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이 앰 댓 하권 7. 궁극의 상태 속에서는 절대적인 관조자가 나타난다.
문: 40년 전쯤에 크리슈나크르티는 오직 삶만이 있을 뿐이고 인생이라든가 개성에 관한 말은 진실의 입장에서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고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삶을 묘사하려는 시도도 하지 않고, 삶이란 묘사될 필요도 없고 그렇수도 없으며 완전히 체험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만약 체험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제거되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주요한 장애물은 시간이라는 우리들의 생각과 과거의 그늘 속에서 미래를 기대하는 데에 있다고 합니다. 과거 전체가 "내가 이랬다"라는 것으로 되고 미래에 대한 소망이" 내가 이렇게 될 것이다." 로 되면, 인생은 "이랬다." 에서" 이럴 것이다." 로 가는 끝없는 노력으로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를 놓치게 된다는 것이지요. 선생님께서는 "내가 있음"에 대해서 종종 말씀하시는데, 그것 역시 내가 무엇이었다거나 내가 어떠할 것이다라는 말처럼 일종의 환상이 아닙니까?
그렇지 않다면 다른 어떤 실제적인 것을 말하는 것입니까? 만약" 내가 있음' 이 환상이라면 어떻게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그것이 환상이라면 "내가 있음" 에서부터 자유롭다는 생각 자체가 있을 수 없는 말입니다.
" 내가 있음"에 관해서 무언가 실재하고 지속되는 것이 있습니까? 거듭된 기억이 새로운 기대를 낳듯이 내가 무엇이었다든가 무엇일 것이라든가 하는 시간에 따라 변해가는 것과 "내가 있음" 은 어떻게 다릅니까?
M: 현재의 "내가 있음" 이라는 것도 내가 무엇이었다 라든지 어떠한 것이다 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진실하지 않은 것이야. 그건 단지 마음속의 한 생각, 기억이 남긴 하나의 인상에 불과해. 그 생각이 낳은 독립된 실체는 없어.
이처럼 허위의 중심을 연구하는 습관은 없어져야만 해. "내가 본다" "내가 느낀다" "내가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이렇게 행한다." 라는 생각은 의식의 장에서 사라져야만 한다구. 허위의 것이 모두 사라진 후에 남는 것만이 참된 것이지.
문: 자아를 없애는데 대한 이런 거창한 이야기가 정말 필요합니까? 어떻게 자아가 그 자체를 없앨 수 있습니까? 과연 형이상학적인 곡예가 곡예사를 사라지게 할 수 있을까요? 결국에는 자신이 사라진 것을 자랑하면서 다시 나타나게 되지 않습니까?
M: "내가 있음"을 쫓아가서 그것을 죽일 필요는 없어. 또 그렇게 할 수도 없지. 자네에게 필요한 것은 진리에 대한 참된 갈망이야. 우리가 그것을 아트마 박티(At답a-bhakti), 즉 궁극에 대한 사랑 또는 모크샤-쌍칼파(답oksha-sankalpa) 즉 허위로부터의 자유에의 결심이라고 부른다네.
사랑과 그 사랑에 의해서 힘을 얻는 의지가 없다면 아무 일도 이루어지지 못해. 진리를 위해서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거기에 관한 말만 하는 것은 스스로를 패배시키는 거야. "내가 있음"을 말하는 자와 "내가 있음"을 바라보는 자 사이에는 사랑이 있어야 해.
관찰자, 즉 내적 자아를 보다 더 높은 자아라고 여기고 관찰되는 자아를 낮은 자아라고 여겨 멀리하며 경멸하고 저주하면 희망이 없어. 관찰자가 관찰되는 자아의 아상을 자신이 드러난 것으로 여길 때, 즉 아상을 본성 속으로 데리고 들어갈 때 "나"와 " 이것" 의 이원성이 없어지는 것이야.
이렇게 하여 이원성이 없어지고 외면과 내면이 하나가 되면서 궁극적 진리가 드러나게 되는 거야. 이렇듯 보는 자와 보이는 자의 합일은 보는 자가 보이는 자를 보는 자 자신의 의식으로 인식할 때 이루어지는 것이야. 보는 자는 보이는 것, 즉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주의를 기울이게 되는거지. 애정어린 자각이야말로 진리에 초점을 맞추는 핵심요소지.
