56 경남 함안 〃모처에서 동지 규합 기미 39쪽 19 裵錫夏1857? 62? 경북 칠곡 이만도 관련자 벽옹 108쪽 20 孫晋衡1870 50 이중업․장석영의 요청에 따라 조카 손후익을 보내 도우려 했으나 실패 문암 35a-b쪽 21 宋圭善1880 33 경북 성주 송준필 상경, 귀가. 송준필의 계획에 동조, 김창숙을 백새각으로 불러옴, 김창숙과 함께 곽종석 방문. 서명의사 표명(탈락). 실기 27,51-52쪽, 판결(1919. 5.20), 감상 22 宋象翼관련자 형사사건부 (1919) 23 宋壽根1896 24 경북 성주 송준필 장석영에게 부친(송준필)의 도움요청 편지 전달, 동지 규합, 김창숙에게 여비 전달 실기 26-28,52-53 쪽 24 宋寅建1892 28 경북 성주 송준필에게 서명자 명단 규합 의사 표명 겸헌 25 宋寅輯1886 34 〃송준필 이기정에게 서명 권유 실기 52쪽 大東文化硏究 제89집 - 544 - 성명 출생 년도 나이 (1919) 주소 학맥 주요 활동 근거 26 宋晦根1877 43 〃 서명의사 표명(탈락), 김창숙에게 여비 1천원 제공 실기 21,28,51쪽 27 安鍾默1887 33 경북 영천 관련자 벽옹 108쪽 28 呂輔會1861 29 경북 성주 장복추 서명의사 표명(탈락), 김창숙에게 여비 2천원 제공 실기 21,28쪽 29 呂相胤1855 65 〃서명의사 표명(탈락) 판결(1919. 5.20), 실기 21쪽 30 柳遠重1861 59 정재규 서명의사 표명(철회) 중재 80쪽 31 尹正洙김황․김진상 접촉 중재 79쪽 32 尹顯振1892 28 경남 양산 파리장서를 영문으로 번역 벽옹 107쪽 33 李敎仁1887 33 경북 영주 김동진 김창숙과 함께 영주지역 운동확산방안 논의 벽옹 74쪽 34 李基元1885 25 경북 성주 곽종석 관련 인물로 경찰에 체포? 요사 252쪽 35 李基允1891 29 〃장석영 관련 인물로 경찰에 체포 〃 36 李基轍 경북 거창? 김창숙으로부터 연락사무 부탁받음 단상 37 李吉浩1893 27 경남 진주 김창숙이 만나기로 작정 실기 28쪽 38 李達馝 경남 산청 송준필 송준필에게 독립청원운동 권유 실기 24쪽 39 李明均1864 56 경북 김천 곽종석 관련자 요사 250쪽 40 李炳喆1883 37 경북 성주 관련 인물로 경찰에 체포 요사 252쪽 파리장서운동의 전개와 영남지역의 숨은 협력자들 - 545 - 성명 출생 년도 나이 (1919) 주소 학맥 주요 활동 근거 41 李相薰1894 26 대구 부친(이윤)이 김창숙을 도울 것을 지시 벽옹 108쪽 42 李永珪김복한 김복한 지시에 따라 경성에 파견되어 임경호 접촉 지산 6a쪽 43 李潤대구 아들 이상훈으로 하여금 김창숙을 돕게 함 벽옹 108쪽 44 李定基1898 22 경북 성주 이두훈 서명의사 표명?(탈락?). 관련 인물로 경찰에 체포 요사 248,250쪽 45 李弼鎬관련자 벽옹 108쪽 46 李鉉德1887 33 경남 하동 곽종석 경성에서 김창숙이 곽종석에 대한 부탁사항 전달 요청받음, 서명의사 표명(탈락), 김화에게 서명자명단 전달 벽옹 72쪽, 중재 41,80쪽 47 張始遠1870 50 장석영이 작성한 장서초안을 곽종석에게 전달 선문 7a쪽 48 張鎭永1886 34 송준필 송준필의 지시에 따라 김창숙을 도움 동산 3a쪽 49 張鎭浩 이봉희로부터 서명 권유받음 판결문(191 9.5.20) 50 張鎭洪1873 48 경북 성주 관련 인물로 경찰에 체포 요사 252쪽 51 田溶彧1899 21 충남 홍성 김복한 김복한 지시에 따라 경성에 파견되어 임경호 접촉 지산 6a쪽 52 鄭宗鎬1875 45 경북 성주 노상직 장석영으로부터 파리장서를 받아 윤상태에게 전달, 서명의사 표명(탈락) 실기 21쪽 53 崔海潤1873 47 대구 곽종석 부호. 관련자 벽옹 108쪽 大東文化硏究 제89집 - 546 - 성명 출생 년도 나이 (1919) 주소 학맥 주요 활동 근거 54 河泳奎1871 49 경남 진주 곽종석 서명의사 표명(탈락) 중재 41쪽 55 河泳斗〃〃 56 河益鎭1878 42 경남 진주 곽종석 진양하씨 문중 서명자 명단 수합․전달 〃 57 河載國1867 53 〃곽종석 서명의사 표명(탈락) 〃 58 黃佾性 충남 홍성? 김복한 부호. 김복한 지시에 따라 경성에 파견되어 임경호 접촉 지산 6a쪽 출전: 감상: 金昌淑, 己未儒林團事件에 關한 追憶의 感想(독립기념관 소장 복제본). 겸헌: 宋寅建, 謙軒文集 권4, 行狀. 동산: 張鎭永, 東山遺集, 권4, 行狀. 문암: 孫厚翼, 文巖先生文集 권22, 仲父瑚峯府君遺事(홍익대 소장본). 벽옹: 心山記念事業準備委員會編譯, (心山金昌淑先生鬪爭史) 躄翁一代記, 太乙出版社, 1965. 사가: 柳浩根, 四可集 권1, 與金元五(辛酉), 景仁文化社, 1993. 심산: 金昌淑, 心山遺稿, 國史編纂委員會, 1973. 실기: 儒林團獨立運動實記編纂委員會編, 國譯儒林團獨立運動實記(瀋中日 記), 原文篇, 대보사, 2001. 요사: 慶尙北道警察部, 高等警察要史, 1935. 중재: 金榥, 重齋先生文集 13, 千字族譜社, 1998. 지산: 金魯東, 志山先生年譜 권2, 1952. 선문: 張錫英, 先文別集 智, 黑山日錄(장세민 소장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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