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산김씨(光山金氏) 안동시 풍천면(豊川面) 구담리(九潭里) 마을
◎ 봉화군 봉화읍 거촌리(巨村里) 마을-쌍벽당(雙碧堂), 김언구(金彦球) 문중
◎ 안동시 와룡면 가구리(佳邱里) 마을-유일재(惟一齋, 不遷位) 김언기(金彦璣) 문중
안동시 풍천면(豊川面) 구담리(九潭里)는 순천김씨(順天金氏)와 광산김씨(光山金氏)의 집성촌이다.
광산김씨(光山金氏)는 신라 왕자 김흥광(金興光)을 시조로 하고 17세손 밀직부사(密直副使) 김천리(金天利)의 아들 김무(金務)와 17세손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 김영리(金英利)의 6세손 담암(潭庵) 김용석(金用石, 1453∼?)을 입향조로 여말선초에 와룡면 오천리와 풍천면 구담리에 세거하기 시작한 씨족이다.
안동 지역에 실제로는 모두 3계열의 광산김씨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그 중 한 계열은 이미 위에서 본 것처럼, 안동 예안에 세거한 바 김천리의 차자 김무의 둘째아들 목청전직(穆淸殿直) 김숭지(金崇之) 후손 계열이요, 또 한 계열 역시 위에서 본바 김영리의 6세손 담암 김용석 후손 계열이다. 기타 또 한 계열이 있으니, 전게 밀직부사 김천리의 장자 평시서령(平市署令) 김탄지(金坦之, 예안파 선대 전직공 김숭지의 장형)의 후손 계열이 더 있다. 현재 평시서령의 주손(冑孫)들은 충남 서천(舒川)에 큰 규모의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안동 지역에는 전체 가호 수가 많지 않고 안동시 풍천면 신성리(申城里)에 집성촌을 이루어 있으며 안동 지역에 100여 호라 하지만 현재 신성리에는 그 가호수가 10여 호에 지나지 않아 지금까지 잘 드러나지 않았다.
광산김씨는 시조 김흥광의 후손들이 후대에 내려오면서 여러 계파로 분파되는데 안동 지방에 정착하게 되는 계파는 14세손 양간공(良簡公) 김연(金璉, 1215∼1292)의 증손 때에 다시 분파한 김광리(金光利), 김영리(金英利), 김성리(金成利), 김안리(金安利), 김천리(金天利) 다섯파 중에 둘째 김영리(判軍器監事公派)와 다섯째 김천리(密直副使公派)의 후손이다.
안동 예안 입향조 김무는 조선 초에 경기도 고양(高陽)에서 안동으로 이거하여 풍산 도양리(현 풍천면 도양리)에 거주하였고 증손 김효로(金孝盧, 1454∼1534) 때에 예안 오천리(현 와룡면 오천리)에 정착하였다. 한편 구담 입향조 김용석은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1498년 무오사화 때 진취의 뜻을 접고 처향인 구담촌(九潭村, 현 풍천면 구담리)으로 이거하여 정착하였다.
예안에 정착한 후 가세가 융성하여 김효로의 아들 운암(雲巖) 김연(金緣, 1487∼1544)은 1519년 문과에 급제하여 강원도관찰사에 오르고, 둘째 아들 탁청정(濯淸亭) 김유(金綏, 1481∼1552)는 생원시에 올랐다. 김연의 아들 후조당(後彫堂) 김부필(金富弼, 1516∼1577)은 학행이 높아 뒤에 문순(文純)을 시호로 받았으며 김부필의 동생 읍청정(揖淸亭) 김부의(金富儀, 1525∼1582) 또한 진사로 성리학에 밝았고, 김수의 아들 산남(山南) 김부인(金富仁, 1512∼1584), 양정당(養正堂) 김부신(金富信), 설월당(雪月堂) 김부륜(金富倫, 1531∼1598) 3형제가 모두 문명과 덕망을 떨쳐 정한강(鄭寒岡) 선생에 의해 오천리가 군자리(君子里)로 일컬어졌다.
