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좋아서 오히려 믿어지지 않는 것들
흑백논리에서 기도로
우리는 이 선물에 관하여,
인간의 지혜가 가르쳐 준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가르쳐 주신 말로 이야기합니다.
1코린 2,13
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느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 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
로마 8,26
제3의 눈이라는 관념이 오늘 우리 문화와 경험으로는 낯선 것일 수 있겠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은 제3의 눈을 사용하고 있다. 주변을 둘러보라. 당신의 두 눈이 서로 다른 각도에서 보고 있지만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두 영상은 뇌에서 만나 하나의 영상으로 인식된다. 당신의 뇌가 서로 다른 각도에서 본 영상을 하나로 통일한 것이다. 눈을 통해서 새겨지는 두 영상을,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닌 또 다른 영상으로 만드는 제3의 눈이 당신 뇌에서 작용한 것이라는 얘기다. 이 생리적 현상이 이제부터 우리가 생각해 보려는 내용을 잘 보여준다.
고대 힌두교에서는 실제로 이마 한복판에 제3의 눈을 그렸다. '티카'라고 부르는 그 눈은 본디 새로 봄 또는 깨달음의 표시였는데, 차츰 변하여 요즘 우리가 보는 것처럼 여자들이 하는 화장化粧이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이 목걸이로 걸고 다니는 십자가와 비슷하다. 어쩌면, 오늘날 종교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두 가지 은유일지도 모르겠다.
거짓 딜레마
앞에서 말했듯이, 사람의 마음은 비교와 구분을 통해서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컴퓨터처럼 이원二元, binary 시스템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흑백논리에 따른 극단적 사유는 자기 삭제 시스템이다. 사람의 말이란 언제나 말하는 자의 처지에서 나오게 되어있고, 따라서 그것을 객관적이고 완전한 진실이라고는 할 수 없음을 우리도 알고 있다. 변호사나 판사들에게, 정직한 남편과 아내들에게 그렇지 않냐고 물어보라. 진실이 그토록 명백한 것이라면 무엇 때문에 대법원까지 가면서 시비를 가린 단 말인가? 게다가 대법원 판사들도 서로 견해가 다르지 않던가?
그런데도 보수 쪽이든 진보 쪽이든 상대를 패배시켜야 자기네가 승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경쟁의식을 부추기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진실은 언제나 한쪽이 다른 쪽에 대하여 말하는 것 이상인 무엇이다.
사람에게 이쪽 아니면 저쪽을 선택하도록 강요하는 일은, 선한 뜻을 품은 사람들한테서도 보게 되는 현상이다. 그것은 상대를 미워하거나 무시하는 특성이 있는데 우리는 그 실례를 예수의 적대자들에게서 본다. 그들은 물었다. "황제에게 조세를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루카 20,22 흑백논리에 따른 극단적 사유는 모든 미묘함과 참된 분별을 피하고 오히려 거짓 이분법을 만들어 낸다. 당신이 이원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 맞서 싸운다면 당신 또한 갈 데 없는 이원론자다. 이것이냐 저것 이냐, 너는 어느 쪽이냐고 윽박지르는 자들 앞에서 예수가 침묵 하거나 엉뚱한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아니면 거짓 딜레마의 틀을 갈아 끼우는 제3의 대안을 제시한 까닭이 여기 있다. 실로 예수는 수사학의 천재였다.
일찍이 투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모든 비폭력 교사가 이 지혜를 배웠다. 유명한 솔로몬의 지혜도 바로 그것이다.1 열왕 3,16-28 만일 그들이 이 지혜를 터득하지 못했다면, 간디, 마틴 루터 킹, 도로시 데이, 마더 데레사에게서 보는 비폭력을 행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마더 데레사가 이슬람교도나 힌두교도를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려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말을 콜카타의 수녀들한테서 직접 들었다. 마더 데레사는 항상 수녀들에게, 우리가 할 일은 예수에 대하여 말하거나 예수를 알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지금 우리는 바로 이 급진적 '정체성 이식'을 회피하고 있는 것 아닐까? 아니면, 이원적 사유가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우기는 것일까?
