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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도는 스님의 사리탑을 말한다. 효봉영각 옆 대나무 숲으로 300m 쯤 올라가면 율원(律院)으로 사용중인 부도암이 있다. 건물 편액은 부도전(浮屠殿)이며, 비전(碑殿)이라고도 한다. 담장을 사이에 두고 29기의 부도와 5기의 비(碑)가 있기 때문이다. 임진·정유왜란(1592~1598)과 병자호란(1636)때 큰 피해를 입은 뒤 폐허 속에서 1640년에 영산전(보물 303호)과 약사전(보물 302호)을 중건하는 등 큰 절의 복원에 힘을 기울이다가 |
1678년에 이르러 백암(柏庵性聰 1631-1700)스님의 원력으로 깨어진 비를 다시 새겨 16국사의 사적을 온전하게 전하니 곧 제1세 보조국사비(지방문화재 91호)와 송광사 사적비이다. 백암스님은 이 해에 이미 이곳에 건립되어 있던 부휴(浮休善修 I543~ 1615) ·벽암(碧巖覺性 1575~ 1660)·송계(松溪性玄 1640년 주지)·뇌정(雷靜應?) ·취미(翠微守初 I590~1668) 유영(柳影圖哲)스님의 부도를 아울러 수호할 암자를 창건토록 제자인 설명(雪明)스님에게 명하니 1689년에 완성하였다. 1776년 와월(臥月敎萍1750~1822)스님이 개강하고 묵암(?庵最訥1717~1790)·향운(香雲昌昊1893~1936)스님이 주석하였으며 1942년 석두(石頭寶澤 1882~1954)스님이 중수하였다. 1828년에 은적암에서 조성하여 부도전에 봉안한 신중탱화(금어 度鎰·壯愈)는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또한 백암·묵암스님의 비와 용운(龍雲處益 1813~1888)스님의 공덕비, 그리고 백암·무용(無用秀演 1651~ 1719)·영해(影海若坦 1668~1754)·풍암(楓巖世察 1688~1767)·묵암스님을 비롯하여 근래의 계룡(溪龍奎成 1913~1995)스님에 이르기까지 여러 스님의 부도가 계보에 따라 여법하게 배열되어있다. 잠깐 보조국사비와 사적비의 음기를 가만히 살펴보라. 1678년 당시의 시주자 중에는 다음과 같은 생소한 글자와 부르는 대로 부담없이 쓴 이름들이 있다. 李 金(이끗쇠)·姜氏 介·裵 金·李氏莫今(이씨막금)·鄭氏愛介(정씨애개!) ·趙¿g達(조작달)·趙介同(조개동)·金 同(김솔동)·車玉乭屎(차옥돌시)·宣淡沙里(선담사리) 德今伊(덕금이). |
![]() ![]() 부도암에서 발길을 계속 옮겨 보조암골 계곡 다리를 건너 북쪽으로 300m 가면 제6세 원감국사(圓鑑沖止 1226~1293)께서 창건하였다는 감로암에 오르게 된다. 담장으로 상·하대가 구분되었는데 하대의 2층 건물 관음전과 상대의 별당 요사가 모두 목조 건축물이 아니라서 부자연스럽다. 이는 6·25 때 소실된 것을 1971년과 1976년 2차에 걸쳐 진일심화(陳一心華)보살이 중건한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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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기록을 살펴보면 1775년부터 다음해까지 묵암스님이 주석했으며 1842년에 혁암(奕庵)·후원(厚源)스님 등이 영취루(暎翠樓)를 앞마당에 세웠다. 이어서 1879년에는 경원(敬圓)스님이 본채를, 1891년에는 용선(龍船)스님이 정문을 중수했고, 1920년에 성봉(性峰)스님이 동별당을 새로 세우기도 했다. 1935년에는 금당(錦堂在順 1899 ~1973)스님이 별당을 해체하여 큰 절 문수전 증축에 사용했다. 1892년에는 호붕(浩鵬振弘1863 ~ ?)