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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사의 길>
나는 어릴 적부터 청소년기에 이르기까지는 주는 것보다 받는 것만이 익숙했고, 청년기에도 내 삶이 주는 것보다 받는 것에 익숙하다 보니 길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보내고, 마음의 집도 몸의 집도 잃은 채 거리를 떠돌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내게 다가와 조용히 말을 건넨 것은 거창한 말과 큰 돈이 아닌 한 사람의 손길이었다. 그 손은 차갑고 외로운 내 손을 꼭 잡아주며 말했다. “괜찮아요. 아직 시작할 수 있어요.”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누군가의 삶에 작은 불빛이 되는 일, 그게 나를 살릴 수 있다는 것을. 그 후, 봉사라는 이름으로 세상 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사랑의 손잡기 실천 본부에 있는 어르신 무료 급식소와 노숙자의 집에 따스한 손길로, 대구대학교 장애인 교실에서는 밝은 웃음을 배우며 함께 시간을 보냈다. 성당과 복지관의 청소 시간에도 단순히 걸레질만 한 것이 아닌 먼지 속에서 사람들의 하루를 맑게 닦아냈다.
밤이면 책상 앞에 앉아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졸린 눈을 비비며, “내 나이에 무슨 공부냐”는 소리를 뒤로한 채 한 장 또 한 장 책장을 넘겼다. 그 길 끝에서 사회복지사 1급, 청소년 지도사 1급과 2급, 청소년 상담사 2급과 임상 실리사 2급 자격증을 품에 안았을 때, 나는 비로소 ‘내가 걸어온 길이 헛되지 않았구나.’하고 웃을 수 있었다.
65세 정년을 맞이한 지금, 나는 다시 길 위에 서 있다. 이 길은 더 이상 나 혼자 걷는 길이 아니다. 손을 내미는 사람, 손을 잡아주는 사람 그리고 함께 걷는 사람들이 있다. 이제 나는 안다. 사회복지사의 길은 누군가를 돕는 길이 아니라, 서로의 삶을 지지하며, 함께 살아간다는 것을. 사람의 배려라는 것을. 그리고 그 길은 앞으로도 내 발걸음이 닿는 한 계속 이어질 것이다.
앞으로 사회복지사의 길은 웃음이 가득한 장애인과 지역 아동 아이들, 따스한 손길이 꼭 필요한 어르신들과 함께 내 발걸음이 나아가는 길이다.
<병이 주는 깨달음>
병을 앓게 되면 평소에 생각지 못했던 깨달음을 얻는다. 어떤 사람은 병이 나면 건강을 위해 운동을 열심히 해야겠다고 깨닫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지금껏 살아왔던 자신의 지난날을 되돌아보는 기회로 삼는다. 그래서 자신의 부족한 점이나 잘못한 점을 반성함으로써 지금과는 달리 살겠다고 자신에게 다짐한다. 병은 아픔과 고통을 주기도 하지만, 인생의 깨달음을 주는 기회가 되어주기도 한다. 법정 스님은 병을 통해 수행자보다 더 성숙한 수행자가 되어야겠다는 다짐과 함께 한 사람으로서 너그럽고 따뜻하고 친절하고 이해심 많은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겠다, 생각했다고 한다. 오랫동안 수행을 닦아 온 수행자이지만 병을 통해 얻은 인생의 깨달음을 글로써 들려주는 인생의 가르침이 피부에 와 닿는다. 그렇다. 병을 병으로만 보지 말자. 나는 인생의 큰 깨달음을 주는 ‘인생의 전환점’으로 삼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겠다.
<나의 기도>
주님, 제가 아프기 전에는 당신을 소홀히 하다가 이렇게 환자가 되어서야 열심히 당신을 부르는 제 모습이 비겁하고 부끄럽고 염치없어서 숨고 싶을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도 용서해 주시리라 믿고 더 열심히 당신을 부릅니다. 오직 당신께 매달릴 수밖에 없는 저의 나약하고 부서진 모습을 가엾이 여겨주시옵소서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두려움, 불안, 외로움, 우울함, 고독과 슬픔이 밤낮으로 저를 휘감을 때면 저 자신이 낯설고 세상과 가족과 이웃도 낯설고 그래서 힘이 듭니다.
