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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台大師于都下瓦官寺略出此法門
六妙法門一卷,隋、智顗說, 大正藏 No. 1917.
天台의 智者大師(538-597年)가
陳나라 都城(金陵, 현재 南京)의 瓦官寺에서 이 法門을 간략히 講說하였습니다.
六妙門은 內行(內善根)의 根本이요 三乘(聲聞、緣覺、菩薩)이 得道하는 要逕입니다.
故로 釋迦께서 처음 보리수 밑에 오셔서 吉祥한 풀방석 위에 결가부좌를 하시고
안나반나(安那般那, ana-apāna, 안나는 날숨, 반나는 들숨)하시면서
六妙門 곧 數,隨,止,觀,還,淨을 心內에서 觀照하셨습니다.
육묘문 수행 때문에 萬行이 開發되고 魔(五蘊魔)를 항복시키고 成道합니다.
부처께서 모범이 되셔서 이와 같이 보여주셨는데 三乘의 正士로서 어찌 이 길을 가지 않았겠습니까?
참고자료 : 六妙門 가운데 第五門의 還 명칭은 ‘轉’ 또는 ‘轉觀’이라고도 합니다.
『阿毗達磨俱舍論』: “此相圓滿,由具六因。一數、二隨、三止、四觀、五轉、六淨.” 『坐禪三昧經』: “轉觀”)
참고자료: “內思安般” 구절에 관하여 “玄精靜寞,寂默一心。
內思安般,一數、二隨、三止、四觀、五還、六淨.”을 나타냅니다.
『大安般守意經』을 비롯하여 『修行本起經』 과 『佛說太子瑞應本起經』에서
六門의 修行과 禪定에 관하여 상세하게 설명하였습니다.
또한 『釋禪波羅蜜次第法門』에서는 龍樹의 제자 提婆가 阿那波那를
第一의 安隱道라고 제창하였고 중국에서도 學道의 기초로 삼았다고 합니다.
六이란 말은 數字를 나타내며 숫자로 禪을 밝히므로 六이라고 합니다.
부처께서 一數로 禪을 설명하시니 一行三昧(真如三昧)이고,
또는 二數로 나누어 말하면
止(系緣止、制心止、体真止、方便隨緣止、息二邊分別止)와
觀(空觀、假觀、中觀)이다. 三數로 말하면 세 가지 三昧(空、無相、無願)이고,
四數로 말하면 四禪이고 五數로 말하면 五門禪(五停心觀)이고,
六數로 말하면 六妙門(數、隨、止、觀、還、淨)이고,
七數로 말하면 七依定(七處善)이고,
八數로 말하면 八背舍이고, 九數로 말하면 九次第定(四禪定、四無色定、滅盡定)이고,
十數로 말하면 十禪支(青、黃、赤、白、地、水、火、風、空、識)입니다.
이와 같이 百千萬億과 阿僧祇와 셀 수 없는 많은 三昧의 門이 있지만 모두 숫자로 세어서 말합니다.
숫자가 얼마나 많더라도 法相을 窮究하면 서로 겹치게 收攝되는데(網羅하는데) 왜냐하면 眾生의 機悟가
서로 不同하기 때문에 숫자를 增減하여 각기 중생을 도와주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한 六은 여섯 가지 법상을 들어서 장절의 제목을 나타낸 것입니다.
妙는 뜻이 많지만 正意를 말하면 滅諦의 涅槃이다.
故로 滅諦의 四行相(滅、止、妙、離) 滅止妙離를 말합니다.
涅槃은 非斷이고 非常이니,
斷과 常의 有爲法이라고 여기면 難契하고,
非斷非常의 無爲法이라고 여기면 易得하니 故로 妙라고 말한 것입니다.
六法은 涅槃에 通達할 수 있으니 故로 門이라고 부릅니다.
修行하는 門이 여섯이지만 涅槃의 妙에 이르는 데는 다르지 않습니다.
故로 『經』에서 “泥洹(涅槃)이 真된 法寶이며,
眾生은 種種의 門을 따라 入합니다.”
위와 같은 설명은 ‘六妙門’ 전체를 通釋한 大意입니다.
六妙門의 大意는 열 가지가 있습니다.
第一은 歷別對諸禪의 六妙門이고,
第二는 次第相生의 六妙門이고,
第三은 隨便宜의 六妙門이고,
第四는 隨對治의 六妙門이고,
第五는 相攝의 六妙門이고,
第六은 通別의 六妙門이고,
第七은 旋轉의 六妙門이고,
第八은 觀心의 六妙門이고,
第九는 圓觀의 六妙門이고,
第十은 證相의 六妙門입니다.
第一의 歷別對諸禪定 六妙門을 밝히며 六意가 있습니다.
첫째는 數에 依한 妙門입니다.
修行者가 數息으로 四禪과 四無量心과 四無色定을 차례로 얻을 수 있습니다.
四無色定 가운데 最後의 非非想定에 다다라서 涅槃이 아니라는 것을 覺知하면,
이 행자는 반드시 三乘의 聖道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非想非非想處定은 五陰과 十八界와 十二入이 和合하여 有이기 때문에
虛誑不實하므로 粗煩惱가 없앴더라도
十種의 細煩惱(貪煩惱、嗔煩惱、痴煩惱、慢煩惱、疑煩惱、取見煩惱、戒禁取見煩惱)는 남아있습니다.
細煩惱를 破析한 뒤에야 不住不著하니 心이 解脫을 얻어
곧바로 三乘의 涅槃을 證得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故로 此義는 부처님의 마지막 제자 須跋陀羅에게
부처께서 非非想處의 惑을 斷하라고 가르치셔서 阿羅漢果를
얻도록 하신 것과 같습니다.
數息을 妙門으로 삼은 목적이 여기에 있습니다.
둘째는 息을 편의대로 따르는 隨息을 妙門으로 삼습니다.
修行者가 隨息으로 十六特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첫째는 息이 入하는 것을 知하는 것이고,
둘째는 息이 出하는 것을 知하는 것이고,
셋째는 息의 長短을 知하는 것이고,
넷째는 息이 全身의 숨구멍에서 출입하는 것을 아는 것이고,
다섯째는 欲界定에서 몸의 느낌이 動搖하는 여러 身行을 집착하지 말고 除去하는 것이고,
여섯째는 身覺과 息相이 寂止한 뒤에 初禪의 心이 喜를 受하는 것이고,
일곱째는 二禪에서 三禪에 올라선 뒤의 心의 受樂이고,
여덟째는 三禪의 여러 心行의 受이고, 아홉째는 心이 作喜하는 것이고,
열째는 心이 作攝하는 것이고,
十一은 心이 作解脫하는 것이고,
十二는 五蘊과 諸法의 無常을 觀하여 正觀에 이르는 것이고,
十三은 觀出散이고,
十四는 觀離欲이고,
十五는 觀滅이고,
十六은 觀棄舍입니다.
十六의 觀棄舍는 무엇입니까?
이 觀은 非想處의 惑을 破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凡夫가 非想定을 修行할 때 有常處를 觀하면서 如癰如瘡처럼 싫어하고,
無想處를 觀하면서 바보처럼 됩니다. 그래서 第一의 妙定을 非想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생각을 마치면 곧바로 有想과 無想을 棄舍하는 것을 非有想非無想定이라고 부릅니다.
故로 非想定에는 有想과 無想 둘을 버린다는 兩舍라는 뜻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今에 佛弟子가 열두 번째부터의 觀行이 破析하는 뜻은 앞의 數門에서 말한 것과 같습니다.
是故로 棄舍를 深觀하여 非想正을 집착하지 않으면 涅槃을 얻을 수 있다. 隨 妙門의 뜻은 이와 같습니다.
셋째는 止를 妙門으로 삼은 것입니다.
修行者가 心을 止하여서 次第로 五輪禪을 발현시킵니다.
첫째는 地輪三昧이며 欲界 마지막 단계의 未到地定입니다.
둘째는 水輪三昧이며 初禪부터 四禪까지의 여러 禪定에서 善根이 發합니다.
셋째는 虛空輪三昧이며 五方便人이 因緣은 無性이라서 虛空과 같다는 것을 覺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見道位의 金沙輪三昧이며 見思의 解脫이며 無著의 正慧가 金沙와 같습니다.
다섯째는 金剛輪三昧이며 第九品(三界×三品=九品)의 無礙道이라서 三界의 結使를 斷하여
永盡에도 無餘하니 盡智와 無生智를 證하여 涅槃에 證入할 수 있습니다. 止의 妙門 뜻은 위와 같습니다.
참고자료: “五方便人”.
첫째는 阿羅漢이 될 수 있는 定性聲聞乘,
둘째는 辟支佛이 될 수 있는 定性緣覺乘,
셋째는 佛果를 얻을 수 있는 定性菩薩,
넷째는 위의 네 가지 種子를 갖고 機緣이 成熟하여 위의 三種 가운데 하나를 얻을 수 있는
不定性聲聞이나 緣覺이나 菩薩, 다섯째는 위와 같은 種子를 갖고 있지 않지만 인연에 따라
수행하여 人과 天의 果를 얻을 수 있는 無性人과 天人입니다.
넷째는 觀을 妙門으로 삼습니다.
修行者가 觀을 修行하므로
九想과 八念과 十想과 八背舍와 八勝處와 十一切處와 九次第定과
보살의 獅子奮迅三昧와 超越三昧와 練禪과 十四變化心과 三明과 六通과 八解脫을 깨달아
滅受想定(滅盡定)을 얻어 涅槃에 入할 수 있습니다. 觀을 妙門으로 삼는 뜻이 이와 같습니다.
다섯째는 還을 妙門으로 삼습니다.
修行者가 慧行을 공부하여 善巧하게 破析하면 反本還源할 수 있습니다.
(還이 反本還源이라는 것은 轉觀을 뜻하며 觀의 대상을 境에서 心으로 되돌린다는 뜻입니다.)
이때 空과 無想과 無作과 四諦와 道諦의 三十七品의 聲聞乘 열반과 十二因緣의 辟支佛
열반과 中道正觀의 보살 열반에 入할 수 있습니다. 還 妙門의 뜻은 위와 같습니다.
여섯째는 淨을 妙門으로 삼습니다.
修行者가 一切諸法의 本性이 清淨함을 體識하면 出世間上上禪이라는 自性禪을 얻습니다.
이 禪定을 얻었기 때문에 二乘人은 涅槃을 證得하고 菩薩은 鐵輪位(圓教의 十信位)에 들어가서 十信心을 갖춥니다.
自性禪 이후에도 修行을 不止하면 九種의 大禪을 얻으니 말하자면
自性禪、
一切禪、
難禪、
一切門禪、
善人禪、
一切行禪、
除惱禪、
此世他世樂禪、
清淨禪입니다.
菩薩은 自性禪에 의지하여 결국에는 大菩提果를 얻는데
그 시기는 과거에 已得하였거나 현재에 今得하거나 미래에 當得합니다. 淨 妙門의 뜻은 위와 같습니다.
다음은 第二의 次第相生 六妙門者을 설명합니다.
次第대로 相生한다는 것은 入道하는 階梯입니다
欲界에서 六法(六妙門)을 便巧하게 修行하여,
六妙門 가운데 第六 단계의 淨心 修行法까지 成就하면 豁然히 三乘의 無漏智를 發하기도 합니다.
