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지겨운 국민교육헌장이여
기억과 추억 사이/옛날 고향 이야기
2006-02-03 22:40:16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공영에 이바지할 때다.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교육의 지표로 삼는다. 성실한 마음과 튼튼한 몸으로 학문과 기술을 배우고 익히며,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계발하고 우리의 처지를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 창조의 힘과 개척의 정신을 기른다. 공익과 질서를 앞세우며 능률과 실질을 숭상하고, 경애와 신의에 뿌리박은 상부 상조의 전통을 이어받아 명랑하고 따뜻한 협동 정신을 북돋운다.
--이하 중략
내 또래의 나이라면 아마 국민교육헌장 한 귀절쯤은 외우고 잇을 것이다. 국민교육헌장, 지금의 초등학생들은 그것의 정체가 뭔지 전혀 모르겠지만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 놈의 헌장냄새에 숨이 막혀 죽어지냈던 사람이다. 초등학교 교과서 앞장에 늘 등장하던 국민교육헌장을 펼칠 때마다 숨이 막혀견딜 수 없었다. 숨이 막힌 것은 그 교육헌장의 정체와 내용에 대해 불만이 있어 그런 것이 아니고 매일 달달 외우라고 볶는 담임선생님 때문이었다. 그 당시 내가 똑똑하고 깨인 놈이라면 당장 교육헌장 내 팽개치고 학교를 자퇴할지도 몰랐지만 시골구석에 쳐박혀 사는 철없는 아이로서는 감히 교육헌장의 무게에 압도되어 선생님의 말을 따라야만 했다. 정말이지 담임 선생님은 매일 아이들을 들볶았다. 수업이 시작되기 전이면 누가 국민교육헌장을 외웠는지 시켜보는 것이 일이었다. 매일 충분한 시간을 주고 교육헌장을 달달 외우게 했다. 그러면 아이들은 제 방식으로 헌장을 외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공책에 글씨를 반복해 쓰며 외우는 아이들, 교육헌장을 한 구절 씩 보며 눈을 떴다 감았다 하며 외우는 아이들, 염불하듯이 소리를 높이는 아이들, 잘 외워지지 않아 머리를 짓뜯는 아이들이 뒤섞여 교실 안은 그야말로 벌집 쑤신 분위기였다. 그러면 그 다음날 선생님은 누가 잘 외웠는지 한사람씩 시켜 보았다. 그것도 제자리에서 일어나 외우게 하는 게 아니라 꼭 맨 앞으로 나와 아이들을 보며 외우게 했다. 그런대로 어느 정도 외운 아이들은 그냥 넘어갔으나 그렇지 않는 아이들이 고역이었다. 첫 줄에서 막히고 더듬거리면 어김없이 회초리를 들이댔다. 찰싹 찰싹 회초리 소리가 들리면 마치 내가 종아리를 맞은 것처럼 살점이 떨어지는 아픔을 느꼈다. 벌건 줄이 서 너 개 쳐진 종아리를 비비며 제자리에 앉은 아이는 창피해서 얼굴을 들지 못했다. 내 차례가 다가올 때마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그러나 생각보단 실력이 형편없는 아이들이 많았다, 하나같이 종아리를 맞고 들어가는 아이들이 태반이었다. 그런데 태봉이란 놈은 어찌나 잘 외우는지 기가 찰 노릇이었다. 키도 작고 이마가 약간 까진 듯한 그 놈의 머리속에 기계가 들었는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똘방 똘방 눈에 빛을 내며 생쥐같이 약삭빠른 행동으로 목에 기름을 친 듯 술술 외우고 들어가면 아이들은 모두 부러워서 어쩔 줄 몰랐다. 그런데 그 다음 내 차례가 되었다. 아이들의 시선에 압도되어 처음에는 막막했으나 차츰 정신을 가다듬고 더듬거리면서도 그 구절들을 다 외울 수 있었다. 그 결과 다행히 회초리를 피해갔다. 하기야 외우는 데는 전부터 소질이 있었다. 나는 늘 특이한 방법으로 암기를 했다. 꼭 책을 펴들고 방안이 따나갈 듯이 큰소리를 내며 외웠다. 마음속으로 웅얼거리거나 공책에 글씨를 반복해 쓰며 외우는 방법은 체질에 맞지 않았다. 