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지는 『설법품』에서는 석존께 보살들이 신속하게 불도(佛道)를 이루기 위한 법문을 여쭈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석존께서는 「하나의 법문(法門)이 있으니 그 하나의 법문(法門)을 일컬어 무량의(無量義)라고 하느니라」고 대답하시고 「무량의(無量義)」라는 하나의 법문에 의해 신속하게 성도(成道)한다는 것을 밝히셨습니다.
그리고 「무량의」를 수학(修學)하는 마음가짐으로서 「틀림없이 일체(一切)의 제법(諸法)은 과거(過去) · 현재(現在) · 미래(未來)에 걸쳐서 크다거나 작다는 등의 상대관념(相待觀念)이나 차별(差別)이 없는 평등한 공(空)이니 대립차별(對立差別)하는 일 없이 관찰해야하느니라」고 설하셨습니다.
그러나 중생은 「이것」과 「저것」, 또는 「이것이 이득이다」와 「이것이 손해다」라고 하는 것처럼 세간(世間)의 모든 것들을 차별(差別)의 상(相)으로 보고 비뚤어진 생각을 일으켜 악업(惡業)을 짓고 육도(六道)에서 윤회(輪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중생을 구하기 위해 대자비심을 일으켜 성질이나 욕망 등이 여러 가지인 중생을 위해 각자에게 맞는 법을 설하였다고 밝히셨습니다.
그리고 설법이 무량(無量)하면 거기에 나타나는 의(義)도 무량하게 되어 이것을 「무량의(無量義)」라고 칭합니다.
이 무량의(無量義)란 말하자면 법화경 이전(已前)에 설해진 화엄(華嚴) · 아함(阿含), 방등(方等), 반약(般若) 등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어서 「무량의(無量義)란 일법(一法)에서 좇아 나느니라.
그 일법이란 즉 무상(無相)이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이러한 무량의도 「무상(無相)」의 일법(一法)에서 생겨난다고 밝히셨습니다.
이 「무상」이란 아직 법화경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표현에 그쳤으며 이 실의(實義)는 법화경에 이르러 밝혀졌습니다.
그런데 이 『설법품』에서는 「모든 중생(衆生)이 성욕부동(性欲不同)하다는것을 알았노라. 성욕부동(性欲不同)하므로 종종(種種)으로 법(法)을 설했노라. 종종(種種)으로 법(法)을 설하는 것, 방편력(方便力)으로써 하였노라. 사십여년(四十餘年)에는 아직 진실을」나타내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러한 까닭으로 중생의 득도(得道)가 차별(差別)해서 빨리 무상보리(無上菩提)를 이룸을 얻지 못하느니라.
〔지제중생(知諸衆生) 성욕부동(性欲不同) 성욕부동(性欲不同) 종종설법(種種說法) 종종설법(種種說法) 이방편력(以方便力) 사십여년(四十餘年) 미현진실(未顯眞實) 시고중생(是故衆生) 득도차별(得道差別) 부득질성(不得疾成) 무상보리(無上菩提)〕」고 설하셨는데, 여기에서 「사십여년(四十餘年) 미현진실(未顯眞實)」이라는 유명한 경문을 볼 수 있습니다.
석존께서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열으시고 이 무량의경에 이르기까지의 40여 년 여러 중생을 위해 각자에 맞는 여러 가지 법, 즉 법화경 이전의 많은 경전을 설해 오셨습니다. 그러나 아직 진실의 가르침을 설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실히 밝히셨습니다. 이 진실의 가르침이야말로 무량의경 뒤에 설해진 법화경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