김부의의 아들 근시재(近始齋) 김해(金垓, 1555∼1641)는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을 지냈으나 임진왜란 때 경상좌도 의병대장으로 용궁, 밀양, 경주 등지에서 활동하다 진중에서 죽었다. 김부륜의 아들 계암(溪巖) 김령(金坽, 1579∼1641)은 1612년 문과에 올라 사간원사간을 지냈고 40년간의 일기 『계암일록(溪巖日錄)』을 남겼다. 이들 외에도 김전(金㙉)과 북애(北厓) 김기(金圻) 형제, 김평(金坪), 병자호란에 창의한 김광계(金光繼)와 김광악(金光岳) 형제 등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그래서 세간에서는 그들의 세거지 외내를 군자가 많은 마을이라 하여 ‘군자리’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안동 풍천 구담마을의 담암 김용석 후손인 광산김씨 집성촌만을 대상으로 더 자세한 자세한 설명을 보태면 다음과 같다.
양간공(良簡公)의 손자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 김영리(金英利) 공의 장손(長孫)은 광성군(光城君) 김정(金鼎)의 아들로 대사헌(大司憲), 충정도관찰사(忠靑道觀察使)를 지낸 김약채(金若采)이다. 아들 넷을 두었는데, 장자는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김문(金問)으로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김철산(金鐵山)의 아버지이고, 좌의정(左議政) 김국광(金國光)의 조부이다. 차자는 김천(金闡)으로 무후하였고, 제3자는 총제공(摠制公) 김한(金閑), 제4자는 형조참의(刑曹參議)에 추증된 퇴촌공(退村公) 김열(金閱)이다. 그럼으로써 광산김씨 중 퇴촌공의 후손을 의정공파(議政公派)의 퇴촌공파(退村公派)라 칭한다. 퇴촌공의 증손에서 충목공(忠穆公) 김여석(金礪石), 정랑공(正郞公) 김이석(金以石), 진사(進士) 담암공(潭菴公) 김용석(金用石)이 났는데, 이들 중 담암공은 세상이 혼란하여 사화(士禍)의 징조를 보이자 초수(樵叟)처럼 세월을 보내고자 하여 서울 장안을 떠나 경상도 안동 땅 풍천(豊川) 구담(九潭)에 복거하게 되니 이로써 퇴촌공의 자손들 일부가 영남의 안동인으로 살게 되었다.
구담마을은 원래 순천김씨(順天金氏) 예조찬의(禮曹參議) 국담(菊潭) 김유온(金有溫)이 정착한 마을이었는데, 광김의 구담마을 입향조 담암공은 김유온의 손서(孫壻)였다. 아들 8형제를 두었는데, 맏아들 참봉(參奉) 김황(金篁)과 일곱째 아들 첨정(僉正) 지(篪)의 후손들이 외가(外家)인 순천김씨와 같은 동리에 기거하게 되었다.
그리고 둘째 아들 김균(金筠)은 봉화 거촌(巨村)을 세거지로 삼았다. 거촌(巨村) 마을은 담암공의 둘째 아들 습독관(習讀官) 김균이 터를 잡았는데, 그의 아들 쌍벽당(雙璧堂) 김언구(金彦球)는 중종조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학술과 덕행으로 성망이 높았으나 영달을 구하지 않았다. 그의 아들 잠계(潛溪) 김득려(金得礪)는 퇴계선생의 문인으로 생원이 되었고 친상(親喪) 삼 년을 시묘(侍墓)하였다. 잠계의 아들 김백웅(金伯熊)은 임진란에 의병장인 정제장(整齊將)으로 군공을 세웠으며, 이곳 거촌에 정착한 후 자손대대로 문장과 학행으로 추중된 분이 많아 봉화 거촌의 문호를 빛내었다. 쌍벽당의 건물은 건축 연대가 오래 되고 구조에 특이성이 있어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정화하여 수호하고 있다. 증손인 김석중(金錫重)은 학봉의 문인인 장경당(張敬堂)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당대의 명사들과 친교를 맺었다. 이토록 뛰어난 후손들이지만, 모두 선조의 유훈을 받들어 관직에는 진출하지 않았다. 이후 20대(代)를 내려오면서 많은 생원과 진사를 배출하였으나 대과는 없었다.
셋째 김시(竹+市)는 무과급제로 성주목사(星州牧使)를 지내고 그의 아들 김언진(金彦璡)과 김언수(金彦璲) 형제가 모두 생원과 진사였고, 언수의 손자 김여종(金汝宗)은 귀산첨사(龜山僉使)를 지냈는데 후손들이 대대로 성주 초전(草田)에 살고 있다.
