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풀 꺾일 줄 알았던 코로나가 다시금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제 막 백신이 개발되었다고 긴장이 풀어졌기 때문일까요? 원래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이제 끝났다고 생각하며 긴장을 늦출 때가 가장 위험할 때인 것 같습니다. 물론 그동안 너무 고생했으니까 이제는 개인방역수칙만 철저히 지킨다면 조금은 돌아다녀도 될 것 같네요.
저는 주말을 이용해 4560 디자인하우스라는 곳에 다녀왔습니다. 1950-70년대의 미니멀리즘 제품들로 구성된 소규모 디자인 갤러리라고 하는데요, 미니멀리즘에 푹 빠진 사장님께서 6년여간 모아온 개인 소장품을 전시하는 공간이라고 합니다. 한때는 쉽게 구할 수 있었던 양산품이었지만, 이제 더는 구하지 못하는 제품들이 대부분이라고 하니 전시를 관람할 때는 꼭 눈으로만 해야 합니다!
4560 디자인하우스의 입구. 깔끔한 흰 벽과 식물, 조명의 조화가 시선을 끕니다.
가전제품 회사인 브라운의 면도기 세트가 먼저 우릴 반겨주네요. 브라운이 어떤 회사인지 먼저 알아볼까요?
브라운
브라운(Braun)사는 1921년 막스 브라운에 의해 설립된 독일의 소비재 제조 기업으로, 기능주의적으로 깔끔하게 디자인된 생활 가전제품들을 제조하고 판매하는 회사이다. 초반에는 라디오 부품들을 제조하는 회사였으나, 곧 독일 제일의 라디오 제조사가 되었고, 1950년대 중반 이후, 디터 람스의 영향 아래 현대적 산업 디자인 개념을 반영한 제품으로 대대적인 인기를 얻었다.
아래에 보이는 우드톤의 제품도 턴테이블과 라디오, 스피커가 결합한 일체형 상품이었습니다. 어떤가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지 않은가요? 20세기 산업혁명 이후, 대량생산의 체계가 갖춰지면서 디자인은 그저 더 많이 팔기 위한 어찌 보면 의미 없는 조형적 장식뿐이었다고 합니다. 디터 람스라는 브라운의 디자이너는 그런 물질적 풍요 속에서 좋은 디자인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했고, 답을 얻어내는 과정에서 미니멀리즘에 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린 것이겠지요. 그는 이렇게 본질만을 남겨 설명서 없이도 쉽게 사용할 수 있는, 정직하면서도 심미적인 아름다움의 조화를 이루어냈습니다. 그래서 그가 디자인한 제품들은 대부분 간결하고 깔끔한 선과 면으로만 구성되어있죠.
이 TV도 브라운사 제품인데요, 제품 몇 개만 봐도 톤이나 마감이 너무 닮아서 다른 제품들이지만 전체적으로 하나의 아이덴티티를 이루고 있다는 느낌이 드네요.
4560 디자인 하우스의 내부는 박물관이나 미술관처럼 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카페와 함께 있는 공간이기 때문에 음료를 들고 돌아다니지만 않는다면, 전시의 전과 후에 안에 앉아서 전시를 복기하는 시간을 여유롭게 가질 수 있습니다. 경계는 있지만 연결된 공간에서 커피를 마시니 확실히 전시와 소통하는 느낌도 드네요.
마치 이케아의 쇼룸처럼 다양한 브라운사의 제품들을 가지고 공간을 하나씩 꾸며두었습니다. 브라운은 독일 회사이지만 꾸며진 공간은 화려하고 장식적이지 않기 때문에 흔히 말하는 북유럽 스타일의 인테리어와 닮아있네요.
아기자기한 소품으로 깨알같이 창틀의 단조로움에 변화를 주었습니다. 필요는 없지만 갖고 싶은 미니어처 가구들에 눈길이 가네요.
테이블에 의자에 수납장에 조명과 그림까지. 물론 모든 게 브라운사의 제품은 아니지만 이렇게 같은 톤으로 맞춰놓으니 분위기가 통일감이 있어서 좋은 것 같습니다. 중간중간 있는 식물로 생동감과 변화의 요소까지 구성한 센스가 너무 좋네요.
브라운사의 각종 제품을 컬렉션 해놓은 곳입니다.
같은 제품이어도 다양한 컬러까지 많이 갖춰두신 게 정말 수집광다운 사장님이시네요.
사진에 할아버지 한 분의 얼굴이 보이시나요?