하물며 諸禪의 三昧를 具足한 것은 물론입니다. 이것은 앞 단계와는 다른데 까닭은 무엇입니까?
數息은 二種이 있으며
첫째는 修數이고
둘째는 證數입니다.
數息을 修하는 것이란
行者가 氣息을 調和시켜서 不澀不滑하고 安詳하게 徐徐히 호흡의 數를 세어서
하나부터 열까지 세는데, 마음을 세는데 집중하여 馳散하지 않도록 하니 修數라고 부릅니다.
數息을 證하는 것이란
心이 任運하여 하나부터 열까지 세는데 힘들이지 않아도 心이 息에 緣하여 住하는 것을 覺知합니다.
그렇지만 息의 出入이 더욱 虛微할수록 心相도 漸次로 더욱 細微하지만, 息을 數하기 때문에
息이 오히려 粗하게 되니까 數하고 싶지 않은 것을 覺知합니다.
이때 修行者는 應當히 數息을 버리고 隨息을 修行해야합니다.
隨息도 二種이 있는데
첫째는 修隨이고
둘째는 證隨입니다.
修隨이란
前의 數息法을 버리고 一心하여 息의 出入에 依隨하면서 攝心하여 息에 緣하며,
息의 入出를 覺知하면서 心이 息緣에 住하도록 하며 分散의 意가 없도록 합니다. 이것을 修隨라고 부릅니다.
證隨란
心이 微細하고 安靜하여 不亂하게 되면 息의 長短과 全身에서 入出하여 心과 息의 任運이 相依하게 되고
意慮가 恬然히 凝靜하게 되는 것을 覺知합니다. 그런데 隨息이 粗하기 때문에 心이 隨息을 厭하여
舍하려는 것을 覺知하게 되면, 마치 사람이 疲極하여 欲眠하며 眾務를 不樂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때 修行者는 應當히 隨息을 버리고 止門를 修行해야합니다.
止門에도 二種이 있는데
첫째는 修止이고
둘째는 證止입니다.
修止란 모든 緣慮를 멈추고 數息과 隨息도 떠올리지 말고
心을 凝寂시키는 것이며 修止라고 부릅니다.
證止란
身과 心이 함께 사라지듯이 泯然히 入定하여 內外의 相貌도 보이지 않는 것을 覺하는데
, 이때 止門방법에 따라 지속하여 任運하면서 不動하도록 하는 證相입니다.
修行者는 이때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이 三昧가 비록 더욱 더 無為하여 寂靜하고 安隱하여 快樂하더라도
아직 慧의 方便이 없기 때문에 生死의 번뇌를 破壞할 수 없다.”
또다시 다음과 같이 생각해야합니다.
“이 禪定은 모두 因緣에 따라 생긴 것이며 五陰과 十八界와 十二入의 法이
和合하여 有이므로 虛誑不實인데도 나는 현재 이것을 不見不覺하고 있으니까 應當히 照了해야한다.”
이런 생각을 마치면 止門의 樂에 집착하지 않고 觀門을 시작하여 分別합니다.
참고사항: 止門에서 觀門으로 넘어가는 요령이 있습니다.
앞의 數息과 隨息과 止門에서는 호흡에 따른 身의 변화를느끼는 觸覺을 주목하였지만,
止門에서 觀門으로 넘어가는 요령은 止門에서 위와 같이 두 가지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慧의 方便이 없고
둘째는 因緣和合이기 때문에 自性이 없다는 것을 照了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分別하는 것이 觀門으로 들어가는 요령입니다.
觀門부터 分別하는 知를 주목하여 수행하면 점차 心慧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觀心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뒤에서 觀還淨 三門을 설명하면서
“안다” 또는 “알아야할 것”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 것에 주의해야합니다.
六妙門의 분류방식 가운데 數隨止 三門은 入定하는 方便에
觀還淨 三門은 心慧의 方便에 치중하는 것을 주의하여야합니다.
『釋禪波羅蜜次第法門』, 卷一: “此六門中,數隨止是入定方便
,觀還淨是慧方便。定愛慧策,愛故說有漏,策故說無漏。”
證止란
欲界의 身과 心이 갑자기 泯然히 사라지면서 色界의 初禪에 入하는 것을 覺知하고
內外의 相貌를 見하지 못하는 證相입니다. 그렇지만 禪定 方法에 따라 持心하여 任運하되 不動합니다.
觀에도 二種이 있으니
첫째는 修觀이고
둘째는 證觀입니다.
修觀이란
析空觀인데 定心에 住하면서 觀慧의 分別로 微細하게 出入하는
息相을 觀하는데 처음에는 息相이 마치 虛空의 바람과 같습니다.
다음에는 身相을 觀하는 것인데
皮肉筋骨과 三十六物을 觀하면 마치 芭蕉 줄기처럼 속이 비어 不實합니다.
다음에는 心相을 觀하는 것인데
心의 第六識이 無常하여 剎那도 不住하다는 空을 觀析합니다
다음에는 我와 人도 없다,
또한 身과 受(想、行、識)와 心과 法 모두 自性이 없으므로
人와 法의 自性을 얻을 수 없는데 禪定인들 어디에 依止하겠는가? 라고 觀析합니다. 이것이 修觀입니다.
證觀이란
이렇게 觀析할 때 息이 온몸의 毛孔에서 出入하는 것을 覺하게 되면 心眼이 開明하여 三十六物과
여러 虫戶의 內外不淨과 身受人法의 剎那變易함을 徹見합니다. 그러면 心에서 과거의 迷妄을 悲하고
현재의 진실한 了知을 喜하므로,
四念處(觀身不淨、觀法無我、觀受是苦、觀心無常)를 얻고
四顛倒(常、樂、我、淨에 대한 凡夫와 二乘의 顛倒妄見)를 破할 수 있으니 證觀이라고 부릅니다.
觀相이 發顯되면 心은 觀境을 緣하여 分別하면서 破析합니다.
따라서 분별하는 心의 念이 觀境에 따라 流動하므로 真實한 道가 아니라는 것을 覺하게 됩니다.
이때 應當히 觀을 버리고 還을 修하여야합니다.
還에도 二種이 있는데 첫째는
修還이고 둘째는
證還입니다.
修還이란
觀境도 心에서 生하였는데
이 觀境을 觀析하는 것에 매달려서는 本源을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면
應當히 觀하는 대상을 觀境에서 能觀하는 心으로 돌려서 다음의 四句를 推檢하며 觀해야합니다.
“能觀하는 心은 어디서 生하는가?
첫째는 能觀하는 心에서 生하는가?
둘째는 아니면 能觀하는 心이 아닌 곳에서 生하는가?
能觀하는 心에서 生하였다면 이미 앞서서도 能觀하는 心이 있어야 하는데
현재의 실제 상황을 보면 없습니다. 왜냐하면 앞의 數와 隨와 止의 三法을
修行할 때에는 能觀의 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能觀하는 心이 아닌 곳에서 生하였다면 能觀하는 心이 아닌 곳이란 滅에서 生하였는가?
아니면 不滅에서 生하였는가?
만약 不滅에서 生하였다면 不滅의 心이 不滅의 心과 能觀의 心이라는 二心을 함께 兼有하는 竝存의 오류에 빠집니다.
아니면 滅法에서 生하였다면 滅法은 이미 謝去하였으니까 현재 能觀의 心을 生할 수 없습니다.
셋째는 만약에 亦滅亦不滅에서 生하였거나 넷째는 非滅非不滅에서 生하였더라도 모두 논리적으로 옳지 않습니다.
그래서 能觀하는 心은 本來부터 不生한 것이고, 不生하였으로 不有하며, 不有하므로 空이며, 空이므로 能觀하는
心은 없는 것이라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합니다. 만약에 能觀하는 心이 없다면 어떻게 所觀하는 境을 能觀하는 心이 있겠습니까?
한마디로 境도 없습니다. 이렇게 所觀의 境과 能觀의 智를 雙亡시키는 것이 還源의 要旨입니다. 이것을 修還相이라고 부릅니다.
證還相는
還의 證相인데 境과 智가 雙亡된 뒤 心에 本具된 慧가 開發됩니다. 개발된 뒤에는 功力을 加하지 말고 任運하여
저절로 妄惑을 破析할 때마다 다시 能觀하는 心을 反觀하는 것이 反本還源입니다. 이것을 還의 證相이라고 부릅니다.
修行者가 마땅히 알아야할 것은 만약에 境과 智를 버리고 無境無智의 雙亡으로 歸還하려고 한다면, 境과 智의 縛을 아직 끊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有境智와 無境智가 相待되는 二邊에 빠지는 오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때 마땅히 還門을 버리고 淨道로
가야합니다.
淨門도 二種이 있는데
첫째는 修淨이고
둘째는 證淨입니다.
修淨者는
色이 不生不滅의 淸淨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妄想과 分別을 일으키지 않는데 色과 함께 受想行識의 四蘊도 마찬가지입니다.
妄想과 分別과 我取의 汚垢를 모두 息滅시키는 것이 修淨입니다. 요점을 말하자면 觀心을 本源이 淸淨하도록 하는 것이 修淨이며, 또한 淨智가 境을 觀照할 때 能修와 所修 그리고 淨과 不淨의 相待를 일으키지 않는 것이 修淨입니다.
證淨은 淨의 證相인데 이렇게 修淨할 때 豁然히 心慧가 修淨에 相應하여
(『釋禪波羅蜜次第法門』, 卷七: “二與淨相應者,作是修時, 豁然心慧相應.”)
方便을 沮礙하지 않으므로 任運할수록 心慧가 開發되는데, 이 妙果는 三昧의 正受이며 心은 더 이상 依恃하지 않습니다.
證淨은 二種이 있습니다.
첫째는 類似한 證相이란 뜻의 相似證이며 五方便人
(七方便人, 小乘의 七賢位)이
見道하기 직전에 相似한 無漏의 道慧가 開發되는 證相입니다.
둘째는 真實證이며 苦法忍부터 見道하기까지 또 見道하여 三界의 번뇌를 斷除하여 第九의 無礙道를 證得하기까지
等真無漏慧가 開發되는 證相입니다. 見道한 뒤부터 三界 번뇌의 垢가 끝까지 斷除되는 證相을 證淨이라고 부릅니다.
또한, 人我의 知見을 얻을 수 없는 眾生空을 觀破하는 것을 觀이라고 부르고,
五陰과 十二入과 十八界를 얻을 수 없는 實法空을 觀破하는 것을 還이라고 부르고,
假와 實을 모두 觀破하는 平等空을 觀하는 것을 淨이라고 합니다.
참고자료: 衆生空과 實法空과 平等空에 관하여 『摩訶止觀』에서 간략히 설명하였습니다.
또한, 修行者가 假에서 空으로 悟入하는 空三昧에 相應하는 것을 觀門이라고 부르고,
空相조차도 보이지 않는 無相三昧에 相應하는 것을 還門이라고 부르고,
生死業을 息滅시키는 無作三昧에 相應하는 것을 淨門이라고 부릅니다.
참고자료: 空三昧과 無相三昧와 無作三昧에 관하여 아래 설명이 있습니다.
또한, 八背舍에서 一切 身外의 不淨을 外觀하는 것이 觀이고,
일체 身內의 不淨을 內觀하는 것이 還이고,
外觀도 內觀도 모두 아닌 것을 觀하는 것이 淨입니다.