스님이, 1925년에는 동운(東雲處機)스님이 주석하였다. 2층 관음전 난간에서 남쪽을 향해 서면 큰 절을 감싼 산 능선 연봉들이 연꽃잎을 이룬다. 천자암 뒷산인 대장봉과 제자(帝字)형의 조계봉이 유다르다. 텃밭 끝 학의 형국 머리부분에 원감국사비(1700년 다시 세움)가 동향으로 왼쪽을 보고 서 있다. 좌대 돌거북이 머리를 치켜들고 있다. 거북의 시선을 따라 가면 앞 고봉등이 가려지지만 바로 원감국사 부도와 연결된다. 원감국사는 수녕(遂寧, 현재 長興) 위(魏)씨로 19세 때 장원급제하여 10년간 외교관으로 봉직하면서 일본을 방문하기도 했다. 감로암이 한때 국제선원이었던 것도 이 인연의 한 줄기였을까. 29세에 득도(得度)하였고 5세 원오국사(圖悟天英 1215 ~1286)의 뒤를 이었다. 시문에도 능하여 어록 등이 전한다. 이 당시 동아시아는 미증유의 몽골제국 정복 전쟁으로 인한 수난의 시대였다. 원 세조(世祖 쿠빌라이칸 1215 ~1294)는 1273년에 다음해의 일본 정벌을 앞두고 전쟁물자 준비를 고려에 부담 시켰다. 이때 송광사의 사전(寺田)도 전비 충당에 편입되자 사찰 경영에 큰 어려움이 닥쳤다. 이에 원감국사는 원 세조에게 청전표(請田表)를 올려 완복(完復)시켰다. 1275년에는 원 세조의 초청을 마지못해 응하니 빈주(賓主)와 사부(師傅)의 예로 대하였다. 보물 제 1376호인 티베트문법지(Tibet文法旨)도 이와 관련된 유물로 전한다. 스님의 문집인 원감국사집(素星圭 역)을 보면, 백성의 곤궁함은 최악의 상태이며 스님들의 생활도 마찬가지여서 영남지방의 참상(1280년, 시제No.79)과 10년간 장맛을 보지 못한 절 살림(시제 No.92) 등의 시가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장흥군 부산면 구룡리 뒷산의 병풍바위 상부에는 국사의 상이라 구전되는 선각 묘사된 초상이 있고 장원봉(壯元峰)·거말봉(居末峰) 등도 남아 있다. 감로암 뒤쪽에 8세 자각국사(慈覺道英. 수선사 주 130I ~1308경)의 부도가 보인다. |
![]() ![]() 감로암을 감고 돌아 왼쪽 길로 300m쯤 올라가면 고개 위에 갈림길이 나타난다.
직진하여 산 허리를 타고 500m정도 나아가면 제7세 자정국사(慈靜一印, 수선사 주 1293~1301)께서 창건하여 얼마 전까지 자정암(慈靜庵)이라 불렀던 불일암에 도달한다. |
1891년에는 월화(月和)·계암(桂庵)·용선(龍船)스님이 정문을 중수하고. 1917년 설월(雪月龍燮 1868~1938)스님의 중수, 192l년 서월(瑞月奇文)스님의 서익실(西翼室)중건과 설월스님의 뒷방 수선 이후 6·25로 퇴락되었다가 1975년 법정(法頂)스님이 중건하면서「불일암」편액을 걸었고 1996년 본채 상부를 해체 중수했다. 1986년에 신축한 해우소도 1997년 해체 복원되었다 (감원 德祖). 지금의 본채 자리에는 칠성각이 있었고. 옛날 본채는 밭과 요사채 자리에 있었다. 주석했던 스님들의 면모를 보면 1845년부터 1853년까지는 기봉(奇峰藏旿 1776~1853)스님·1860년대의 연봉(蓮峰鳳麟 1833~1912)스님·1877년 경해(鏡海官一 1843~1928)스님 1879년 통허(洞虛致性1844~1901)스님· 1886년부터 다음 해까지 원해 (圖海鳳玉1850 ~1888)스님·1922년부터 1927년까지 경명(景溟泰敏 1858 ~?)스님·1925년 계암(桂庵應寬)스님. 1926년 연해(蓮海)스님·1929년 호붕스님을 찾을 수 있다. 1879년 열었던 만일회(萬日會)는 1882년 큰 절의 보제당(普濟堂)으로 옮겼다. 1835년에 본사 선원 구역인 상대의 칠전(七殿)에서 조성하여 봉안했던 후불탱화(금어 益贊)는 부도전에 이안되었다가 1995년 박물관으로 옮겼으며, 1867년에 그린 칠성탱화(금어 龍院奇衍 就善 妙英) 3폭은 본사 관음전에 이안된 후 역시 박물관으로 옮겼으며, 1879년의 지장탱화(금어 雲波就善·天禧·敏禹)도 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경내 북동쪽에 자정국사 부도가 있다. 뒷산 망수봉(望水峰·望需峰·望守峰·望峰)에 올라 사방을 조망하는 맛은 호령봉(號令峰)과 짝하리라. |