대안 의식
성숙한 종교는 여러 가지로 대안 의식을 말한다. 세상을 좀 더 넓게 보고 인생의 깊은 딜레마에 제대로 대처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의식이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빛을 가리키는 다양한 이름으로 부른다. 예를 들어 '깨달음'(힌두교, 불교, 요한복음)이라 하기도 하고,어떤 이는 그것을 '회심'(사도 9,18의 바오로 눈에서 비늘이 벗겨진 것 같은)이라고 불렀으며, 예수는 제대로 보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들에게 '구원' 루카 8,48; 17,19; 마르 7,28이라는 단어를 썼다. 또는 더 간단하게,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루카 10,28 라고도 했다.
나는 이 새로운 의식에 대한 예수의 은유가 '하느님 나라'였다는 짐 매리언의 견해에 동의한다. 그가 말한 것은 사후세계의 어떤 장소가 아니라 지금 보고 생각하는 새로운 방법이다. 하느님 나라는, 인간들의 왕국이 없고 민족공동체, 국경, 주민등록증 따위가 없는 '벌거벗은 지금'이다. 하지만 그것을 너무 많이 생각하지는 마라. 당신의 인생과 돈지갑을 바꿔버릴 테니까.
이는 구원 문제를 장차 있을 보상과 처벌 시스템에 종속시키는 일반적 구원관과 얼마나 다른가? 장차 있을 보상과 처벌에 연결되는 구원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는 예수의 말씀, 또는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2코린 6,2이라는 바오로의 말이 어떻게 다른가? 건강한 종교는 언제나 '지금' 무엇을 보고 깨달으라고, 그리하여 오늘 내 쪽에서 의식에 변화가 있도록 하라고 가르친다. 뒤에 주어질 상을 바라보며 영웅적인 의지력을 발휘하는 운동선수가 되라는 게 아니다.
기도는 울림이다
오랜 세월 동안 진리에 접근하는 방법이 서로 다를 때 가장 보편적으로 하는 말이 "기도해 봅시다"였다. 그러나 그 '기도'가 이른바 독실한 신자들의 남용과 오용으로 말미암아 사실상 죽은 단어가 되었으므로 여기에서 나는 다른 단어를 소개할까 한다. 아마도 당신은 이 말에서 기도의 의미를 새롭게 찾고, 그것이 우리가 써온 '관상'의 의미와 통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울림 resonance, 共鳴'이 그것이다. 기도는 실제로, 소리의 진동수를 측정 하는 소리굽쇠를 설치하는 것이다. 영성생활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언제나 거기 있는 메시지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자신을 조율하는 것이 전부다. 일단 조율하고 나면 그때부터 메시지를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얼마나 쓸모 있는 존재인지, 어느 집단에 속해있는지 따위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오직 안에서 울리는 소리와 그것을 듣는 우리의 상호관계가 있을 따름이다.마태 7,7-11 라디오 송신기는 언제나 가동 중이며, 변수는 오직 수신기에 있다.
기도는 하느님 또는 궁극의 실재Ultimate Reality와 연결되는 방편이다. 우리를 향한 그분의 뜻을 바꾸려는 시도가 아니다. 그런 시도는 세속주의자들이 즐겨 하는 것이고, 그들로서는 당연히 그럴 만하다. 하지만 기도는 본디 우리 마음을 바꾸어 무한·신비·용서 같은 것이 우리 안에서 되울릴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작은 마음으로는 저보다 큰 것을 볼 수 없다. 둘의 채널 또는 주파수가 다르기 때문이다. 큰 것은 큰마음이 알아본다. 도둑이 도둑을 알아보고, 천사가 천사를 알아보는 법이다. 그래서 우리는 채널을 돌려야 하고 돌릴 수 있다.
기도하지 않을 때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당신'의 제한된 관점으로 계산하고 비교하여 무엇을 아는 게 고작이다. 기도의 본질은 현실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보게 하는 것이다. 참된 기도는 자기 생각과 느낌을 옹호하고 키워서 결국 자기를 방어하는 대신, 온갖 두려움과 적의를 놓아버리고 '완전타자한테서 오는 안내를 기다리고 기대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당신 자신을 지금 여기에 '벌거벗은 채'로 내어놓고, 그로써 당신 안에서 눈을 든 연인이 우주의 한 분 연인을 만나게 되는 것이 기도다. 이제 당신은 기도하기 위해서 가슴, 머리, 눈에 큰 수술을 받아야 하는 까닭을 알게 되었다. 마태 5,23-26 이다.기도는 하느님을 바꾸자는 게 아니라 당신을 바꾸자는 것이다.