故로 先尼梵志(Seuika는 外道로서 부처의 가르침을 받아 보살이 되었음.)가 말하길
“內觀으로 一切智를 얻은 것이 아니고, 外觀으로 이 지혜를 얻은 것이 아니고,
內外의 觀으로 지혜를 얻은 것이 아니고, 또한 無觀으로 지혜를 얻은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內觀하면 因緣의 相對를 잊기 어렵고, 外觀하면 二邊의 견해를 없애기 어렵고,
內外觀과 無觀에 머물지 않았고,
非內非外의 淨門으로 非空非有의 平等不二의 지혜를 얻었다는 뜻입니다.
3、次釋第三隨便宜六妙門。
다음은 第三의 隨便宜 六妙門을 설명합니다.
修行者가 深妙한 禪定의 智慧 그리고 中道의 實相 涅槃을 얻으려면 初步者가 安心을 배울 때 任運의 善巧가 필요합니다.
善巧가 무엇인가? 六妙門의 方法을 잘 알아서 心을 調伏하고 心의 方便을 따라서 항상 잘 운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心이 不便하면 억지로 修治하더라도 無益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처음 坐禪하기 전에 마땅히 다음을 알아야합니다.
調心과 數息의 방법을 배우고,
다음에는 隨息하는 것을 배우고,
다음에는 止와 觀과 還을 차례로 배우되 각각 단계마다 며칠씩 연습합니다.
배운 뒤에는 다시 數息과 隨息부터 還門과 淨門까지 心을 安頓시켜서 연습하여
각각 단계를 며칠씩 연습해야합니다.
다시 몇 번 반복하면서 修行者가 자신의 心에 便宜한 단계가 어떤 것인지를 잘 알아야합니다.
예를 들어 자신의 心에 數息이 편의하다면 마땅히 數息으로 安心시키고 淨門까지 마찬가지이며,
편의대로 운용하며 반드시 여섯 단계의 차례에 억매이지 말아야합니다.
이와 같이 安心시킬 때 身이 輕安하고 息이 調適하며 心이 寂靜하고 開明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安固하다면 마땅히 이 방법을 專用하야하며 반드시 깊은 利益을 얻을 것입니다.
그런데 방해가 나타나서 心을 散亂하고 暗塞시킨다면 마땅히 편의한대로 다른 行門을 써야합니다.
心이 安穩한 行門이 자신에게 좋은 것이며 오랫동안 운용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위와 같이 초학자가 六妙門을 善巧하게 安心하는 것을 설명하였는데,
여기에서 便宜하게 마음을 써야하는 요점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수행자가 수행하면서 心이 安穩하면 반드시 驗證한 여러 證相이 나타납니다. 무엇이 證相입니까?
持身을 얻으면 몸이 端正하고 오래 앉아 수양하더라도 피곤하지 않고,
粗住를 얻으면 心이 住하는데 不亂하고,
細住를 얻으면 心이 法에 住하더라도 不動하고,
欲界定을 얻으면 忘身하고,
欲界의 未到地定을 얻으면 잠시 憶持를 잃고 昏定하고,
色界의 初禪을 얻으면 八觸과 十功德을 얻어 正禪의 첫 단계에 들어갑니다.
이와 같이 種種의 여러 禪定의 증상을 얻었더라도 만약에 어떤 禪定에서는
心이 滯住하여 增進하지 못할 경우에는 마땅히 禪定의 深淺에 따라
六妙門을 골라서 수행하여 위의 증상들을 開發시킵니다.
淺定단계에서 오랫동안 수행하여도 增進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六妙門을 수련하여 증진시킨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修行者가 처음으로 持身法과 粗住法과 細住法을 배워서 수행하는데 며칠 몇 달이 지나도록 增進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에는 應當히 細心하게 하여 數息을 수행해야합니다.
數息을 수행하더라도 증진되지 않으면 隨息으로 바꾸어서 수행해야합니다.
隨息을 수행하더라도 증진되지 않으면 마땅히 세심하게 心을 凝聚시켜서 止門을 수행합니다.
止門을 수행하더라도 증진되지 않으면 마땅히 定中에 五陰과 十二入과 十八界를 觀합니다.
觀門에서 增進되지 않으면 마땅히 所觀의 境에서 能觀의 心源으로 되돌려서 心源을 檢修하는 還門을 수행해야합니다.
還門에서도 增進되지 않으면 마땅히 心을 寂然히 하여 淨門을 體得해야합니다. 이렇게 六妙門 모두를 운용하면서
만약에 어떤 하나의 수행법에 치우쳐서 증진될 때에는 마땅히 이 수행법으로 善巧하게 수행해야합니다.
漸次로 깊은 禪定에 進入하여 數息 단계를 넘어서서 數息의 相도 없어지면 隨息禪에 들어가서 개발해야합니다.
隨息의 定中에서 增進되지 않으면 마땅히 善巧하게 隨止觀還淨의 五法을 수행해보아야 합니다.
隨息의 禪定이 漸次로 깊이 증진되어 隨息의 境相도 넘어서면 止門의 禪定을 개발해야합니다.
止禪이 增進되지 않으면 마땅히 善巧하게 止와 觀還淨의 四法을 수행해야합니다.
止門의 禪定이 漸次로 깊이 增進된 뒤에는 觀心의 觀門이 開發됩니다.
所止의 境이 있는데 因緣和合의 所生이며 自性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부터 止相이 사라집니다.
觀禪이 증진되지 않으면 마땅히 더욱 善巧하게 觀과 還淨의 三法을 수행합니다.
觀禪이 增進되고 증진도 사라지면서 더욱 깊은 禪定에 들어가서 慧解가 開發되어 오직 自心이 所有한 法相 곧 身內의 三十六物과 여러 虫戶가 느껴지는데(覺), 이때 알아야할 것은 觀行에서 느끼는 것들이 虛誑不實하며 自心의 妄情이므로 夢中所見과 같다는 것입니다. 아는 것이 익숙해진 뒤에는 느끼는 이런 境相에 끌려다니지 않고 거꾸로 되돌려서 곧 返還시켜서 能觀하는 心源을 觀照합니다. 還禪 수행이 오래 되어도 증진되지 않으면 마땅히 다시 더욱 善巧하게 心源을 反觀해면서 心源의 본체를 淸淨시켜 寂然하도록 하는 것도 체득해야합니다.
還禪이 增進되고 증진도 마치려고 할 때 淨禪을 개발해야합니다. 淨禪에서는 “念想할 것은 觀門에서 수행한 能觀의 心이 모두 除滅되면, 言語로 생긴 法相이 모두 消滅되고, 無始 이래의 無量한 一切 眾業도 除去되고, 오직 清淨한 心만이 常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는 것을 淨禪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淨禪이 增進되지 않을 때에는 마땅히 善巧하게 垢心을 제거하여 本體가 真實하게 虛寂하도록 수행하여, 마치 心體가 虛空처럼 依倚할 것이 없도록 합니다. 이때 淨禪이 漸次로 더욱 깊이 虛寂해지다가 豁然히 明朗해지면서 真實한 無漏의 智가 개발되어 三乘의 道果를 證得합니다.
참고자료: “念相觀已除,言語法皆滅,無量眾罪除,清淨心常一.”에서
“相”字는 “想”字가 옳으며, 문구의 출처는 다음과 같습니다.
위와 같이 修行者가 便宜에 따라 六妙門을 공부하여
여러 禪定의 功德과 智慧를 增長시켜서 涅槃에 悟入하는 것을 간략히 소개하였습니다.
또한, 修行者가 六妙門을 수행하는 禪定 中에 內障과 外障이 일어나서 이를 除去하려면
다시 六門 가운데 하나씩 골라서 수행하여 제거하도록 합니다. 그 가운데 낫게 하는 방법이 藥입니다.
禪障과 禪定 中에 일어나는 魔事와 病患을 치료하는데 六妙門을 모두 공을 들여 수행해보면 거의 나을 수 있습니다.
위와 같이 설명했지만 실제적인 요령을 알기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修行者가 隨便宜 육묘문을 수행하면서
수행자 자신의 체험을 잘 생각하여 요령을 파악해야하며 함부로 수행하지 말아야합니다.
4、次釋第四對治六妙門。
다음은 第四의 對治하는 六妙門을 설명합니다.
三乘(聲聞、緣覺、菩薩)의 修行者가 修道하여 真如를 깨달은 것은 모두
障礙(報障、煩惱障、業障)를 제거하고 眞理를 顯現시켰기 때문이며,
결코 外道처럼 외부의 어떤 造作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二乘人은
四住惑(四住: 三界의 見一切住地、欲界의 欲愛住地、色界의 色愛住地、無色界의 有愛住地.)을
제거하는 것을 聖果를 얻었다고 부르고 더 이상 다른 방법으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菩薩大士는 塵沙의 無明障을 모두 破除하였기 때문에 菩提의 理가 顯現한 것이며,
어떤 다른 조작으로 聖果을 얻지 않았다는 것은 二乘人과 같습니다.
이렇게 보면 善巧하게 육묘문의 對治방법을 운용하여 內外의 장애를 破除할 수 있는 것이 修道이며 得道이며,
어떤 다른 방법으로 조작하여 얻는 것이 아닙니다.
六門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써서 내외장을 對治합니까?
修行者가 應當히 病을 알고 藥도 잘 알아야합니다.
病을 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三障입니다.
첫째는 報障인데 今世의 不善과 粗動과 散亂이며 十八界와 十二入을 막습니다.
둘째는 煩惱障인데 三毒과 十使(五利使: 身見、邊見、見取見、戒禁取見、
邪見과 五鈍使: 貪、嗔、痴、慢、疑是) 등 여러 煩惱입니다.
셋째는 業障(身、口、意三業)인데 過去와 現在에 일어나는
聖道를 막는 惡業인데 중간에서 아직 果報를 받지 않았지만 聖道를 막을 수 있습니다.
修行者는 坐禪 中에 三障이 發하면 마땅히 障相을 잘 알아내고
對治 六妙門을 써서 障相을 對治하여 除滅시켜야합니다.
坐禪 中에 報障이 일으키는 障相을 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對治와 除滅은 무엇입니까?
分別하는 覺이나 觀의 心이 散動하여 여러 境에 攀緣하기 때문에
暫時도 停住하지 않으므로 報障이 일으키는 障相이라고 합니다.
참고자료: 覺과 觀을 구분하면 覺은 粗心으로 境을 攀緣하는 것이고 觀은 細心으로 分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覺과 觀은 동시에 병존하지만 覺할 때는 觀이 어둡고, 觀할 때는 覺이 어둡습니다.
또한 覺은 身根과 身識이 相應하는 것이고 觀은 意根과 意識이 相應하는 것입니다.
身識은 外鈍하므로 粗하다고 하며, 意識은 內利하므로 分別할 수 있기 때문에 細하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身識과 意識이 병존하지만 하나가 강력하면 하나는 약하기 때문에 하나의 觸을 攀緣하더라도
둘이 병존하지 않고 하나만 나타납니다.
첫째 對治방법은
分別하는 覺觀의 心이 浮動하고 明利하여 여러 境을 攀緣하므로
心이 縱橫으로 散亂하여 마치 猿猴가 나무에서 난동하는 것과 같아서 制錄하기 어렵습니다
이때 修行者는 마땅히 數息을 써야하며,
調心하여 數息하되 마땅히 數息이 참된 對治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그리하여 부처께서 “覺觀의 分別心이 많은 사람에게는 數息을 하도록 가르쳤습니다.”고 하였습니다
.(『釋禪波羅蜜次第法門』, 卷四: “覺觀多者,教令數息.”)