하루가 시작되는 아침이 오면 또 하루를 어찌 견디나 힘겨워하고 하루를 마감하는 밤이 되면 잠을 설치며 또 다음 날을 걱정하는 어리석은 저에게 다시 감사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다시 기뻐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고 다시 기도할 수 있는 믿음을 주시고 저 자신을 받아들이는 인내를 주시옵소서. 저를 담당하는 의사와 간호사들을 단순한 마음으로 신뢰하고 저를 돌보아 주는 보호자인 가족과 간병인들에게 고마워하는 마음, 수고하는 마음을 잃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그래서 제가 아프기 전보다 더 겸손하게 사랑을 넓혀가는 성숙한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아멘 -
<마라톤 인생>
인생을 달리기에 비유한다면, 나는 마라톤을 떠올린다. 영화 ‘1947년 미국 보스톤 마라톤 대회에서 서윤복 선수가 월계관과 메달을 건 순간’이나 1992년 스페인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황영조 선수가 31km 지점에서 힘겹게 언덕을 오르막길에서 일본 선수를 제치고 끝내 땀방울로 금메달을 따냈던 순간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TV 화면 속에서 결승선을 힘차게 통과하던 그의 모습은 단순히 한 선수의 승리가 아니라, 국민 전체가 감동 속에 하나 되었고, 내 마음에도 도전의 불씨를 지퍼 주었다. 그날부터 마라톤은 내 삶의 길잡이가 되었다. 이어 2000년대에는 국민 마라토너 이봉주 선수의 끈기와 인내 그리고 지구력으로 질주를 보며 또 한 번 감동을 주었다. 그는 화려한 스타보다는 미국 도시 보스톤 마라톤에서도 이봉주 선수는 오랜 세월 국민 마라토너로 꾸준한 노력과 성실함의 상징이었다. 그의 레이스를 보면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모습으로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했고, 감동을 주었다. 그들의 땀방울은 단순한 달리기 운동이 아니라 인생의 도전과 희망을 상징하는 불빛이었다. 나 또한 ”포기하지 않으면 길이 열린다“ 는 믿음을 얻게 되었고, 내 인생의 어려운 고비마다 참고 견디는 힘을 얻었다. 2011년, 무덥고 무더운 여름.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는 나에게 특별한 경험이었다. 세계적인 선수들이 한자리에 모여 달리는 모습을 직접 지켜보며, 나 또한 직접 참석하여 그 뜨거운 현장을 몸소 느낄 수 있었다. 세계 각국 선수들의 숨 가쁜 질주와 함성 속에서, 나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힘을 보았다. 그날의 기억은 단순한 관람이 아니라 내 삶 속에 깊은 울림으로 남았다. 나는 해마다 대구 국제마라톤대회에 참가해 왔다. 출발선에서 느끼는 긴장, 오르막길에서 찾아오는 숨가쁨, 그리고 결승선을 통과하는 순간의 감격은 마치 내 인생의 여정을 닮았다. 인생 또한 마라톤처럼 굴곡지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고, 때로는 넘어지기도 하지만 다시 일어나 달리는 것이 마라톤이요 나의
인생이었다. 그 후로 나는 매년 대구 국제마라톤대회에 참가하면서도 영남클럽 회원으로서 동료들과 함께 달려왔다. 기록보다는 완주에 의미를 두며, 인생의 또 다른 목표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42.195km의 긴 여정은 내 삶과도 닮아있다. 고비가 오면 숨이 차고 포기하고 싶지만, 그 순간을 견디고 나면 다시 힘이 솟는다. 사회복지사로서의 봉사, 수많은 자격증 공부와 도전들, 모두가 나에게는 마라톤이었다. 마라톤이 내게 가르쳐 준 것은 단 하나, ‘끝까지 달려야 결승전을 만날 수 있다. 는 사실은 단순하지만 깊은 진리였다. 이제는 나이를 먹어 기록에 연연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 마라톤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내 인생의 결승선에 도착하는 그날까지, 나는 오늘도 한 걸음 더 내디딘다.
