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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당 동편 춘당대 마당에서 북쪽으로 난 호젓한 길을 올라가면 왼쪽에 금마문(金馬門)이 나온다.
금마(金馬)’는 ‘쇠붙이로 만든 말’이라는 뜻이다. 금마(金馬)는 세자를 가르키는 말이다. 그 문 안쪽 전각에
왕세자가 있음을 상징한다. 원래 금마문은 중국 한나라 때 대궐 미앙궁(未央宮) 문의 이름이다.
그 문 옆에 동(銅)으로 만든 말이 있었으므로 <금마(金馬)>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순조의 맏아들 효명(孝明)세자 이 영(李旲)이 공부하던 공간으로 들어가는 창덕궁 금마문(金馬門)이다.
'조선의 마지막 희망'으로 거론되던 효명(孝明)세자의 성품을 알 수 있는 곳이다.
금마문을 들어서면 만나는 기오헌(寄傲軒)이다.단청을 하지 않은 아주 소박한 한옥이다.
이 한옥은 남쪽 산자락을 기대어 북쪽을 바라보는 북향을 하고 있다.
효명세자는 할아버지인 정조의 성품을 많이 닮아 독서를 좋아하고 성품이 신중했다고 한다.
그는 공부하는데 따듯하고 밝은 남향집은 필요 없다고 하여 일부러 북향으로 된 단청을
하지 않은 소박한 백골집(白骨宅)을 지었다고 한다.
기오헌은 한벌대 장대석 기단 위에 네모 뿔대로 다듬은 초석을 놓았다.
그리고 네모기둥을 세운 민도리집이다.홑처마에 팔작지붕이다. 정면4칸 측면3칸의 규모다.
가운데 작은 대청을 온돌 방하나를 두었다.동쪽에 누마루 방이 있다.
마루에는 편액 寄傲軒이 달렸다.
기오(寄傲)라는 말은 도연명의 귀거래사 첫 구절에 나오는 말이다.
"남창에 기대어 마음을 다잡아보니 좁은 방안일망정 편안함을 알았노라.
(倚南窓以寄傲 審容膽之易安)".
비록 좁고 작은 집 한 칸 속에 머물지만 선비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고자 한다고 풀이된다.
기오헌과 나란히 배치한 전각 운경거(韻磬居)이다.
정면 2간 측면 1간으로 구성된 극히 작은 한옥으로 단청이 없다.
방 1칸에 마루 반 칸으로 이루어져 있어 궐내에서 제일 작은 전각이다.
마루 밑으로 다섯개의 구멍이 나 있다. 책과 악기를 보관하는 공간으로,
습기와 좀스는 것을 막고자 환기와 통풍을 위해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기오헌을 의두합(依斗閤)이라고도 부른다. 의두(依斗), 북두칠성에 의지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의두(依斗)의 두(斗)는 북두칠성이 아니다. 효명세자가 기대고 의지했던 할아버지 정조를 북두로 본 것이다.
기오헌 뒷쪽 언덕으로 오르는 가파른 계단이 있다. 그 언덕에는 정조의 개혁정치 산실 규장각이 있다.
기오헌에서 공부하고 사색을 하다 계단을 밟고 규장각으로 달려가 조선의 걸출한 인물들을 만나 토론하였을 것이다.
효명세자는 당대 최고의 인물 다산 정약용과 추사 김정희를 유난히 좋아했다.
한승원은 장편소설 <추사>에서 효명세자와 추사 김정희의 돈독한 관계를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
효명(孝明)은 죽어서 받은 묘호이다. 생전 그의 자는 덕인(德仁)이다. 소설 속 덕인은 효명이다.
덕인세자는 키가 후리후리한데다가 목이 길고 얼굴이 하얗고 기름했다.
눈섭이 짙고 코가 오똑하고 입술이 도톰했고 눈망울이 새벽하늘에 나타나곤 하는 샛별처럼 초롱초롱했다.
추사가 규장각 대교로 있을 때 덕인세자가 찾아왔다.열다섯살의 소년이었지만 나이에 비하여 성숙해 있었고
안면 표정이나 태도가 의젖하고 느름했다.덕인은 소리없이 살랑거리는 미풍이나 그림자처럼 나타나 경전을
뒤적거리기도 하고 읽기에 몰두해 있는 검서관들을 휘 둘러보고 추사 옆으로 다가왔다.
추사가 다른 검사관들의 일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목소리를 낮추어
"저하,소신을 이렇게 찾아주시다니 하늘과 땅의 광영이 모두 소신에게로 쏟아지고 있는 듯싶사옵니다"하고
머리를 조아리자 덕인세자는 가볍게 손사래를 치고 나서 속삭이듯이 말했다.
"월성위궁의 종손이신 김정희 대교는 저하고 형제뻘이십니다.아따가 퇴청하실 때 잠깐 들러 주십시오.
청나라에서 들어온 승설차 맛이 좋습니다."
