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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20세기초 결혼식 장면.
신랑이 10대 초반으로 어려보인다. 신부는 조용히 눈을 감고 있다. 조선시대 여인의 시집살이는 혹독했다. 사진 캘리포니아 디지털도서관.
조선시대 시집살이는 '벙어리 삼 년, 귀머거리 삼 년, 장님 삼 년'으로 대변될 만큼 혹독했다. 그렇더라도 대궐에서 금지옥엽으로 자란 왕의 딸들은 시집살이에서 자유롭지 않았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조선 후기 학자 심노숭(1762~1837)의 자서전 <자저실기>에 따르면, 효종의 다섯째 딸 숙정공주(1645~1668)는 동평위 정재륜(1648~1723)에게 시집갔다. 정재륜은 영의정 정태화(1602∼1673)의 아들이었다.
이 집안은 대대로 서울 남산자락의 회현동에 거주하면서 한 가문에서 1명도 나오기 힘든 정승을 무려 12명이나 배출해 동래 정 씨이면서도 특별히 '회동 정 씨'로 칭송받았다.
공주의 시아버지 정태화는 숙정공주를 다른 며느리들과 똑같이 대했다. 어느날 마루에 누운 정태화 곁에 공주가 무릎을 꿇고 앉아 머릿니를 잡아주고 있었다.
나인이 이 장면을 목격하고 입궐해 일러바치자 임금이 노해 "너무 심한것 아닌가, 너무 심해…"라고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잠시 뭔가 생각을 하더니 조금 지나서는 "이미 남의 집 며느리가 되었으니 어쩔 도리가 없다"고 체념해 버렸다.
부마의 삶도 탄탄하지는 않았다. 숙정공주는 아이를 낳지 못한 채 24세의 나이로 일찍 죽는다. 정재륜은 후손이 없다며 재혼을 허락해 달라고 상소를 올려 왕을 허락을 받아내지만 대간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평생 홀로 지냈다.
영조의 차녀 화순옹주(1720~1758)는 월성위 김한신(1720~1758)과 결혼했다. 화순옹주가 혼사를 치르고 시댁 사당에 예를 올리는데 시녀가 옆에서 부축하자 시아버지 김흥경(1677∼1750)이 예에 맞지 않는다며 이를 금지시켰다.
시녀가 "나이가 어리고 귀하신 몸이라 혼자 하지 못한다"고 했지만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옹주는 혼자 힘으로 절을 해야 했다.
김한신은 키가 크고 인물이 준수했으며 재주가 총명하고 글씨도 잘 썼지만 39세에 사망했다. 화순옹주는 남편이 죽자 곡기를 끊고 남편을 따라 죽고 만다. 영조는 화순옹주를 아꼈다.
화순옹주가 죽자 "정절을 있으나 효과 모자란다"며 슬퍼했다. 정조대에 그녀의 정절을 기려 열녀정문을 내려졌다. 화순옹주는 조선왕녀 중 유일한 열녀다.
고려 32대 우왕(1365~1389·재위 1374~1388)은 사냥과 주색에 빠져 헤어 나질 못했다. 정치는 그를 옹립한 이인임 일파에게 일임해 나라의 기강이 극도로 문란해졌고 이성계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는 데 빌미를 제공한다.
결국 우왕은 위화도 회군으로 반대파를 숙청한 이성계 일당에 의해 강제로 왕위에서 쫓겨난 뒤 유배지에서 피살된다. 우왕의 부인들은 그런 남편과는 많이 달랐다.
우왕의 제2비 영비는 고려 말 명장 최영의 딸이다. 영비는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아 대쪽 같은 성품을 지녔다. 유배지까지 남편을 따라갔으며 남편이 처형된 후에는 밤낮으로 곡을 하며 곁을 지켰다.
조선 성종 때 문신 이륙(1438~1498)의 <청파극담>에 그녀의 일화가 소개된다.
