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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산 항일투쟁유적지 기념비
2009년10월 17일 북만주의 밀산시 조선족 마을 십리와 뒷동산 소나무 숲 언덕에 세워졌다.기념비 둘레삭은 산동성에서 대리석을 가져오고 기념비는 사천성에서 백옥돌을 높이 2미터, 너비 1미터로 깎아 한글비문과 중국어비문을 함께 새겨넣었다.
서일총재항일투쟁유적비
광복70주년을기념하여 서일총재의 나라독립과 민족해방을 위해 싸운 업적을 기리기위해 위해 2015년 8월 2일, 서일총재 순국지인 밀산시 당벽진에 서일총재항일투쟁유적비가 제막 2000여평방미터의 부지에 길이 6.5미터, 높이 2.5미터, 두께 1미터, 무게가 40여톤에 달하는 화강암으로 구성되였다
십리와농장(밀산)
문헌상 밀산시 십리와
흑룡강성 밀산시 흥개진 흥농 육대
黑龙江省 密山市 兴凯镇 兴农六带
1910년대 홍범도가 군인을 이끌고 밀산으로 들어와 봉밀산 아래에서 개척했던 농장 1910년대 이승희를 비롯하여 안창호의 권유를 받은 김성무 등 많은 독립운동가가 새로운 독립운동기지를 개척하기 위해 밀산으로 들어왔다. 이때 홍범도도 군인을 이끌고 봉밀산으로 들어왔다. 봉밀산 주민의 생활을 걱정하여 군인들을 각 호마다 분배하여 그 주인집에서 일하게 하고, 백포자 등지에 학교를 세웠다. 또한, '우리 동무회'라는 청년단체를 조직하여 청년 교육과 독립군의 양성에 주력하였다. 이때 홍범도와 함께 활동했던 인물로는 이중집ㆍ정태ㆍ김용ㆍ문덕빈 등이었으며, 홍범도는 군인들을 동원하여 십리와에 농장을 개척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재 홍범도와 그의 의병부대원들이 개척했다는 십리와 농장은 정확한 위치나 흔적을 찾을 수는 없었다. 다만 이전에는 십리와에 늪지대가 형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인근 마을에 거주하는 수동진(조선족, 조사 당시 68세)노인의 증언을 토대로 십리와농장의 실체를 추측해 보면, 오래전에 마을 사람들로부터 홍범도가 경영했던 농장과 관련하여 ‘홍범도 도랑’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십리와는 특정 지명이 아닌 부근의 늪지 지역을 아우르는 명칭이었으며, 이 지역은 상습침수구역이었다고 한다. 십리와를 가로지르는 하천은 斐德江이며, 십리와 일대는 완달산맥의 줄기, 봉밀산은 장백산맥의 여맥이라고 한다.
밀산 한흥동
문헌상 밀산현 한흥동
흑룡강성 밀산시 백포자향 봉밀산 일대
黑龙江省 密山市 白泡子乡 蜂蜜山 一带
1910년대 북만주 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 기지가 되었던 곳
밀산 한흥동은 1909년 여름부터 항카호 북쪽의 중국령 밀산부 봉밀산 일대에 한인들을 집단이주시켜 만든 마을이다. 특히 이승희는 봉밀산 아래 45만 평의 토지를 사들여 한흥동 마을의 기조를 만들었다. 한인자제 교육을 위해 한민학교가 설치되기도 하였다.
대한독립군단 결성지(밀산)
문헌상 흑룡강성 밀산현 당벽진
흑룡강성 밀산시 당벽진 봉밀산
黑龙江省 密山市 当壁镇 蜂蜜山
1920년 일본군의 간도출병 이후 한국독립운동 단체들이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했던 곳 1920년 10월 일본군의 간도 출병 이후 만주의 독립군들이 러시아로 이동하기 전에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였다. 대한독립군단의 총재는 서일, 부총재 홍범도와 김좌진, 총사령 김규식, 참모총장 이장녕,지청천 등이 임무를 담당하였다. 대한독립군단에 속하는 독립군은 3,500명으로써 3개 대대로 편성되었다. 대한독립군단은 봉밀산 마을에서 결성되었으나, 정확한 지점을 확인되지 않는다.
당벽진 대종교 총본사 터
흑룡강성 밀산시 당벽진
黑龙江省 密山市 当壁镇
1928년부터 1934년까지 민족종교인 대종교 총본사가 있었던 곳
1926년 장작림은 일본의 압력을 받고 '대종교포교금지령'이 내렸다. 이에 따라 동ㆍ서ㆍ북 3개의 도본사가 해체되었고, 서울의 남도본사마저 폐쇄되었다. 대종교는 이러한 상황을 피하고자 1928년 총본사를 밀산현 당벽진으로 옮기고, 1934년 영양현 동경성으로 이전할 때까지 6년 동안 이곳에서 활동하였다. 당시 대종교 총본사가 있었던 곳은 밭으로 변하여 정확한 위치를 찾을 수 없다.
밀산 백포자
문헌상 밀산현 백포자
흑룡강성 밀산시 백포자향 백포자 5대
黑龙江省 密山市 白泡子乡 白泡子 5队
현천묵이 대종교 신도들을 중심으로 대한군정서를 재정비하여 신민부의 탄생을 이끌어 냈던 곳 현천묵은 대종교 신도들을 중심으로 밀산 백포자에서 대한군정서를 재정비하였다. 이 대한군정서가 신민부 창출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백포자에는 과거에 늪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과거의 백포자는 현재 백포자향 백포자 5대이다.