둘째 對治방법은
坐禪 中에 어떤 때에는 能觀하는 心이 昏沈하거나 散亂합니다.
昏沈할 때는 無記心이 되거나 暗할 때는 睡眠하고,
散亂할 때는 心이 浮動하여 越逸합니다. 이때 行者는 마땅히 隨息門을 수행한다.
心을 잘 調適하고 息을 따라 入出을 明照하면 心이 息에 緣함에 의지하므로
分散하는 意가 사라지고 또한 息의 出入을 觀照하여 無記와 昏과 睡의 心을 고치며,
隨息에 의지하여 覺觀이 攀緣하는 것도 고칩니다.
참고자료: 睡眠에 관한 설명입니다.
睡는 속마음 곧 意識 또는 心神이 잠깐 어두운 것이며, 眠은 五情이나 六識이 가려서
팔다리를 풀어놓고 누워서 깊이 잠든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前五識과 第六識 모두 어두운 정도에 따라 구분한 것입니다.
셋째 對治방법은 坐禪 中에 身心이 긴장되고 숨을 몰아쉬어서心도 散亂하고 流動할 때에는,
修行者는 마땅히 止門을 수행하면서 身을 조금 풀어놓고 숨을 자연스럽게 放寬하다가
다시 心을 제어하여 凝寂시켜서 여러 憶慮를 멈추게 하는 것이 對治방법입니다.
또한, 煩惱障이 일어나면 어떻게 합니까? 어떻게 對治합니까?
煩惱가 일으키는 장애는 三種이 있습니다.
첫째 對治방법은 坐禪 中에 貪欲 煩惱의 장애가 일어납니다. 이때 修行者는 마땅히 觀心門 가운데
九不淨想과 八背舍 가운데 初背舍과 八勝處 가운데 第二勝處 등 不淨觀法을 수행하여 對治합니다.
둘째 對治방법은 坐禪 中에 嗔恚 煩惱의 장애가 일어납니다. 이때 修行者는
마땅히 觀心門 가운데 慈悲喜舍의 四無量心을 수행하여 對治합니다.
셋째 對治방법은 坐禪 中에 愚痴와 邪見의 煩惱의 장애가 일어납니다.
이때 修行者는 마땅히 還門을 수행하여 十二因緣과 三空道品(空、無相、無願)을 反照하여
心源을 破折시켜서 本性으로 歸還시키는 것이 고치는 방법입니다.
또한, 聖道를 막는 業이 일어난다는 것을 무슨 뜻입니까?
業은 三種이 있고 治法도 셋이 있습니다.
첫째 對治방법은
坐禪 中에 忽然이 明照의 心을 가려서 昏暗하고 境界를 迷失하면 마땅히 黑暗의 業障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이때 修行者는 마땅히 淨門 가운데 方便淨의 應身의 三十二相과 清淨한 光明의 妙德을 念觀하면 對治됩니다.
둘째 對治방법은
坐禪 中에 忽然히 惡念이 일어나서 貪欲을 思惟하여 無惡不造할 때에는 당연히 과거 罪業이 짓는 것이라고 알아야합니다.
이때 行者는 마땅히 淨門을 수행하는 동안에 報身佛의 一切種智의 圓淨常樂한 功德을 念觀하는 것이 對治방법입니다.
셋째 對治방법은
坐禪 中에 種種의 諸惡境界의 相이 顯現하거나 身心을 逼迫할 때에는 모두 過去와 今世에 지은 惡業의 障惑이
일으킨 것이라고 알아야합니다. 이때 行者는 마땅히 淨門을 수행하는 동안에 法身의 本體가 淸淨하여 不生不滅하며
本性이 清淨하다고 念觀하는 것이 對治방법입니다.
위와 같이 六妙門으로 三障의 相을 對治하여 斷除하는 방법을 간략히 설명하였으며,
자세하게 廣說하더라도 略說과 다르지 않지만
略說한 九障에 病障의 三類와 魔障의 三類를 더하여 모두 十五種 障입니다.
또한, 앞의 略說은 粗障의 對治방법을 설명한 것입니다.
그런데 修行者가 坐禪 中에 기타 禪法을 수행하면서 깊은 禪定의 智慧와 解脫을 開發하면서
種種의 細障이 일어날 때에는 마땅히 六門 가운데 善巧하게 對治방법을 골라서 수행해야합니다.
粗障과 細障의 障惑이 제거되면 真如의 實相이 저절로 顯現하고 三明과 六通이 저절로 개발되고
十力과 四無所畏와 一切諸佛菩薩의 功德과 行願이 自然이 現前하는데 이것들은 造作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法華經』에서 “또한 衆生의 心에서 여러 如來를 보고, 自然히 佛道를 成就한다.”고 말하였습니다.
5、次釋第五相攝六妙門。
다음은 第五의 相攝 六妙門을 설명합니다.
六妙門은 門門마다 서로를 包攝하는데,
淺近하게 말하면 二種이 있고 深遠하게 보면 방법이 아주 많습니다.
二種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六門 모두 각기 一門이 자체에 다른 五門을 포섭하는 自體相攝이고,
둘째는 六門 가운데 어느 一門을 善巧하게 수행할 때 다음의 높은 단계로 들어가는 行門을 포섭하는 것입니다.
六妙門의 自體相攝은 무엇입니까?
修行者가 六門을 수행할 때 예를 들어 數息 中에 任運하게 되면 隨止觀還淨의 五法도 포섭하는 것입니다. 까닭은 무엇입니까?
心이 息의 出入에 依隨하여 一에서 十까지 숫자를 세기 때문에 隨息門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여러 攀緣을 멈추고 心을 숫자 세는 것에 제어하므로 止門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心이 숫자를 세는 것과 息의 출입 둘을 나누어서 잘 알고 있으며,
아주 분명하게 알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觀門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心이 動散하여 五欲을 攀緣하는 것은 모두 虛誑이라고 알기 때문에 心이 受著하지 않고,
五欲에 攀緣하였던 心을 다시 되돌려 數息으로 歸還시키므로 還門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數息에 다른 五門을 포함시켜 수행할 때
五蓋(貪、嗔、睡眠、掉悔、疑)와 여러 粗한
煩惱의 垢染이 없기 때문에 身心이 寂然하므로 淨門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數息 안에 六門을 포함하고 있고,
隨止觀還淨도 각각 六門을 포함하므로 六門에 六門을 곱하면 모두 三十六妙門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위에서 각기 行門마다 운용이 다르지만 모두 현재 설명하는 포섭한다는 뜻도 있습니다.
이렇게 포섭한다는 뜻을 설명하지 않으면 수행자가 모릅니다.
위와 같이 육묘문마다 자체에 육묘문을 포함하므로
하나의 행문에 여섯 行相을 具備하고 있다는 것을 간략히 설명하였습니다.
또한, 六門 가운데 어느 一門을 善巧하게 수행할 때
다음의 높은 단계로 들어가는 行門도 포섭하고 있다는 상황은 무슨 뜻입니까?
修行者가 처음 調心하여 息을 一부터 十까지 셀 때 心이 分散되지 않는 것이 數息門입니다.
그런데 數息할 때 靜心하여 善巧하면, 숨이 처음에 코끝으로 들어와서 중간에 경유하여
배꼽 아래 丹田까지 이르는 것을 覺知하며,
또한 숨이 단전까지 들어온 뒤에는 다시 나가는 것도 心이 잘 覺知하여,
心이 숨에 依隨하여 散亂하지 않으므로 숨을 一에서 十까지 세는 數息을 成就시킵니다.
그러므로 數息을 수행하는 동안에 다음 단계의 隨息門도 함께 성취시키고 있습니다.
또한, 修行者가 數息할 때 細心히 善巧하여 心을 統制하여 숫자 세는 數法과 息相에 붙도록 하여
微細한 覺觀도 일어나지 못하도록 하고 또한 剎那의 異念(數法과 息相 밖의 念想)이 分別하는 것도
생기지 않도록 합니다. 이것이 數息에 더 높은 단계의 止門도 성취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修行者가 數息할 때 息을 세는 念이 巧慧의 方便으로 되도록 성취시키므로,
靜鑒之心이 息의 生滅을 觀照하면서 동시에 身分 안의 剎那의 思想과 陰入界의 法이
모두 구름과 그림자처럼 空하여 自性이 없기 때문에 人과 法의 我도 얻을 수 없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때 數息 中에 더 높은 단계로써 息을 세는 念이 善巧한 慧로 되어 觀門을 성취시킵니다.
또한, 修行者가 數息할 때 觀智를 성취시켜서 앞의 數隨止 修行의 대상이 虛假하다는 것을 알았을 뿐만 아니라,
다시 觀照하는 心도 自性이 없어서 虛誑不實하다는 것을 더욱 善巧하게 깨달으면서 知覺을 버리겠다고 생각합니다.
지각을 버리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數息 中에 아주 더 높은 단계의 還門도 성취시킨다는 것입니다.
참고자료: “離知覺想”에 관하여 覺知를 버릴 때 더럽다고 여긴답니다.
또한, 修行者가 數息할 때 所觀의 境과 能觀의 心 모두 寂然하므로 얻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慧의 方便이 있으므로 能觀의 心과 所觀의 境 모두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本性이 淸淨한 法性이 虛空과 같아서 分別할 수 없기 때문에 이때 수행자의 心은
法性과 相應하여 寂然不動합니다. 이것은 數息 中에 아주 높은 단계의 淨門도 성취하는 것입니다.
위와 같이 五門의 相攝하여 數息을 莊嚴하게 하였으니,
隨止觀還淨 五門 모두 각기 장엄하게 相攝한다는 것을 여기에서 따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六六이 三十六 또는 三十六妙門이라고 부릅니다.
修行者가 이와 같이 善巧하게 六妙門을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은 種種의
여러 깊은 禪定과 智慧를 반드시 얻어 三乘의 涅槃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6、次釋第六通別六妙門。
다음은 第六의 通別 六妙門을 설명합니다.
六門을 通과 別로 나누어 설명하는 까닭은 凡夫와 外道와 二乘과 菩薩이 모두 數息 한 가지 방법을 수행하지만 각기 얻은 解慧가 不同하기 때문에 證得하는 涅槃도 각기 다릅니다. 隨止觀還淨 五門도 마찬가지입니다. 까닭이 무엇입니까?
참고자료: 解慧는 의미가 다음과 같습니다.
凡夫 또는 鈍根의 行者는 數息할 때 一부터 十까지 숫자를 세면서 心을 安定시키고
이것으로 數息禪에 進入하여 여러 快樂을 받으려는 것만을 압니다.
이것은 범부가 數息 가운데 魔業을 일으킨다는 것이며 그 까닭은 살기를 탐하고 죽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참고자료: 利根과 鈍根에 관한 간략한 설명입니다.
또한, 여러 利根의 外道는 能見하는 心이 猛盛하여 因緣을 보기 때문에 數息할 때 調心하여 息의 출입을
一부터 十까지 세어서 禪定에 들어가려고 할 뿐만 아니라, 또한 분별할 수 있는데,
現在의 息은 있느냐?