넷째 진사 김주(金籌)는 안처정(安處貞)의 사위가 되어 안동시 와룡면(臥龍面) 가구리(佳邱里)에 복거하였다. 김주의 둘째아들 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璣, 1520∼1588)는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인으로서 후진 양성에 힘써서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으나 벼슬에는 뜻을 두지 말라는 김용석의 유훈을 지켜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며 산림처사로 은거하였는데, 불천위(不遷位)로 향사를 받고 있다. 그의 아들 갈봉(葛峯) 김득연(金得硏, 1555∼1637)과 김득의(金得礒), 현손 긍구당(肯構堂) 김세환(金世煥)은 세인의 추앙을 받은 학자들이다.
유일재공파(惟一齋公派)의 종택이 이곳에 자리잡고 있다. 이 마을은 또 그 형국이 밤송이가 벌어지는 모습으로 예로부터 마을에 밤나무가 많아 이름을 율리 혹은 밤실이라 하였다. 남향한 마을로 뒤에는 야산이 둘러 있으며 마을 앞에는 가구천이 흐른다.
유일재 김언기는 퇴계선생이 타계한 지 4년 후에 사림(士林)이 선생을 위해 여강서원(廬江書院→虎溪書院)을 짓고 유일재 선생을 초대 원장으로 추대하였는데 동문들과 더불어 원규(院規)를 제정하여 초간(草澗) 권문해(權文海)가 안동부사 재임시에 청원하여 서원을 국학으로 승격시켰으며 그 글의 내용이 천하의 명문으로 전한다. 문도 중에 승지(承旨) 신지제(申之悌), 참판(參判) 권태일(權泰一)은 현달한 분이요 지헌(芝軒) 정사성(鄭士誠), 비지(賁之) 남치리(南致利)는 후진 교육에 전념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1588년 3월 15일 공이 별세한 후 문인 참판 권태일이 스승의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 동문들에게 통문을 보내어 돈이나 곡식을 수습해 용산(龍山)의 선생 묘 아래에 보덕단(報德壇)을 쌓아 사림에서 받들어 온 지 삼백 수십 년에 이른다.
유일재고택(惟一齋古宅)이란 이름으로 전하는 종택은 口자형의 정침과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유일재 공의 9대손 도상(道常) 공이 거처를 이곳으로 옮기면서 이 집을 구입하였다고 전한다. 결국 구담, 봉화 거촌, 성주 초전, 안동 와룡 일대에 거주하는 광김은 모두 담암공을 파조(派祖)로 하는 같은 집안이다.
현재 구담리에 남아 전하는 광김의 문화재는 담암공유허비(潭菴公遺墟碑)와 추원사(追遠祠)가 있을 뿐 종택 중락당(中洛堂) 외에 둔정사(遯靖祠), 체락당(棣樂堂) 등 건물이 타인의 소유로 되어 있다.
광산김씨 예안파는 1970년 안동댐 공사로 오백 년 세거지가 수몰되어 옛 마을 뒷산에 새로 부지를 조성하여 군자리로 이름 붙이고 수몰지에 흩어져 있던 묘우, 종택, 누정 등 건축물들을 집단적으로 이건하여 문화재 단지를 조성하고 대대로 내려오던 고문서와 전적은 유물각인 숭원각(崇遠閣)을 지어 보존 관리하고 있다. 그러나 후손들은 안동, 서울 등지로 흩어져 나가고 오천리는 사실상 없어지게 되었다.
안동 예안 오천리 및 풍천 구담리 광산광씨 관련 유적 중 예안파의 각종 건축물을 이건하여 단지를 조성한 군자리에는 탁청정, 후조당, 탁청정 종가, 후조당 종택, 재사 및 사당, 침락정(枕洛亭), 설월당, 양정당, 낙운정(洛雲亭), 읍청정 등 고건축물과, 광산김씨 예안파 종가 21대 600년간에 걸쳐 전래된 고문서 1,000여 점과 전적 3,000여 책이 유물각에 보존되어 있다. 예안 입향조 김효로의 묘와 재사가 녹전면 죽송리에 있다. 구담파 입향조 김용석의 유허비(遺墟碑)가 풍천 구담리에 있고 유일재 고택(김언기)과 긍구당 고택(김세환)이 각각 와룡면 가구리와 와룡면 주계리(住鷄里)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