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말뚝에 대한 사서 기록이 주역(周易)에 처음 쓴 것을 보아
기원전 35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 간다.
주역 구괘(女+后卦) 초육(初六)에,
소인을 어린 돼지에 비유하여 군자를 경계한 말로 쓰인
“쇠말뚝에 붙들어 매면 정(貞)이 길(吉)하고
풀어 놓으면 흉(凶)을 당하리니 어린 돼지[羸豕]가
머뭇거릴 때 경계하라."고 한 것이다.
이 글은 정약용(丁若鏞)이 쓴 다산시문집 제15권
정헌(貞軒)의 묘지명(墓誌銘)의 주(註)에 보인다.
고려 중기의 문인 이규보(李奎報 1168~1241)는
그의 저서 동국이상국전집 제9권 “또 불사의방장(不思義方丈)에 제하다”에서
“불사의 방장은 옛날 진표율사(眞表律師)가 살면서
수진(修眞)한 곳이고 어머니 지장현신(地藏顯身)이 수계(授戒)한 곳이다.
나무 사다리가 백 척이나 솟아있고 사다리를 따라 내려가면
바로 방장에 이르게 되는데 그 아래는 헤일 수 없는 계곡이다.
철사로 그 집을 이끌어 바위에 못질했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바다 용이 만든 것이라 한다”하여
쇠말뚝을 말하고 있으니, 1200여 년 전 이야기이다.
잠곡(潛谷) 김육(金堉 1580-1658)은 유람 기록인 잠곡유고 제14권의
천성일록(天聖日錄)에 “북쪽에 있는 돌사다리 길을 거쳐서
손으로 쇠말뚝을 잡고 내려온 다음 남성거암의 폐허를 지났다” 라 썼으며,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은 임하필기(林下筆記) 제37권
‘금강산(金剛山)의 유래와 고사'에서 절벽을 파서 판자를 가로지르고
구리쇠 기둥을 밖에 세워서 세 칸짜리의 작은 집을 그 위에 짓고
이름을 ‘관음각(觀音閣)’이라 하였다.
그 관음각은 쇠사슬로 비끄러매고
바위에 못질을 하여 공중에 떠 있게 하였으므로,
사람이 오르면 흔들린다.
그 가운데에는 불함(佛函)을 두어 주옥(珠玉)으로 장식하고
밖에는 철동(鐵銅)을 설치하여 손으로 만지는 것을 방지하였다.” 라 썼다.
일제는 한민족의 정기를 말살하고자
전국 명산과 명당 곳곳에 대못질한 참상을 저질렀다.
명나라는 고려의 천자(天子)의 기운을 끊어버리기 위해
다섯 개의 쇠말뚝을 박았음이 사서
"天子의 맥을 끊어라"의 기록으로 증빙되었다.
쇠말뚝에 이어 소금을 쌓고 이를 태워
지맥을 억누르는 행태 또한 자행되었음이 보인다.
역사는 현재를 보는 지름길이다
무엇을 더 논할 것인가.
"신시복본 다물흥방(神市複本 多勿興邦)"
한문수 2008. 10. 27. 1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