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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098. [역경의 열매]
임영진 (1-9) “하나님, 내게 힘을…” 기도로 생명 살릴 칼을 들다
“어머니, 한 번 더 수술을 하시죠.”
“무슨 말씀이세요? 내 딸에게 더 이상 손대지 마세요. 벌써 8번이나 수술을 했잖아요. 어떻게 더 칼을 대요. 이제 포기할래요. 저 이 아이 편안하게 보내 주고 싶어요. 못합니다.” 어머니는 아이를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두 살도 안 된 영아에게 너무 가혹한 일이긴 했다. 수차례의 수술에도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보호자가 힘들만도 했다. 그렇다고 수술을 안 할 수는 없었다. 내겐 이 아이를 살려야만 하는 의무가 있지 않은가.
1987년 가을 무렵의 일이었다. 뇌수두증을 앓고 있는 영아가 입원했다. 뇌척수액을 내보내는 관이 막혀있는 경우였다. 선천적이었다. 뇌는 하루 500㏄ 정도의 뇌척수액을 생성한다. 이 액은 척수까지 순환하면서 영양분을 공급한다. 뇌에서 척수로 내려가는 관인 뇌척수액로(路)가 막힐 때 뇌수두증이 생긴다. 뇌척수액이 많이 생기는 경우도 있다.
뇌척수액이 많아지면 뇌실이 커지고 뇌압이 올라가 두통, 구토, 행동 장애, 기억력 상실, 보행 장애, 동안 신경마비로 인한 사시, 두개골이 얇아지는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 급성으로 진행되면 의식저하가 오기도 하고, 심하면 사망하기도 한다. 성인에게 발생하기도 한다. 주로 단락 수술(shunt)로 치료한다. 여러 가지 원인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예후에 많은 요인이 작용한다.
이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여러 가지 방법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뇌압을 빨리 낮추기 위해 뇌 밖으로 물을 빼내는 단순한 방법도 있지만 임시방편이었다. 염증이라도 생기면 아예 생명을 포기해야 한다. 일반적이지만 가장 좋은 방법인 뇌실에서 복강(배)까지 얇은 관을 피부 밑으로 넣어 뇌척수액이 빠지도록 했다. 그러나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힘드시겠지만 결정하셔야 합니다.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데 이대로 보낼 순 없습니다. 의사인 제가 허락할 수 없습니다.”
“….” 아이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번이 마지막 수술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제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번 수술 후에도 차도가 보이지 않는다면 저도 어머니 말을 따르겠습니다.”
병증에 대한 의사의 정확한 판단은 중요하다. 치료 방법에 대해 성심성의껏 설명하고 환자나 보호자에게 신뢰와 확신을 주는 일은 더 중요하다.
결국 보호자는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목에 있는 작은 정맥, 경정맥을 찾아 관을 넣어 심장까지 연결해 뇌척수액을 유도하는 방법을 택했다. 내 판단과 시술은 모두 생명과 직결돼 있다. 1㎜의 오차도 허용돼선 안 된다. “영진아, 수술하기 전에 꼭 기도해야 한다. 자만에 빠지면 안 된다. 항상 하나님께 네 손을 맡겨라.” 어머니와 할머니의 당부가 생각났다.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 손을 닦으면서 기도했다. “하나님, 내게 힘을 주십시오. 이 어린 생명이 자신의 삶을 살고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하나님께 맡깁니다.”
수술 자국이 가득한 아이의 배가 눈에 선했다. 여덟 번의 수술을 견뎌냈을 작은 몸이 안타까웠다. ‘이번에도 잘 견뎌내고 꼭 나아야 한다. 아이야.’
나는 다시 메스를 잡았다.
정리=전재우 기자 jwjeon@kmib.co.kr
* [역경의 열매] 임영진 (1) "하나님, 내게 힘을…" 기도로 생명 살릴 칼을 들다
* [역경의 열매] 임영진 (2) 神의 영역 ‘뇌’ 다루는 신경외과에 도전한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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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1953년 서울 출생, 현 경희의료원장 겸 경희대병원장, 정동제일교회 장로, 경희대 의대 졸업(10회), 스웨덴 카로린스카 대학병원 연구원, 대한신경외과학회 차기 이사장, 현 대한의사협회 고문, 현 대한병원협회 학술위원장, 현 아시아감마나이프학회 한국대표, 대한정위기능신경외과학회장, 대한감마나이프학회장, 대한축구협회 의무분과위원회 위원 및 국가대표팀 팀 닥터, 2009 세계의사월드컵 한국팀 감독, 현 대한의사축구연맹 회장
***[역경의 열매] 임영진 (2) 神의 영역 ‘뇌’ 다루는 신경외과에 도전한 까닭은?
2002년 가을 무렵이었다. 진료예약 명부에서 기억이 선명한 이름을 발견했다. 9번의 수술 끝에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난 그 영아였다. ‘아니, 별일 없었던 건가. 벌써 오래전에 검진을 받으러 왔어야 했는데….’