밀산부 관립소학교
문헌상 밀산부 관립학교
흑룡강성 밀산시 지일진 지일소학교 동쪽 담벽 부근
黑龙江省 密山市 知一镇 知一小学校 东边土墙 附近
김성무가 안창호의 권유로 밀산에 들어와 농장을 개척하면서 근무했던 학교 밀산부 관립소학교는 미주에서 활동하던 김성무가 안창호의 권유로 밀산에 들어와 농장을 개척하면서 근무했던 학교이다. 학교 내력은 다음과 같다. “知一鎭은 密山市 동남쪽 11km 지점에 있다. 남쪽으로는 蜂蜜山을, 북쪽으로는 穆낑河를 끼고 있는, 100년 역사의 문화 도시이다. 지일소학교는 1910년 창립된 淸末密山縣 縣府 소재지에 처음으로 건립된 공립소학교이다. 1927년 8월에는 밀산현 현립 師範講習所의 부속소학교가 되었으며, 9ㆍ18 이후에 강습소가 해체되자 다시 독립소학교가 되었다. 학교는 鎭의 중심에 있다. 총면적은 1만 4,400㎡며, 건평은 4,004㎡(그 가운데 강의동은 1,989.14㎡, 기숙사는 809㎡다), 녹지 면적은 2,400㎡다. 창건 95년을 즈음해서 붕괴 위험이 있는 건물에 대한 보수 작업을 모두 끝냈다.2005년 9월, 鎭內의 모든 학생이 이 中心小學校로 집결되었다. 학교는 기숙사 제도를 시행하고 있으며 폐쇄식 관리를 채택하고 있다. 현재 17개의 반이 있으며, 재학생은 542명, 기숙사에 거주하는 학생은 93명, 교직원은 64명이다.100년의 교육 발전 과정에서 각급 지도자의 갚은 관심 속에 지일소학교는 크나큰 발전을 함으로써, 교육 환경이 크게 개선되었다. 어학실습실ㆍ전산실ㆍ멀티미디어 교실이 모두 갖추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실험실ㆍ도서실과 종합활동실이 갖춰져 있다. 14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식당과 120인이 생활할 수 있는 기숙사가 갖추어져 있다. 전 시에서 제일 처음 集中辦學制 (학생 수가 적은 지역 학교의 학생을 주변 성진의 대형 학교에 모아 교육하는 것)를 실시하고 있다. 학교의 면모는 일신되었으며, 교육 수준이 크게 향상되어 학생의 입학률ㆍ승급률ㆍ졸업생 합격률이 모두 100%에 달하였다. 이로써 의무교육과 문맹 퇴치의 성과가 더욱 강화ㆍ제고되었다. 2004년 전 성 붕괴 위험 건물 개조 사업을 위한 시범 현장을 제공하였으며, 2005년 10월 26일에는 헤이룽장 성을 대표하여 국가 교육 감독 단의 검사를 받았다. 2006년에는 鷄西市 시급 녹색 학교로 뽑혔으며, 지방 시급 규범화 학교와 계서시 시범 소학교로 선발되었다. 학교는 여러 해 동안 연속으로 密山市 全面先進集體로 뽑히기도 하였다.“이 학교가 김성무가 근무했던 관립소학교가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밀산 조선족 백년사』 20쪽에는 1930년 중화민국 19년 밀산현 경찰 제5분국 한민호적 등록에 김성무에 관한 기록이 나오고 있다. 관리소학교는 남아 있지 않으나, 관립소학교가 있었던 자리 옆에 지일소학교가 들어서 있었다. 지일소학교 교정 안에 있는 학교 내력에 관한 설명문에 지일소학교가 관립학교를 이어서 설립된 학교라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김성무가 근무했던 관립소학교 터
홍량촌 4열사 묘비 및 석조기념물
문헌상 밀산현 서대림자
흑룡강성 밀산시 서대림자 굉량촌
黑龙江省 密山市 西大林子 宏量村
주덕해와 함께 항일활동을 전개하다 피살되었던 사회주의 운동가들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묘비와 석조 기념물 1933년 9월 주덕해ㆍ황옥청ㆍ오복ㆍ이종근 등은 밀산현 서대림자에서 '항일회'를 설립하고 항일선전활동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조선인민회에 대한 반대투쟁을 전개하면서 신분이 노출되었다. 10월 말 만주군 1개 부대가 밀산 거류민회 소속 양세환의 안내를 받으며, 서대림자로 쳐들어와 주덕해를 내놓으라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만주군은 마을주민의 방해로 주덕해를 찾을 수 없었다. 만주군들은 주덕해 대신 윤락범ㆍ태동식ㆍ이종근ㆍ오복을 체포하여 밀산현성으로 압송하던 중 이들을 살해하였다.현재 서대림자 홍량촌 어구에 윤락범ㆍ태동식ㆍ이종근ㆍ오복의 무덤과 '革命烈士 永垂不朽'라고 새겨진 비석이 있다. 이 비석은 1992년 6월 24일에 건립되었으며, '1933년 某日, 抗日聯軍 戰士 尹落範, 太東奎, 吳福, 李宗根 등은 부대의 이동을 엄호하기 위해 일본군과 혈전을 벌인 후 이곳에서 장렬하게 희생되었다.'라고 적혀 있었다.기념 석조물 뒤에 열사들의 묘비와 무덤이 있다. 주변 묘역은 물론 기념 석조물 등이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기념 석조물의 파손이 심하며, 묘역 역시 관리가 필요하다.
목단강 액하 감옥(목단강)
문헌상 목단강시 액하
흑룡강성 목단강시 철령하진 환성로
黑龙江省 牡丹江市 铁岭河镇 华星路
임오교변 당시 많은 대종교인들이 투옥되었던 곳
1942년 일제는 태평양 전쟁을 전개하기 위하여 식민지 내부의 항일세력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1942년 11월 19일 북만주와 국내에서 윤세복ㆍ이정ㆍ안희제 등 대종교 간부들을 검거하였다. 일제는 영안현 경무과에 특별조사본부를 설치하고 고문과 악형을 행하였다. 제1차 심문 후에는 목단강성 경무과에서 2차로 3개월간 심문하였다. 조사과정에서 고문과 악형 때문에 결국 21명 중 10명은 사망하고, 나머지 8명은 실형을 받았다. 감옥이 있던 곳은 철령하진으로 가는 다리를 건너 좌측이며, 건물터에는 군인가족 주택이 들어서 있다.
