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감찰
제목 : 사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성경 : 욥7:11~21
찬송 : 438장
저자 : 이삼규 목사
출처 : 20220220
욥 7:11 그런즉 내가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 내 영혼의 아픔 때문에 말하며 내 마음의 괴로움 때문에 불평하리이다
욥 7:12 내가 바다니이까 바다 괴물이니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나를 지키시나이까
욥 7:13 혹시 내가 말하기를 내 잠자리가 나를 위로하고 내 침상이 내 수심을 풀리라 할 때에
욥 7:14 주께서 꿈으로 나를 놀라게 하시고 환상으로 나를 두렵게 하시나이다
욥 7:15 이러므로 내 마음이 뼈를 깎는 고통을 겪느니 차라리 숨이 막히는 것과 죽는 것을 택하리이다
욥 7:16 내가 생명을 싫어하고 영원히 살기를 원하지 아니하오니 나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 것이니이다
욥 7:17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크게 만드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욥 7:18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순간마다 단련하시나이까
욥 7:19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내가 침을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욥 7:20 사람을 감찰하시는 이여 내가 범죄하였던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이까 어찌하여 나를 당신의 과녁으로 삼으셔서 내게 무거운 짐이 되게 하셨나이까
욥 7:21 주께서 어찌하여 내 허물을 사하여 주지 아니하시며 내 죄악을 제거하여 버리지 아니하시나이까 내가 이제 흙에 누우리니 주께서 나를 애써 찾으실지라도 내가 남아 있지 아니하리이다
영국 작가 ‘프랜시스 톰슨 (Francis Thompson)’은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며 외로운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기대에 어긋나게 신부도 되지 못하고 의사도 되지도 못하고 군인도 되지도 못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옥스퍼드에서 수학하기를 원했지만 프랜시스는 마약에 빠져 런던의 빈민굴에서 살았습니다. 그런 중에도 그는 자신을 계속하여 추적해 오시는 주님을 느꼈습니다. 주님의 추적에서 벗어나 보려고 발버둥을 치다가 결국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게 되고, 그의 인생은 극적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천국의 사냥개' (Hound of Heaven)라는 기념비적인 시를 썼습니다.
시가 상당히 길기에 그 의미를 살리는 선에서 압축하여 소개합니다.
나는 그에게서 도망쳤네, 밤에도 낮에도.
나는 그에게서 도망쳤네, 수많은 세월 동안을,
나는 그에게서 도망쳤네, 내 마음 속의 미궁 같은 길로
슬픔 속에서도 그를 피해 숨었다네.
겉으로는 계속 웃었고 한 때 희망에 부풀어 오르기도 했었지만
이내 두려움의 골짜기 아래 거대한 어둠 속으로 곤두박질쳐 버렸네.
나를 따라오는, 추적해오는 그 힘찬 발소리
그러나 서두르지 않고 흐트러지지 않는 걸음걸이,
장엄한 긴박함으로, 한 목소리가 두드린다. 발소리 보다 더 긴박하게-
“네가 나를 배반하기에, 모든 것이 너를 배반한다.”
“가여워라, 너는 알지 못하는도다. 나 아니면, 오직 나 아니면 비천한 너를 누가 사랑해 주겠느냐?”
“내가 네게서 너의 모든 것을 가져감은 너를 해롭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네가 그 모든 것을 내 품에서 찾게 하려 함이었다. 네가 어린 아이같은 생각으로 잃어버렸다 여긴 모든 것을 나는 내 집에 쌓아 두었노라.”
“일어나라. 내 손을 꼭 잡고 가자!”
내 곁에서 멈추네, 그 발자국 소리.
“아, 어리석고, 눈멀고, 연약한 자여, 내가 바로 네가 찾는 자이니라!”
여러분은 '천국의 사냥개'라는 시가 여러분의 이야기라는 느낌을 받지 않으십니까?
예수님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던 한 여인을 만나시기 위해 사마리아의 한 우물가로 찾아가셨으며, 절망하고 탄식 가운데 있던 38년 된 병자를 만나기 위해 베데스다 연못으로 나가셨습니다. 폭풍을 뚫고 거라사의 광인을 찾아 가셨습니다. 심지어 이미 죽어서 썩어가는 자를 살리기 위해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을 추적하셨습니다. 마치 우리의 상처와 절망과 죽음의 냄새를 맡고 쉼 없이 목표물을 향해 달리는 사냥개처럼 주님은 그분의 백성을 추적하셨고 결국 그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사명의 자리를 벗어나 다시스로 가던 요나를 찾아내셨고 결국은 니느웨로 가게 하셨으며,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에게 주님은 찾아 오셔서 사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찾아 오셨고, 그렇게 계속 우리를 이끌어 가십니다.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원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우리 삶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때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의미가 감시와 억압같이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욥은 고난 속에서 자기를 감시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있다고 한탄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하신다는 것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동행하시며 보호하시는 하나님
욥은 하나님이 주신 시련으로 인해 잠조차 잘 수 없다고 불평합니다.
