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산이 진성眞聖이 거주하는 곳이라고 믿게 된 것은 자장율사가 중국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의 화현을 친견하고
부처님의 정골사리, 가사, 발우 등을 얻으면서부터이다. 이로써 "동북방 청량산에 문수보살이 계시면서
일만의 권속을 거느리고 늘 설법한다."는 「화엄경」을 바탕으로 한 오대산 신앙이 우리나라에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처럼 문수보살이 오대산에 머문다는 믿음은 뒤에 7, 8세기에 이르면 오류성중五類聖衆이라 하여 오만보살신앙으로
더욱 발전된다. 신라 신문왕의 아들인 보천, 효명 두 태자가 오대산에서 수행하며 오대의 각 대마다 거주하는 오만보살에게
일일이 참배하였다고 한다. 즉, 동대 만월산滿月山 관음암에는 일만의 관음보살이, 남대 기린산麒麟山 지장암에는 일만의
지장보살이, 서대 장령산長嶺山 미타암에는 일만의 대세지보살이, 북대 상왕산象王山 나한당에는 오백 나한이, 중대 지로산
地爐山 진여원에는 일만의 문수보살이 상주하며 설법한다는 것이다.
보천태자는 임종 때에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오대산은 백두산의 큰 줄기로서 각 대는 진신이 상주한다. 동쪽은 북대의 남쪽 기슭 끝에 있다. 마땅히 관음방을 두어 관음과 일만 관음상을 봉안하고... 천수주를 독송하고... 그 곳을 원통사圓通社라 이름한다. 남쪽은 남대의 남면에 있다. 지장방을 두어 8대보살을 수반으로 일만 지장상을 봉안하고... 지장경과 금강반야경을 독송하고... 금강사金剛社라 이름한다. 서대의 남쪽에는 미타방을 설치하고 무량수여래을 수반으로 일만의 대세지를 그려 봉안하고... 법화를 독송하고... 수정사水精社라 이름한다. 북대의 남쪽에는 나한당을 설치하여 석가여래를 수반으로 오백 나한을 봉안하고... 열반경을 읽고... 백련사白蓮社라 이름한다. 중대의 진여원 가운데는 비로자나불을 수반으로 문수상을 모시고... 화엄경과 육백반야를 독송하고... 화엄사華嚴社라 이름한다. 보천암을 개창하여 화장사華藏社로 하고 비로자나불을 봉안하고 해마다 백 일 동안 화엄회를 열게 하되 법륜사法輪社라 이름한다. 이 화장사를 오대의 본사本寺로 삼아 굳게 호지하고 향화를 받들게 하면 국왕이 장수하고 백성이 평안하고 문무가 화평하고 백곡이 풍요할 것이다." |
월정사의밤 1999년
팔각구층석탑의 보존상태에서 균등하고 우아한조형미를 보여주는데 상륜부의 금동장식또한
완벽하게 남아있다. 이곳의 창건주인 자장율사慈藏律師(신라선덕여왕12년.643년)가 세웠다고 전하나 고려시대 양식으로 보는견해가중론이다. 정교한 팔각지붕들이 구층까지 체감률을 줄여가고 추녀끝이 반전하므로 상승감을 유발시키는데 추녀끝마다 풍탁이 달려있어 조형미와 함께 세월의 바람을 더해준다. 헤아려보니 온전했다면 풍탁은 모두 72개가 바람에 흔들리게 되는데 그풍경소리는 화려하고도 우아한 신라 금관의 찰랑거림과도 같은 이미지이다.
그석탑앞에 지긋이 실눈을뜨고 탑을향해 공양을 올리는 석조보살상은 일체중생희견보살一切衆生喜見菩薩로 1,200년동안이나 몸과팔을 테우는 소신燒身공양의 은덕으로 마침내 무수한 중생을 제도하는 약왕보살藥王菩薩이 되었다고 전해온다비가오나 눈보라를 맞으나 이레중생을 위해 형상이 마모될때까지 온몸을 사르며 그자리를지켜 공양을 올리는모습인것이다. 그엄숙한 보살상을 머리로받들고 있는 동자상은 세월의 이끼와 바람소리에 잠들어가고있다.
오대산월정사 1999년
이일주문에서 월정사까지 800미터구간의 천연자생림 전나무는 약400~500년생으로 오대산의 이미지를 가장먼저 전해준다산세의 ㅂ흐름과 가람배치를 눈여겨보자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터전이다. 문자형국가운데 야也자 형이라고 풍수가들은 이곳월정사를 말한다. 오대산은 주봉인 비로봉을 비롯 호령봉,상왕봉,두로봉,동대산으로 다섯개의 臺가 꽃봉오리처럼 피어난형국이다여기에 월정사는 동대산東坮山을 지맥으로 한 만월산에 기대어 뜨락을 펼친것이다.