김좌진 순국지
문헌상 산시 김좌진장군이 운영하던 정미소 앞
흑룡강성 해림시 산시진 도남촌 문명로 11-1
黑龙江省 海林市 山市镇 道南村 文明路 11-1
김좌진이 동포들의 생활 안정을 목표로 정착하여 정미소를 운영하다가 순국한 곳 김좌진(1889∼1930)은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끈 인물이며, 북로군정서ㆍ신민부ㆍ한족총연합회 등에서 활동한 만주지역의 대표적인 무장독립운동가이다. 안동인 김상용의 11세손인 김형규의 둘째 아들로 고종 27년 출생하였다. 개화당 김옥균과는 사종질 관계이다. 18세 때 집안의 노비들을 해방하고, 1905년 구국계몽운동의 목적으로 호명학교를 설립하여 신교육을 실시하기도 했다. 1915년 박상진 등이 조직한 국내 비밀혁명단체인 ‘대한광복회’에 참가하였다가 체포되어 3년여간 옥고를 치르고 1917년경 출옥하여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1919년 봄 소위 무오독립선언서를 선포하는데 참여하였고, 북로군정서의 지휘관으로 1920년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하였다. 이후 대종교의 민족주의를 주장하며, 1925년에 결성된 신민부와 1929년에 결성된 한족총연합회의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1930년 초 공산주의자인 박상실에게 저격당하여 순국하였다. 이 곳은 만주 지역의 우리 동포들의 생활 안정을 목표로 정착하여 정미소를 운영했던 곳이자 저격당해 순국한 장소이기도 하다. 그가 정착하기 전 북만주 지역에는 목릉현에 있는 황공삼의 정미소만이 운영되고 있었다. 김좌진은 이러한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1929년 한족총연합회와 협의하여 ‘금성정미소’를 설치하였다. 이곳에는 김좌진이 살았던 집과 동상, 그가 운영한 정미소가 남아있다. 그의 집은 한족총연합회의 독립군들이 수시로 드나들며 회의했던 장소이며, 연락 거점이기도 했다. 1999년 그의 집과 동상, 정미소를 복원하였으며, 안내판과 표지석도 설치하였다. 2011년에는 주변지역을 대대적으로 정비하여 현지 주민이 휴식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매년 청명과 추석 때에는 많은 사람이 참배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김좌진장군 묘소지
문헌상 7가촌 뒷산
흑룡강성 해림시 산시진 신흥촌 뒷산
黑龙江省 海林市 山市镇 新兴村 后山
김좌진이 순국한 후 최초로 매장되었던 곳 김좌진이 순국한 후 최초로 매장했던 장소이다. 매장 후 그를 보필하던 8명의 노인은 보초를 세워 묘소를 보호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묘를 계속 보존하기 힘들어지자 1934년 봄 유해를 고향으로 반환할 것을 결정하였다. 김좌진의 고향에서는 본부인 오숙근이 왔으며, 산시에서 옛 전우들과 부하들이 모여들었다. 김좌진의 묘소는 중동선 철로까지 약 700m 떨어져 있었다. 그의 유해는 전용 짐차에 새로이 입관한 후 하얼빈과 심양을 거쳐 국내로 들어왔다. 국내로 들어온 유골은 처음에는 충남 홍성에 모셨다가, 1954년 다시 보령으로 옮겼다. 묘적지는 현재에도 그래도 남아 있으며, ‘김좌진장군기념사업회’에서 복원을 추진 중이다. 청명과 추석에는 많은 학생이 참배행사를 거행하고 있다.
한중우의공원
흑룡강성 해림시 철남가 해랑로
黑龙江省 海林市 铁南街 海浪路
김좌진을 비롯한 항일투사들의 활동과 한인들의 이주역사, 일제의 침략상을 알리는 전시관이 설립된 공원 한중우의 공원은 중국 헤이룽장 성 해림시 해랑로 철남가에 있다. 김좌진을 비롯한 항일투사들의 활동과 한인들의 이주 역사, 일제의 침략 상을 널리 알릴 수 있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특히 21세기를 이끌어나갈 젊은이들에게 선열들의 독립의지를 일깨우고 독립운동의 실상을 파악하는 데 필요한 공간으로 역사관ㆍ백야관ㆍ경비실 3개 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총면적은 16,800㎡이고, 기념관의 면적은 1,860㎡이다. 두 개의 건물로 이루어진 기념관은 백야관과 주몽관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이 중 독립운동과 관련된 내용은 주로 백야관에 전시되어 있다. 백야관은 총 5개의 전시실로 이루어져 있다. 제1실은 1860년부터 시작된 한인들의 만주지역 개척사와 독립운동 관련 내용을 전시하고 있다. 제2실은 만주를 비롯한 국내ㆍ외에서 전개된 3ㆍ1운동과 봉오동전투 및 청산리 전투 등을 보여주고 있다. 제3실은 청산리전투 후 ‘경신참변’과 ‘자유시참변’ 등 독립운동 시련의 역사와 함께 이를 극복하기 위한 각종 독립운동 단체의 성립, 이 시기 김좌진의 활동에 대해서 전시하고 있다. 제4실은 1931년 일제의 침략전쟁에 맞선 한중 연합 무장투쟁 과정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활동을 소개하고 있다. 제5실은 1992년 8월 24일 한중수교 후 한국과 중국의 교류 관련 내용을 전시함으로써 한중우의의 상징적인 공간으로 꾸며 놓았다. 백야관은 총 5개의 전시실로 이루어져 있다. 제1실은 1860년부터 시작된 한인들의 만주지역 개척사와 독립운동 관련 내용을 전시하고 있다. 제2실은 만주를 비롯한 국내ㆍ외에서 전개된 3ㆍ1운동과 봉오동전투 및 청산리 전투 등을 보여주고 있다. 제3실은 청산리전투 후 ‘경신참변’과 ‘자유시참변’ 등 독립운동의 시련의 역사와 함께 이를 극복하기 위한 각종 독립운동 단체의 성립, 이 시기 김좌진의 활동에 대해서 전시하고 있다. 제4실은 1931년 일제의 침략전쟁에 맞선 한중 연합 무장투쟁 과정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활동을 소개하고 있다. 제5실은 1992년 8월 24일 한중수교 후 한국과 중국의 교류 관련 내용을 전시함으로써 한중우의의 상징적인 공간으로 꾸며 놓았다.
한족총연합회 본부 터
문헌상 산시역전
흑룡강성 해림시 산시진 임위가 19호
黑龙江省 海林市 山市镇 林卫街 19号
1929년 북만주에서 김좌진을 중심으로 조직된 아나키즘적 항일독립운동단체인 한족총연합회 본부의 옛 터 한족 총연합회는 1920년대 후반 신민부의 후신으로 김좌진, 이을규, 이정규 등이 조직한 무정부주의 이념을 실천한 북만주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 단체이다. 한족총연합회 본부가 있던 곳은 현재 길가에 있으며 개인 주택이 들어서 있다.
김종진 피살지
문헌상 해림역 부근
흑룡강성 해림시 구해림역 부근
黑龙江省 海林市 旧海林站 附近
1931년 8월 26일 한족총연합회의 중심인물인 김종진이 공산주의자에게 피살되었던 곳 김종진은 김좌진의 족제이다. 또한 그는 1925년 9월에 중국의 운남군관학교를 졸업한 군사 전략가로서 신민부 군정파에서 보안 제5대 대장과 군사부위원으로 활약한 인물이기도 하다. 1927년 9월 북경에서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의 창립자인 이회영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고 무정부주의자가 되었으며,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의 책임위원으로서 일하였다. 가 피살된 곳은 옛 해림 철도역 근처에 있는 광장이다.