(사진 출처: 플리커)
이 분이 바로 브라운의 디자인 부흥, 더 나아가 독일 현대 산업 디자인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핵심적인 인물, 디터 람스(Dieter Rams)입니다. 이 분의 디자인 십계명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디자이너들이 마음속에 새기는 원칙이라고 하는데요, 한 번 알아보시죠.
디터 람스의 디자인 십계명
좋은 디자인은 혁신적이다.
좋은 디자인은 제품을 유용하게 한다.
좋은 디자인은 아름답다.
좋은 디자인은 제품을 이해하기 쉽게 만든다.
좋은 디자인은 정직하다.
좋은 디자인은 불필요한 관심을 끌지 않는다.
좋은 디자인은 오래 지속된다.
좋은 디자인은 마지막 디테일까지도 철저하다.
좋은 디자인은 환경친화적이다.
좋은 디자인은 할 수 있는 한 최소한으로 디자인한다.
그분의 명확한 디자인 철학이 느껴지지 않나요? 디터 람스는 1955년 브라운에 입사해, 1997년 퇴사할 때까지 514개의 제품을 디자인했다고 합니다. 커피메이커, 계산기, 라디오, 면도기 등 브라운사에서 나오는 모든 제품을 디자인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겠죠.
실제 디터 람스의 사무실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은 인테리어로 보는 맛을 더한 공간입니다.
저는 사진을 좋아하다 보니 카메라 장비에도 눈이 가더군요. 언젠가는 정말 오래된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보고 싶어요.
드디어 브라운의 디터 람스와 애플의 조너선 아이브가 만나는 순간입니다. 조너선 아이브는 1992년부터 2019년까지 약 27년간 애플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디자이너인데요, 그가 가장 존경했던 인물이 바로 디터 람스라고 하죠. 애플의 아이팟은 바로 디터 람스가 디자인한 T3 포켓라디오(오른쪽에서 세 번째 제품)를 오마주 한 제품으로 알려졌습니다.
조너선 아이브
조너선 아이브는 1967년 영국에서 태어난 디자이너로, 애플의 최고디자인책임자(CDO)를 역임했다. 1992년 애플에 합류했으나, 초창기엔 주목받지 못하다가 1997년 스티브 잡스가 애플에 복귀하면서 재평가받기 시작했고, 2019년, 본인의 벤처 회사 러브프롬(LoveFrom)을 설립하며 애플을 떠나게 되었다. 그는 아이맥, 알루미늄 파워북 G4, 맥북 프로, 아이팟, 아이폰 등을 디자인하며, 애플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저는 개인적으로 애플의 제품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그 특유의 디자인 감성은 물론, 독단적이기까지 한 폐쇄성도 사랑해 마지않습니다. 덕분에 굉장히 안정적인 사용 환경을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맥을 사용한 지 7년이 지났습니다만, 큰 불만 없이 잘 쓰고 있답니다.
컬러풀한 로고를 자랑했던 매킨토시 시절의 컴퓨터입니다.
그 이후 나온 다양한 버전의 맥들.
아이팟부터 아이폰, 맥미니, 매직마우스에 이르기까지. 이 정도는 모아야 진정한 덕후라고 할 수 있겠네요.
덕후의 기본은 컬러별 수집인가 봅니다..
퐁피두 센터가 그려진 액자도 있었습니다. 전 아직 가보지 못했지만, 파리 3대 미술관 중 하나로 유럽 최고의 현대미술센터라고 하더군요. 꼭 한번 가보고 싶습니다!
전시의 마지막엔 이렇게 휴게공간이 펼쳐져 있습니다. 맥이 한 자리에 이렇게 많은 건 처음 보네요.? 진짜 대단한 컬렉션입니다. 뭔가 백남준 님 작품이 떠오르기도 하네요.
전시장을 나서는 출구 옆에는 이렇게 기념이 될만한 디자인 소품들도 따로 구매할 수 있었습니다. 브라운이나 애플 제품은 아니지만 그들의 정신을 이어받은 제품들이 많으니 꼭 한 번 둘러보고 가시길 추천합니다.
어떻게 보면 카페 같고, 어떻게 보면 전시장 같은 공간이었는데요, 어쩌다 이렇게까지 컬렉션을 하시게 되셨는지 정말 대단하시다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사장님은 미니멀리즘을 좋아하는 맥시멀리스트신 셈이네요. 여러분들도 브라운과 애플의 디자인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으시다면, 한 번쯤 가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