영아기에 단락수술을 받았기 때문에 당연히 정기검진을 받아야 한다. 몸이 성장하면서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문제 때문이다. 그런데 이 아이는 한동안 검진을 받으러 오지 않았다. 문제가 있었다면 수시로 병원을 찾았을 터였지만 그러지 않았다는 건 별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예상대로 진료실에 들어서는 아이의 모습은 보기에도 건강해 보였다. 정맥에 넣었던 관은 끊어져 있었다. 꽤 오래 된 듯 보였다.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치료됐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의사로서 너무나 행복한 순간이었다. 일반 수련의 시절 전공분야를 정하지 못해 방황하던 때가 있었다. 소아과 병동에서 실습하기도 하고, 국립정신병원에 나가기도 했다. 하지만 적성에 맞지 않는 느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응급실을 지키고 있는데 새벽 2시쯤 의식을 잃은 환자가 갑자기 들어왔다. 급하게 레지던트 1년차 선배에게 위급한 환자가 왔다고 연락을 했다. 잠시 후 그 선배가 응급실에 들어와선 환자의 의식 상태를 살폈다. 선배는 환자의 기관을 절개했다. 순간 피가 솟구쳤다. 환자의 호흡이 돌아왔다. 3분도 안 되는 시간에 벌어진 일이다.
‘그래, 이게 의사야.’ 마음이 요동쳤다. 뒤늦게 의학도가 된 나로선 상대적으로 편한 전공을 택해야 했다. 그러나 촌각을 다투는 상황에서 생명의 끈을 붙잡아 살리는 외과에 ‘꽂히고’ 말았다. 열심히 공부했고 수련의 중에 1, 2등만 지원할 수 있는 신경외과에 지원했다. 생명을 살리는 일은 가슴 벅찬 일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신경외과 의사들이 흔히 접하는 수술은 뇌동맥류, 이른바 ‘꽈리 수술’이다. 뇌동맥의 일부가 꽈리처럼 부풀어 오르는 병이다. 혈관 벽이 얇아진 부위에 혈류가 계속 부딪히면서 생긴다. 부풀어 오른 부위가 터지지 않는다면 별 이상 없이 지낼 수 있지만 대체로 터지게 되고 심각한 문제를 유발한다. 발병자의 30%는 사망하고, 30%는 혼수상태에 빠진다. 다행히 병원에 도착해 수술을 받더라도 중증 장애를 갖게 된다. 수술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일주일 뒤 혼수상태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의술의 발달로 요즘엔 개두 수술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졌지만 예전엔 그렇지 않았다. 예후가 좋지 않아 늘 안타까운 마음을 갖게 하는 곤혹스러운 질병이다.
뇌동맥류 수술뿐 아니라 다른 모든 수술에서 신경외과 의사는 고도의 집중력과 정확한 판단력, 빠른 결단력을 가져야 한다. 다른 부분과 달리 뇌를 다루기 때문이다. 하지만 100% 성공할 수는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뇌는 아직 미지의 영역이다.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다. 잘 알지 못하는 뇌의 어떤 부분에 생긴 종양을 잘못 제거했을 때 나타나는 후유증은 예상할 수 없다.
신경외과 의사로 생명과 신체 각 부분에 명령을 내리는 뇌를 담당한다는 자존심과 자부심을 갖고 있지만 그만큼 감당하기 어려운 심적 고통을 겪는다. 최고의 실력을 갖고 있다고 자부해도 24시간 동안 물 한 모금 입에 못 대고 정성으로 수술을 해도 환자가 잘못 되면 실의에 빠지기도 하고 심한 자책감을 갖게 되기도 한다.
그러면서 내 실력과 능력이 얼마나 미약한 것인지 느끼게 됐다. 다 안다고 여기면서 수술대에 서지만, 내 실력이 뛰어나다고 자부하면서 미세현미경을 들여다보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 신의 영역에 해당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래서 늘 기도하게 된다. 또 환자와 보호자에게 당부한다.
“생명을 관장하는 절대자의 영역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도하십시오.”
***[역경의 열매] 임영진 (3) 말썽쟁이 골목대장에게도 4代 기독집안의 피는…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우리 쪽은 30여명. 상대는 40∼50명쯤 돼 보였다. 게다가 저쪽 대장은 힘깨나 쓰게 보였다.
“야, 한 동네에서 이렇게 두 패로 나뉘어서 지낼 순 없어. 내 밑으로 들어오지?” 숫자도 부족한 데다 자칫 패싸움이라도 벌어지면 영락없이 지겠다 싶었다. 여러 가지 생각이 ‘휙 휙’ 지나갔다. “이렇게 하자. 너랑 나랑 단둘이서 칼싸움, 벽돌 깨기, 씨름, 이렇게 세 가지를 해서 진 사람이 이긴 사람 편으로 들어가는 거야. 어때?”
초등학교 1, 2학년 무렵이었다. 아버지가 새를 키운다고 서울 필동에서 일제강점기에 경성목장 자리였던 홍제동 집으로 이사 왔다. 동네 한편에는 중산층들이, 다른 편에는 어려운 형편의 사람들이 거주했다. 우리 집은 그 가운데 있었다.