<색채는 빛의 고통이다!>
이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모든 색채가 빛의 고통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만약 빛이 고통이 있다면 바로 어둠이라고 생각했으나 빛의 고통은 오히려 아름다움이었다.
산과 바다가 산과 바다의 색깔을 내는 것이, 꽃과 노을이 꽃과 노을의 색깔을 내는 것이 모두 빛의 고통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저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빛깔이 빛에 의해 그저 당연히 주어지는 것이라고만 생각했지. 그 아름다운 색채를 내기 위해 빛이 그토록 고통스러웠을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빛은 우리에게 아름다운 빛깔들을 주기 위해 그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고통은 어떤 의미를 찾는 순간부터 더 이상 고통이 아닐 수 있다. 나의 고통이 누군가에게 위안이 될 때, 나의 고통이 누군가에게 사랑이 되고 존재의 의미가 될 때 그것은 오히려 감사이자 행복일 수 있다.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하지만 어쩌면 그것을 받아들임으로써 이겨내는 일들로 가득 차 있을 수 있다. 고통은 피할 수 없지만 고통을 받는 것은 어쩌면 인내를 이겨내는 힘을 기를 수 있다.
「저는 자신의 고통에 대해 그런 믿음을 지니고자 한다. 고통은 푸른 들판을 달리기 위해 통과해야 할 어두운 터널 속이며, 그 터널 속은 언젠가는 벗어날 것이라는 희망을 준다. 고통받을 때 오히려 하느님께 의지하며 내가 아직 살아 있어 맛볼 수 있는 증거이다.
이 세상 모든 만물이 빛의 고통이 없으면 제 색깔을 낼 수 없고, 만물이 색채를 지닌다는 것은 바로 고통의 빛이었다는 증거이다.
<고통과 선물>
사람의 고통은 긴 터널 속을 지나는 절망이지만
자연의 고통은 어둠을 뚫고 나오는 아름다움의 색채이다.
만물의 빛깔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으뜸의 선물이요
사람의 빛깔은 인간이 누리는 최상의 선물이다.
<나의 신앙의 힘>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하느님은 오늘이란 새로운 날에 나를 통해 새로운 일을 행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고하고 세례를 받아 구원을 얻게 되었다. 중년이 넘어 인생 밑바닥에 떨어져서 인생이 끝이라 할 때 찾아와 내 인생의 상처와 고통을 다 기억하셨다가 때가 차매 갑절의 기쁨과 행복으로 갚아 주셨다. 하느님은 자기를 찾는 자에게 모든 악을 복으로 바꿔주겠고 약속하셨다. 그때부터 먼저 내 생각을 바꿔 하느님이 인생(나 자신)을 바꿔주신다는 확신을 믿고, 복음을 믿게 되었다. 하느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매일 아침 하느님의 은혜를 기대하고 믿음으로 성장했다.
내 과거 실수와 상처에 머물지 않고 하느님이 베푸신 은혜를 사모하며 때로는 삶에 시련과 고통, 어려움이 찾아올 때마다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고 사모하여 하느님의 종이 될 것을 선포했다.
다윗의 시 23편을 자주 낭독하고 묵상하며 하느님 은혜를 사모하면 내 모든 상처, 근심, 고통, 어려움이 물러갔다. 다윗은 하느님의 은혜가 시련 속에 찾아오는 것을 알았기에 절대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은혜의 꽃을 피웠다.
[시편 23장 1절에서부터 6절 말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부어 내 머리에 부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욥기 10장 2절 말씀]
생명과 은혜를 내게 주시고 나를 보살피심으로 내 영을 지키셨나이다.
욥은 견디기 힘든 시련을 여러 번 겪으면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하느님의 은혜로 괴로움과 상처 그리고 고통이 곧 기쁨으로 바뀌었다. 자신의 죄와 실수를 고백하면서 계속 하느님의 은혜를 믿고 날마다 선포하며 감사했다. 그 결과 성경에서 가장 시련이 많은 사람인 욥은 누구보다 하느님의 은혜를 넘치게 체험하며 훌륭한 삶을 살았다.
하느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치를 잘 알고 계신다. 그리고 하느님은 내 인생 후반기가 전반기보다 더 나아지기를 바라시며, 하느님을 찾는 자에게 책임을 지시며 믿음으로 바라보는 자와 항상 동행하신다.