덕인세자는 기오헌에서 미리 차 우릴 준비를 해놓고 추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책상을 앞에 놓고 마주 앉아 차를 마시면서 덕인세자는 정중하게 말했다.
"형님께서 앞으로 저를 많이 도와주셔야만 됩니다.
그 부탁을 하려고 많아 바쁘실 터인데 이렇게 청했습니다."
추사는 망극함을 주체할 수 없었다.
"저하께서는 북학파들에게 있어 새로 떠오르는 해 같은 희망이십니다.
옥체를 잘 보존하시옵소서.
우리 뜻있는 사람들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의 한 자락 한 자락이
모두 다 미덥지 않고 의심스럽고
간이 오싹 오싹 저릴 정도로 위태위태합니다.
나라 안의 권력을 독식하려고 똘똘 뭉친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속속들이 제거하려고 듭니다.
그 제거방법은 잔혹 무도합니다.슬픈 일이옵니다만 어느 때 어디에 가서
드시는 차 한 잔 물 한 모금 약조 한 잔일지라도 세세히 살피고 가리시옵소서.
옛날 타 세력들로부터 위협을 받는 임금이나 세자저하들께서는 방 안이나
강아지를 키웠다고 합니다.모든 음식을 먼저 그들에게 먹여보고
탈이 없다 싶으면 드셨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며칠 뒤 한밤중에 미복 차림을 한 덕인세자가 한 젊은이와 더불어
추사의 서재 숭정금실엘 찾아왔다. 덕인이 함께 온 젊은이를 가르키며
"형님, 이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하고 물었다.
세자를 수행한,체구가 크면서도 강단진 젊은이가 추사를 향해 머리를 숙여 절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다 싶었다.어깨가 딱 벌어지고 눈초리가 위쪽으로 치켜올라가고
눈빛이 매서운 젊은이.
"이름이 박규수인데, 연암(박지원)의 손자입니다."
"아하, 이 무슨 감개무량한 인연인가? 연암 선생은 내 운사이신 초정 선생의 은사이십니다."
추사는 박규수에게 손을 내밀었다. 박규수가 무릎걸음으로 다가와 두 손을 내밀어 추사의 손을
감싸면서 머리를 조아렸다. 추사는 박규수의 손등을 다독거려주었다. 그의 손으로부토 뜨거운
물결이 가슴으로 거세게 흘러들었다.
추사는 조선의 앞날이 밝다고 생각했다. 총명한 덕인세자와 박규수처럼 북학으로 깨어 있는
젊은 세대가 한데 어우러진다면 안동 김씨 일파들의 세도로 말미암아 찌들어진 세상을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이다.-<한승원의 장편소설 추사에서>
효명세자는 순조 9년(1809) 8월 9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출생했다.
이때 부모의 나이는 순조 20세와 순원왕후 21세였다. 순조와 순원왕후의 첫 아이였다.
그는 태어난 순간부터 원자로 명명 되었고, 순조 12년인 1812년 6월 2일 휘(이름)를 대라 정하고
7월 6일 4세의 나이로 왕세자로 책봉 되었다.
실로 효명세자의 탄생은 조선의 축복이었다. 현종과 명성왕후 슬하에 숙종대왕이 탄생한 이후로
150 년여 만에 왕후의 몸에서 난 적통 왕자였으니 순조의 기쁨은 말로다 표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왕세자 책봉문에서 표현된 순조의 감격은 여느 군왕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아, 원자 너의 모습이 준수하고 영명하다"로 시작하는 책봉문은 어질고 현명하게 자라 세자이며
아들의 본분을 다 하길 바라는 아버지의 바람과 기대를 한껏 드러낸 것이었다.
아버지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세자는 그에 부응하는 성장한다.
여느 역대 세자와 비교해도 빠른 학습능력을 보였다고 한다.
용모에 있어서도 조부인 정조를 빼 닮았다.
순조 27년(1827) 2월 순조는 자신의 병을 핑계로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한다.
순조는 나이 불과 38세의 한창 나이였으나 어린 시절부터 왕의 격무와 안동김씨 세도의 등쌀에 시달렸다.
그는 11세의 어린 나이에 명군 정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다.
순조는 재위 초반에는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았고
친정 이후에는 아버지 정조가 자신의 후견인으로 내세워 준 장인인 김조순의 비호를 받았다.
정순왕후는 정조의 정치적 적대관계로서 정조대왕의 개혁을 무위로 돌렸다.
순조 재위 초년 천주교 탄압이라는 껍질을 쓴 신유박해를 통해 노론 적대 세력이며
정조 친위세력인 소론과 남인을 대거 숙청했다.그 수가 무려 500인에 달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어린 나이에 등극 하자마자 그런 피바람을 목격 했으니 순조의 정신적인 충격은 상당했을 것이다.
순조는 그 말년에 이르기까지 기를 펴지 못하고 정순왕후가 사망한 후에도 김조순이 안동김씨
세도정치 시대를 여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순조의 유일한 희망은 아들 효명세자 뿐이었다.