사진이없던시절,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는 이곳 오대산의 상원上院, 사고史庫, 중대中臺,그리고 월정사 전경을 소상하게 그렸다. 문명의 흐름을 거스를수없다지만 단원 그림에서 느겨지듯 오대천을 끼고 전나무가 무성한 소롯길로 산문山門을 찾아야했을 그윽한가람의 정취가 못내 아쉬운것이다.
오대산월정사 전경 스케치
석조보살좌상 스케치
한때 조지훈趙芝熏(1920~68)은 이곳에 머물며 어느봄날
고사古寺라는 시를 남겼는데 바로 이구층탑앞에서 시상詩想을 떠올렸을것이다.
목련꽃향기로운/그늘아래/물로씻은듯이 조약돌빛나고/흰옷길 매무새의 구층탑위로/파르라니 돌아가는 신라천년의 꽃구름이여/한나절 조찰히 구르든/여울물소리 그치고/빙;ㅣㄴ골에 울려오는 낮 종소리/바람도 잠자는 복사꽃잎은/종소리에 세삼놀라 떨어지노니/무지갯빛 햇살속에/의희한 단청은 말이없고
이내붉은구름이 서산을 가로지러더니 어느새 달이돋고.
어둠이 짙어지면 월정사의 뜨락은 별빛으로 가득해졌다.
아. 월정月精!
그렇구나.달빛이 이토록 정채精彩로운 가람의 이름이 지닌뜻을 이제야 알겠구나
.어둠속에서 탑은더욱더높아 상서롭고. 석조보살은 세월을잊은 공양으로 밤을지세는데
달빛이푸른밤.오대산자락귀퉁이를 베고누운 나그네는 천년의 꿈에 휩싸였다.
오대산 월정사(부분)
월정사 창건기
나라 안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선원으로서도 널리 알려져, 일찍부터 월정사 산내 암자에 그치지 않는 명성을 누려 오고 있다.특히 사람이 자주 다니는 도로에서 멀지 않은데도 깊은 산사의 숙연한 분위기가 매우 뛰어나, 참선수행으로써 본래의 참면목을 깨우치려는 눈 푸른 수행납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상원사는 신라 성덕왕 4년(705)에 신라의 보천(寶川)과 효명(孝明) 두 왕자에 의해 오대산 중대에 창건되었는데, 처음 이름은 진여원(眞如院)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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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문에서 월정사까지 800미터 구간의 천년자생림 전나무는 약400~500년생으로
오대산의 이미지를 가장먼저 전해준다
특히 이전나무들중 20미터 간격으로 자라는 거목9본을 아홉수라 부르는데
이나무들의 종자가 퍼져 오대산 전나무숲을 이루었다고 전해온다.
이곳의 창건주인자장율사(신라선덕여왕12년.643년)가 세웠다고전하나
고려시대 양식으로보는 견해가 중론이다. 정교한팔각지붕들이 구층까지 체감률을 줄여가고
추녀끝이 반전하므로 상승감을 유발시키는데
추녀끝마다풍탁이 달려있어조형미와 함께 세월의 바람을 더해준다.
헤아려보니 온전했다면 풍탁은 모두72개가 바람에 흔들리게 되는데 그풍경소리는
화려하고도 우아한신라금관의 찰랑거림과도 같은 이미지이다.
그석탑앞에 지긋이 실눈을 뜨고 탑을향해 공양을 올리는 석조보살상은
일체중생희견보살로 1,200년동안이나 몸과 팔을 태우는
소신공양의 은덕으로 마침내 무수한중생을 제도하는약왕보살이 되었다고전해온다.
월정사 중창기
고려 충렬왕 33년(1377)에 화재로 모두 타버린 것을 이일스님이 중창하고 조선시대까지 계속 법등을 밝혀 왔는데 조선 순조 33년(1833)에 또다시 큰 화재를 입고 말았다. 그런 지 12년 뒤인 헌종 10년(1844)에 이르러 영담, 정암 스님 같은 분이 앞장서서 중건하여 큰 사찰로서의 모습을 다시 회복하였다. 1911년에는 전국 31본산의 가운데 하나가 되어 강원도 남부의 사찰을 총괄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랜 역사를 간직해 오던 월정사는 1950년 6. 25 전쟁의 참화로 칠불보전七佛寶殿을 비롯하여 영산전, 광응전, 진영각 등 17동 건물이 모두 불타고 소장 문화재와 사료들도 모두 재가 되어버린 비운을 맞이했다. |
월정사 현재
지금의 월정사는 1964년 탄허스님이 적광전을 중건하고 그 뒤로 만화스님과 현해스님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중건하여 이룩한 것이다. 그리하여 어엿한 대가람의 모습을 되찾게 된 월정사는 비록 몇 차례 화재와 전화로
많은 성물(聖物)과 문화재를 잃긴 하였으나 나름대로의 독특한 특징을 지닌 당우들이며 국보로 지정된
팔각구층석탑을 비롯하여 많은 보물과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