동네 친구들과 매일 인왕산으로, 안산으로 놀러 다녔다. 생활이 좀 어려운 친구들이었다. 인왕산에 있는 조그만 동굴에서 친구들과 거적을 덮고 잔 적도 있다. 함께 다니는 친구들은 점점 늘어났다. 그러자 다른 패거리가 좋지 않게 본 모양이었다. 결국 대결 아닌 대결을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일대일. 이제 씨름으로 결정하는 거다.” 양 패거리의 시선은 두 우두머리에게 쏠렸다. 지는 쪽이 굽히고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온 힘을 다 쏟아야 했다. 허리춤을 잡고 이리저리 힘을 써봤다.
‘이겨야 해. 내가 대장이 되는 거잖아.’ 쉽진 않았지만 상대는 내 기술에 넘어갔다. 느낌이 좀 이상했다. 왠지 져주는 느낌이었다.
“나 임영진이야.” 멋쩍은 느낌이 있었지만 어찌됐든 이겼기에 당당하게 손을 내밀었다. 상대도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난 김성준이라고 해. 앞으로 잘 지내보자.” 우리는 신나게 놀러 다녔다. 다른 동네 아이들과도 많이 싸웠다. 힘을 써야 하는 상황이면 부대장인 성준이가 앞장을 섰다. 나는 대장이지만 주로 책사 역할을 했다.
남산초등학교를 3년 다니다가 안산초등학교로 전학했다. 학교가 가까워졌으니 시간은 훨씬 더 많이 남았다. 더 열심히 놀러 다녔다. 학교 성적은 좋을 리 없었다. 경성사범학교를 나온 어머니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다시 인왕초등학교로 전학했다. 회초리를 맞으면서 공부했다. 성적은 올랐다. 전교 1등도 했다.
성적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고 5학년 2학기가 되자 어머니는 나를 수송초등학교로 전학시켰다. 결과는 좋지 않았다. 다른 학교보다 한 학기 빠른 교과 진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첫 시험부터 망쳤다. 아들을 둔 거의 모든 가정의 목표였던 경기중학교 진학은 힘들게 됐다.
어머니는 차선인 다른 학교보다 배재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르게 했다. 외가는 4대째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었다. 성적이 안 된다면 기독교 신앙이라도 제대로 갖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라는 걸 한참 후에야 깨달았다.
나는 이중생활을 하고 있었다. 친구들과 놀고 싶었다. 그래서 공부를 했고, 어머니를 따라 교회도 열심히 나갔다. 교회 종 치는 일도 담당했다. 주일학교 반사도 했다. 같이 놀던 친구들을 교회에 데려가 동전을 쥐어주며 요절을 외우게 했다. 어머니에게 잘 보여야 성준이를 비롯한 친구들과 한번이라도 더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성준이와 만나는 시간은 줄어들었다. 더구나 성준이는 다른 중학교에 진학했다. 늘 붙어 다녔던 친구를 못 만나는 게 슬펐다. 형편이 어려웠던 성준이는 결국 중학교 2학년 때 집을 나가 버렸다. 아예 볼 수도 없게 돼 버린 것이다. 성준이에 대한 여러 가지 안 좋은 소문이 들렸다. 안타까웠다. 보지는 못했지만 성준이는 내 생일이 되면 내 방 창문 틀에 편지와 함께 선물을 놓고 가곤 했다.
***[역경의 열매] 임영진 (4) 비운의 세계 챔프 김성준 “영진아, 나 권투하고 싶어”
배재고에 진학하면서 동네 친구들과 점차 멀어져갔다. 그럴수록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은 쌓여갔다. 특히 김성준을 떠올릴 때면 마음이 먹먹해왔다. 하지만 그마저도 입시에 대한 중압감에 밀려나고 있었다.
아버지는 의사가 되라고 했다. 상위권 성적을 유지했지만 부족했다. 어머니는 연세대를 추천했다. 기독교계 학교인 배재를 보냈을 때와 같은 이유였다. 내 성적으로 연세대 치과대학은 충분히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치대는 싫었다. 아버지도 반대했다. 아버지는 대안으로 생물학과를 권했고, 그 권유를 받아들였다. 대학 생활은 즐거웠다. 캠퍼스의 아름다움에 빠졌고, 자유로움이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성준이 형 소식 들었어요?”
하루는 동네 후배가 나를 찾아왔다.
“무슨 얘기를 들었어?”
“누가 서울역 근처에 봤다고 하던데요.”
심장이 빨라졌다. 서울역에 가면 당장 내 친구를 만날 수 있겠다 싶었다. 그 길로 서울역에 갔다. 몇 개월 동안 거의 매일 서울역 근처를 뒤졌다. 당구를 치지도 못하면서 일부러 당구장에 들어가 당구를 치기도 했다. 혹시 만날까 싶어 하루에 몇 군데씩 다방에 들어가 앉아있기도 했다. 결국 어느 다방에서 그렇게 그리워하던 성준이를 만났다. 밤새 지난 시간의 얘기를 들었다. 가출 후 신문팔이 구두닦이 껌팔이 등을 전전했던 얘기를 들었다.