√욥 7:14 주께서 꿈으로 나를 놀라게 하시고 환상으로 나를 두렵게 하시나이다
잠을 잘못자는 것은 몹시 사람을 힘들게 합니다. 불면증으로 시달리는 분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욥이 그러했습니다. 꿈으로 놀라게 하시고 환상으로 두렵게 하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더 살고 싶지 않다고 토로합니다.
√욥 7:15 이러므로 내 마음이 뼈를 깎는 고통을 겪느니 차라리 숨이 막히는 것과 죽는 것을 택하리이다
그는 ‘뼈’라는 단어로 그의 심정을 나타냅니다. ‘뼈’로 번역된 히브리어 ‘에쳄’에는 ‘존재, 자아, 삶’이란 의미도 있습니다. 뼈에는 골수가 흐르는데 그곳에서 피가 생성되며, 피는 생명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뼈를 깎는 고통’은 생명의 존재가 사라지고 삶이 끊어지는 ‘죽음의 고통’을 대변합니다.
한편 ‘숨막히다’라는 히브리어 동사 ‘마하나크’는 ‘교살함, 질식시키다’는 의미가 있는데 누군가에게 목이 졸려 교살당하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즉, 이 표현은 불행한 삶을 마감하고자 하는 욥의 의지를 생생하게 드러낸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욥의 묵상은 16절에서 더 강렬해집니다.
√욥 7:16 내가 생명을 싫어하고 영원히 살기를 원하지 아니하오니 나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 것이니이다
‘싫어하고’의 원어적 의미는 ‘거절하다, 경멸하다, 내가 지긋지긋하게 싫어하다’란 뜻입니다. 이어지는 ‘영원히 살기를 원하지 아니하오니’란 표현은 자신이 이 땅에서 영원히 살 수 없는 존재임을 토로하며 죽음에 대한 강한 열망을 드러낸 것입니다. 결국 욥은 생명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나를 놓으소서”라며 극단적인 기도를 드립니다. 이러한 탄원을 통해 그가 얼마나 견디기 힘든 고난을 당하고 있으며, 또 그로 인해 얼마나 낙심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극단에 내몰리면 죽음을 묵상하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욥은 극심한 고난 속에서 아주 솔직하게 기도합니다. 고난으로 인해 입을 절제하지 못하고 영혼의 아픔 때문에 마음의 괴로움을 불평할 수밖에 없다고 고백합니다.
√욥 7:11 그런즉 내가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 내 영혼의 아픔 때문에 말하며 내 마음의 괴로움 때문에 불평하리이다
욥의 고백은 불평과 원망을 넘어 자기 생명을 포기하는 지경까지 이릅니다. 이처럼 부정적인 말의 권세는 우리의 영혼을 지배하고 결국 죄의 결과인 사망을 선포하게 만듭니다. 욥이 불평하다 못해 죽음을 선포하게 된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요? 본문에는 ‘나’라는 말이 27회 등장하며, 7장 전체에서는 39회나 사용되고 있습니다. 아무리 욥이 의인이라 할지라도 자아가 살아나는 순간 죄의 본성을 절제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나’를 내려놓고 ‘하나님’을 선포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연약함과 한계를 인정해야 합니다.
바울의 고백을 들어봅시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살아 있으면 안 됩니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셔야 합니다. 성도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나’를 죽이고 ‘주’를 선포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욥은 하나님을 감찰하시는 분으로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감찰하신다는 것은 우리와 동행하시며 우리를 보살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누군가의 돌봄과 보살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마치 부모가 자녀를 보살피듯이 우리 삶에 개입하셔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고 우리를 악에서 보호해 주십니다.
시편 저자는 이렇게 우리를 감찰하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는 사람이 무엇이기에 하늘처럼 높으신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시느냐고 감격하며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감찰하셔서 위험에서 건지시고 살려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해 공중의 나는 새를 먹이시고 들의 풀 한 포기도 자상하게 입히시는 좋은 아버지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최고의 행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형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갔던 요셉은 그를 감찰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어디에 있든지 형통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자신과 동행하시고 형통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했기 때문에 형들을 용서하고 품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참된 복은 나의 형편과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아시고 살피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만들어진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에 관한 영화로 기독교 영화 중에 가장 잘 만들어진 것으로 손꼽힙니다. 주인공인 제임스 카비젤이 골고다 언덕으로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는 장면에서 갑자기 벼락이 쳤습니다. 제임스의 머리카락에 불이 붙고 그가 뒹굴며 기절을 했습니다. 그는 의식을 잃었고 사방은 고요한데 어두운 기운이 그를 덮쳤습니다. 그때 “너, 죽어”라고 말하는 사탄의 음성이 들려왔스니다.
