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자리
김시헌
아홉 시가 되면 서둘러 집을 나선다. 손에는 끈 달린 검은 가방이 늘어진다. 백화점 문화센터로 강의를 하러 가는 것이다. '일일 일건' 하는 말을 친구들에게 흘린 일이 있다. 하루 한 가지씩만 일거리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고향 친구가 서울에 와서 전화를 하고 어느 다방에서 만나자는 일도 나에게는 사건이 된다. 그런데도 일 건도 없는 날이있다. 시간을 어떻게 처분하느냐? 정년 퇴임자에게는 그것이 골칫거리이다. 집안에만 들어앉아 있을 인내심도 없고, 무턱대고 쏘다닐 수도 없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멍에이다.
요행, 일거리가 얼마 전부터 생겼다. 그것이 수필 강의였다. 처음은 긴장되었다. 경상도의 억센 사투리를 어쩌나였고, 다음은 삼사십대의 젊은 주부 앞에서 나의 연령이 문제될 것 같았다. 그러나 꾸며서 될 일도 아니고 조심해서 될 일도 아니었다. 생긴 대로 가진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백화점 문화센터의 담당자 회의가 있단다. 정보 교환의 날이라고 한다. 새로 취미반이 설치되면 회원 충당의 문제, 강사 초빙의 문제가 논의되는데 그 모임을 통해 소개되어 지금은 거의 일일 일건의 일거리가 되었다. 어떤 친구는 고되지 않느냐고 묻는다. 고되기는커녕 빈 시간이 줄어져서 너무 고맙다는 말을 한다. 낮 열 시간 중에서 두 시간만 그들과 보내면 된다. 그것도 나 혼자서 지껄이지 않고, 합평이라는 작품 평가의 공동 시간이 있다. 주고 받고 웃고 흥분하다 보면 두 시간이 금방 간다. 그래도 오후의 남는 시간을 무엇으로 보낼까 하고 시간과 싸워야 할 날이 있다.
집을 나가서 잠실역 지하도 입구에 이르면 80은 되어 보이는 노인이 시멘트 바닥에 앉아 있다. 땅땅한 체구에 머리가 많이 벗겨져 있다. 앞에 사람이 지나가면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십원만!" 하고 외친다. 그때마다 손을 쏙 내민다. 십원은 백 원을 뜻하는 모양이다. 손바닥에는 때에 따라 백 원짜리의 수효가 다르다. 어떤 때는 거의 빈손이다. 나도 때론 백 원씩 놓고 간다. 그러면 "십원만!" 하는 소리보다 더 높게 "고맙습니다." 한다. 고맙습니다를 귓전에 싣고 지하도 계단을 밟고 잇으면 가슴에 찡 하는 감동 같은 게 온다. 백 원짜리보다 더 큰 감동이다. 이래서 주는 맛에 산다고 할 수 있겠다. 백 원으로 베푼다는 생각은 하기 싫다. 그런데도 찡 하는 감동은 무엇일까?
잠실역 안으로 들어가서 표 파는 창구 앞에 경로증을 내민다. 공짜로 나오는 차표에 어떤 할머니는 "고맙습니다." 하고 절을 깊게 하는 것을 보았다. 나도 그 감정이 처음에는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습관에 밀려 그 감정이 사라졌다. 오히려 창구멍 안에서 귀찮다는 듯이 차표를 펄쩍 던지면 '너도 늙어 보아라.' 하는 생각이 퍼뜩 날아 오른다.
아침의 지하철은 대만원이다. 비집고 서 있으면 손잡이를 잡지 않아도 넘어지지 않는다. 옆에 젊고 예쁜 여자와 몸이 강하게 닿고 있으면 옛날엔 기분이 싫지 않았는데 지금은 그가 나를 싫어할까 봐 걱정이다. 만약 싫어하는 감정이 일어난다면 나의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아닌가.
하차 하는 사람 때문에 생기는 구멍에 밀려서 안쪽으로 들어가면 때로 젊은 사람이 벌떡 일어난다. 하차가 아니고 양보일 때 "감사합니다." 하고 앉는다. 나이 덕을 본다고 할까. 그것도 옛날은 노인 취급을 당한다는 불쾌감이 조금 왔는데 지금은 고맙기만 하다. 습관은 무섭다, 안에서 관성 같은 것을 만드는 모양이다. 그래서 오히려 살기 편리할 때가 있다. 관성에 맡겨서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지하도 입구에서는 내가 '고맙다'는 말을 듣고, 열차 안에서는 내가 '고맙다'는 말을 한다. 이것도 인과응보라 하면 되는 것이지?
그런데 몇 달 전부터 지하도 입구의 노인 자리가 비어 있다. 과거에는 며칠씩 비었다가 또 나타나곤 했는데 이번에는 계속 빈다. 나는 문득문득 그 할아버지가 혹? 하는 생각이 일어난다. 가는 길에는 순서가 없다는 말을 한다. 그 할아버지는 순서를 따라도 되는 나이지만 그래도 허망한 생각이 온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는 그 자리에 밤 굽는 할아버지가 앉아 있다. 빈 자리를 보다가 보다가 자기 자리로 잡은 모양이다. '십원'만 하던 노인보다는 좀 젊어 보이지만 또한 할아버지이다. 손을 내밀지 않고 연기를 올리면서 적쇠에 밤을 굽는다.
그 광경을 보면서 나는 오늘 빈자리 생각을 했다. 직장에는 빈자리가 생기면 그때그때 새 사람으로 메워진다. 대통령 자리가 빌 때가 되면, 새 대통령 선거를 한다. 국장 자리가 비면 과장들이 빈 자리를 쳐다본다. 과장 자리가 비면 그 아래의 계장, 계원해서 연달아 빈자리를 쳐다본다. 가을으리 들녘이 비어지면 이듬해의 새싹들이 뒤를 채운다.
인간의 역사는 비우는 역사이고 채우는 역사이다. 인간뿐인가, 생물도 무생물도 다 그렇다. 사람은 오래 살아서 백 년이다. 그런데도 비우고 채우는 연결로 몇만 년이 지났지만 완전히 비운 때가 없었다.
강의를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 버스 정거장에 설 때가 있다. 56번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동차의 물결이 한강 물줄기처럼 이어진다. 1년 전에도 그렇게 흘렀고, 5년 전에도 그렇게 흘렀다,. 고장이 나서 오늘은 나타나지 않는 차도 있고 못쓰게 되어 폐차 처분을 당한 차도 있을 것인데, 거리의 자동차 밀도에는 변동이 없다. 없기는커녕 더욱더 많은 차가 기운차게 흐르고 있다.
지금은 중간 봄이다. 골목길의 나뭇가지에서 참새 새끼가 날개를 바르르 흔들면서 어미에게 먹이를 달란다. 어느 사이 새끼를 쳐서 대여섯 마리의 자식을 거느린 참새 어미, 그도 이 년을 살까 오년을 살까, 한데도 골목길에는 참새 소리가 끊어지지 않는다. 5년 전에도 그렇게 울었고 십년 전에도 그렇게 울었다. 무엇이 끊어지고 이어지는 역사를 만들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또 무엇에다 목적을 두고 있는 것일까? 오늘은 이런 생각을 해본 날이었다.
김시헌|(1925―2014)수필가
수필집|《오후의 좌석》《허무의 표정》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