책 읽는 소리가 얼마나 큰지 우리 집과 지척에 있는 큰집까지 소리가 들렸고 우리 집 뒤로 돌아간 샛길로도 소리가 넘쳐흘렀다. 어쩌다가 그 길을 따라 산이나 들러 가던 사람들은 책 읽는 나의 낭랑한 목소리를 듣고는 소문을 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어떤 때는 친구들한테 놀림감이 되었다. 책을 열심히 읽는 나 때문에 놀기 좋아하는 아이들은 부모님한테 혼난다는 것이었다. 어떤 때는 나 자신이 선비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선비처럼 책을 펴들고 낭랑한 목소리를 내는 모습이 선비를 닮았기 때문이었다. 아이들 앞에서 국민교욱헌장을 외운 것도 나의 독특한 암기 방법 때문인지 몰랐다. 그렇게 독특한 방법으로 공부하여 국민교육헌장을 다 외웠어도 교과서 앞장에 박혀있는 헌장을 보면 늘 가슴 한쪽에 서늘하게 다가왔다. 웬일인지 거들떠보기가 싫었다. 내용이 어렵고 글자 한자 한자 삭막해서 그런지는 몰랐지만 하여튼 내가 졸업할 때까지 국민교욱헌장은 내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초등학교 졸업을 한 이후로 깜깜할 정도로 그것을 잊고 지내다가 불현듯 생각이 떠올랐다. 세월이 흐를수록 더 답답해지는 정치판과 민생문제에 대해서도 별 뾰족한 해답을 내놓지 못하는 대통령 때문에 보다 더 강력한 대통령을 바라는 나의 염원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 강력한 대통령이 바로 박정희 같은 인물이었다. 박정희, 독재시대도 가고 민주화 시대가 들어선 지금 무슨 캐캐묵은 망발이냐 할지 모르지만 하여튼 박정희는 희망과 절망을 한 몸에 않고 총탄에 스러져간 사람이었다. 그 때, 그 암울한 시절에 자신의 정권을 더 공고히 하기 위해 오만가지 방법으로 국민의 눈과 귀를 틀어막았는데 그 중의 한 가지 방법이 바로 국민교육헌장이었다. 절대권력과 무조건적인 복종과 충성을 강요하는 내용으로 일제의 '교육칙어'(敎育勅語)를 그대로 본뜬 것이라는 비판에 직면해 있었던 교육헌장을 선생님이 왜 그렇게 외우라고 달달 볶았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지금 같아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통령의 담화나 글이 교과서에도 실리기도 만무하고 막강한 힘을 가진 전교조 때문에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멋모르고 그 교육헌장을 외운 나나 친구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머릿속에 지식이 가득하고 알건 다 아는 선생님이 왜 그렇게 했는지 궁금했다. 하기야 선생님도 어쩔 수 없을 것 같았다. 서슬퍼런 시절에 누가 대통령의 지시를 어긴단 말인가. 초등학교 때 두 눈 까집어가며 외우던 교육헌장이 지금에는 헌 신발짝보다 못한 처지가 되었는데도 그것을 강요한 담임선생님이 웬지 처량하게 다가오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이유가 있었다. 그 선생님이 마치 일제 시대 때 사람들을 모아놓고 황국신민서사를 외우게 한 장본인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는 상상만 떠올리면 그 담임선생님의 얼굴이 겹쳐 떠오르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러나 아쉽게도 선명한 얼굴이 아니다. 세월에 닳고 닳아 풍화가 된 얼굴처럼 생각날 듯 말 듯 환장하게 하는 그 얼굴, 돌아가셨는지 아니면 살아있다면 지금쯤 씁스레한 입맛을 다시고 있지는 않을지, 세월이 흘러가니 모든 게 추억이 되고 그리움이 된다. 한번쯤 만나보고 싶다. 왜 그렇게 아이들을 달달 볶았는지, 그렇게 안하면 안 될 이유라도 있었는지, 꼭 물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