없느냐?
있으면서도 없는 것이냐?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냐?
過去의 息은 떠나갔느냐?
가지 않았느냐?
갔으면서도 가지 않은 것이냐?
간 것도 아니고 가지 않은 것도 아니냐?
未來의 息은 끝이 있느냐?
없느냐?
있으면서도 없는 것이냐?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냐?
現在의 息은 常하냐?
無常하냐?
亦常亦無常하냐?
非常非無常하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四句의 논리로만 개념을 분석한다는 것입니다.
心에 대해서도 이와 같이 四句로 개념을 분석합니다.
그래서 心이 보는 것마다 實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불교는 그들이 말하는 것은 모두 妄語라고 평론합니다
이런 外道 사람들은 四句로는 알 수 없는 息相을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妄見(四句 논리)에 따라 分別하는데,
이것은 數息을 부정하는 戲論입니다. 위와 같이 正理가 아닌 邪見의 四句 논리가 불타는 곳이 번뇌를 낳는 곳이며
生死 윤회의 長夜에서 邪見을 貪著하고 여러 邪行을 짓고 善根을 斷滅시켜 싹도 나오지 못하게 하며
心이 正理의 밖으로만 흐르기 때문에 外道라고 부릅니다.
참고자료: “數息戲論。四邊火燒”는 四句分別이라는 불교의 悟證논리이며 서양의 형식논리와는 다릅니다.
이와 같이 범부와 외도는 根機의 鈍利가 다르지만 三界의 生死輪回하는 것은 똑같습니다.
또한, 聲聞乘의 數息相은 어떻습니까? 聲聞乘의 修行者는 三界를 速出하고 涅槃을 추구하려고 하기 때문에 數息을 수행하여 調心합니다. 이때 數息을 수행하는 동안 四諦의 正觀을 떠나지 않습니다. 數息을 수행하면서 四真諦를 觀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참고자료: 二乘의 同異 가운데 하나는 所觀이 다른데
聲聞乘은 四真諦法을 觀察하고 緣覺乘은 十二緣法을 관찰합니다.
修行者가 數息을 수행하면서 息은 身에 의지하고 身은 心에 의지하므로
息身心 三事가 和合하여 五陰、十八界、十二入을 이루며,
陰界入이 苦라는 諦를 깨닫는 것입니다.
참고설명: 聲聞乘은 數息을 수행하면서 息身心 三事의 和合을 觀하여 苦諦를 깨닫습니다.
息과 身의 色蘊과 心의 受、想、行、識 四蘊을 합하여 五陰이 되고,
身의 六根과 所對의 六塵을 합하여 十二入이 되고,
다시 六界를 더하여 十八界가 됩니다.
息身心 三事의 和合을 觀하면서 陰界入이 生死 윤회의 苦報가 된다는 苦諦를 깨닫습니다.
성문승은 息의 真性이 空이라는 것을 깨달으면 苦도 無生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四受(苦受、樂受、不苦不樂受、寂滅受)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그래서 集諦의 四行(因、集、生、緣)이 생기지 않으므로
鈍使(貪、嗔、痴、慢、疑)와
利使(身、邊、見、戒、邪) 등 煩惱結使가 寂然히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을 滅諦라고 부릅니다.
알아야할 것은 苦諦의 正慧가 眞理에 通達하는데 壅塞하지 않으므로 道諦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數息 수행으로 四諦에 通達할 수 있습니다.
마땅히 알아야할 것은 이 수행자가 반드시 聲聞의 道를 깨달아 阿羅漢果을 얻을 것이고
三界의 煩惱惑業을 畢竟에는 寂滅시키기 때문에 또다시 새롭게 五欲의 諸業을 짓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數息을 수행하여 어떻게 緣覺乘의 道를 證入할 수 있습니까?
緣覺乘의 修行者가 스승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 自然의 智慧를 찾기 때문에
홀로 寂靜하기를 잘하는 것을 좋아하며, 깊이 알게 되는 것은 諸法이 因緣의 화합이라는 것입니다.
緣覺乘 修行者는 十二因緣을 觀照하는데, 數息을 수행하면서 알게 되는 것은
息을 세는 念이 息의 出入을 계속 攀緣하는 것이 十二支 가운데
有支이며(有는 愛와 取가 작용하여 身口意 三業으로
三有〔欲有、色有、無色有〕를 짓습니다.)
有는 取에서,
取는 愛에서,
愛는 受에서,
受는 觸에서,
觸은 六入에서,
六入은 名色에서,
色은 識에서,
識은 行에서,
行은 無明에서 緣起하였다는 것입니다.
다시 더욱 관찰할 것이 있습니다.
息相을 攀緣하는 念이 有이며,
善한 有가 業을 짓는다는 뜻의 善有爲業이라고 부릅니다.
善한 因緣이 반드시 未來世의 人 또는 天의 受를 感招하고,
受의 因緣으로 반드시 老死하기 때문에 憂悲하고 煩惱하는 것입니다.
三世의 因緣으로 生死輪回도 끝없이 멈추지 않는데 본래부터
生도 없고 死도 없지만 모두 不善한 思惟의 心行이 지어낸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觀하면서 알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無明의 體性이 本來부터 없고 妄想의 因緣이 和合하여 생긴 것이고,
없는 것이기 때문에 假名으로 無明이라고 부릅니다.
無明이 이러한데 다시 말해 無明에서 緣起한 다른 十一因緣도 虛妄無實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알고 난 뒤에는 마땅히 알아야할 것이 있습니다. 行을 비롯한 因緣法은
모두 根本이 없으며, 行을 비롯한 因緣이 없는데 어찌 현재 息을 세는 念이 實在하겠는가입니다.
이때 修行者는 數息이 因緣의 所生이며 空으로 自性이 없다는 것을 깊이 알고 나면,
息相을 不受不著하며 不念하고 不分別하여 心이 虛空처럼 寂然不動하다가
豁然히 無漏心이 생겨서 緣覺의 道를 成就합니다.
6-5、復次云何名為菩薩數息相?
또한 菩薩의 數息相은 어떻습니까?
菩薩乘의 修行者는 一切智와 佛智와 自然智와 無師智와 함께 如來知見과 力無所畏를 얻어서
無量의 衆生을 불쌍하게 여기고 安樂하게 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數息을 수행하면서
數息門으로 一切種智를 證入하려고 합니다.
무슨 까닭입니까?
經에서 “阿那般那는 三世諸佛이 入道하는 初門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처음 새로 發心한 菩薩이 佛道를 얻으려면 應當히 먼저 調心하여 數息하여야합니다.
참고자료: “阿那般那,三世諸佛入道之初門”이란 말의 출처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釋禪波羅蜜次第法門』, 卷五: “현재 불교에 따르면 經에서 ‘阿那波那는 三世諸佛의 入道初門이다.’말하였습니다.
그래서 부처는 처음 道樹에 가서 佛法을 연습하려고
安那般那 곧 一數와 二隨부터 還淨까지를 마음속에서 생각하였습니다.
모두 『瑞應經』에 전해오고 있습니다.”
吳나라 支謙이 번역한 『佛說太子瑞應本起經』의 卷上에 “寂默한 뒤 一心으로 한 뒤에
마음속에서 安般의 여섯 단계를 생각하였습니다. 곧 一數와 二隨와 三止와 四觀과 五還과 六淨입니다.”
보살이 數息할 때 알아야할 것은
息과 非息이 모두 幻化와 같다는 알기 때문에 息相이 眞空이므로 生死의 法이 아니고,
동시에 息相이 幻化의 假有이므로 涅槃의 法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때 數息하면서 生死가 眞空이므로 斷除할 生死도 없고,
假有를 부정할 수 없으므로 들어갈 空寂의 열반도 없습니다.
그래서 生死가 眞空이므로 生死에 머물지 않습니다.
三界의 二十五種 有漏法의 系縛도 없지만,
涅槃이 幻化의 假有이므로 涅槃을 아직 證入하지 못하였지만
聲聞乘과 辟支佛의 地位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보살은 數息하는 동안에 平等한 大慧,
곧 息相이 眞空이므로 取하지도 않고
假有이므로 부정하지도 않는 心을 깨달았기 때문에 息相의 中道를 證入합니다.
이것을 佛性을 보았고 無生忍을 얻었고 大涅槃의 常樂我淨 四德에 住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涅槃經』에서 말하길 “마치 洪水가 一切를 갑자기 휩쓸어 바다로 가지만
오직 楊柳만이 부드럽기 때문에 휩쓸리지 않는 것과 같다.
生死의 洪水도 이와 같이 一切의 凡夫를 漂沒시키지만 오직 菩薩만을 못하는데
까닭은 보살이 大乘의 大般涅槃에 머물러서 心이 柔軟하기 때문이다.”라고 합니다.
이것을 大乘의 行者가 數息하는 동안에 菩薩位를 證入한다는 것입니다.
위와 같이 數息妙門에서
凡(凡夫와 外道)과
聖(三乘),
大小乘(聲聞乘, 緣覺乘, 菩薩乘)의
通別之相을 略說하였습니다.
數息이 비록 凡聖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通하지만
반드시 각기 다른 殊別之相도 이해해야합니다.
그러므로 數息은 비록 凡夫과 聖人 누구나 修行하지만
각기 果에 따라 報도 差等있게 내려간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數息 이외의 隨止觀還淨 妙門도
범부와 성인 그리고 大乘과 小乘의 通과 別이 이와 같습니다.
7、次釋第七旋轉六妙門。
위에서 설명한 六妙門은 모두 범부와 성인이 共行하는데 보살승이 凡夫와 二乘과 공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돌고 돈다는 뜻의 旋轉 六妙門은 오직 菩薩乘만이 수행하는 것이며
聲聞과 緣覺과 공행하지 못합니다. 하물며 凡夫가 공행할 수 있겠습니까?
왜냐하면? 앞에서 설명한 第六의 通別 妙門觀에서 설명한 假有에서
眞空으로 증입하는 從假入空觀은 慧眼과 一切智를 얻습니다.
慧眼과 一切智는 二乘과 菩薩의 共法입니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설명하는 眞空에서 假有로 돌아 나오는
旋轉 六妙門은 法眼과 道種智를 얻습니다.
보살의 法眼과 道種智는 聲聞이나 辟支佛과는 共得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고 설명: 假有를 부정하고 眞空을 체득하는 從假入空觀 곧 體眞止 수행에서 慧眼과 一切智를 얻습니다.
그래서 從假入空觀 또는 二諦觀 또는 慧眼 또는 一切智라고 부릅니다. 聲聞과 辟支佛 二乘 모두 혜안과
일체지를 얻지만 定力가 더 많기 때문에 佛性을 볼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오직 菩薩乘만이 眞空에 머물면서假有도 分別하는 從空入假觀 곧 方便隨緣止 수행에서
法眼과 道種智를 얻지만 智慧力이 더 많아서佛性을 모호하게나마 볼 수 있습니다.
菩薩이 數息하는 동안에 從空出假觀을 수행하면서 眞空에서 돌아서
妙假로 나오면서 내놓는 一切諸行의 功德相을 어떻게 일으킵니까?
所謂 菩薩이란 修行者는 數息할 때 마땅히 衆生을 憐湣하겠다는 大誓願을 發願합니다.