그 뒤부터 광원암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한다. 1712년 치순(致淳) 지익(智益)스님의 중수 및 회관(會觀) 망혜(望惠)스님의 단청(丹靑), 1771년에 출징(出澄) 치초(致初)스님의 공루(空樓) 중건, 1890년에 취암경은(翠巖景恩) 용선(龍船)스님의 중수, 1917년 용선· 원명(元明)스님의 남익실(南翼室) 중수, 1936년 향운(香雲) 월고(月皐) 스님이 체실(體室) 조실(祖室) 왕각(王閣)을 중수하였다 한다. 이곳에 주석했던 큰스님들은 부지기수라 자세히 쓰기가 번거롭다. 용암진수(龍巖桭秀) 응하학수(應夏學守) 호연(浩然) 서월(西月) 용연두문(龍淵斗文)스님 등등.... 암자의 바로 뒤에는 1234년에 입적한 진각국사의 사리(舍利)를 모신 부도(浮圖)인 원조탑(圓照塔)이 있다. 이 탑의 탑호(塔號)는 그 때 고려 고종(高宗)이 내렸고 이규보(李奎報)가 쓴 진각국사비명(眞覺國師碑銘)에는 그 위치를 ‘광원사(廣遠寺) 북록(北麓)’<광원암 뒤의 북쪽 언덕>이라 기록 되어 있다. [진각국사의 비는 전남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 월남사지(月南寺址)에 세웠는데, 지금은 파손되어 비신 하반부만 남아있다<보물313호>] 광원암 앞에는 작은 연못이 있는데 여름에는 수련(睡蓮)이 피어난다. 수초(水草)사이로 헤엄치는 물고기들을 바라보면 망중한(忙中閑)의 무아경(無我境)에 빠져든다. |
![]() ![]() 이곳은 1969년 송광사에 조계총림(曹溪叢林)이 개설되면서 방장(方丈)으로 주석하신 구산(九山秀蓮 1909~1983)스님의 다비장(茶毘葬)터에다 1991년에 세운 스님의 사리탑인 적광탑(寂光塔)과 비(碑). 그리고 이를 수호하고 향화를 올릴 탑전의 적광전과 요사채인 무상각(無上閣) 및 문간인 구산선문(九山禪門)을 포함한 구역을 말한다. |
이는 온갖 역경과 시련을 흘로 이겨내고 자수성가한 후 구산스님과 현호스님께 귀의했던 김무상각(金無上覺 1910 ~ 1995)보살의 단독 시주에 의한 것이다. 또한 옛적 신부도등(新浮屠嶝)이라 부르던 이곳에는 1800년대 초에 세운 6기의 탑과 효봉(曉峰學訥 1888 ~ 1966)스님의 사제인 향봉(香峰香訥 1901 ~1983)·화봉(華峰柳葉)·계봉(溪峰我無)스님의 부도가 줄지어 있다 |
천자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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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안녕하세요? 저도 같이 가고 싶어요~~~~~
반갑습니다. 잘 지내시지요? 추석 잘 보내시고 순례때 뵈요~
현재 7명 입니다.
저도 갈 수 있을까요? 같이 가고 싶어요~
예 가실수 있습니다.출발전에 연락주셔서 접선장소를 정하면 편리하겠지요?
저는 원호동에 살고 있는데~ 차는 어디서 출발하나요?
점심공양은 송광사에서 할예정입니다.
원호동분들은 농협마트앞에서 여섯시 사십오분에 타시면됩니다.
갑자기 취소하신분이 계셔서 자리가 남았습니다. 세분더 가실수있습니다 주위에 같이가실분 계시면 같이 가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