그리고 하느님은 우리 안에 새로운 일을 행하시길 원하신다. 그래서 내 믿음으로 될 것이며, 우리 자신의 좁은 생각 속에 하느님을 가두지 말고 보다 앞으로 이루고 싶은 자신 이미지를 마음에 품고 간직하면 믿음대로 될 줄 믿어야 한다.
사람의 능력을 보지 말고 하느님의 능력을 보면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느님은 하실 수 있느리라“고 성서에 나와 있다.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하느님의 눈(시각)으로 자신을 보고 크고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하느님을 신뢰하고 말씀에 순종하며 오늘도 하느님이 주신 삶을 기쁘게 누리며 행복을 선택하여 베푸는 남은 생애를 살고 싶다.
내 인생 전환기는 예수님을 만난 것이다. 믿음으로 주님을 닮아가며 나를 부인하고 자신보다 하느님께서 맡긴 사명을 다해 나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예수 그리스도 증인으로 살고 싶다.
♪나의 인생을 처음 변화시킨 찬송가 305장♪
1절.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을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2절.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3절.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4절.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 하리라. 내게 말한다. 하루 한 번, 하느님 앞에서 자신에게 말한다. 〃주 안에서 열심히 살아줘서 고맙습니다. 옛날의 자아, 자존심 버려서 감사합니다.〃 라고. ♡ 살 롬 <내 허기를 달래 준 고마운 나무> “헤이, 기브 미 썸 쪼꼴레뜨!(= Hey, give me some chocolate!)” 그게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열심히 미군 지프차 뒤를 따라다니며 소리쳤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어떤 전쟁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지만 그것은 불과 사십 년 전 나 같은 꼬마들의 일상이었다. 수백 미터를 숨이 턱까지 차도록 기쁘게 쫓아간 뒤에야 얻을 수 있었던 껌과 초콜릿은 두고두고 아껴 먹어야 할 최고의 먹거리였고, 먹고 난 뒤에 남는 빤질빤질한 포장지는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놀잇감이었다. 특히 츄잉껌의 겉 포장지는 유달리 질기고 감촉이 좋았는데, 그걸로 딱지를 만들어 갖고 있으면 아이들이 내 말 한마디에 껌벅 죽곤 했다. 그리고 또 하나, 그렇게 먹을 것 얻는 재미도 쏠쏠했지만, 그보다 더한 아이들 소원은 지프차를 한번 타 보는 거였다. 매일 보는 거라곤 소달구지와 수레뿐이던 아이들에게 부르릉 하며 빠르게 내달리는 지프차는 신기함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미군 부대에서 나온 간식거리들이 어린 나에겐 얼마나 참기 어려운 유혹이었던지. 행여 끼니라도 거른 날이면 장롱 위에 숨겨진 쵸콜릿 봉지가 유난히 눈에 들어오곤 했다. 사실 지금에야 추억이라 말하겠지만 어린 나이에 배고픔은 무척이나 참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하얀 쌀밥 한 그릇 먹으면 원이 업겠다던 그 시절, 애 어른 할 것 없이 매해 봄이 되면 기도하는 심정으로 한 해 농사를 점쳐 보곤 했다. 그때 사람들을 불러 모으던 나무가 바로 이팝나무다. 서구 국채보상로라면 어디서든 볼 수 있었던 이 나무는 무리 지어 피는 꽃 모양새가 꼭 밥공기에 수북이 담겨 있는 쌀밥을 닮아서 예전에는 ’이밥나무‘라고 불렀단다. 멀리서 보면 꼭 하얀 밥 덩어리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것 같다고 할까. 그래서 예로부터 ’이팝나무 꽃‘이 풍성하게 피면 그해 농사도 풍년이라고 했다. ’이팝나무에 꽃이 많이 피면 배가 고프지 않겠구나.‘ 나는 지금도 이팝나무를 보면 꽃이 예쁘다는 느낌보다 어린 시절 애틋한 기억들이 한 움큼씩 솟아오른다. 슬펐지만 행복하였고, 따뜻했던 어린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가슴을 적신다. <안녕, 소중한 사람들아!> 사랑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행복한 순간이 있었습니다. 