북만 한인교육대회 개최지
문헌상 해림시 고령자
흑룡강성 해림시 종마장 2대와 3대 사이, 고령자 중촌
黑龙江省 海林市 种马场 2队ㆍ3队 中间, 古岭子 中村
1927년 8월 해림에서 교육을 통한 후속세대 양성이 결의되었던 북만 한인교육대회가 개최되었던 곳 1927년 8월 1일에는 북만 한인교육대회를 해림에서 개최되었다. 북만 한인교육대회에서는 독립혁명사상을 제2의 국민인 초등학생에게 주입하여 장래를 대비하는 방안이 결의되었다. 그에 대한 실천으로서 주하ㆍ목릉ㆍ밀산ㆍ요하ㆍ돈화 등 15개 지역에 50 여개소의 소학교를 설치하였다. 1개지역에 3개 정도의 소학교가 설립된 것이다. 북만한인교육대회가 개최된 곳은 현재 해림시 종마장 2대와 3대 사이에 있는 논으로 변하였다.
신창학교 터
문헌상 해림 서두가
흑룡강성 해림시 조선족 실험소학교
黑龙江省 海林市 朝鲜族 实验小学校
신민부가 설립한 신창학교의 옛 터 신창학교는 신민부가 건립한 민족학교이다. 1927년 10월 현재 교장은 권중인이며, 학생 수는 60명이었다. 신창학교의 옛터에는 현재 해림시 조선족실험소학교가 들어서 있다.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결성지
문헌상 해림소학교
흑룡강성 해림시 조선족실험소학교
黑龙江省 海林市 朝鲜族 实验小学校
만주지역의 최초의 무정부주의 조직인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이 조직된 곳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은 1929년 7월 북만의 해림지역에 있는 소학교에서 김종진과 이을규 등에 의하여 조직된 무정부주의 이념을 표방한 단체였다. 이 단체는 사회적으로 평등한 모든 사람이 상호보조적 자유 합작으로 인간의 존엄과 개인의 자유를 완전히 보장하는 무지배의 사회,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한 만큼 소비할 수 있는 그러한 사회 즉 무정부주의 사회의 구현을 추구하였다.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했던 장소에 해림시 조선족소학교가 설립되어 있다.
신민부 군정파 본부 터
문헌상 영안현 신안진
흑룡강성 해림시 신안조선족진 부흥촌
黑龙江省 海林市 新安朝鲜族镇 复兴村
신민부의 중추세력인 군정파 본부가 있었던 곳
신민부는 1925년 3월 창립된 이후 1926년 9월 영안에서 신안진으로 그 본부를 옮겼다. 영안 시내에는 대종교총본사가 위치한 남관에만 연락처를 두었다. 신안진의 위치는 해림과 산시 양지점의 중간 지점이었다. 신안진이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발전하자 일제는 신안진에 각종 관공서와 경찰서를 설치하였다. 신안진에는 당시 건물들이 남아 있다. 신민부 군정파의 주요 간부는 김좌진(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 군사부위원장)ㆍ황학수(참모부위원장)ㆍ정신(경리부위원장, 선전부위원장)ㆍ유현(실업부위원장)ㆍ백종렬(보안 제1대대장)ㆍ오상세(보안 제2대대장)ㆍ장종철(보안 제3대대장)ㆍ주혁(보안 제4대대장)ㆍ김종진(보안 제5대대장, 군사부위원)ㆍ임강(별동대장서리)ㆍ박두희(군사교육위원장) 등이다. 이들은 본부를 영안현 신안진에 두고 위하현 석두하자ㆍ영안현 해림ㆍ밀산ㆍ동녕현 등지를 세력 범위를 넓혀갔다. 옛 신안진은 현재 부흥촌ㆍ복강촌ㆍ영락촌 일대이다. 이곳에 마을이 새롭게 조성되었으며, 신민부 군정파 본부는 이곳 어딘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족총연합회 북만중학 부지
문헌상 고령자
흑룡강성 해림시 종마장 2대와 3대 사이, 고령자 중촌
黑龙江省 海林市 种马场 2队ㆍ3队中间, 古岭子 中村
한족총연합회에서 재만동포의 자제들의 교육을 위해 설립했던 북만중학의 옛 터 한족 총연합회는 1929년 8월 북만 중학기성회를 조직하고 학교의 대지로 해림과 산시의 중간에 있는 서남 15리 지점인 고령자로 정하였다. 1925년 김좌진이 원시림을 벌채하고 이 자리에 학교와 훈련장에 필요한 부속건물을 세웠다고 한다. 독립군과 그 가족을 중심으로 고령자에 이주 한인 마을이 들어서게 되었다. 북만 중학은 1934년 일제의 간섭이 시작될 때까지 계속 운영되었다. 북만중학이 있었던 곳은 현재 해림시 종마장 2대와 3대 사이의 고령자 중촌 지역이다.
발해진 대종교 총본사 및 3ㆍ1학원 건물
문헌상 영안현
흑룡강성 영안시 발해진 상경로 동일가도 7호
黑龙江省 宁安市 渤海镇 上京路 同一街道 7号
1934년 영안현 동경성으로 이전한 대종교의 총본사와 3ㆍ1학원이 있었던 곳 대종교는 단군을 받드는 대표적인 항일종교였다. 대종교 총본사는 밀산현 당벽진에서 1934년 영안현 동경성으로 그 본사를 이전하였다. 총본사에서는 동경성을 중심으로 왕성한 포교활동을 전개하였다. 1942년에는 천진전 건물을 발해궁전 옛터 앞에 지으려 하던 중 임오교변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임오교변 당시 대종교 총본사의 위치는 영안현 발해진 상경로 동일가도 7호였다. 한편 동포들의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총본사가 있던 건물에 3ㆍ1 학원을 세웠다. 3ㆍ1 학원은 이후 대종 학원으로 교명이 변경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1941년 봄에 초등부가 폐지되고, 이듬해인 1942년 여름에는 중등부와 여자 야간부가 폐지되었다. 대종교 총본사는 현재 영안시 조선족사업촉진회 북측 길 건너편에 있다. 대종교 총본사가 사용했던 건물은 과거에 주광욱의 개인 주택으로 사용되었으나, 창고와 공장 등으로 쓰이고 있다. 최근 다시 붉은 벽돌집으로 신축하였다. 대종교 총본사가 있었던 구역은 벽돌 건물 뒤편의 큰 건물 일부까지 포함된다고 한다. 강용권 선생의 증언채록으로 대종교 총본사와 대종학원 건물의 공간배치 구조가 밝혀졌다.