어린 날의 그리움을 보상받기라도 하듯 우리는 자주 만났다. 그러던 어느 날 성준이가 권투를 하고 싶다는 얘기를 했다. 함께 체육관에 갔다. 시간이 날 때면 링 사이드에서 세컨을 봐주기도 했다. 성준이는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다. 금세 플라이급 신인왕이 됐다.
성준이는 종종 경기 입장권을 보내줬다. 1975년 학군으로 임관 후 외박을 허락받아 경기를 보러간 적도 있다. 성준이는 76년 초 한국챔피언에 올랐고, 78년에는 WBC 라이트 플라이급 챔피언이 됐다.
그를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저며 온다. ‘비운의 복서’ 김성준. 괜찮다고, 잘 지낸다고 말할 때 좀더 세밀하게 살펴봤으면, 내가 좀더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더라면 그를 전도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성준이 권투 실력을 차근차근 쌓아가는 동안 나는 통기타에 빠져 있었다.
대학에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아 과 야유회를 갔다. 그 자리에서 대광고 출신의 동기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모습에 반하고 말았다. 그 친구에게 기타를 배웠다. 남산교회 청년부 추수감사예배 때 특별찬양을 하기도 했다. 대학 보컬대회에 나가 통기타 부문 1등을 하기도 했다. 정식으로 기타 듀엣을 결성했다. 듀엣 이름은 서로의 이름을 따서 ‘영 토이스’로 정했다. 그 친구 이름은 완구였다.
우리는 큰 무대에 나가기로 의기투합, 서울 명동 사보이호텔 건너편에 있던 내슈빌이란 음악다방에 가서 오디션을 봤다. 1주일에 2번 공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어니언스나 김태곤 등과 한 무대에 서기도 했다. ‘영 토이스’ 생활은 길지 않았다. 2학년 때 친구가 군에 입대하면서 팀은 해체됐다. 고별 공연은 가톨릭 학생회관을 빌려서 했다. 급하게 연습하느라 오르간 반주자를 구했다. 그때 반주를 해 준 사람이 지금 내 아내다.
3학년에 올라가면서 학군단에 지원했다. 첫 훈련은 악몽 같았다. 야영훈련은 최악이었다. 나름대로 어려서 거칠게 놀았다고 자부했지만 그건 자만심이었다. 엄격한 조직생활과 극도의 긴장감, 체력의 한계를 느끼게 하는 훈련은 견디기 어려웠다. 화장실에서 여러 번 울었다. 안 하던 기도도 절로 나왔다.
마침내 기다리던 퇴소식 날이 왔다. 머릿속은 온통 ‘바깥’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의아한 일이 벌어졌다. 훈련을 잘하지도 못했는데 군사령관상을 받은 것이다. 연세대 학군단에서 거의 처음 있는 일이라고 했다. 학군단 생활을 하면서 성격은 점차 외향적으로 바뀌어 갔다.
***[역경의 열매] 임영진 (5) 야외 기동훈련 나갔다 사고… 제대도 못할 뻔
남자 아이들이 가장 많이 하는 놀이 중 하나는 ‘축구’일 것이다. 나도 그랬다. 특히 아시아 최고의 스트라이커 ‘아시아의 표범’ 이회택 ‘선수’는 우상이었다. 초·중·고교 때 늘 축구를 했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단과대학 동기들끼리 축구부를 만들어 경기를 하곤 했다. 미팅을 나가기 위해 위아래로 ‘쭉’ 빼입고 구두를 ‘반짝반짝’하게 닦고 나갔더라도 시합이 있다면 쫓아가서 뛴 후에 땀범벅으로 미팅에 참석했던 적도 있다.
당시 기업은행 농구팀은 체력 단련 상대로 종종 우리 단과대 축구부를 불러 경기를 갖곤 했다. 훗날 큰 매형이 된 김무현 코치가 주선했다. 아마 나를 설득해서 누나를 한번이라도 더 보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김무현 선수는 한국 농구 전성기의 한축을 담당했다. 기업은행에서 선수 생활을 했고, 1964년 도쿄와 68년 멕시코 올림픽 국가대표 선수였다. 선수 은퇴 뒤에는 지도자로 78년 세계선수권대회와 방콕 아시안게임에도 출전했다. 78년 아시안게임에선 은메달을 차지하는 성과를 이뤄내기도 했다.
김무현 코치에게 농담처럼 푸념했다.
“형님, 이회택 선수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내 우상이잖아요.”
“하하, 이제 와서 네가 선수가 될 순 없고. 의대를 다녔으면 팀 닥터라도 할 수 있잖아? 같이 지내다시피 할 텐데 아쉽다.”
뒷머리를 한대 맞는 듯한 느낌이었다. 가뜩이나 대학에 들어와 캠퍼스에서 우연히 만났던 초등학교 동창 때문에 마음에 불편함이 앙금처럼 남아 있을 때였다. 나보다 공부를 조금 못했다고 여겼는데 의대생이 돼 있었다.