眾生이 畢竟에는 空이라는 것을 알지만 眾生을 淨佛國土로 渡生시키는데 未來의 끝까지 다하겠다고 발원합니다.
참고자료: 『摩訶止觀』, 卷三上: “化度眾生淨佛國土.”
『大智度論、釋淨佛國土品』, 卷九十三: “問曰: 佛憐湣眾生淨佛國土中.”
이렇게 발원한 뒤에 마땅히 알아야할 것이 있습니다.
현재 숫자를 세고 있는 息은 본래 不生不滅하므로 본성이 空寂입니다.
息의 因緣을 분석하니 空이며 결코 息이 없어졌기 때문에 空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息의 본성이 空이니 息이 空이고 空이 息이며,
空을 떠나서 息이 없고 息을 떠나서 空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 息과 空은 不二의 관계입니다(息空不二).
一切諸法도 이와 같이 空과 不二관계입니다.
息과 空이 不二이므로 息은 眞空도 아니고 假有도 아니며,
世間의 假有도 아니고 出世間의 眞空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假有의 息 또는 眞空의 非息 兩邊 가운데
한쪽으로 치우칠 수 없지만 둘이 息을 세고 있는 念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루어진 息의 念은 꿈이나 幻術에서 보이는 것과 같고
소리는 없이 메아리만 들리는 것과 같습니다.
息念(見分)은 비록 그 實事를 얻을 수 없지만
꿈이나 환술이 만든 世間業(相分)을 분별하고 있습니다.
보살이 다시 더 알아야하는 息이 이와 같습니다.
息은 비록 본성이 空이므로 息의 본성을 분별할 수 없지만
息을 세는 念을 이루면서 하나부터 열까지 세는 것을 명료하게 분별합니다.
다시 말해 息念이라는 深心의 분별(見分)이 息相의 夢幻처럼 假有이지만
또한 夢幻의 息처럼 본성이 없기 때문에,
深心의 분별은 본성이 없는 世間과 出世間의 一切法을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無明이 顚倒를 일으켜서 息性이 空이란 것을 모르기 때문에 息이 있다고 妄計하며
그래서 人과 法의 집착과 愛見 등 諸行을 지어서 世間法이라고 합니다.
息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五陰과 十八界와 十二入 등 世間의 苦樂한 果가 생깁니다.
그렇지만 알아야할 것은 息이 空이지만 一切世間의 善惡因果와
二十五有(欲界十四有와 色界七有와 無色界四有)의 生死輪回 같은 일을 지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보살이 息相이 空이므로 出世間의 相이 없다고 하여
息相에서 出世間法도 분별해내지 못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息相이 空이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無明이 모르면서 世間業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息性이 空이라서 없다는 것을 안 뒤에는 無明의 妄執도 없어지므로
一切의 諸結과 번뇌가 일어날 곳이 없어집니다. 이것을 出世間의 因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世間業을 짓는 因이 사라졌기 때문에
來世의 世間과 二十五有의 윤회를 벗어나는
果를 얻을 수 있습니다.이것을 出世間의 果라고 합니다.
世間의 顚倒된 因果法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出世間法이라고 합니다.
출세간의 正法에도 因果가 있는데, 因은 息性이 空이라는 것을 아는 지혜이며 출세간의 因이 됩니다.
息에서 妄計하던 人我과 무명의 顚倒와 苦果 등이 滅된 것을 出世間果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보살이 息과 非息을 觀하여 아직 世間과 出世間의 한 쪽으로 치우칠 수 없지만
세간과 출세간을 분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보살이 息性의 空이라는 것을 觀하는 동안에 四諦를 얻지 못하였지만 四諦에는 通達합니다. 왜냐하면?
앞에서 말한 대로 世間果는 苦諦이고 世間因은 集諦이고 出世間果는 滅諦이고 出世間因은 道諦입니다.
息相을 觀하면서 四諦를 볼 수 없지만 四諦를 명료하게 分別할 수 있기 때문에 聲聞乘에게 四諦의 分別을
광범하게 해석해줄 수 있답니다.
또한, 보살은 息의 空을 아는 동안에는 十二因緣을 볼 수 없지만 十二因緣에 通達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지나간 過去의 息은 本性이 空이므로 없지만 妄見하여 息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種種의
顛倒된 分別을 낳고 여러 煩惱를 일으키는데 이것을 無明이라고 합니다. 無明은 因과 緣이 되어서
行과 識과 名과 色과 六入과 觸과 受와 愛와 取와 有와 生과 老와 死와 憂悲와 苦惱 등이 있으며
쉼 없이 輪轉하는데, 이런 모든 것은 息이 虛空처럼 없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息이 空寂이라는 것을 알고 난 뒤에는 無明을 破하여 無明이 滅되면 十二因緣 모두 滅됩니다.
菩薩이 이와 같이 息과 非息을 알게 되면 十二因緣을 얻지 못하지만 분명히 알기 때문에
十二因緣에 通達하여 緣覺乘人에게 十二因緣의 분별을 광범하게 설명해줄 수 있습니다.
또한, 보살은 息이 本性이 없다는 것을 알지만 이때 아직은 息이 있다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하물며 息을 觀想하는 동안에 보살 자신에게 장애가 되는
六蔽(慳貪、破戒、嗔恚、懈怠、散亂、愚癡)와
자신을 구제하는 六度(布施、戒行、忍辱、精進、禪定、智慧)의 法을 볼 수 있겠습니까?
息性이 空이라는 단계에서는 六蔽와 六度의 法을 볼 수 없지만 六蔽와 六度에는 분명하게 통달합니다.
왜냐하면? 修行者가 數息할 때 息이 空이라는 非息에서 息을 볼 수 있는 것이
반드시 慳貪의 蔽法을 이룬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기 때문입니다.
慳에는 四種이 있으며
첫째는 財物을 慳惜하는 것이며 息에 我가 있다는 것을 보고 我를 위하여 慳을 生起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慳身인데 息中에 身見을 生起하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慳命인데 息中에도 息을 모르므로 命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넷째는 慳法인데 息中에도 息을 모르기 때문에 法을 見執하려는 마음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보살 修行者는 이와 같은 慳蔽의 惡法을 破壞하기 위하여
四種의 檀(dana, 六度 가운데 布施)波羅密(paramita)을 수행합니다.
첫째는 息性이 空이므로 我도 空이지만,
息을 떠나서 我도 없으며,
我가 없는데 여러 財物을 모아서 어디에 資給하겠는가? 하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알고 난 뒤에는 慳財之心이 즉시 사라지고 여러 珍寶를 마치 涕唾처럼 내놓습니다.
息性을 아는 것이 財物 布施 곧 檀波羅蜜이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둘째는 보살이 身의 본성이 空이므로 息 같은 諸法을 身이라고 여길 수 없으며
동시에 息 같은 法을 떠나서 또 다른 身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이때 身은 身과 非身을 알게 되면 慳身하는 執을 破합니다.
身을 慳執하지 않으면 身을 奴僕처럼 부리며 身과 같은 諸法을 필요한 사람에게 施與합니다.
마땅히 알아야할 것은 息과 非息을 알면 舍身의 檀波羅蜜를 具足하게 成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보살 修行者가 息性이 空이라는 것을 알고 난 뒤에는
息이 命이거나 身 밖에 命이 있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命이 없다고 여기면 命을 慳執하려는 마음을 破합니다.
이때 命을 버려서 衆生에게 施與하더라도 心이 驚畏하지 않습니다.
마땅히 알아야할 것은 息이 空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具足한 舍命의 檀波羅蜜이라는 것입니다.
넷째는 修行者가 息이 空이라는 것을 알고 난 뒤에는 五陰과 十二入과 十八界 같은
諸法을 實在라고 여기지 않고 또한 世間과 出世間의 種種 法相도 실재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보살은 眾生이 種種으로 妄計하여 諸法을 迷執하여 六趣를 輪回하는 것을 破하기 위하여
중생에게 설명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말한 것도 가르쳐준 것도 없는데 왜냐하면 듣는
사람이 들은 것도 없고 얻은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때 法施를 하더라도 法施를 집착하지 않고
은혜를 받은 적이 없는 사람에게도 모든 一切를 이롭게 합니다.
마치 大地와 虛空과 日月이 世間에 利益을 주지만 萬物에게 마음을 두지 않고 은혜에 대한 보답을
구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菩薩이 息性이 空이라는 것을 알면 平等한 法施의 檀波羅蜜을 行하며
衆生에게 利益을 주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마땅히 알아야할 것은 보살이 息性이 空이라는 것을 안 뒤에는 慳貪의 蔽와 布施의 度를 얻을 수 없지만
慳과 度를 분명하게 分別한다는 것입니다. 얻을 수 없기 때문에 息性이 空이라는 것을 아는 것은
尸羅와 羼提와 毗梨耶와 禪那와 般若의 다섯 波羅蜜도 具足하게 하는 것이 마찬가지입니다.
보살은 이와 같은 妙假觀을 수행하는 동안에 應當히 六度마다 波羅蜜相을 널리 旋轉하여
佛道를 구하는 善男子와 善女人에게 分別하는 것을 開示해줍니다.
위와 같이 數息門에서 陀羅尼(總持)를 旋轉하여 菩薩의 無礙方便을 수행합니다.
菩薩이 旋轉六妙門에 들어서서 數息과 調心만을 말하지만 旋轉하는 방법은
窮劫토록 不盡한데 하물며 隨止觀還淨等의 種種諸禪과 智慧와 神通과
四辯力(法無礙辯、義無礙辯、詞無礙辯、樂說無礙辯)과 無所畏와 諸地菩薩의
行願과 一切種智와 無盡一切功德에서 旋轉하여 分別하는 것이 끝이 있겠습니까?
8、次釋第八觀心六妙門。
다음은 第八의 觀心六妙門을 해석합니다.
觀心六妙門은 大根性의 修行人을 위한 것이며 이들은 方便無礙하므로
諸法의 惡을 잘 알 수 있기 때문에 次第로 諸法의 源을 懸照하는 것이 아닙니다.
諸法의 源은 무엇입니까? 眾生心입니다. 一切萬法은 心이 生起한 것인데,
心性을 反觀하더라도 心源이 空이므로 얻을 수 없기 때문에 萬法도 根本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여기에서 觀心에 한정하여 설명하는 六妙門은 앞의 七種 수행문과는 다릅니다. 왜냐하면?
修行者가 數息을 하면서 처음 觀心을 배울 때 一切의 世間과 出世間의 여러 數量法은 모두 心에서 나온 것이며,
心 밖에 어느 하나의 數法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그래서 數에 관한 一切法은 모두 心의 작용이므로 숫자를
셀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心이 觀心의 數息門이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또한, 修行者가 觀心할 때 알아야할 것은 一切의 數量之法이 모두 心王을 따르는(隨) 것이며,
心王이 없으면 숫자를 세는 數法도 없고, 심왕이 움직이면 數法도 따라서 움직이며,
마치 百官과 臣民 모두 大王을 隨順하듯이 一切의 數量法이 心王을 依隨하는 것도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觀心할 때 心이 觀心의 隨息門이 된다는 것을 압니다.
또한, 修行者가 觀心할 때 알게 되는 것은 心의 本性이 常寂하므로 諸法도 분석해보면 常寂합니다.