즐거운 기억이 있었습니다. 고마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대견한 모습이 있었습니다. 함께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소중함을 마주합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지 못하고 지나치곤 하죠. 많은 소중함을 그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싶습니다. 내 마음속 가장 단단한 곳에 새기고 싶습니다. 그럴 수 있다면, 어떤 고난에도 굳건히 버텨 낼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소중한 시간을 쌓아 가는 것이 아닐까요. 떠난 이들과 인연이 닿은 이들과 여전히 나의 곁에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안녕, 소중한 사람들이여! <진정한 위로에 대하여> 진정한 위로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한때는 위로란 쓰러진 상대를 일으켜 주는 것이라 믿었다. 조금은 듣기 힘들지라도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말을 전하고자 했고, 조금 더 삶을 당당하게 마주할 수 있는 강인함을 전하고자 노력했다. 그런데 누군가는 자신도 누구보다 강한 모습으로 세상을 마주하고 싶은데, 누구보다 떳떳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싶은데, 그게 잘되지 않는다. 라고.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뜻대로 되지 않기에, 그런 말들이 아프게 다가올 때가 있다고. 이젠 알수 있다. 일어설 힘조차 없는 사람에게 일어서는 방법을 전해 주는 것만이 사람을 위하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주저앉아 울고 싶은 사람에게 울지 않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만이 진정한 위로가 아니라는 것을, 아픔을 극복하고 있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내일의 행복이 아닌, 현재를 견뎌 낼 힘 것을. 오늘을 온전히 살아낸 사람에게 내일의 희망이 있다는 것을 말이죠. 진정 상대를 위로하는 것은 다양한 지식이나 뛰어난 말솜씨가 아닌, 상대를 향한 진심 어린 마음일 것이다. 누군가의 마음에 ’진심‘이라는 온기를 불어넣을 수 있을 때, 나의 마음이 그 사람에게 위로라는 이름으로 가닿을 수 있을 때. 소중한 사람을 견딜 수 없는 아픔으로부터 지켜낼 수 있을 때. 내일을 밝혀주기보다는 오늘을 함께 살아내는 사람이 되고 싶다. 훈계하거나 가르치려 들지 말고 가만히 기다려 주는 것도 위로다. 그가 잠시 웃으면 같이 웃어주고 대책 없이 울면 같이 울어주는 것도 위로다. 위로의 방법 아픈 사람 앞에서 아픈 얘긴 너무 많이 하지 말자, 좋은 약 좋은 음식 죽음 준비에 대한 말도 너무 많이는 말고 그냥 정도에 맞게 말해 주자. 문병을 와서 정 할 말이 없으면 약간 어색해도 미소 지으려 애쓰며 그냥 가만히 있는 것도 위로의 좋은 방법인 것 같다. <사랑으로> 자신에게 절대로 해선 안 되는 행동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동정하는 것이다. 자신의 상황이 다른 사람에 비하면 좋지 않고, 노력에 비해 나타나는 결과가 크지 않더라도, 그래서 좌절하고, 무너지더라도 결코 자신을 동정해 서는 안된다. 동정은 스스로 일어날 힘을 앗아간다. 자신의 삶을 불행하게 바라보는 것은 자신이 계속해서 그 자리에 머무를 것이라 단정 짓는 것과 같다. 스스로 아픔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 그로 인해 쏟아지는 눈물을 참지 않는 것, 그 정도면 충분하다. 자신은 동정해야 할 존재가 아니다. 자신은 불쌍하게 여겨야 할 존재가 아니다. 자신은 사랑해야 할 존재다. 꼭 명심하자. 진정 누군가를 일으키는 것은 동정이 아닌, 사랑이다. ♥ 해바라기의 - “ 사랑으로 ”노래가 있다.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할 일이 또 하나 있지 바람 부는 벌판에 서 있어도 나는 외롭지 않아 그러나 솔잎 하나 떨어지면 눈물 따라 흐르고 우리 타는 가슴 가슴마다 햇살은 다시 떠오르네. 