막연한 꿈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그 꿈을 접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하지만 쉽사리 진로를 결정하진 못했다. 편입할 수 있는 의과대학은 많지 않았다. 입대를 앞둔 상황도 걸림돌이었다. 일단 대학원 생물학 석사과정에 지원해 합격했다. 거의 포기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의대를 다니고 있는 동창생이 부러웠다. 순진한 생각이긴 하지만 어린 시절의 우상인 이회택 선수를 만날 수 있다는 꿈도 이루고 싶었다. 주변 사람들의 배려에 보답하고 싶다는 생각도 작용했다. 짧은 기간이지만 열심히 공부했고 경희대 의대에 편입할 수 있었다.
의학 공부는 군 복무 이후에 해야 했다. 졸업을 하면서 학군단원에게 주는 박대선총장상을 받았다. 중대장 후보생, 대대장 후보생 등의 보직을 잘 수행했기 때문이라고 짐작했다. 그런 내게 학군단 중대장은 화학병과를 추천했다. 화학병과에 가면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을 어떻게든 만들 수 있다고 했다.
학군단 중대장 추천에 따라 전문 교육을 받기 위해 화학학교에 갔고 학교장을 면담했다.
“어디에 가고 싶나? 대충 얘기를 들었는데 상무대에서 화학 교관을 하는 건 어떻겠어?”
“아닙니다. 전방에 가고 싶습니다. 소대장으로 복무하게 해주십시오.” 순수한 대답이었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스물두 살 젊은 나이의 가식도 있었던 것 같다.
학교장은 세 번이나 되물었다. 내 결심을 확인하려는 듯했다. 나는 변함없이 전방에 가겠다고 대답했다.
강원도 양구 쪽에 배치됐다. 자대에 가서 후회했음은 두말 할 필요도 없다.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했다. 이왕 이렇게 된 일인데 최선을 다해야지.’ 열심히 생활했다. 다른 사람들은 내가 육군사관학교 출신인 줄 알았다고 했다. ‘말뚝 박아라’는 소리도 들었다. 그런데 제대조차 하지 못할 뻔했다.
제대 4개월을 앞둔 마지막 훈련이었다. ‘야외 기동훈련’에 참여했다. 실제 상황을 가정해 병력과 장비를 기동하는 훈련이다. 텐트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 누군가 나를 깨웠다. 눈을 떠봤더니 불 속에 내가 있었다. 교대병이 초를 켜놓고 있다가 끄는 것을 깜박했던 모양이었다. 오른쪽 귀와 다리 등에 화상을 입었다. 후에 이를 수습하느라 고생을 좀 하긴 했지만 학군단 생활을 비롯해 장교로서의 생활은 나를 강하게 만들었다.
***[역경의 열매] 임영진 (6) ‘감마 나이프’ 선진 의료술 배우러 스웨덴으로
뒤늦게 시작한 의학 공부는 예상과 달리 힘들었다. 첫 시험에서 한 과목을 빼고 모두 재시험을 봐야했다. 당시에는 학생 중 20%를 유급시켰다. 불안했다.
‘첫 성적이 이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한다는 거야? 생물학 석사과정 자리를 비워둔다고 했는데 연대 대학원으로 다시 가버릴까.’
자괴감이랄까, 열등감이랄까 마음이 복잡했다. 학군단 중대장의 추천대로 군 생활을 상대적으로 편한 보직에 배치 받아서 미리 공부를 해둘 걸, 후회스럽기도 했다. 다른 한 편에선 나를 도와줬던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첫 시험을 잘 치르지 못했다고 해서 포기한다면 내 꿈은, 그 사람들의 기대는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시 이를 악물었다. 2학기가 지나가면서 공부가 조금씩 수월해지기 시작했다. 특별한 문제없이 학업을 마칠 수 있었다.
신경외과를 전공하면서 수많은 수술을 해야 했다. 신경외과의 특성상 뇌종양이나 뇌혈관과 관련한 웬만한 수술은 모두 머리를 열어야 했다. 많은 연구가 진행되어 뇌에 대해 많이 알아가고 있지만 종종 수술 예후가 좋지 않았다.
1987년 어느 날이었다. 당시 스승이던 고 임언 원장이 머리를 열지 않고 뇌종양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인 ‘감마 나이프’가 유럽에 있다는 얘기를 들려줬다. 귀가 번쩍 뜨였다. ‘감마 나이프’는 스웨덴에서 시작된 수술 방법이다. 방사선으로 칼의 효과를 내 머리를 열지 않고도 수술에 준하는 치료를 가능하게 한다. 51년 렉셀 교수가 제안했고, 67년 치료에 사용하기 시작했다.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정식 뇌질환 치료 장비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현재 청신경종양 뇌수막종 등의 뇌종양과 뇌혈관 기형, 파킨슨씨병과 같은 뇌기능적 질환 치료에 이용된다. 그런데 이 수술이 단순하지 않았다. 보통 수술을 하면 수술 직후 그 결과를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감마 나이프는 자연 효과를 내는 치료법이라 결과가 6개월에서 3년 후에야 나왔다. 단순히 기계를 돌리는 기술만으로 환자를 볼 순 없었다.