心이 常寂하니까 念을 일으키지 않고 起念하지 않으므로 不動하며 不動하므로 止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땅히 알아야할 것은 心이 觀心의 止門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修行者가 觀心할 때 心의 本性이 虛空처럼 名도 없고 相도 없다는 것을 覺了하므로 一切 語言의 道이 斷絶됩니다.
비로소 無明藏을 열어젖혀서 如來藏의 真實性을 보고 一切諸法에서 無著의 智慧을 얻습니다. 마땅히 알아야할 것은
心이 觀心의 觀門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修行者가 觀心할 때 所觀之心과 能觀之智 모두 얻을 수 없습니다.
이때 心이 虛空처럼 依倚할 곳이 없습니다. 좀 더 수행하면 觀行에서 얻은 無著의 妙慧가 諸法을 볼 수 없지만
一切諸法에 通達하여 一切諸法이 顯示하는 것을 分別합니다. 神通力으로 諸法界에 들어가서 缺減없이
色身을 普顯시키고 九道(佛界를 제외한 九界)에서 形相을 나타내면서 變通藏을 證入합니다.
善根을 廣集하고 菩提로 回向하고 佛道를 莊嚴하게 합니다. 이렇게 되면 心이 還門이라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합니다.
또한, 修行者가 觀心할 때 心과 諸法을 얻을 수 없지만 一切諸法을 분명하게 분별할 수 있습니다.
一切法을 분별하더라도 一切法을 집착하지 않고, 一切法을 成就시키더라도 一切法을 染着시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自性이 清淨하므로 無始 이래로 無明과 惑倒에 染着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經(『大乘起信論』)에서 말하길
“自性淸淨한 本心이 煩惱를 染着하지 않았고 煩惱도 本心을 染着시키지 않았다.”고 합니다. 修行者가 自性清淨心을
通達하였기 때문에 垢法에 들어가더라도 垢法에 染着되지 않으므로 淨이라고 합니다. 마땅히 알아야할 것은
心이 觀心의 淨門이라는 것입니다.이와 같이 觀心의 六門은 하나씩 次第대로 수행하는 것이 아니고,
心의 本性을 直觀하는 觀心이 六門을 具足합니다.
9、次釋第九圓觀六妙門。
다음에는 第九의 圓觀六妙門을 해석합니다.
圓觀을 어찌 위에서 설명한 修行방법에서 얻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心源을 觀하는 圓觀이 六妙門을 具足하며,
心源을 제외한 다른 諸法을 觀해서는 圓觀을 얻을 수 없습니다!
보살 修行者가 一心을 觀하면 一切心과 一切法이 보이고,
一法을 觀하면 一切法과 一切心이 보이고,
菩提를 觀하면 一切煩惱와 生死가 보이고,
煩惱와 生死를 觀하면 一切菩提와 涅槃이 보이고,
一佛을 觀하면 一切眾生과 諸佛이 보이고,
一眾生을 觀하면 一切佛과 一切眾生이 보입니다.
能觀에 따라 所見의 一切가 동시에 나타나는데,
마치 물체의 움직임에 따라 그림자가 동시에 나타나는 것과 같기 때문에,
觀과 一切는 非內非外이며 不一不異이며 十方不可思議입니다.
이것은 本性이 自爾하여 누가 能作者인지를 구분할 수 없습니다.
一心에서만 一切의 十方法界와 凡聖과 色心과 諸法數量을 分別하는 것이 아니라
一微塵에서도 一切의 十方世界諸佛과 凡聖과 色心과 數量法門을 通達할 수 있습니다.
위와 같이 圓觀의 數息門을 설명하였는데 隨止觀還淨 五門마다 이와 같습니다.
여기 圓觀의 數妙門은 微妙하며 不可思議하여 입으로 설명하거나 마음으로 추측할 수 없으므로
小菩薩(有相을 집착하는 大心菩薩)과 二乘境界(空寂을 집착하는 二乘)이 알 수 없는데 하물며 凡夫가 알겠습니까?
그렇지만 利根한 大士는 이 圓觀의 妙法을 들으면 믿고 이해하여 받아들여 지키고 正念思惟하면서 修習에 專精합니다.
마땅히 알아야할 것은 이 수행자는 佛이 다니신 淸淨한 곳을 다니고 佛住處(法界)에 住하고
如來室(法空의 大定)에 들어가서 如來衣(慈悲)를 입고 如來座(法性)에 앉습니다.
그리하여 이 報身이 반드시 六根清淨을 證得하고 佛의 知見을 열고 色身을 普現하여
等正覺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華嚴經』에서는 “처음 發心할 때 벌써 正覺을 이루었다.
(初發心時便, 成正覺.)”이라고 하여, 諸法의 真實之性을 了達하는데,
모든 慧身은 다른 방법으로 깨우친 것이 아니고 바로 이 圓觀이었습니다.
10、次釋第十證相六妙門。
다음에는 第十의 證相六妙門을 해석합니다.
앞에서 설명한 九種의 六妙門은 모두 因을 닦는
修因之相이며 곁들여 證相도 포함하였지만 설명이 具足하지 않습니다.
현재 여기에서는 六妙門의 證相을 더욱 분별하려고 합니다.
六妙門에는 四種의 證相이 있는데
첫째는 次第證이고
둘째는 互證이고
셋째는 旋轉證이고
넷째는 圓頓證입니다.
次第證이 무엇입니까?
앞에서 第一의 歷別對諸禪門과 次第相生의 六妙門에서 次第의 證相을 간략히 설명하였으니
자세히 따져보면 스스로 알 수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달리 설명하지 않습니다.
둘째는 互證이며 第三 隨便宜와 第四 對治와 第五 相攝과
第六 通觀의 四種 妙門에서 證相을 설명했습니다.
왜냐하면? 四種의 妙門은 方便을 修行하므로 정해진
次第가 없기 때문에 證相도 서로 되돌아가므로 차례가 일정하지 않습니다.
10-2-1、如行者當數息時,發十六觸等諸暗證、隱沒、無記、有垢等法。此禪即是數息證相之體,而今不定。
修行者가 數息할 때 初禪에 진입하기 전에
十六觸(一動、二癢、三涼、四暖、五輕、六重、七澀、
八滑、九掉、十猗、十一冷、十二熱、十三浮、十四沉、
十五堅、十六軟)의 暗證과 隱沒과 無記와 有垢等法이 發顯합니다.
이것들은 數息의 證相 가운데 本相이지만 일정하게 차례대로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또는 修行者가 數息하는 동안에 身의 毛孔이 열려서 虛疏해지는 것이 보이고
몸 안의 三十六物을 徹見하기도 합니다. 이런 證相은 數息하는 동안에 隨息을 證得하였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다시 修行者가 數息하는 동안에 空靜定(空寂定)을 證入하는데 身心이 寂然하여 緣念할 곳이 없다고 느껴집니다.
이렇게 空寂定에 들어가면 공적정의 淺深이 다르더라도 모두 空寂定의 證相입니다.
그러므로 數息하는 동안에 止門의 禪定에 證入하였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또한, 修行者가 數息할 때 몸의 內外가 死尸처럼 不淨하여 腱脹하거나 爛壞하거나 白骨이 光明한 증상이
나타나더라도 定心이 安隱합니다. 그래서 數息하는 동안에 觀門을 證得하였다는 것을 꼭 알아야합니다.
또한, 修行者가 數息할 때 空無相의 智慧와
三十七道品(指四念處,四正勤,四如意足,五根,五力,七覺支,八正道)과
四諦와 十二因緣 等의 巧慧方便이 일어나고 思覺心도 일어나서
諸法을 破析하여 反本還源합니다. 이것은 數息하는 동안에 還門禪에 證入하였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또한, 修行者가 數息할 때 身心이 寂然하여 諸法을 얻을 수 없어서 妄垢도 分別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心想이 寂然하지만 法相을 분명히 알면서도 依倚할 곳이 없습니다.
이것은 數息하는 동안에 淨門禪에 證入하였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위와 같이 數息中에 六門禪相이 互發하며 前後 차례가
一定하지 않아 반드시 위에서 말한 대로는 아닙니다.
이밖에 隨止觀還淨 五門에서도 각기 여러 禪相을 互證하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하나의 수행문에서 여러 禪相을 互證하는 까닭은 二種 意義가 있습니다.
첫째는 一門의 禪을 修行하지만 실제로는 다른 禪門도 함께 수행되기 때문에 수행되는
禪門에 따라 禪相도 함께 發합니다. 意義는 앞에서 설명한 四種의
六妙門相(第三 隨便宜와 第四 對治와 第五 相攝과 第六 通觀의 四種)과 같습니다.
둘째는 宿世에 수행했던 禪業이 善根에 緣하여 善根이 發하도록 하기 때문에 互發하는 것이 一定하지 않습니다.
뜻은 坐禪하는 동안 內方便(定內用心之法)으로 善惡의 根性을 明驗하는 곳에서 상세하게 설명한 것과 같습니다.
참고자료: “二者宿世業緣善根發,是故互發不定.”에 관하여 『摩訶止觀』, 卷八下, 第四觀業相境者에는
“수행자가 무량겁 이래로 지은 선업과 악업이 이미 수보하거나 아직 수보하지 못한 것이 있다.
그런데 일상생활의 散心에서 선악의 業이 보이지 않지만 止觀을 수행하면 이런 業을 흔들기 때문에
선악의 相이 나타납니다.
(行人無量劫來, 所作善惡諸業, 或已受報, 或未受報。若平平運心相則不現, 今修止觀能動諸業, 故善惡相現.”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셋째 從空入假하는 旋轉門의 證相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第七의 旋轉 修行에 따라 證相이 發하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旋轉의 解를 證得한 證相이고,
둘째는 旋轉의 行을 증득한 증상입니다.
旋轉의 解를 證得하면 어떤 證相을 發합니까?
修行者가 數息中에 巧慧가 旋轉하면서 修習하기 때문에 이때 深禪定 또는 淺定을 證得합니다.
深定이거나 淺定 中에 豁然히 心慧가 開發되어 覺識을 旋轉시켜서
(참고: 巧慧가 覺識으로 轉換되거나 覺識을 흔들어서 밝게 만든다는 뜻 같습니다)
真無礙을 了解합니다. 心念으로 法門을 了解하는 것이 아니고
巧慧가 任運으로 旋轉하여 法門을 覺識하는 것입니다.
旋轉에는 二種이 있는데
첫째는 總相旋轉解이며
둘째는 別相旋轉解입니다.
總相에는 다시 二種이 있는데
첫째는 解真總相이고
둘째는 解俗總相입니다.
別相旋轉解에도 다시 二種이 있는데
첫째는 解真別相이고
둘째는 解俗別相입니다.
總相法에서 旋轉되어 一切法을 了解하며,
別相도 마찬가지입니다.
旋轉의 行을 證得하면 어떤 證相입니까?
수행자가 了解한 것은 마음과 말이 서로 어긋나지 않고 서로 相應하여 法門이 당장에 顯現하도록 합니다.
心念의 行이 堅固하므로 任運할수록 增長합니다. 心念의 힘 때문이 아니지만 여러 善功德은 저절로 生起하고
여러 惡은 저절로 息滅합니다. 總相과 別相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지만 相應하는 것이 다른데 여러 法門境界에
들어가서 顯現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旋轉行의 證得을 간략히 설명하였는데 예를 들어 數息門에 二種의 旋轉 證相이 있으므로
다른 隨止觀還淨 五門도 마찬가지로 각기 二種 證相이 있습니다. 간략히 설명하여 자세하게
具足하지 못한 곳은 스스로 잘 생각하여 意義를 알아서 여러 法門에 널리 對處하여야합니다.