아, 영원히 변치 않은 우리들의 사랑으로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밝혀 주리라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이며, 70.80년대 가장 유명하고 불렀던 노래다. 사람의 삶은 사랑이다. 사랑은 아름답고 소중하고 멋진 것이다. 사랑의 색깔과 모양은 사랑하는 사람마다 각각 다르다. 사람은 사랑을 찾아 만나기를 원한다. 사랑을 떠나서 살 수 없다. 사랑 속에 태어나서 사랑 속에 자라난다. 그래서 사람은 참사랑과 진실한 사랑을 원한다. 극심한 고통 속에서 사람을 살리는 사랑은 가장 위대한 인간 사랑이다. 성경 말씀에 고린도전서 13장을 인용하면 “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나’라는 존재 > 주변을 둘러보면 사회적 위치에 따라 스스로 바라보는 시선도 함께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 퇴사 후 자신감을 잃어가는 사람, 남들이 알아주는 직장에 들어가지 못한 자신을 끊임없이 비관하는 사람, 비싼 차나 집이 없어서, 다른 사람보다 높이 올라가지 못해서 나 또한 자신도 모르게 위치만으로 자신의 가치를 판단하곤 한다. 사람은 끊임없이 욕망하는 동물이기에 자신의 상황에 쉽게 만족하지 못한다. ‘나’라는 존재는 소중하다. 그 자체만으로도 소중하다. 나의 주인을 내 바깥에서 찾지 마라. 자신을 삶의 중심에 두는 것, 이것이 바로 나의 주인으로 사는 길이다. 나의 주인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다. 일일삼성(一日三省)이란 말이 있다. 하루에 세 번씩 자신을 돌아보라는 말이다. 공자의 제자인 증자는 자기반성을 잘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나는 날마다 다른 사람을 위해 계획하고 정성을 다했는가, 친구와 사귀면서 믿음을 잃지 않았는가, 스승에게 배운 것을 익히지 못했는가를 살피는 일에 힘쓴다”고 말했다. 그가 훌륭한 학자가 된 데에는 자기반성에서 오는 성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무엇을 살펴야 할까. 우리는 증자처럼 할 수 없어도 자신이 오늘 하루 어떤 삶을 살았는가는 충분히 살필 수 있다. 오늘 잘한 일은무엇이며, 잘못한 일은 무엇인가를 살핌으로써 잘한 것은 더 잘할 수 있게 , 잘못한 일은 깊이 반성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잘못되지 않고 바르게 해야 한다. 하지만 자신을 살피지 않거나 게을리한다면 지금보다 더 나은 자신으로 살아갈 기회를 잃게 된다. 자신을 살피는 일은 곧 자신을 위한 참 길을 찾는 일이다. [자신을 살피는 일에 힘쓰는 자는 자신을 다이아몬드가 되게 하고, 그렇지 않은 자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살아가게 된다.] <마음 비우기> 마음을 비우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지금 당장’이라는 단어를 지우는 것이다. 내 인생의 절반은 억울함과 외로움으로 채워져 있었다. 한때 내 마음은 상처로 가득했다. 어린 시절 부모의 따스한 손길이 그리웠고, 가난과 외로움에서 늘 남과 나를 비교하여 살았다. ‘억울함, 분노, 슬픔.’이라는 단어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가슴속 깊은 곳, 씻기지 않는 감정의 찌꺼기들이 있었다. 35세가 넘어서야 나는 진심으로 ‘내가 왜 이렇게 힘들게 살았을까? 하고 되묻게 되었다. 그 답은 뜻밖에도 ’봉사‘라는 조용한 실천 속에서 찾아왔다. 그것은 사랑의 실천 본부로 운영된 노인무료급식소, 근로자의집 쉼터, 복지관, 지역아동센터 등 자원봉사자로 있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말없이 묵묵히 일하는 나를 보고 ’참 부지런하신 분‘이라 말했지만, 사실 나는 마음을 비우기 위해 나를 비우기 위해 일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 교회에서 들었던 강론 하나가 내 마음을 뒤흔들었다. ”마음을 비워야 하느님이 채워 준다.“ 라는 그 말이 가슴속 깊이 박혔다. 나는 그날 이후로 하나씩 마음을 비우는 연습을 시작했다. 그것은 걷기 명상, 클래식 음악, 작은 봉사활동, 낡은 물건 정리, 그리고 일기 쓰기였다. 나는 공원이나 산책 걷는 동안 내 마음에 쌓였던 미움도, 슬픔도, 외로움도, 걱정도, 함께 걷어냈고, 봉사할 때마다 ’누군가에게 위로를 줄 수 있겠구나‘ 하는 걸 깨달았다. 지금은 나는 말할 수 있다. ”비우니 비로소 내가 보였다.