렉셀 교수의 수제자인 링퀴스트 교수와 접촉했다. 링퀴스트 교수는 임상 결과를 알려주지 않았다. 장기 연수를 요청하는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그가 참석하는 학회마다 쫓아 다녔다. 번번이 거절했다. 실망하지 않았다. 우리 환자에게 좀더 좋은 시술을 해줄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하나님, 우리나라 환자들도 좀더 좋은 환경에서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하시고, 그 일에 저를 사용하십시오.”
결국 2년 만에 연수 승인을 받아냈다. 곧바로 스웨덴 카롤린스카 대학병원으로 달려가 링퀴스트 교수를 만났다.
링퀴스트 교수는 자리를 만들어줬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점이 있었다. 스웨덴 의사들은 윗사람과 마주쳐도 인사를 하지 않았다. 한참 아랫사람이 과장을 툭툭 치고 지나가기도 했다. 노벨의학상을 심사하는 어떤 과장은 직접 커피를 타고 설거지도 했다. 보다 못해 하루는 과장의 컵을 씻어서 갖다 줬다. 아부를 한다고 생각했는지 탐탁지 않게 여겼다. 내 생각을 말했다. “한국 문화는 윗사람을 섬깁니다. 이렇게 한번 해보십시오. 기강이 잡힐 겁니다. 이게 ‘휴먼 릴레이션십’입니다.”
3개월이 지나면서 링퀴스트 교수는 내게 신뢰감이 생겼는지 연수에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기 시작했다. 자기 환자도 맡겼다. 봉급도 제안했지만 거절했다. 대신 임상일지를 보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링퀴스트 교수는 내게 방 열쇠를 건넸다.
67년부터 축적된 자료가 그 방 안에 있었다. 감마 나이프의 모든 것이었다. 링퀴스트 교수는 그 자료를 활용, 논문을 쓰도록 지원해줬다. 뇌혈관질환과 뇌종양에 대한 첨단 시술법도 배웠고, 세계적인 학회에서 발표할 수 있는 기회도 얻었다.
***[역경의 열매] 임영진 (7) 월드컵·아시안컵… 잇따라 찾아온 ‘팀닥터’ 행운
“운재! 너한테 달렸어. 한 사람 막을 때마다 기도하면서 막아.”
이운재 골키퍼의 다리를 풀어주며 쉰 목소리지만 힘주어 말했다. 팀 닥터로 해 줄 수 있는 다른 말은 없었다. 이운재 선수는 특유의 표정으로 웃으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2007년 아시안컵 축구대회 3·4위전 경기 때였다. 선수 퇴장 판정에 항의하다 압신 고트비 코치를 제외한 핌 베어벡 감독 등 코칭스태프도 후반 초반 모두 퇴장당해 벤치는 텅 비어 있었다. 고트비 코치와 나는 선수들을 독려하기 위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목이 거의 잠긴 상태였다. 남은 건 승부차기.
승부차기도 팽팽했다. 6대 5 상황. 일본의 여섯 번째 선수가 들어섰다. 그가 찬 공은 골문 가운데로 향했다. 이운재는 왼쪽으로 몸을 날렸다. 누가 봐도 골을 먹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운재는 공에서 끝까지 눈을 떼지 않았고, 넘어지면서 오른손으로 공을 막아냈다. 우리는 이겼다. 힘든 수련의사 생활은 좋아하던 축구를 잊게 만들었다. 1987년 교수로 임용되고 나서야 취미생활 중 하나였던 축구가 떠올랐고, 의대 축구부 지도교수도 맡았다. 학회 활동을 하면서 신경외과 의사들 사이에서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대한축구협회는 96년 의무분과위원회를 구성했다. 당시 위원장이 내 소문을 듣고 나를 추천했고, 의무분과 위원으로 축구협회와 인연을 맺게 됐다. 의무위원회가 열리면 참석해 의학적 조언 정도를 하고 돌아왔다. 그저 사회활동 중 하나였던 셈이다.
그러던 2002년 2월 아랍에미리트 두바이 4개국 친선대회 팀 닥터로 차출됐다. 의아했다. 알아보니 히딩크 감독이 새로 부임했는데, 팀 닥터도 축구를 할 줄 아는 사람이 가는 게 낫겠다 싶어서 추천했다는 설명이 돌아왔다. 두바이에 도착하면서 잊었던 내 꿈이 떠올랐다. ‘팀 닥터가 돼서 이회택 선수를 만난다….’
몸이 바빠졌다. 내 꿈 중 하나가 실현됐는데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전술훈련에 필요한 표시들을 먼저 운동장에 갖다 놓고, 옆줄 근처까지 나가 훈련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했다. 한번은 연습 중에 누군가 찬 공이 강하게 내 정면으로 날아왔다. 본능적으로 공을 가슴으로 트래핑한 뒤 발리로 다시 넘겨줬다. 그 모습이 히딩크 감독의 눈에 든 모양이었다. 그 일로 히딩크 감독과 여러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한국과 한국인의 정신력에 대해서도 많이 설명했다. 경기가 끝나고 돌아오기 전 히딩크 감독에게 목에 걸고 있던 호루라기를 선물로 받았다. 2002월드컵 팀 닥터로 강력하게 추천하기도 했다고 후에 들었다. 하지만 오랜 기간 병원을 비울 순 없었다.