旋轉六妙門을 證得하면 旋轉陀羅尼門(總持、能持、能遮)을 증득하는 것이며,
이것을 無礙辯才와 巧慧方便이라고 부르고, 여러 惡을 遮蔽시켜서 일어나지 못하도록 하며
또한 여러 功德을 能持하여 漏失하지 않도록 합니다. 이 旋轉陀羅尼門의 法門을 任運하는
수행자는 반드시 멀지 않아 菩薩位에 들어가서 阿耨多羅三藐三菩提(無上正等正覺)를 성취할 것입니다.
넷째 圓證六妙門은 무엇입니까?
수행자가 第八의 觀心과 第九의 圓觀의 二種 六妙門을 方便으로 삼기 때문에
圓觀이 成就될 때 圓觀의 證相을 發합니다.
참고자료: 方便을 善巧라고 부릅니다.
『摩訶止觀』, 卷四上: “第六明方便者, 方便名善巧. 善巧修行以微少善根, 能令無量行成解發, 入菩薩位.”)
圓證에는 二種이 있는데,
첫째는 解證입니다.無礙한 巧慧로 法界를 圓滿하게 알며
心念으로 법계를 了解하지 않는 것을自然 圓證이라고 하며 解證이라고 부릅니다.
둘째는 會證이며 妙慧가 朗然하게 開發되어 法界를 明照하여 通達하는데 無礙한 것입니다.
證相에는 二種이 있습니다.
첫째는 相似證相이며『法華經』에서 설명한 대로 아직 無明을 破하지 못했지만 佛乘을 닮은 六根清淨相입니다.
둘째는 무명을 벌써 破하고 三德을 分證하여 부처와 같은 真實證相이며,『華嚴經』에서 설명한 初發心圓滿의 功德智慧相입니다.
참고자료: 三德의 뜻입니다.
相似圓證(‘為’誤字)六妙門은 무엇입니까?
『法華經』에서 말하길 “眼根이 清淨하면
一時에 十方의 凡聖과 色心 등 法의 數量을 셀 수 있다.”하였으므로 數息門이라고 부릅니다.
一切의 色法이 眼根에 隨順하며 眼根도 色法을 거부하지 않고 서로 隨順하므로 隨息門이라고 부릅니다.
眼根이 이렇게 色法을 隨順하게 볼 때 眼根과 眼識 모두 寂然히 不動하므로 止門이라고 부릅니다.
佛世尊만이 二相(作相과 無作相)을 일으키지 않고도 여러 佛國을 보시며 통달하시는데 장애가 없으며
善巧하게 分別하셔서 法性을 明照하셨으므로 觀門이라고 부릅니다.
眼根境界에서 耳鼻舌身意等諸根境界까지 통달하여 장애 없이 明瞭하며
眼根과 다른 五根이 서로 不一不異한 證相이 나타나는 것을 還門이라고 합니다.
또한, 수행자 자신의 眼根 境界가 다시 되돌아서 十方의 凡聖眼界에서도 顯現하는 것을 보기 때문에 還門이라고 합니다.
위와 같이 相似證相을 설명하는 數隨止觀還 五門에서 분명하게 通達하여 여러 가지 일들을 보았지만 妄想을 일으켜서 분별하지 않고, 本性이 淸淨한 것을 알아서 어떤 法에도 染着되지 않고 不住不着하여 法愛를 일으키지 않는 證相을 淨門이라고 합니다.
위와 같이 眼根의 淸淨을 수행하는 동안에 證得하는 相似六妙門의 證相에 대하여 간략히 설명하였습니다.
다른 五根의 相似證相도 眼根과 마찬가지이며 자세한 설명은 『法華經』의 설명과 같습니다.
참고자료: “不以二相, 見諸佛國.” 구절의 출처는 『維摩詰所說經』, 弟子品第三이며 二相은 作相과 無作相을 말합니다. 그렇지만 『妙法蓮華經文句』, 卷一下에서 神通力을 初敎, 通敎, 別敎, 圓敎 네 단계로 나누었고, 圓敎의 神通은 三諦의 實相에 의거한 神通이며 二相으로 佛土를 보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二相은 俗諦와 空諦입니다. 그러므로 作相은 俗諦이며 無作相은 空諦를 의미합니다.
“부처의 제자 아나율이 유마힐에게 대답하길 ‘저는 석가모니의 佛土 안에 三千大天世界를 攝化한 것을 보았으며 마치
손바닥 안에 암마륵 열매가 들어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때 유마힐이 아나율에게 다가와서 ‘그렇소! 아나율. 佛世尊께서
天眼으로 보실 수 있는 까닭은 보시려고 作意하신(作相) 것인가? 아니면 보시려고 하신 적이 없는데도(無作相) 보시는 것인가?
만약에 보시려고 作意하셨다면 外道의 다섯 가지 神通과 같으며, 보시려고 作意하신 적이 없으셨는데도 보신다는 것은 無爲
이므로 당연히 보실 수 없다.’……유마힐이 대답하길 ‘세상에는 오직 불세존께서만 참된 天眼을 얻으셔서 항상 三昧에 계시면서 여러 佛國을 모두 보시는 것이며 앞의 作相 또는 無作相 때문에 보시는 것은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敎判에 따라 神通을 다음과 같이 구분합니다. 四禪의 十四變化와 觀의 練熏에 따라 十一切無漏事禪을 수행하여 十八變을 일으키는 것이 初教의 神通입니다. 空에서 慧를 얻고 空의 慧心으로 여러 神通을 수행하는 것이 通教의 神通입니다. 三諦에 따라 차례대로 神通을 習得하여 점점 깊이 들어가서 二乘을 넘어서는 것이 別教의 神通입니다. 二乘의 二諦가 아니고 實相의 의거하여 얻은 神通으로 곧 二諦로 여러 佛土를 보고, 真諦에서 俗境에 對應하면서도 真際를 흔들지 않으며 十法界를 모두 진입할 수 있는 것이 圓教의 神通이라고 합니다.”
번역: “『淨名疏』에서는 ‘二乘이 天眼을 얻었더라도 作意하여야 千界와 大千을 볼 수 있지만,
諸佛과 菩薩은 真天眼을 얻어서 앞의 二乘의 二諦가 아닌 三諦로써 여러 佛土를 본다.’고 합니다.
天台 智者大師는 ‘中道諦가 真天眼이며 二諦之相이 아니고 眞天眼으로 四土의 三種 生死가 여기 저기
윤회하는 것을 觀照하니 王三昧에서 依正二報 모두 나타나는 것이 真天眼이다.’고 합니다.”
真實圓證의 六妙門은 무엇입니까? 二種이 있는데
첫째는 하나씩 설명하는 別對이고
둘째는 전체를 설명하는 通對입니다.
첫째 別對는 菩薩行의 五十二位 가운데 十住를 數門으로 삼고
十行을 隨門으로 삼고 十回向을 止門으로 삼고 十地所를
觀門으로 삼고 等覺을 還門으로 삼고 妙覺을 淨門으로 삼습니다.
둘째 通對에는 三種의 證相이 있는데
첫째는 初證이고
둘째는 中證이고
셋째는 究竟證입니다.
初證은 菩薩이 ‘阿’字(華嚴四十二字行門 가운데 첫 글자 ‘阿’는 無의 뜻입니다.)
門에 進入한 것이며 初發心住에서 真無生法忍의 智慧를 얻는다고 합니다.
이때 一念의 心에서 不可說한 微塵世界의 諸佛과 菩薩과 聲聞과 緣覺의
여러 心行을 비롯하여 無量數의 法門을 모두 헤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數門이라고 합니다.
一念의 心에서 法界의 모든 事業을 隨順할 수 있기 때문에 隨門이라고 합니다.
一念의 心에서 百千種 三昧와 一切 三昧에 들어가서 虛心과 妄想과 習氣를 모두 止息시킬 수 있기 때문에 止門이라고 합니다.
一念의 心에서 一切 法相을 잘 알아서 種種의 觀의 智慧를 具足시킬 수 있기 때문에 觀門이라고 합니다.
一念의 心에서 諸法에 通達하여 분명하게 알고 神通으로 전환과 변화를 시켜서
중생을 調伏시키고 本源으로 되돌아오도록 할 수 있기 때문에 還門이라고 합니다.
一念의 心에서 위에서 말한 일들을 성취시키되 心은 染着되지 않고 諸法에 汚染되지 않을 수 있으며,
또한 佛國土를 淸淨하게 하여 衆生이 三乘의 淨道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할 수 있기 때문에 淨門이라고 합니다.
初發心의 菩薩이 圓證六妙門에 悟入하면 『華嚴經』에서 말한 대로 佛이라고 부릅니다.
般若의 正慧를 얻어서 如來藏을 열고 真法身을 顯現하고 首楞嚴定(諸佛과 十地菩薩이 얻은 禪定)을 具足하고
佛性을 明見하고 大涅槃에 住하고 法華三昧와 不思議의 一實境界에 들어갔습니다.
자세한 설명은 『華嚴經, 十住品』에서 밝힌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初地 보살이 不可思議의 真實六妙門을 證得한 것입니다.
참고자료: 一實境界에 관한 출처는 다음과 같습니다.
中證은 二住부터의 九住와 十行과 十回向과 十地와 等覺地이며 모두 中證의 不可思議真實六妙門입니다.
究竟圓證은 무엇입니까?
發心後의 菩薩이 入茶(萘의 誤字)字門(華嚴四十二字行門 가운데 ‘萘’字는 非의 뜻입니다)에
들어가서 一念에 相應한 智慧를 얻어 妙覺이 당장 顯現하여 法界를 窮照합니다.
六種 法門 가운데 究竟에 通達하여 功用이 普備하여 缺減이 없는 것이 究竟圓滿의 六妙門입니다.
數隨止觀還淨 六法門의 각기 證相은 意義가 앞의 數門과 다르지 않지만 다만 圓滿의 정도가 다릅니다.
그래서 『瓔珞經』에서 “三賢(十住、十行、十回向)과 十聖(十地)가 無生法忍 가운데 수행하지만
오직 佛陀 一人만이 諸法의 本源까지 窮盡할 수 있다.”라고 말하였으며,
『法華經』에서는 “오직 佛陀과 諸佛만이 諸法의 實相을 盡究할 수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여기에서는 修行과 敎道에 관하여 이와 같이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나 理 관점에서 보면 法界가 圓通하며 諸佛과 菩薩이 證得한 法門은 처음부터 끝까지 같습니다.
그러므로 『大品經』에서 “처음의 ‘阿’字行부터 뒤의 ‘萘’字까지 意義가 다르지 않다.”고 말하였으며,
『涅槃經』에서는 “初發心의 보살과 畢竟의 佛은 서로 다르지 않지만,
이와 같은 보살의 초발심과 佛心 둘 가운데 앞의 發心이 더욱 어렵다.”고 말하였습니다.
『華嚴經』에서는 “初地 보살이 처음부터 모든 地位의 功德을 갖추고 있다.”고 말하였으며,
『法華經』에서는 “이와 같이 本과 末이 끝에서는 같다.”고 말하였습니다.
六妙法門一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