간단하게 말하여, 기도는 당신이 사사로이 하는 무엇이 아니라 당신에게 일어나는 무엇이다.로마 8,26-27 작은 나를 내세우기보다 큰 나를 모시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당신은 '오늘 내가 기도했다'가 아니라 '오늘 기도가 이루어졌고 거기 내가 있었다'라고 말하는 자신을 보게 될 것이다. 당신이 아는 것은, 당신이 이끌리고 안내받고 사랑받고 쓰임 받고 당신을 관통하여 기도가 흐른다는 사실, 그리하여 더 이상 당신이 운전석에 앉아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전부다. 그때 하느님은 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사물들처럼 당신이 눈여겨볼 하나의 대상이 아니라, 당신만의 "나인 나 lam'로 되신다. 바야흐로 당신은 당신 아닌 다른 이 안에서 그를 통하여 그와 함께 만물을 보기 시작한다. 당신의 작은 '나인 나 I Am'가 '우리인 우리 We Are'로 바뀌는 것이다. 부디 내 말을 믿어주기 바란다. 어쩌면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말을 지금 내가 하고 있다.
불가능하고 불가사의한 일들
이 경험을 나는 당신에게 말로 설명할 수 없다. 뭐라고 설명할 수 있다면 그건 양단을 아우르는 비이원적 경험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 일이 일어날 때 당신은 스스로 그것을 알게 될 것이다. 단, 일을 겪고 난 다음에! 그와 같은 깨달음이,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생각이 자신한테서 나오도록 허용한 다음에 당신은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바오로가 갈라티아서 2장 20절에서 "이제 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라고 시적으로 고백했듯이. 삶에서 중요한 것은 당신이 아니라. 당신이 그 삶을 열렬히 살아가는 것임을!
예수께서 여러 차례 "사람의 아들(당신의 인간성, your humanity) 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마태 17,9고 당부하신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흑백논리에 따른 양극단적 사유에서 기도로 옮겨가는 것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과 같다. 분리의 강 저편 언덕으로 건너간 뒤에야 당신은 자신이 다시 살아났음을 알게 된다. 아직 강을 건널 마음이 없는 사람은 그런 곳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조차 불가능하다. 그들은 당신이 무슨 뚱딴지같은 말을 한다고, 또는 엉터리 시를 쓰고 있다고, 기껏해야 당신이 자기네보다 훌륭하고 거룩한 척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그들의 반응에 아무 영향도 받지 않는다. 당신은 방금 분리의 강을 건녔고, 그것이 당신 스스로 이룬 일이 아니라 당신한테서 이루어진 일임을 알고 있다! 당신은 지금 머리털을 잡혀 다른 곳으로 훌쩍 옮겨진 예언자 하바쿡다니 14,36처럼 되었다.
양극단적 사유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놀라운 일이 참으로 많다. 우리 안에서 울리는 하느님 말씀에 공명하는 기도만이, 너무 좋아서 오히려 믿어지지 않는 일을 경험하고 믿게 할 것이다. 바야흐로 당신 앞에 펼쳐진 성경 갈피에서 수많은 구절이 꿈틀거리며 살아날 것이다. 이를테면,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1요한 3,2 같은 구절이다.
당신은 이미 하느님의 자녀다.
당신한테 있어야 할 것이 모두 갖추어져 있고
드디어 하느님의 신성이 당신 안에서 울리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도덕적으로 정신적으로
완벽하다는 말은 아니다.
천만의 말씀이다! 하지만
이제 당신은 당신의 결함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렇게 함으로써 더욱 성숙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바로 이것이 어제 당신과 오늘 당신의 가장 중요하고 큰 차이다!
당신은 궁금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지금까지 그게 그렇다고 가르쳐 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한 것일까? 어째서 이토록 중요한 진실이 세상에서,
특히 다른 데도 아닌 교회에서 알려지지 않있거나 잊힌 것일까?"
이 궁금증을 풀려면 '잃어버린 전통' 쪽으로 고개를 돌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