2004년 아시안컵에도 차출됐다. 중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자리에 앉아 있는데 누군가 옆자리에 앉으면서 악수를 청했다. 고개를 들어 얼굴을 본 순간 현기증이 났다. 어릴 적 우상이던 이회택 ‘선수’였다. 축구협회 기술위원장 자격으로 가는 것이었다. 현지에서 이회택 기술위원장과 트랙을 함께 뛰기도 하고, 공을 주고받기도 하고, 등산도 함께 다녔다. 그러면서 내 축구 실력을 인정받았고, 또 친해졌고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됐다.
축구와의 관계는 교회로도 이어졌다. 정동제일교회가 속한 감리회 중구·용산지방회 축구대회에서 3년 연속 예선 탈락했다는 설명이었다. 한번만 참석하겠다고 대회에 나갔는데 첫 승리를 거뒀다. 송기성 담임목사는 축구팀을 아예 만드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선수 모집 공고가 나갔고, 37명이 지원했다. 자비로 유니폼 50벌을 장만했다. 그러면서 전도의 중요성을 깨닫기 시작했다.
***[역경의 열매] 임영진 (8) 참된 의사의 도리는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
진료와 축구 등을 통해 내가 있는 위치에서 전도하는 데 노력해왔지만 아버지는 좀처럼 교회에 나가지 않으셨다. 젊었을 때는 어머니가 교회에서 봉사하는 걸 이해하지 못했고, 지나치게 교회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걸 반대했다. 하지만 점차 달라졌다. 어쩌다 가정예배를 드리지 않는 날이면 오히려 왜 예배를 드리지 않느냐며 물었고, 빳빳한 지폐를 미리 준비해뒀다가 손자 손녀가 교회에 갈 때면 헌금하라고 주기도 하셨다.
아버지는 85세 때 병원에서 세례를 받았다. 당시 정동제일교회 담임목사였던 조영준 목사가 집례했다. 세례를 받은 후 아버지는 나도 잘 외우지 못하는 성경구절을 암송했다. 찬송가도 또렷한 목소리로 불렀다. 나도, 가족도, 조영준 목사도 예상 밖의 상황에 너무 놀랐다.
아버지의 상태는 점점 나빠졌고 결국 집으로 모셨다. 그러던 2003년 2월 출근하면서 아버지의 상태를 살폈다. 부정맥이 만져졌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병원에 전화해서 잡힌 수술을 연기하라고 했다. 그때였다. 아버지가 기력을 다해 무슨 말인가를 하셨다.
“선….”
“아버지, 둘째 누나 불러드려요?”
누나 이름이 선희여서 누나를 찾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어머니가 듣더니 “선공후사(先公後私)라고 하시는데”라고 알려줬다. 공적인 일이 우선이니 병원에 나가 수술을 하라는 당부였다. 아버지는 생사의 갈림길에서도 아들에게 지켜야 할 도리를 가르치시려 했다. 망설였다. 불안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쉽게 돌아가시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이 생겼다. 병원에 가서 수술을 끝내고 나왔을 때 임종 소식을 들었다. 그 후 선공후사는 내 좌우명이 됐다.
내 생각과 판단의 바탕에는 배재학교의 정신도 배어 있다. 배재학교의 교훈은 ‘욕위대자 당위인역’(慾爲大者 堂爲人役)이다. 크고자 하거든 남을 섬기라는 뜻이다. 성경 마태복음 20장 26절 말씀이다. 이를 당시 교장은 3S로 설명했다. 공부(Study)와 정신(Spirit) 체력(Sports)이었다. 특히 정신은 봉사였다.
배재 정신은 은연 중 내 삶에서 행동으로 나타난다. 1983년 레지던트 1년차 때 당직을 하면서 깜빡 잠이 들었다. 사이렌 소리가 시끄럽게 들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다른 병동에 불이 난 모양이었다. 얼른 밖으로 나가봤다. 환자들이 의사와 간호사, 보호자의 부축을 받으며 대피하고 있었다. 문득 14층에 있던 환자가 생각났다. 고등학생으로 사지마비 환자였다. ‘그 친구는 도와줄 사람이 없는데….’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14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 환자만 덩그러니 병실에 있었다. 환자를 들쳐 업고 6층까지 정신없이 내려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무슨 힘으로 그렇게 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 이후로도 응급환자나 중환자를 우선 생각했다. 아마 응급환자나 중환자를 많이 본 의사 중 한 명에 들 것이다.
요즘도 학생들에게 강의할 때 가장 강조하는 점은 의사의 도리다. 사명감과 책임감을 갖지 않거나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의사로서 점수를 주기 어렵다.
‘선공후사’, ‘크고자 하거든 남을 섬겨라’, ‘약속은 꼭 지켜야 한다’ 등을 설명하는 데도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병원을 경영하는 원칙이기도 하다.