“ 마음을 비우는 일은 나를 잃은 게 아니라, 진짜 나를 다시 찾는 과정이었고, 더 소중한 걸 채우는 일이란 걸 알았다. <나의 모든 고향> 오랜만에 만난 죽마고우에게 물었다. ‘나’란 존재가 네게 어떤 의미냐고 말이다. 그 친구는 단 두 글자로 답했다. “고향.” 친구의 과분한 말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 깊은 생각에 잠겼다. ‘고향 이란 어떤 의미일까?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곳, 언제든지 찾아와 편히 쉴 수 있는 곳, 오고 가는 이야기 속에 사랑이 숨 쉬는 곳, 변치 않는 따뜻함이 머무르는 곳. 그러나 진정한 친구란 많은 것 바라지 않고 언제나 그 자리에서 기다려 주어 그저 서로의 고향이 되어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게 해 주는 사람. 삶에 지쳐 돌아왔을 때 언제든지 양팔을 벌려 반겨 줄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닐까?. 나는 누군가의 고향일 수 있을까?, 어떤 상황에도 소중한 사람을 감싸줄 그런 사람일 수 있을까?. 그토록 따뜻한 마음을 언제까지나 변함없이 품을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의 모든 고향 친구한테는 쑥스럽지만, 전해야 할 것 같다. 고향을 향하여 언제나 내 곁에 머물러 주어 감사하다. < 세 가지 마음 > 사랑엔 세 가지 형태가 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 타인을 향한 사랑의 마음, 타인이 내게 주는 사랑의 마음이 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은 나를 아끼고 나를 챙기고 나를 위한 사랑하는 마음이다. 타인을 향한 사랑의 마음은 남을 배려하고 남에게 주고 남을 위한 사랑의 마음이다. 타인이 내게 주는 사랑의 마음은 다른 사람에 대한 자비하고 다른 사람의 은혜이고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마음이다. 그것은 먼저, 나를 아끼고 나를 챙기고 나를 위한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남을 도울 수 있는 마음이 생긴다, 남을 배려하고 남을 위한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타인을 향해 사랑을 실천하는 마음이 생긴다, 남을 향한 사랑은 자비와 은혜, 용서하는 마음이 무조건적 사랑이어야 하는 마음이 아닐까. 아무리 가난해도 마음이 있는 한 나눌 마음이 있다. 근원적인 마음을 나눌 때 물질적인 것은 자연히 그림자처럼 따라온다. 마음을 나눈다는 것은 참 아름답고 행복한 일이다. 그것은 사랑을 나누는 일이며 자신의 마음을 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물질이 없다고 해도 마음을 나눌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자신은 물론 상대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마음을 나누는 삶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과 타인을 향한 사랑의 마음 그리고 타인이 내게 주는 사랑의 마음을 사랑 안에서 서로서로 나누는 삶이 아닐까? < 마음을 나누는 사람이 많을수록 따뜻한 사회이며 자신의 마음을 나누는 일에 기쁨으로 동참하라> “ 이 세상의 참다운 행복은 남에게서 받은 마음의 사랑이 아니라 내가 남에게 주는 마음의 사랑이다. 그것이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인간에게 있어 가장 아름다운 행동이기 때문이다.”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 우리는 살아가며 몇 번의 사랑을 경험하고 그만큼의 상처를 마음에 새긴다. 그리고 저마다의 방식으로 상처를 치유한다. 나는 한동안 마음이 긴 겨울에 갇혀 살았다. 삶의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았고, 외로움은 깊게 뿌리내렸다. 그러나 그 고독이 나를 쓰러뜨리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나를 치유하는 길을 찾게 만들어 주었다. 