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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
세상 끝에 있다 해도 강운은 자신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그의 사부를
찾아낼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었지만 지금과 같이 전혀 그 기운을
탐지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의 사부의 존재가 이미 소멸되었거나 아니
면 차원을 이동해 간 것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강운은 전자의 경우는 꿈에서라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사부에 대한 믿음이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거라는 확신을 심어주고 있
기 때문이다.
한참동안 먼 동쪽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강운은 문득 누
군가가 자신을 향해 애처로운 시선을 보내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고
개를 돌려 홍의소녀를 바라보았다.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홍의 소녀는 백호의 기세에 완전히 제압당해
지금 강운을 향해 구원 요청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같아서는 강운에게 직접 도와달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세상이
무너진다 하더라도 그 알량한 자존심을 굽힐 수 없었기 때문에 결코
입으로는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홍의 소녀의 눈빛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충분히 알아들었지만
강운은 그녀를 도와줄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백호야! 이제 장난 그만하고 빨리 끝내. 나 추남형 만나러 가야 된단
말이야. ]
도와주기는커녕 오히려 백호를 더 부추기는 사악한 모습을 보이기 까
지 했으니 확실히 강운의 모습에서 그 사부에 그 제자라는 말을 떠올
릴 수 있었다.
[그럴까? 흠.. 그래! 잠깐만 기다려. 금방 끝내고 올게. 몇대 후려치면
기절하겠지 뭐.. 흐흐 ]
간절한 시선으로 강운을 쳐다보고 있던 홍의 소녀는 문득 백호가 움
직이려는 기미가 보이자 당황하여 등을 돌려 달아날 자세를 취했다.
[흥! 어딜! ]
막 등을 돌려 백호를 피해 전력으로 도망을 치려던 홍의 소녀는
갑자기 자신의 앞에 모습을 들어 내는 백호의 신형에 깜짝 놀라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10장이 넘게 떨어져 있는 거리를 몸을 돌리는 그 찰라의 짧을 시간동
안 건너 뛰어온 것이나 다름없으니 충분히 놀랄만한 일이었다.
하얀 이를 드러내며 넘어져 있는 자신에게 다가 오고 있는 백호를 두
려움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홍의 소녀가 두 손으로 땅을 짚으며
앉은 자세 그대로 뒤로 몸을 빼기 시작했다.
“오, 오지마! 이.. 이! “
지옥의 악귀의 형상이 저러할까.. 지금 홍의소녀의 눈에 비치는 백호
의 모습은 공포 그 자체였다.
“흑흑.. 오지 마! 오지 말란 말야! “
두 손으로 땅을 짚으며 놀라운 속도로 도망을 치던 홍의소녀가 결국
울음을 터트리자 오히려 당황하는 쪽은 백호였다.
[으잉? 저 인간계집 도대체 왜 우는 거지? 운아 왜 저래? ]
[나도 몰라. 음! 아무튼 그냥 있어봐. 내가 물어볼게. ]
지금껏 잠자코 지켜보기만 했던 강운이 걸음을 옮겨 홍의소녀에게로
다가갔다.
백호가 다가오던 것을 멈췄다는 걸 알아차린 홍의소녀는 도망가던 것을
멈추고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울고 있었다.
강운은 홍의소녀의 뒤에 도착해서는 그녀의 어깨를 톡톡 건드렸고
누군가의 손길이 닿자 홍의소녀는 경기를 일으키며 화들짝 놀라 고개
를 돌려 강운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등을 건드린 사람이 강운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홍의소녀는 안
심한 표정으로 눈물 콧물이 뒤범벅이 된 얼굴로 애원조의 눈길을 강
운에게 보냈다.
아직도 그 무시무시한 백호가 앞에 버티고 서 있었기에 강운의 도움
이 없이는 결코 이 자리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너 왜 울고 있어? “
‘네 똥강아지 때문이다’ 라는 말이 목 구멍까지 솟구쳐 나오는 홍의
소녀였지만 속으로 꾹꾹꾹 눌러 담아서 간신히 입이 열리는 것을 막
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본능적인 공포심에 울음을 터트렸었지만 강운이 나타남과
동시에 다시금 이성을 되 찾아가고 있던 홍의소녀는 눈물 콧물이
뒤범벅이 된 자신의 추한 몰골을 깨닫고는 황급히 강운으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홍의소녀는 번개 같은 속도로 다시 강운에게 고개를 돌려야만
했다. 그녀가 고개를 돌렸을 때 백호의 두 눈과 또 다시 마주쳤던
것이다.