문: 신지학파들과 심령학자들에 의하면 사람은 인성 개성 그리고 영성의 세 측면으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영성 너머에는 신성이 있으며 인생은 아주 일시적이어서 인간으로는 단 한번의 출생만 있을 뿐이랍니다.
그래서 인생은 몸이 태어나면서 시작되고 다음 몸이 태어나면서 영원히 끝난다고 합니다. 일단 끝나면 영원히 끝나버려서 몇몇 가지 달고 쓴 교훈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 합니다.
개성은 동물적 인간의 시절에 시작하여 충분히 인간적으로 되면서 끝납니다. 인성과 개성 사이의 갈등이 오늘날 인류의 특성입니다. 한편으로는 진선미를 그리고 개성과 다른 한편으로는 습관, 야망, 두려움, 탐욕, 폭력 등과의 사이에 추한 투쟁이 있는 것입니다.
영성의 면은 여전히 부재중에 있습니다. 영성은 이원성의 분위기 속에서 드러나지 않습니다. 제한적이긴 하지만 인성이 개성과 제 결합하여 참된 표현을 하게 될 때만 영성의 빛과 사랑과 아름다움이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선생님께서 가르치는 관찰자, 관찰 대상, 관찰의 토대라고 하는 것은 이런 견해들과 맞아떨어지는 것인가요?
M: 그렇지. 관찰자가 관찰 대상과 분리되어서는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관찰 대상이 관찰자를 자기 자신의 표현으로 볼 때에 비로소 관찰의 토대가 지니는 평화와 고요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야. 실제에 있어서 이 셋은 하나라네.
관찰대상과 관찰의 토대는 분리할 수 없고, 관찰자는 오대(五大)로 이루어져서 그것을 먹고 사는 육신에 기초한 , 감각하고 느끼고 생각하는 과정일세.
문: 관찰 대상과 관찰의 토대사이의 관계는 어떠한 것입니까?
M: 둘은 하나인데 어떻게 관계가 있을 수 있나? 분리와 관계에 관한 모든 말은" 내가 육체" 라는 생각의 왜곡적인 영향 때문이야. 외면의 자아는 내면의 자아의 육체적 마음에 비친 것일 뿐이고, 내면의 자아는 다시 모든 것이면서 그 어느 것도 아닌 궁극적인 대 자아의 표현이지.
문: 고차의 자아와 저급한 자아에 대해서 말을 하지 않는 스승들이 계십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겐 오직 낮은 자아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설법을 합니다. 부처님이나 그리스도께서도 더 고차원적인 자아에 관하여 언급한 일이 없습니다.
또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도 고차적인 자아에 대해 언급하는 일들에 대항해서 싸우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M: 하나의 몸 안에 어떻게 두 개의 자아가 있을 수 있는가? "내가 있음" 이라는 것은 하나일세. 높은"내가 있음" 도 낮은 "내가 있음" 도 없어. 온갖 종류의 마음의 상태가 자각에 주어지면 그것들과의 자기 동일시가 이루어진다네.
관찰의 대상들은 겉보기와는 다르고, 그 생각들이 받아들여지는 태도들은 마땅히 그래야 할 태도와 다른 것이야. 만약 자네가 부처라든지 예수 혹은 크리슈나무르티가 인간에게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건 자네의 오해일세.
그들은 내면의 자아에게, 오직 내면의 자아에게 말하는 것이라네. 그들은 내면의 자아에서 외면의 자아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인내하고 도와주며 외면의 자아에 책임을 느끼라고 말하는 것이야.
다시 말해서 외면의 자아를 완전히 자각하라는 것이지. 자각은 초월 상태로부터 나와서 내면의 자아에 가득한 것이야. 소위 외면의 자아는 우리가 자각하지 못하는 자신의 존재의 부분에 불과해.