처음으로 봉사활동을 시작했을 때, 나는 남을 돕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 자신을 돕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사랑의 손잡기 실천 본부에서의 근로자의 집과 어르신 무료 급식소에서 자원봉사자 선생님과 함께 어르신들에게 손을 잡아주던 순간, 지역아동센터에서 밝은 웃음을 잃지 않은 아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던 순간, 복지관에서 어르신들 위해 공부를 가르치던 순간, 대구대학교 장애인 교실에서 아이들의 서툰 인사 속에서 나는 조금씩 치유되고 있었다. 자원봉사는 나를 세상과 다시 연결을 잇게 해 주었다. 남의 아픔을 바라보는 일은 내 아픔을 객관적으로 보게 하고, 덜어내게 했다. 밤이면 검정고시와 대학수학능력시험 공부를 했었고, 낯선 교정 속에서 사회복지상담학을 배웠다. 계명문화대학교에서의 학사학위 과정과 전공 심화 과정을 거쳐 배우는 시간은 그저 학문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상처를 상담해 주거나 사람을 이해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었다. 사회복지사 1급, 청소년 지도사 1급과 2급, 청소년 상담사와 임상 심리상담사 2급 자격증은 단순한 종이가 아니라 내가 나를 다시 세운 증거였다. 퇴직 후, 비원노인복지관과 서구노인복지관에서 인문학 수업에 참여했다. 그곳에서 철학, 시, 자서전, 음악, 역사 속에서 다시 ’나‘ 라는 사람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졌다. 양광모 시인의 <인생 예찬>을 읽으며 내 인생의 빛과 그림자를 함께 껴안게 되었다. 이제 나는 안다. 나는 봉사자로, 사회복지사로, 그리고 한 사람의 배우는 자로서 끝까지 사람 곁에 서 있을 것이다. 상처는 감추어야 할 흉터가 아니라, 다른 이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상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프란치스코 교황 - ‘희망’ 자서전 중> 65세 정년을 맞고 새로운 삶을 준비하던 어느 날, 우연히 ‘프란치스코 교황의 희망’이라는 자서전을 읽게 되었다. 그분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말 세 마디가 있다. 그것은 “고마워요”“미안해요”“이래도 될까요?”이다. 우리의 삶을 평화롭고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열쇠다. 그분의 ‘희망’은 어떤 의미로 되어 있을까? 교황은 희망은 절망의 끝자락에서 피어난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은 나의 지난 삶, 특히 보육원 시절부터 외롭게 견뎌온 시간과 맞닿아 있었다. 고단한 삶 속에서도 끝까지 사랑과 겸손을 잃지 않았던 그분의 이야기는 내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때로는 포기하고 싶고, 쓰러지고 싶고, 자신을 버리고 싶을 때가 있었을 것이며, 삶의 막장에서 고통과 절망으로 울부짖을 때가 있을 것이다. 막장이 더 내려갈 수 없는 곳임을 알게 되는 순간, 남는 것은 희망뿐임을 깨닫는다. 가난 속에서도 사람에 대한 신뢰를 놓지 않았던 교황의 삶은 내가 자원봉사와 공부로 삶을 바꾸어 온 지난날을 돌아보게 했다. 나 또한 작지만, 누군가에게 따뜻함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희망은 신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다. 반짝이는 별을 보고 싶다면 어두운 밤하늘을 봐라. 그때 별만 찾지 말고 절망 속에서도 피어나는 희망을 찾아라. 희망은 늘 괴로움의 언덕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다. 지금의 고통이 언젠가는 사라지리라는 희망, 누군가 어둠 속에서 손을 뻗어주리라는 희망, 내일은 네게 빛과 생명이 주어지리라는 희망, 그런 희망이 있어야 그대의 투혼도 빛난다. 희망은 고통을 극복하게 하고 삶을 변화시킨다. 희망은 삶의 근거이고 원천이다. 희망은 세상을 계속 움직이게 하는 정신적 엔진이다. 희망은 마음에 꽃을 피우고 삶을 지배한다. 희망은 하늘에서 저절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군가를 안겨 줄 때 피어난다는 것을 배웠다. 인간은 끊임없이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존재다. 희망을 품고 도전하여 인생의 승자가 되어라. 이제 남은 삶, 나의 작은 손길이 누군가의 희망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