발해농장 터(영안)
문헌상 영안현
흑룡강성 영안시 발해진 상경로 17호, 발해진 상경촌 노인협회 맞은편 건물
黑龙江省 宁安市 渤海镇 上京路 17号(渤海镇 上京村 老人协会 对面 建筑) 안희제가 독립운동의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세웠던 발행농장 터
백산 안희제는 부산에서 백산상회를 경영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한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1933년 헤이룽장 성 영안진 동경성에 정착하여 발해농장을 경영하면서 대종교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그러나 백산은 1942년 일제의 대종교 말살정책인 임오교변으로 투옥되었다. 1943년 8월 3일 병보석으로 석방되었지만 3시간 반 만에 동경성 영제병원에서 서거하였다. 안희제의 거처이면서 발해농장 사무실이었던 자리는 지금도 절반가량 남아있다. 그러나 발해농장이 있던 터는 확인되지 않는다.
신민부 조직지
문헌상 영안현 영안성
흑룡강성 영안시
黑龙江省 宁安市
1925년 3월 10일 신민부가 조직되었던 곳
1924년 7월에 길림에서 개최된 전만주통일회의주비회의 결과 남만주 지역을 통괄하는 통일체인 정의부가 성립되었다. 이에 북만주지역의 독립운동단체들도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위하여 1925년 1월 목릉현에 모여 부여족 통일회의를 개최한 결과 동년 3월 10일에 영안현 영안성내에 신민부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신민부가 조직되었던 정확한 지점을 확인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김소래 이상촌
문헌상 영안현 팔도하자 어복촌
흑룡강성 영안시 와룡향 홍기림장
黑龙江省 宁安市 卧龙乡 红旗林场
원종교 창시자 소래 김중건이 독립운동을 추진하면서 조성했던 이상촌 마을 소래 김중건은 1914년 만주로 망명하여 20여 년간 원종교을 선포하고 종교를 통한 이상 국가건설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3ㆍ1운동 이후에는 특히 대진단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김중건은 1928년 원종교의 근거지를 북간도에서 북만으로 옮기고 노야령 북록 팔도하자에 황무지를 개척하여 어복촌을 세웠다. 이 마을은 농사하면서 사상을 학습하는 마을이다. 소래의 「농촌주의 구체안」에 의하여 공작분유제도를 실시했던 것으로 나온다. 공작 분유 제도는 농사를 포함한 모든 노동은 동대를 편성하여 공동으로 수행하고, 분배는 배급카드 제도를 시행하는 제도였다. 공동체안에는 청년단ㆍ소년단ㆍ장년단ㆍ부녀단이 있어 함께 교육을 받고 군사훈련에 임했다. 김중건은 교단을 재정비하고 동경성 인근 여러 지역에 법회를 조직하였다. 만주사변 이후에는 중국군과 힘을 합쳐 일본군과 전투를 전개하다 1933년 3월 24일 순국하였다. 영안시 와룡향 홍기림장 사무청사의 북쪽으로 흐르는 실개천을 지나 후미진 산비탈에 김중건의 집이 있었고, 묘소도 그 주변에 있었으나 지금은 옥수수밭으로 변해 버렸다.
동경성 전투지(영안)
문헌상 중국 길림성(빈강성) 영안현 동경성
흑룡강성 영안시 동경성(진)
黑龙江省 宁安市 东京城(镇)
1933년 6월 7일 한국독립군이 일ㆍ만군과 전투를 벌였던 곳
한국독립군은 1930년 7월 북만주 위하현에서 창건된 한국독립당 소속 독립군이었다. 한국독립군은 1932년 1월부터 중국의용군과 연합하여 1933년 가을까지 북만주 지역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한국독립군이 1933년 6월 7일 전투를 치렀던 동경성의 서문은 없어져 흔적을 찾기 어렵다. 특히 시가지가 많이 변했기 때문에 동경성 지역을 제외하고 과거의 유적지를 찾기는 어렵다. 다만 시내에 있는 동경성이란 이름이 적혀있는 안내 표지판과 철도와 도로의 흔적으로 과거의 전투현장을 추측할 뿐이다. 1930년대 중반 경 동경성에는 겨우 200호, 약 1,100여 명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을 뿐이었다. 또 1934년 대종교 총본사가 밀산현 당벽진에서 옛 발해국의 수도였던 발해진으로 옮겨오기 전까지는 한국인 교민도 별로 없었다. 따라서 이곳에서 독립운동은 지속해서 전개되지 못하였다. 다만 지청천이 거느리는 한국독립군이 중국의용군(길림구국군)과 함께 동경성 전투를 치렀을 뿐이다.이곳은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용천부 유적지가 지척이다. 또 사방이 탁 트인 평야 지대로 토질이 비옥하여 농업(밭농사)이 활발하였다. 현재는 벼농사도 일부 지역에서 가능하다. 따라서 한국독립군이나 중국 항일의용군이 장기간 유격전 등의 형태로 항전을 전개하기 어려운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지역은 영안현성의 서남쪽에 있어 영안현 방위상의 요충지였다. 그리고 도주선(도문-가목사 구간) 철도와 도로가 지나는 교통의 요지였으며, 일본군과 만주국군의 식량보급기지로 활용되고 있었다.
남관 대종교 총본사 터
문헌상 영안 남관
흑룡강성 영안시 통강로 공농병대교
黑龙江省 宁安市 通江路 工农兵大桥
1922~1923년 민족종교인 대종교의 총본사가 있었던 곳
대종교는 1922년 4월 대종교 총본사를 영안현 남관으로 이전하여 각처에 시교당을 설치하였다. 교주인 김교헌은 1922∼1923년 동안 48개 처의 시교당을 설립하고 포교활동에 전념하였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목단강에 단일시교당, 밀산에 숙일시교당, 철령하에 하일시교당, 해림에 장일시교당 등을 들 수 있다. 대종교 총본사가 있던 곳은 영안시 농공병대교 남단 오른쪽으로 현재는 다른 건물이 들어서 있다.