모든 존재가 의식이 있기 때문에 의식이 있을 수는 있지만 자각을 하고 있지는 않아. 자각 속에 포함된 것은 내면의 자아가 되어서 내면에 참여하게 된다네. 달리 표현하면 육신이 외면의 자아를 결정하고 의식이 내면의 자아를 결정하고 순수한 자각 속에서 초월 상태와 만날 수 있는 것이지.
문: 선생님께서는 육신이 외면의 자아를 규정짓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선생님께는 육신이 있으니 외면의 자아도 있으신 건가요?
M: 만약 내가 육신에 집착해서 그것을 나 자신으로 여긴다면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
문: 하지만 선생님께서는 육신을 자각하고 있으시고 그 필요를 돌봐 주시지 않습니까?
M: 오히려 그 반대가 옳겠지. 육신이 나를 알고 나의 필요를 안다고 말이지. 하지만 그 둘이 모두 다 정말 그렇다고는 할 수 없어. 이 육신은 자네의 마음속에 비치는 것이지 내 마음속에는 아무것도 없다네.
문: 그러면 선생님께서는 육신이 있다는 것조차 통 의식이 안된다는 말씀이신가요?
M: 오히려 그 반대로 난 내게 육신이 없다는 걸 의식하고 있어.
문: 전 선생님이 담배 피우는걸 봅니다.
M: 바로 그래. 자넨 내가 담배 피우는 걸 보는데 어떻게 내가 담배를 피우는 걸 보게 되었는지를 스스로 발견해 보라구, 그리되면 이처럼 "나는 당신이 담배 피우는걸 본다" 라는 생각에 책임이 있는 것은 바로 "나는 육신이다." 라는 마음의 상태로 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거야.
문: 육신이 있고 저 자신이 있습니다. 저는 육신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과 별도로 전 무엇입니까?
M: 육신과 별도로는 나도 없고 세계도 없어. 육신과 나 세계 이 셋은 함께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일세. 그런데 그 뿌리에 있는 것이 "내가 있다" 라는 느낌이야. 그러니 그걸 넘어가게.
"난 육신이 아니다."라는 생각은 "난 육신이다."라고 하는 잘못된 생각의 해독제일 뿐일세. 그 "내가 있음" 이라는 게 도대체 뭔가? 만약 자네가 자신을 모른다면 자신을 알기 위해 힘쓰는 것 외에 무슨 할 일이 있겠나?
문: 선생님말씀에 따라서 제가 육신이 없다면 해탈도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납니다. 만약 "난 육신이 아니다" 라는 생각이 해탈을 가져온다면 육신이 있다는 사실은 필수불가결해지니까요.
M: 거의 맞다고 해야겠지. 육신이 없다면 "난 육신이 아니다" 라는 생각이 어떻게 나타날 수 있겠나? 그렇듯 "난 자유롭다" 라는 생각은 "난 속박되어있다" 라는 생각만큼이나 엉터리인 셈이야. 이 둘 모두가 공통된 "나는 어떠하다"라는 것을 찾아서 그걸 넘어서게나.
문: 모든 건 꿈일 뿐입니다.
M: 모든 건 말에 불과해. 그것들이 자네한테 무슨 소용인가? 자넨 말이야, 말로만 규정과 공식의 틀에 빠져 있어. 개념과 생각을 넘어가게나. 욕망과 생각의 침묵 속에서 진리가 발견되는 것이야.
문: 기억하지 않으려면 기억을 해야합니다. 이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M: 물론 그건 되지 않는 일이지. 그건 그냥 발생할 수밖에 없어. 그러나 그 필요성을 진실로 느끼게 될 때에 그 일이 발생하는 거야. 다시 말하게 되지만 진지함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열쇠지.
문: 제 마음의 뒤편에는 언제나 하나의 신음소리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허약한 생각들이 무수히 넘쳐흐르면서 잡음을 일으키는데, 형태 없는 구름처럼 언제나 저와 함께 있습니다. 선생님도 그러신가요? 선생님의 마음은 어떠십니까?
M: 마음이 없는 곳에서는 마음 한 구석이라는 것이 없어. 나는 모두가 다 앞이고 뒤가 없어. 오직 공(空)이 말하고 공만이 남아있어.
문: 남은 기억은 없습니까?
