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고광덕의 멋진 인생...
얼마 전 고향에서 독창회를 하니 시간 있으면 놀러오라고 쪽지를 받았다.
그런데 웬일일까?
독창회는 고광덕이 하는데 내 가슴이 얼마나 콩닥거리는지...
청년으로 부활하는 그의 모습이 부러우면서 그날 그 자리에
꽃비가 내릴 것 같은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친구들도 많이 모시고 오고 꽃다발은 사양하고 저녁을 대접하겠다.
꽃다발을 안 사니 돈이 안 들어서 좋고 저녁까지 공짜로 얻어먹을 수 있다니 ..
그날 이후 아는 지인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런 멋진 일이 있으니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또 하나 앙콜곡으로 나의 노래<섬진강-오숙자 작곡>을 부르고 나도 소개할 테니
이쁘게 하고 오라고. ㅎ
맨 처음 고광덕은 회원문단에 올려진 나의 글에 댓글로 만났고
두 번째는 2006년 4월 ,마산영남 가곡부르기 행사를 했던 <소담수목원>에서였다.
광주가 고향이라며 반갑게 나를 찾아주던 기억이 새롭다.
세 번째 만남은 연암대학에 <한국예술가곡사랑회> 시연회 자리였는데
광주에서 같이 올라간 사람들과 각원사로 향하는 내 차 안에서였다.
그 때 제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고교시절 선생님이 성악을 한 번
해보라던 말이 오래도록 남아 가곡을 배우고 있노라고
드디어 독창회 날
광주에 살면서도 거의 방안퉁수나 다름없는 나는 처음으로 <드맹 아트 홀>을 찾아갔다.
입구에서부터 연주회 포스터가 곳곳에 나붙고 객석은 어느 새 거의 만석이 되고 있었다.
아주 세련된 남성 성우의 사회로 독창회는 시작되고
나는 그의 목소리의 음악성을 따지지 않았다.
지천명을 넘은 나이에 더구나 잘 나가는 직장에서 은퇴한 후에
시쳇말로 좌절하기 쉬운 시기에 보다 나은 미래로의 꿈을 펼치는 삶을
가족이나 친지 또 이웃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그 용기 있는 도전에
기립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그는 한 곡 한 곡 온갖 성의를 다해 정성껏 연주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목소리가 좀 잠기는가 싶었는데 후반부로 갈수록 목소리의 진가를 발휘하고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누가 감히 이 일에 도전하겠는가.
누가 감히 저렇게 잃어버린 젊음을 되찾을 수 있겠는가.
고광덕은 청년으로 피 끓는 청년으로 부활하고 있었다.
고광덕이 부활하는 자리에는 30년 지기 부인도 찬조출연으로
한국무용<화향>으로 봄날 꽃동산에 나비처럼 화사한 꽃처럼 부활하고 있었다.
15년 간 한국무용을 배웠다는데 전문 무용가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고
같이 간 친구들이 입이 마르게 찬사를 보냈다.
또 한 사람 고교 친구이자 대학 친구
그 분은 전남대학교 클래식기타 동아리회원으로 오랜 우정을 나누는 친구로
<알함브라의 궁전>과< 코윤바바>를 연주했는데
연주하는 손끝에 그 분의 음악이 온 몸에 녹아있음을 보았다.
학창시절 클래식 기타를 배운다고 <카르카시>교본을 열심히 연주하던
나의 학창시절이 파노라마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었다.
고광덕은 그날 사람들에게 젊음을 되찾아주고 멋진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동기 부여를 해주었다. 독창회는 아주 훌륭했다.
그가 가곡과는 담을 쌓고 지내는 더러는 가곡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많은 지인들에게 우리 가곡이 얼마나 아름다운 음악인지 알려주는 가곡전도사가
되는 시간이었다.
누구든 도전해 보라
안 되는 일이 없다.
흘러간 청춘을 되찾아 오자
우리 다시 청년으로 부활하자
그날 고광덕으로 인하여 참석자들의 가슴에 사랑의 꽃비가
생명의 단비가 하염없이 내림을 나는 보았다.
고광덕 님!
정말 훌륭했습니다.
당신은 정말 멋진 청년으로 부활했습니다.
축하합니다.
2007. 11. 19
광주에서 박원자 드림
※ 위의 글은 고광덕의 독창회를 보고 난 후 내 마음의 노래 자유게시판에 올린 글이다.
2008년 8월 고광덕과 나는 광주우리가곡부르기를 태동시키기 위해 장소를 물색하느라
이리저리 동분서주하며 다녔고, 마침내 광주우리가곡부르기를 탄생시키는데 일조를 했다.
몇 년이 흐르고 난 후 고광덕은 누구라도 좋아할 수 있는 관용의 덕을 갖춘 사람으로
한국예술가곡연주회 회장이 되어 2009년 7월에 나를 초청시인으로 초청하여
연주회원의 80%가 넘는 분들이 박원자 작시의 노래를 연주하는 무대를 마련해주기까지 해서 고마운 마음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있다.
한국예술가곡연주회 회장을 연임을 하면서 우리가곡애창운동에 크게 기여를 하고
이제 고향으로 내려와 곡성 강빛마을에서도 중창단을 만들어 우리가곡부르기를
이끌고 있으며 곡성의 여러 행사에서 누구보다도 앞장서 가곡을 부르고 있고
광주의 여러 단체와 서울을 비롯한 다른 지역에서도 우리가곡만 즐겨 연주하고 있다.
이제 고광덕은 노래와 한 몸이 되어버렸고 말 그대로 노래가 되어버렸다.
아니 우리 가곡이 되어버렸다.
첫댓글 멋쟁이 아재 ~^^
멋쟁이 아재 맞아요. ㅎ
와우!! 너무나 멋집니다
고광덕 샘!! 홧팅!!
박원자샘의 글도 훌륭합니다 아자아자!!
가곡을 사랑하는 고광덕 님의 활동이 모든 분들의 모델이 되길 빕니다.
가곡 사랑의 열정이 넘쳐나는 고광덕샘 정말 멋지십니다~!!! 노래가 되어버린 고광덕 샘의 멋진 인생을 멋진글로 어필 해주신 박원자샘 또한멋지십니다~!!!
우리 주변에 이렇게 노래를 사랑하는 분들이 많아 좋군요. 언니 또한 노래가 되어버린 분이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