올바른 정신과 함께 강조하는 또 다른 것은 종교다. 기독교 신앙에 대해 거부감이 든다면 다른 종교라도 가지라고 말한다. 이는 환자와 보호자에게도 마찬가지다. 신경외과의 특성상 내 힘으로 치료할 수 없는 환자가 반드시 있다. 의사와 환자, 보호자 사이에 신뢰가 형성되더라도 어떤 선을 넘어가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래서인지 요즘도 수술 후 보호자들에게 이렇게 설명한다.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 손을 통해 환자를 돌봐주셨을 겁니다. 보호자분도 함께 기도해주셨으면 합니다. 가급적 교회에도 나가시고요.”
***[역경의 열매] 임영진 (9·끝) 축구 통한 지구촌 의료선교가 남은 생의 목표
의사의 도리와 사명, 책임 등을 학생들에게 강조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조금 힘들더라도 생명을 살리는 일에 대한 소중함을 일깨우고 싶어서다. 상대적으로 힘든 전공분야를 선택하지 않으려는 학생들이 예전에 비해 많아지고 있어 안타깝기도 하다.
촌각을 다투는 환자, 매일 계속되는 수술, 예후가 좋지 않을 때의 스트레스 등은 상대적으로 힘든 전공분야의 의사에게만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조금 편한 전공을 선택하는 사람들만 많아진다면 기우지만, 결국 심장이나 뇌를 수술할 의사가 우리나라에서 영원히 사라질 수도 있는 일이다.
“아버지, 저 신경외과로 정했습니다.”
“뭐라고? 다시 생각해봐. 너 아빠 보면 모르겠니? 실력만으로 되는 게 아냐. 체력도 있어야 하고 정신력도 강해야 해. 네 사생활도 거의 없어져.”
대한민국 어느 부모도 자식이 의대에 입학하면 은근히 자랑하고 싶고 어깨도 살짝 올라가는 건 인지상정일 것이다. 아들이 재수를 하고 경희대 의대에 입학했을 때 내심 기뻤다. 그런데 일반 수련의 생활을 하면서 외과를 돌더니 어느 날 신경외과를 전공하겠다고 통보해 왔다. 기특했다. 하지만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부정(父情)으론 반대해야 했다. 그러나 학생들에게 좀 힘들더라도 신경외과 등을 전공하라고 권유하면서 내 자식에겐 편한 전공을 권유하는 모습으로 비쳐질까 걱정스럽기도 했다. 웅장여어(熊掌與魚) 상황이었다.
아들에게 어머니와 상의해보자고 했다. 내 생활을 옆에서 지켜봐왔던 아내라면 반대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그런데 아내가 뜻밖의 말을 했다. “본인이 하고 싶은 것을 하게 놔두세요. 좋은 신경외과 의사가 될 수 있을 거예요.” 아내와 아들에게 속으로 감사했다.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적었는데도 남편, 아버지를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들은 아버지의 뒷배 없이 정상적으로 전공과목을 선택했고 신경외과 의사의 길에 들어섰다.
아들과 함께 회진을 하기도 하면서 다른 신경외과 학생들에게 당부하는 것이 또 있다. 환자에게 병증에 대해 친절하고 소상하게 설명하라고 한다.
신경외과에서 흔한 병증 중 하나는 뇌졸중이다. 우리나라 사망원인 중 두 번째다. 발병하면 신체적 장애로 인해 환자 본인은 물론 가족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고혈압 심장질환 당뇨병 등의 질환과 연관된다. 나이, 가족력, 65세 이상의 흡연, 비만, 스트레스 등도 영향을 준다. 65세 이상인 흡연을 하는 고혈압 환자가 뇌졸중에 대한 가족력이 있다면 상당한 위험군에 속한다. 뇌졸중 발병 위험 인자를 갖고 있다면 꾸준한 운동과 식습관 관리로 예방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 다른 병증은 뇌동맥류이다. 뇌혈관 벽이 혈류나 다른 요인으로 인해 얇아져 꽈리처럼 부풀어 오르는 병을 말한다. 40∼60대에 터지는 경우가 많다. 30% 정도는 즉사하고, 30%는 혼수상태에 빠진다. 요즘엔 뇌를 열지 않고 수술하는 경우도 있지만 상태에 따라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뇌출혈 가능성이 있는 환자들에게는 노래방에 가지 말라고 권한다. 고음 부분에서 소리를 지르다가 혈관이 터질 수도 있다. ‘큰일’을 보면서도 조심해야 한다. 배변을 하면서 힘을 너무 세게 줘도 위험할 수 있다. 허리를 숙여서 머리를 감는 것도 좋은 방법이 아니다. 급격한 온도 변화를 느낄 수 있는 사우나나 찜질방도 피해야 한다. ‘열 받는 일’도, 심한 운동도, 음주도 하지 말아야 한다. 혈압이나 경련은 늘 관리해줘야 하고 스트레스를 피해야 한다. 어린이 환자라면 울어서도 안 된다.
원장이란 직책을 수행하면서 남아 있는 숙제라면 생활을 돌보는 암센터 건립, 효과적인 협진 등 병원의 현안을 소통과 공유로 풀어가는 일일 것이다. 이 일이 끝나면 축구를 통한 의료선교가 새로운 목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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