군주로서의 자질이 남다른 세자에게 일찌감치 정치를 가르쳐 자신의 사후에는 더욱 영향력을
확대하길 바라는 순조의 마음이었다.19세의 나이로 대리청정을 시작한 세자는 불과 4개월 만에
김조순의 아들인 김유근과 조카 김교근 등을 유배 보내고 사간을 통해 김씨 일족의 비리를 탄핵하는 등
세도세력을 약화 시키는 쾌거를 이룬다.
효명은 세자의 청정을 통해 몰락했던 남인과 소론이 정계로 복귀 시켰다.
그간 세도 세력을 위해 자행 되어 온 과거제의 비리와 부정을 혁파 하고자 관련자에 대한 문책과 벌을 엄히 하였다.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대리청정기간 3년 동안 무려 50회의 과거제를 시행 하는 등 인적 쇄신에 힘을 쏟았다.
민생에 관심이 많던 세자는 자주 미행을 한다.그 길에 우연히 만난 박규수와의 인연은 군신지간을 넘어 친동기와
같은 우애로 발전한다. 박규수는 북학파의 창시자이며 실학의 거두인 박지원의 손자로 초기 개화사상의 선구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효명세자와 박규수는 북학과 실학을 함께 연구하며 개혁의 불씨를 함께 지폈다.
개혁을 시도했던 효명세자는 그 방법으로 기존의 군주들과는 차별적인 방법을 택했다.
바로 노래와 춤을 통해 왕권 강화를 꽤한 것이다. 효명세자는 조선의 예악을 정립하는 것이 왕실의 권위와 전통을
내세우는 방법이라고 판단했다.특히 순조와 순원왕후를 위한 연회를 11차례나 마련함으로서 연회에 참석한 대소신료들에게
왕실의 건재함과 왕권의 신성함을 내세웠다.
1827년 9월 순조와 순원왕후에게 존호를 올리면서 첫 연회를 열었고, 1828년 6월 순원왕후의 40세 축하연을 또한 개최 하였다.
가장 화려하고 세심하게 신경 쓴 1829년의 사순연은 세자가 직접 기획하고 제작한 연회였다.
사순연은 1829년 2월에 시작하여 6월에 이르기 까지 총 6회에 걸쳐 진행 되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순연에 선보일 춤과 노래를 세자가 직접 창작했다는 것이다.
궁중무용으로 유명한 '춘앵전'은 바로 효명세자가 창작한 노래와 무용으로 지금까지 전한다.
춘앵전은 꾀꼬리를 상징하는 노란색 옷을 입고 화문석 위에서 추는 독무이다.
효명세자는 당대 최고의 학자 다산 정약용과 추사 김정희를 가까이 했다.
다산 정약용은 효명세자의 마지막 진맥을 하고 처방을 한다.
한승원은 장편소설 <다산>에서 그 장면을 이렇게 그렸다.
어떤 일에 집중하거나 긴장된 일을 하면 무력증이 일어나곤 하는 순조 임금은 열아홉 살의
덕인(시효:효명)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켰다. 할아버지 정조 임금을 닮은 덕인 세자는
미래 조선의 희망이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덕인 세자는 대리청정 첫 해에 할아버지 정조 임금이 총애하던 신하들을 불러다 쓰려고 했다.
첫 번째로 정약용을 불러 중용하려 했는데 서용보 홍희운 이기경 목만중 일파가 윤극배를 시켜 상소하여 막았다.
그로부터 3년 뒤의 5월 단옷날 약원의 관원이 여유당으로 정약용을 찾아왔다.
정약용을 불러 약 처방에 대하여 논의하라는 순조 임금의 명령이 내려진 것이었다.
"한시가 급합니다. 빨리 배에 오르십시오."
한강나루에서 내려 약원으로 들어갔을 때는 새벽녘이었다.
기다리고 있던 도제가 덕인 세자의 명이 경각에 달려 있다고 하면서 진찰을 해보라고 말했다.
정약용은 망설이지 않고 동궁으로 달려가 진맥을 해보았다.
맥이 끊일락 이어질락 했다. 우선 기를 북돋을 수 있는 약제를 달여올려야겠다고 처방을 하고
몸을 돌려 나오는데 지켜보고 있던 세자빈의 통곡소리가 들려왔다.
바야흐로 숨을 거둔 것이었다. 밖에는 심연 같은 새벽의 푸른빛이 약원 마당에 밀려 들어와 있었다.
정약용은 머리끝이 하늘로 솟구쳐올라가고 가슴이 서늘해졌다.
만일 내가 달여올린 약을 드시고 숨을 거두었다면 나는 어찌될 뻔했는가.
"하늘이 도운 것이오"하고 도제가 정약용에게 귀엣말을 했고,
그는 서둘러 배들 타고 두물머리 소내로 돌아왔다.
-한승원의 장편소설 <다산> 2권 303쪽~304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