M: 과거의 즐거움과 고통의 기억은 전혀 남아 있지 않아. 매 순간은 항시 새로 태어나고 있어.
문: 기억이 없다면 의식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M: 물론 난 의식이 있고 완전히 자각하고 있어. 난 나무토막이 아니야. 의식과 의식의 내용을 구름에 비교해 보자구. 난 구름을 바로 보고 있는데 자넨 구름 속에 있는거야. 자넨 그 속에 빠져서 자기 손가락 끝도 거의 보지 못하고 있지만, 난 그 구름뿐만 아니라 푸른 하늘 그리고 태양, 달, 온갖 별들도 보고 있어.
그것은 우리들 둘 다에게 하나이지만 자네에겐 그것이 감옥인데 난한테는 편안한 휴식처지.
문: 선생님께서는 인상(人相)과 관찰자가 그리고 초월자 셋을 말씀하시는데 어느 것이 먼저 나타납니까?
M: 초월자 속에 관찰자가 있고 관찰자가 인간을 낳으며 자신이 인간과 다른 것으로 여기게 되지. 관찰자는 인간이 의식 속에 나타난 걸 보는데 이 인간은 다시 관찰자 속에 나타나지. 이런 근본적인 단일성을 깨닫는 것이 초월자의 작용이야.
그것은 관찰자의 뒷면에 있는 힘이고 모든 흐름의 근원이야. 만약 인간과 관찰자 사이의 단일성과 사랑 그리고 서로간의 도움이 없다면, 그리고 행위가 존재 및 앎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초월적인 상태를 접할 수가 없어.
초월자는 그러한 조화의 근원이자 열매이지. 내가 자네에게 말할 때에 난 빠져들진 않지만 애정 어린 상태에 속해 있다네. 이런 자각이 불을 밝힐 적에 그런 걸 근원적 상태라고 하는 거야. 그러나 근본적인 진리는 세상 너머에 , 그리고 되고, 있고, 있지도 않은, 세 가지 상태의 너머에 있는 것이야.
문: 제 마음이 다른 중요한 문제를 다루고 있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편하고 즐거운 상태에 머무를 수 있나요? 저는 집으로 돌아가면 여기서 배운 모든 걸 잊어버리고 다시 근심과 초조함에 싸여서 저의 본성을 한 순간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뭘까요?
M: 그건 자네가 미숙한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일세. 자넨 충분히 성숙하지 못해서 주의력이 없기 때문에 개발되지 않은 층들이 남아있어. 그냥 자네 속에 있는 잔인하고 원시적이며 불합리하고 불친절한, 한마디로 말해서 미숙한 온갖 일들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게.
그리되면 성숙하게 될 거야. 가슴과 마음의 성숙함이 꼭 필요해. 중요한 장애물 즉, 부주의함이나 무자각이 제거되면 그것은 노력없이 다가오지. 사람은 자각 속에서 크는 거라구.
간단하게 글 하나 덧붙이자면 답을 하는 니사르가다타 마하라지는 질문자를 의식으로 보고.. 의식으로써 답을 하고 있고, 질문자는 자기 자신을 육신과 마음을 자기자신으로 아는 동일시된 상태에서 질문을 하고 답을 듣고 있습니다. 이 차이를 명확하게 알기 전에는 '아이 앰 댓'의 내용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정확하게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글을 읽는 사람이 글의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신 자신을 형체 없는 깨달은 사람이라고 치고(당신이 깨달음에 대한 개념이 명확하지 않다고 해도) 읽어야 이해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깨달음에 대한 개념이 명확하지 않다고 해도 계속해서 글을 읽어나간다면 개념은 조금씩 수정될 것이고 결국에는 정확한 개념을 갖게 될 겁니다. 그리고 깨달음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갖게 되었을 때 책의 내용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될 겁니다. 그리고 그런 순간이 오면 세상 모든 경전의 내용을 궁리하지 않고도 무슨 말인지 정확하게 알 수 있게 될 것이고 그런 것을 일러서 해오解悟했다고 하며 이 상태에 이르면 남는 것은 수행을 해서 진짜 깨달은 사람이 되는 일만 남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