한국귀일당 본부 터(영안)
문헌상 영안현 영고탑
흑룡강성 영안시
黑龙江省 宁安市
1926년 9월 신민부에서 조직한 한국귀일당의 본부 터
신민부는 1926년 9월 한국귀일당을 조직하여 정당활동을 통한 신민부의 운영을 지향하였다. 귀일당은 본부를 영안현 영고탑에 두었고 당원은 천명이나 되었다. 주요 간부는 김좌진ㆍ정신ㆍ유현 등으로 이들 구성원의 대부분은 대종교 교도들이었다. 한국귀일당은 대 종교적 민족주의자들을 주요 구성원으로 하고 대 종교적 민족주의를 이념으로 표방하는 이념정당이었던 것이다.그러나 귀일당이 조직되었던 정확한 지점을 확인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대한독립군단 본부 터
문헌상 목릉현 마교하
흑룡강성 목릉시 마교하
黑龙江省 穆棱市 马桥下
1922년 8월 북로군정서와 신민단 등 여러 세력을 결집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정비할 당시 본부가 위치했던 곳 대한독립군단은 1922년 말 목릉현 마교하에서 한인의 무장활동을 견제하는 중국 지방 관헌에게 무장해제를 당하였으며, 그 후 주요 간부들이 영안현 영고탑으로 모여 재기를 도모하였다. 대한독립군단의 주요 간부는 김좌진, 김규식, 박두희, 신희경, 이범석, 이범윤 등이었다. 대한독립군단의 본부는 강을 끼고 있는 산밑 마을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나, 조사 결과 정확한 위치를 찾기 힘들었다.
부여족통일회의 개최지
문헌상 목릉현
흑룡강성 목릉시 팔면통
黑龙江省 穆棱县 八面通
1925년 신민부를 조직하기 위한 부여족통일회의가 개최되었던 곳
북만주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들은 1925년 지린 성 목릉현에서 부여족 통일회의를 개최하고, 독립군단의 통합과 항일운동의 방략을 논의하고 동년 3월 15일 신민부를 조직하였다. 이 회의에는 김혁ㆍ조성환ㆍ정신ㆍ김좌진ㆍ남성극ㆍ최호ㆍ박두희ㆍ유현 등이 참여하였다.부여족통일회의가 개최되었던 곳은 목릉현 팔면통 역이 있는 마을로 확인되나 정확한 위치 지점을 확인되지 않는다.
송동모범학교 터
흑룡강성 가목사시 탕원현 오동하진
黑龙江省 佳木斯市 汤原县 梧桐河鎭
1928년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이 설립했던 송동모범학교 터
1927년 흑룡강성 군벌 오준승은 탕원현 오동하 하류에 복풍도전회사를 꾸리고 한인 300여 호를 모집하여 논농사를 짓게 하였다. 그리고 한인 박치호와 손우송을 정ㆍ부 경리로 임명하고 무장자위단 20여 명을 두어 관리하게 하였다. 1928년 봄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화요파에서는 최석천ㆍ채평ㆍ이춘만ㆍ김리만 등을 복풍툰에 파견하여 농민들을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게 하였다. 그들은 복풍툰에 송동모범학교를 꾸리고 농민계몽활동을 진행하였다. 이 학교를 졸업한 이들로서 후에 동북항일운동에서 유명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탕원중심현위 서기 배치운ㆍ김성강, 항일연군 제6군 제1사 정치부주임 서광해, 항일연군 제6군 제3사 정치부 주임 오일광, 항일연군 제6군 제1사 사장 마덕산, 항일연군 제 11군 정치부 주임 김정국 등이 그 대표적 인물이다.사회주의 운동가들은 이곳에 농민동맹ㆍ부녀동맹ㆍ반제동맹ㆍ청년회 등을 조직하고 반일활동을 전개하였다. 1929년 가을 농민들을 발동하여 감조감식투쟁을 전개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1930년 11월부터는 제1기ㆍ2기 군사훈련반을 꾸리고 항일전쟁을 할 수 있는 유능한 군사 인재를 배양하였다. 1930년대에 북만에서 위용을 떨친 항일연군 제6군과 제7군, 제11군의 허다한 고위급 장령들은 거의 전부 이 훈련반 졸업생들이었다. 1931년 8월 대규모 홍수로 오동하가 범람하여 복풍툰농장이 전부 폐허가 되자 농민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송동모범학교도 폐교되었다. 이 홍수 때문에 마을 전체가 유실되어 현재에도 아무런 흔적이 발견되지 않는다.
가목사 감옥
흑룡강성 가목사시 안경가 188호
黑龙江省 佳木斯市 安庆街 188号
독립운동가 강철구가 순국한 감옥 독립운동가 강철구는 1920년 대한군정서 총재 비서로 활동하였으며, 1923년경 간도 동불사 소재 천영소학교(天英小學校)의 교사로도 활동하였다. 대한군정서의 비서직과 교사직을 함께 수행하면서 군자금 모집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1921년경에는 심양과 하얼빈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였으며, 1922년 8월 서울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다가 붙잡혀 3년의 옥고를 치렀다. 이후 강철구는 독립운동을 지속해서 펼치다가 1942년 가목사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가목사 감옥은 만주국 시기부터 사용되다가, 1949년 헤이룽장 성 가목사 감옥으로 쓰였다. 2006년 새로운 감옥이 세워지면서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당시의 건물은 일부분만이 남아 있다.
화광학교 구지
흑룡강성 가목사시 행림로 164호
黑龙江省 佳木斯市 杏林路 164号
가목사시 유일의 한인 초등교육기관으로서 초기 민족교육 실시했던 화광학교의 옛 터 화광 학교는 1920년대 가목 사시에 설립된 한인들의 유일한 초등교육기관이었다. 하지만 교사를 구하기 어려웠던 현실과 ‘만주사변’ 직후 학생 수급 상황이 여의치 않아 어려운 지경에 빠지기도 하였다.화광학교가 사용했던 건물은 현재 시립 유치원 건물로 바뀌었다(실험유치원).
배치운 등 12열사 희생지 기념비
흑룡강성 가목사시 탕원현 학립진
黑龙江省 佳木斯市 汤原县 鹤立镇
1920년대 후반 탕원현에서 항일투쟁 속에서 희생된 12열사를 기리기 위해 건립된 기념비 1985년 8월 가목사시 탕원현 정부에서 1920년대 후반 조선공산당원들이 항일투쟁 당시 붙잡혀 일본 헌병에게 희생되었던 것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한 기념비이다. 기념비가 있는 자리는 원래 가목사시 탕원현 일본헌병대 자리이다. 이곳에서 열사들이 희생되었기 때문에 기념비를 그 자리에 건립하였다. 탕원현 문물단위로 지정되어 있지만, 상점 건물 뒤에 방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보존 상태가 좋지 않다.