제임스는 누워 있는 채로 사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으니 죽으면 바로 천국으로 들어간다. 그러니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다. 그런데 네가 할 수 있는 게 고작 이것이 다냐?”
이렇게 사탄은 아무 때나 불쑥 나타나 “너, 죽어”라고 말을 던집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낚시바늘을 물고 죽어 버립니다. 우리는 “고작 이게 전부냐?”하고 제임스처럼 주님의 손을 ‘꽉’ 붙잡아야 합니다.
완벽하신 예수님이 우리를 붙잡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에서 떨어지지 않습니다. 주님은 실수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손을 놓치지 않으십니다.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시37:2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과 동행하심을 믿습니까? 하나님이 동행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보호가 우리 가운데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동행하시며 감시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감찰하시는 눈은 따뜻한 보호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감찰’(나차르)은 ‘지키다, 보호하다, 망보다’라는 의미입니다. 욥은 하나님의 눈이 무섭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가 느끼기에 하나님은 자신을 돌보시는 것이 아니라 감시하시고 징계하시기 위해 감찰하신다고 하소연합니다. 욥은 자신을 시험하시기 위해 찾아오셔서 감시하듯 보시는 하나님을 피할 수 없다고 탄식합니다.
성경에서 ‘감찰하시는 하나님’은 보통은 긍정적 문맥에 사용됩니다. 이 호칭을 통해 모세는 광야에서 방황하는 백성을 보호하시고 지키시는 하나님을 증거했습니다.
√신 32:10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다윗은 악인의 음모에서 숨겨 주시는 하나님을 증거했습니다.
√시 64:2 주는 악을 꾀하는 자들의 음모에서 나를 숨겨 주시고 악을 행하는 자들의 소동에서 나를 감추어 주소서
그러나 욥은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부정적 의미로 사용합니다.
하나님을 마치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도록 자신을 끊임없이 감독하시고 감시하시는 분으로 묘사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욥은 하나님이 자신을 화살의 과녁으로 삼으셨다고 호소합니다.
√욥 7:20 사람을 감찰하시는 이여 내가 범죄하였던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이까 어찌하여 나를 당신의 과녁으로 삼으셔서 내게 무거운 짐이 되게 하셨나이까
‘과녁’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프가’는 ‘방패, 표적, 장애물, 걸림돌’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마치 궁사가 과녁을 향해 활을 쏘며 군사들이 적진에 도달하기 위해 넘어야 하는 걸림돌을 제거하듯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공격하시는 분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결국 그는 21절에서 자신처럼 미천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에게 절대자이신 하나님이 신경을 쓰시고 고난을 내리시는 것이 얼마나 의미 없는 일인지 항변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욥의 항변 속에는 절망 가운데 자포자기한 자신을 감찰하셔서 속히 구원을 베풀어 주시기를 요청하는 간절한 간구가 담겨 있습니다.
극심한 고난이 찾아올 때 그 원인이 내 죄와 상관없는 것이라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지라도 누구나 극심한 고난 가운데 있으면 절망하고 포기하려는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고난이라는 현실이 너무나 커서 구원의 하나님을 바라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이 왜 이렇게 나를 괴롭히실까?’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고난을 주시는 것은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서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매 순간 우리를 성실히 감찰하시며 지켜 주십니다. 그리고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계시하십니다. 고난이 우리의 죄로 인한 것이라면 우리가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하시려는 것이며, 죄와 상관없이 임하는 고난이라면 우리의 믿음을 연단시키거나 시험하시기 위한 선한 목적 때문입니다. 따라서 극심한 고난 속에 있다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 위해 예배와 기도의 자리로 더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욥의 고백처럼 귀로만 들었던 하나님을 눈으로 보고 만나는 은혜를 경험할 것입니다.
√욥 42: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극심한 고난을 당하면 죽음을 묵상하기도 합니다. 죽임이 그 고난을 끝낼 유일한 방법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의인이라 불렸던 욥도 극심한 고난 앞에서 죽기를 호소했습니다. 하지만 그 탄식에는 자신을 구원할 이가 오직 하나님뿐이심을 인정하는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 백성은 죽을 것 같은 고난 앞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십자가에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내어 주신 하나님 사람이 숨겨져 있습니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참뜻을 발견하는 사람은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보는 은혜를 경험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감찰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우리의 마음의 상처와 고통을 헤아려 주십니다.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보호자 되시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함이 마땅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지켜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모든 죄악들을 고백하고 우리의 삶이 더 의롭고 거룩하고 변화되도록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가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