"신우(우왕)가 형을 당하자 영비가 몸을 날려 구하였다. 한 아전이 그녀의 옷자락을 잡고 물리치니 영비가 '늙은 종놈 따위가 어찌하여 손으로 나를 더럽히는가'라고 크게 꾸짖으며 옷자락을 찢어버리니 보는 자들이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고려 말 실권자였던 이인임의 족질녀(먼친척 조카)인 제1비 근비도 남편에 대한 의리를 끝까지 저버리지 않았다. 역시 <청파극담>의 내용이다.
"근비는 늙도록 개성 본가에 살았다. 병풍 한 폭의 살이 부러져 있어 계집종이 이를 고치려 하자 근비가 말하기를 '선왕(우왕)께서 친히 부러뜨리신 것이니 고쳐선 안 된다' 하였다. 기일을 맞을 때 마다 눈물을 흘리며 제사를 지냈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이런 일들을 전해 듣고 표창하기 위해 근비와 영비에게 각각 수신전(수절하는 미망인에게 내린 토지) 300결을 내렸다고 <청파극담>은 전하고 있다.
전쟁은 많은 여인에게 불행을 가져다줬다. 병자호란 뒤 청나라에 끌려갔다가 속환되어 돌아온 부녀자들을 '화냥녀(환향녀·還鄕女)'라고 손가락질 했다. 꿈에도 그리던 고국에 돌아왔지만 그녀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남편들의 배신이었다. 노론 강경파였던 김만중(1637~1692)도 <서포만필>에서 많은 선비들이 아내들을 내쫓은 세태를 두고 개탄해 마지않았다.
"옛날 사람들은 함께 삼년상을 지냈거나 돌아갈 곳이 없는 아내는 비록 죄가 있어도 내치지 않았다. … (중략) … 오랑캐에 포로로 끌려갔던 부녀자들이 비록 절개를 잃었더라도 음란한 여인과 비교하면 사정에 차이가 있다. … (중략) … 사대부들이 의리를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입장에만 유리한 계책을 세워 쓰니 이것은 사사로운 욕심이 지나친 것이다."
여성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지조를 잃어버린 것이지만 철저히 외면 당했던 것이다. 사회적 약자였던 여성이 죄를 지으면 어떤 처분을 받았을까. 남편을 죽인 사내를 흉기로 살해한 여인은 어땠을까. 결론적으로 정당방위가 인정됐다.
조선 후기 형사판례집 <심리록>에 따르면, 정조 17년(1793) 전북 부안에서는 박조이라는 여성이 최두일을 칼로 찔러 살해했다. 그녀의 남편 김계추가 최두일에게 맞아 앓다가 사망하자 최두일을 죽여 남편의 원수를 갚은 것이다. 요즘 형법에 의하면 그녀가 최두일을 죽인 것은 명백한 살인죄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녀는 무죄 방면됐다. 형조로부터 이 사건을 접한 정조는
"아내에게 지아비, 자녀에게 부모는 다 같은 삼강(三綱)인 바, 아비가 구타당하는 것을 보고서 자식이 그 사람을 구타하여 죽게 한 경우에는 형률을 감한다는 법조문에 분명한 근거가 있다"며 박조이를 방면하라고 판결했다.
아내의 강간범을 죽였을 때도 역시 살인죄가 성립되지 않는다. 전북 무주의 장우창은 정조 16년(1792) 자신의 아내가 배선봉에게 욕을 당한 사실을 알고서 그를 찾아가 마구 때렸다. 배선봉은 목뼈가 부러지고 뒤통수가 벗겨지는 중상을 입고 숨졌다.
사건을 조사한 관찰사는 "강간은 격분할 만하나 죽도록 때린 것은 의도적이었으니 강간이 이미 성립되었다고 하더라도 용서하기 어렵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나 정조는 "강간당했다는 말을 듣고 강간한 자를 죽이려는 분노가 폭발했으니, 혈기가 있다면 누구나 그러했을 것이다. 또한 그의 아내가 스스로 증명했고 그자는 변명의 말이 없으니 강간 현장에서 체포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라고 죄인을 두둔하면서 살인죄를 적용하지 않았다.
[출처] : 배한철 매일경제신문 기자 :<배한철의 역사의 더께> - 18.금지옥엽 조선 공주도 혹독한 시집살이 했다 [조선여인의 삶1] / 매일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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