한국독립당 결성지
문헌상 위하현 위하현가 김광택의 집
흑룡강성 상지시 위하진
黑龙江省 尚志市 苇河镇
1930년대 민족주의 단체인 한국독립당이 결성되었던 곳
한국독립당은 김좌진인 암살당한 후 북만 지역의 민족진영이 집결하여 결성한 당이다. 당의 강령으로 민본정치의 실현ㆍ노본경제의 조직ㆍ인본 문화의 건설이라는 삼본 주의를 채택하였다. 한국독립당은 재만 농민의 경제적 지위를 고양하고 나아가 항일을 통하여 민본정치를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한국독립당은 당군으로 한국독립군을 결성하여 만주사변 이후 북만지역 만족진영의 항일무장투쟁을 주도하였다.한국독립당이 결성된 단체는 평야에 있는 수양버들이 많은 마을이다. 그러나 정확한 지점은 확인되지 않는다.
노은 김규식 유허지
문헌상 주하현 마의하
흑룡강성 상지시 마의하교 서쪽 방면
黑龙江省 尚志市 蚂蚁大桥 西边 方向
연수현 태평촌에서 민족학교를 운영하던 김규식을 화장하고 유해를 뿌린 장소 김규식은 자신이 거주하던 연수현 태평촌 농장에 학교를 세워 독립군 인재 양성에 주력하던 중 이붕해(주하지방 집행위원장)의 집에서 동지들과 함께 하룻밤을 지내다가 피살되었다. 김규식의 시신은 피살된 직후 마의하에 유기되었지만, 동포들에 의해 거두어져 마의하 옆 南興村에서 화장된 후 유해는 마의하 강가에 뿌려졌다고 한다.1991년 77세였던 김규식의 딸 김현태의 증언에 의하면 “아버지 사망소식이 연수에 있는 우리 가족에게 전해지자 어머니는 연로하여 못 오고 둘째 오빠와 내가 갔다. 아버지 시체는 2~3일이 지나서야 건져낼 수 있었다. 얼굴을 명주 수건을 싸고 옷을 입힌 뒤 입관하고 마의하 버들 방천 모래톱에서 화장했다. 나무를 한길 정도 쌓아 놓고 관을 올려놓은 후 관의 상하 양쪽에 구멍을 뚫고 석유를 부었다. 뼛가루는 마의하에 뿌렸기 때문에 묘소는 없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루는 과정에 아버지의 친우들도 많이 왔는데 지청천과 키가 큰 오수암(평안도 말씨)이 제일 수고했다.”고 한다.
노은 김규식 피살지
문헌상 주하현 하동 삼계
흑룡강성 상지시 하동향 남흥촌
黑龙江省 尚志市 河东乡 南兴村
김규식이 하동농장에서 백운봉과 최호 등에게 피살되었던 곳
김규식은 한말 육군 참위로 1907년 대한제국군이 해산당하자 철원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동하다가 1912년 3월 만주로 망명, 1919년 8월에는 서일, 김좌진 등과 함께 북로군정서를 조직하여 항일무장투쟁에 앞장섰다. 또한, 북로군정서에서 왕청현 십리평에 사관연성소를 건립하자 교관으로서 김좌진, 이장녕, 이범석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에 참여하였으며, 대한독립군단 총사령에 임명되었다. 또한, 자유시에 도착한 김규식은 그곳에서 조직된 대한의용군(사할린의용군)에서 홍범도ㆍ지청천 등과 함께 참모부원으로 활동하였다.1925년에는 김좌진, 김혁 등이 영안현에서 민족주의 대표를 망라하여 신민부를 조직하자 이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또한 장기적인 항일투쟁은 2세 국민의 교육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자신이 거주하던 연수현 태평촌에 학교를 세워 독립군 인재양성에 주력하였다. 김규식은 1931년 4월 주하현 하동농장 3계에 있던 이붕해의 집에서 신숙ㆍ지청천 등을 만나 장래의 독립운동에 대해 논의하였는데, 그날 밤에 하동농장에서 직권을 남용하며 주민으로부터 원성을 사던 백운봉과 최호 등의 습격을 받고 피살되었다. 정부는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조선중앙일보』1933년 10월 4일자 ?哈市 河東農場賣渡?라는 기사에서는 하동농장이 일제에 넘어가게 된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도 하였다. '오길밀하에 있는 하동농장은 지금으로부터 七~八 년 전 순전히 우리 사람의 손으로 개간되어 동포 집단 농장이었던 바 오랫동안 정치적 파쟁으로 말미암아 많은 분쟁을 거듭해 오던 중 소위 만주사변 이후 거의 일본사람의 손으로 지배하게 되었던 바 지난 25일에 당지 동아권업주식회사에서 20만 1천6백 49원 55전(판독불가)에 매수하였다' 한다.김규식의 피살 현장인 이해붕의 집을 찾을 수 없었다. 마을에는 조선족 노인들이 여러 명 살고 있었으나 김규식이나 이해붕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 마을의 조선족 노인들은 하동농장이 집단농장으로 바뀐 후인 1930년대 중반 이후 이주해 온 주민이었다. 현재 이 마을에는 1930년대 일제가 조성한 농업용 수로가 그대로 남아 있다.
노은 김규식 부인 주명수 묘지
문헌상 주하현 하동 팔계
흑룡강성 상지시 하동향 중앙둔
黑龙江省 尚志市 河东乡 中央屯
북로군정서와 신민부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던 김규식의 부인 주명수의 묘 북로군정서와 신민부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주도한 김규식의 부인 주명수(1881년~1974년)의 묘이다. 김규식의 딸 김현태는 “우리 가족의 묘지는 하동 8계 부근에 있다. 1974년 93세로 세상을 뜬 어머니(주명수)의 묘소 큰 오빠, 작은 오빠, 나의 남편 등 네 자리의 묘소가 있다. 마을 뒷산에 가족의 묘소가 조성되어 있다.”라고 증언하였다. 각각의 묘비에는 '현비 주명래지묘', '현고 김현욱지묘', '현고 김현성지묘'라고 되어 있다. 하동향 중앙둔 마을 뒷산에 큰아들 김현욱과 작은아들 김현성의 묘가 함께 가족묘를 형성하고 있으며, 보존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신민부 본부 터
문헌상 위하현 석두하자
흑룡강성 상지시 석두하자진
黑龙江省 尚志市 石头河子镇
북만주 지역의 독립운동단체들의 통합체인 신민부의 본부가 있었던 곳
신민부는 1925년 3월 10일 목릉현에서 대한독립군단, 대한독립군정서를 주축으로 한 북만주지역의 독립운동단체들이 효과적인 항일투쟁을 위하여 통합을 추진하여 결성되었다. 그러나 1927년 12월 25일 석두하자에서 개최된 총회에서 군정 파와 민정 파로 양분되었다. 분열의 발단은 그해 2월에 일본경찰과 중국군 1개 중대의 습격으로 중앙집행위원회의 위원장인 김혁과 경리부 위원장인 유정근, 본부 직원인 김윤희ㆍ박경순ㆍ한경춘ㆍ남중희ㆍ이정화ㆍ남극 등이 체포된 데서 시작되었다.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관인 김좌진은 더욱 적극적인 무장투쟁을 주장한 반면에 민사부위원장 최호는 우선 교육과 산업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의견의 마찰로 신민부는 김좌진을 중심으로 한 군정 파와 최호를 중심으로 한 민정 파로 각각 분열되어 나름대로 조직을 갖고 각기 자신들의 조직이 신민부임을 주장하였다.한편 이곳에는 신민부가 세운 영신학교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 영신학교의 교사는 1명, 학생 21명이었다. 이곳에서 1931년 7월에 한족총연합회의 이준근ㆍ야운 등이 공산주의자에게 저격당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석두하자진은 유서가 깊은 마을이나 당시 신민부 본부가 있었던 정확한 자리는 확인되지 않는다.