좀 전의 무서운 살기가 느껴지는 눈빛은 아니었지만 홍의소녀는 이젠
백호의 하얀털만 봐도 공포심이 느껴질 정도로 크게 놀라 있었다.
“왜 울고 있냐니깐? “
“무, 무서워서.. “
얼떨결에 튀어나오는 대답에 그녀 자신이 먼저 놀라 손으로 입을 틀
어 막아 버렸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 누구한테도 무섭다는 말을 꺼낸 적이 없었던
그녀였는데 어이없게도 강운에게 그런 말을 하게 된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말실수에 대한 자괴감에 사로잡힌 홍의소녀가 고개를
푹 수그리고 또 다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녀 생전 가장 처참하게 자존심에 상처를 받은 일이 있다면 바로
지금 이 순간을 꼽을 것이 분명했다.
“무섭다고? 흠.. “
강운은 홍의소녀에게서 고개를 돌려 백호를 바라보았지만 결코 무섭
다거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았기에 고개를 갸우뚱 거릴 뿐이었다.
[백호야! 얘는 너가 무섭대! 이상하다. 귀엽기만 한데.. 헤헤! ]
귀엽다는 말에서 다리를 휘청거리던 백호는 감히 자신을 향해 제대로
된 눈길 한번 마주치지 못하고 겁먹고 있는 홍의소녀를 향해 만족스
러운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그렇지! 내가 누군데! 생각 같아서는 실컷 두들겨 패주려고 했
는데 이쯤에서 그만 둬야 겠구나. ‘
인간 세상에 나와서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자신이 위협적인 존재라는
것을 각인시켰다는 알 수 없는 뿌듯함(?)에 만족스러워 하던 백호는
강운을 향해 눈짓을 하고는 강운의 뒤로 돌아갔다.
‘치! 사고는 자기가 쳐놓고서 지금 나보고 뒷정리 하라는 거잖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즐거워 하고 있는 백호를 못마땅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강운이 홍의소녀의 등을 다시 톡톡 건드렸다.
“나 이제 그만 가봐야겠다. 백호는 내가 데리고 갈 테니까 너무 무서
워 하지 마! 참! 혹시 내가 저 건물에 들어가는 거에 대해서 불만 있으
면 얘기해봐. “
합격자 대기실을 가르키며 말을 하는 강운에게 홍의소녀는 감히 불만
이 있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강운은 무섭지 않더라도 그의 뒤를 졸랑졸랑 따라다니는 백호는 정말
다시 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불만이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응? “
얼어 있던 홍의소녀는 강운이 다시 물음을 던져오자 볼 것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러니까 불만이 없다는 거지? 그러면 나 이만 가볼게! “
홍의소녀로부터 등을 돌려 합격자 대기실을 향해 한참을 걸어가던
강운은 갑자기 뭔가 생각난 것이 있다는 듯이 고개를 돌려 아직도
얼어붙은 표정을 풀지 못하고 자신과 백호쪽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는
홍의소녀를 바라봤다.
“근데 이름이 뭐야? 난 강운이라고 해! “
강운은 비록 그녀의 성격이 제멋대로이고 행동이 조금 과격하다고는
하지만 그 심성 자체는 그리 나쁘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홍의소녀에
게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왠지 모르게 앞으로 그녀와 또 만날 일이 아주 빠른 시일 내에 일어날
것 같다는 이상한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그녀의 어리벙벙한 표정을 보건데 곧 바로 대답이 튀어나올 것 같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강운은 피식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려 대기실
을 향해 걸어갔다.
홍의소녀는 강운의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어서야 온전한
정신상태를 되찾을 수 있었다. 백호의 정신적인 공격은 그만큼 무서웠
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