한족자치연합회 결성지
문헌상 주하현 오길밀하 (하동농장)
흑룡강성 상지시 오길밀향
黑龙江省 尚志市 乌吉密乡
1930년대 한국독립당의 행정조직인 한족자치연합회가 결성되었던 곳
1930년 1월 26일 김좌진이 공산주의자들에게 피살되자 김좌진과 더불어 한족 총연합회 조직에 참여했던 정신 등이 한족 총연합회를 한족 자치연합회로 개편하였다. 한족 자치연합회는 결성 초기 교민 자치와 산업육성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무정부주의 사조가 받아들여져서 점차 무정부의 단체로 변모하고, 김종진ㆍ이준근ㆍ김야운 등 지도자가 계속 피살되는 시련을 맞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혼란한 가운데에서도 만주사변으로 일제의 만주침략이 본격화될 때까지 활동을 계속하였다.한족 자치연합회는 당시 조선족들이 거주했던 마을에서 결성된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정확한 결성장소는 확인되지 않는다. 한족자치연합회가 결성되었던 하동농장 터 전경 오길밀향 일대 전경 오길밀향 일대 전경 오길밀향
신민부 동원학교 터
문헌상 아성현 취원창
흑룡강성 아성시 거원진 취원창
黑龙江省 阿城市 巨源镇 聚源昶
신민부에서 취원창에 설립한 동원학교의 옛 터
동원학교는 신민부가 취원창에 세운 민족학교이다. 동원학교에 근무하던 교사는 5명이었으며, 학생은 60명이었다. 신민부에서 세운 학교 중 가장 큰 규모이다. 교장에는 한족회, 정의부 등에서 활동한 김형식(金衡植)이 활동하였으며, 교사로서 신흥학교 출신인 강동호(姜東浩)가 일하였다. 동원학교가 있던 곳은 현재 개인 주택과 밭으로 변하였다.
박세황 묘소
문헌상 연수현 유하진
흑룡강성 연수현 연하진
黑龙江省 延寿县 延河镇
연수현에서 신민부와 한국독립당 활동했던 박세황의 묘
박세황은 1882년 1월 7일 평안남도 강서군 증산면 오하리에서 박양수의 장남으로 출생하였으며, 자는 북농(北農)이다. 18세 되던 해에 고향에서 서당을 설립하여 선생이 되었으며, 3ㆍ1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1923년 길림성 동빈현(현재 연수현) 흑룡진으로 이주하였다. 이후 신민부에 참여하여 1926년 흑룡진에 신창학교를 세웠고, 신민부가 군정파와 민정파로 나누어졌을 때 민정파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1927년 8월 동빈현 총판의 신분으로 북만주 한인교육회의에 참석한 뒤 대량자학교ㆍ대련표자학교ㆍ동광학교ㆍ보명학교 등을 설립하여 교육활동에 전력을 다하였다.1930년 7월 위화현의 김광택의 집에서 한국독립당이 창당되자 홍진ㆍ지청천ㆍ신숙 등 40여 명의 대표와 함께 당장(黨章)과 당의 규약을 제정하는데 참여하였다. 주로 박관해ㆍ이탁ㆍ문학빈ㆍ김인대ㆍ원재룡 등과 함께 독립군의 군비를 지원해 주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2년 일제에 체포되었으며 감옥에서 당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1942년 10월 4일 사망하였다.그의 묘소는 후손들이 돌보고 있어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이
었다. 현재 손주 사위인 김병학(金炳學, 1938년생)이 묘소를 돌보고 있다.
동녕현 삼차구의 만세운동과 동녕현성 전투 유적지
삼차구는 동녕에서 동쪽방향으로11Km 떨어진 곳에 있는데, 이 곳에서 승용차로 30분 정도 달리면 중.러 국경이 나온다. 삼차구에는 1920년대에 6개의 조선인 촌락이 있었다. 독립운동가들이 러시아를 왕래하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민족의식이 충만했던 곳이었다. 1919년 3.1운동 당시에도 이 곳 삼차구에서는 만세시위가 있었다. 삼차구는 만주국 시절에서 대소련 방어의 전진기지였다. 그래서 일본군과 만주국군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중요 군사물자가 많이 비축되어 있었던 곳이다. 1930년대 당시 삼차구에는 동. 서. 남. 북문 등 5개의 문이 있었으며, 삼차구의 서쪽, 곧 동녕 쪽으로 500m가량 떨어진 곳에 있던 작은 언덕에 서산포대가 있었다. 1933년 9월 이청천의 한국독립군은 사충항이 지휘하는 구국군, 김일성이 지휘하는 유격대와 연합하여 이 곳을 공격하여 많은 군수물자를 노획하였다. 동녕현성전투 가운데 가장 격전이 벌어졌던 서산포대의 흔적은 밭으로 변해버려 남아있지 않다.일제는 1939년에 동녕현의 소재지를 지금 동녕으로 옮겼다.
신주백, 『만주지역 한인의 민족운동사(1920~45)』, 아세아문화사, 1999.
첫댓글 이러한 유적지를 모두 참관하는 역사 기행단이 한 번쯤 꾸려졌으면 좋겠습니다.
높이 뜨는님...동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