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부인 육영수 여사와 슬하에 1남 3녀를 두었다.
<주역의 상수학 하락이수로 해설한 박정희 대통령의 운명>
박정희 대통령 생애 요약
불우한 집안에서 늦둥이로 태어났지만,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공부에 소질 있어 교사가 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17년 (다이쇼 6년) 11월 14일, 경상북도 구미에서 하급 군관인 효력부위를 지낸 농민 박성빈과 백남의 부부 사이에서 태어났다. 박정희 본인은 6남 2녀 중 막내다. 백남의는 박정희를 임신할 당시 나이가 45살이었고 하도 가난한 살림에 입이 늘어난다는 것 때문에 뱃속의 아이를 떼어내기 위해 간장을 끓여 한 사발 원샷한다던가 언덕에서 일부러 굴러 떨어지는 등 여러 방법을 시도해봤지만 실패하고 박정희는 그대로 태어나게 되었다.
태중에서 워낙 고생한 탓인지 박정희는 당시로선 훤칠한 장신인 아버지나 형들에 비해 성인이 되어서도 왜소한 체격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도 어렸을 때부터 공부머리는 있었는지 어려운 사정에서도 박정희를 보통학교로 내보냈기에 집안에서 박성희와 같이 근대식 교육을 받은 2명 중 1명이었으며,1932년 3월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사범학교에 응시하기도 했다.
어머니 백남의는 박정희가 '합격하고 진학을 못 하면 한이 생긴다'고 하여 불합격을 빌었지만 1932년 4월 박정희는 정원 100명 중 51등으로 합격했고, 대구사범학교에 제4기생으로 진학하였다. 대구사범 시절에는 대구 시내 기숙사에서 등·하교하였고, 품행 평가에서 '양(良)'이 4번, '가(可)'가 1번이었지만 '군사 체육' 관련 교과목의 성적은 뛰어났다고 한다.
1937년 3월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37년 4월 문경공립보통학교 초등교사로 부임하여 4학년을 맡았다. 이렇게 학교 선생 일을 하고 있던 박정희는 병을 앓고 있던 아버지의 간청으로, 19세이던 1936년에 16세의 김호남과 결혼을 했고, 이듬해에 딸 박재옥이 태어났다.
그러나 자유연애로 결혼한 것이 아닌 정략결혼인 데다가 박정희가 김호남에게 성적인 호감을 느낀 것도 아니여서 김호남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사범학교를 졸업 후, 의무 근로를 끝내기도 전에 전 만주로 가, 군관학교 시험을 치루고 입교했다.
해방후 국군으로 있던 박정희는 1947년 12월 경리장교였던 박경원(朴璟遠)의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이화여자대학교 아동 교육 학과 1학년이었던 이현란(당시 24살)과 처음 만난다. 이현란은 함경남도 원산시 출신으로, 혈혈단신으로 월남한 처지였다. 박정희는 이현란과 약혼한 후 서울 용산 관사로 데리고 와 동거를 시작했다. 1948년부터 1950년 초까지 3년 정도 사실혼 관계에 있었다. 1948년 11월 중순~12월 말 사이 이현란은 광화문 산부인과에서 아들을 낳았으나 얼마 못가서 죽게 되었다.
동거녀(약혼녀) 이현란은 공산주의가 싫어서 월남한 사람이었고 아들마저 죽자 박정희에게 실망했다. 게다가 박정희가 아내와 딸 까지 둔 유부남이라는 사실도 이현란에게 들통났다. 3남 박상희가 경찰에게 총살 당하고, 막내아들 박정희마저 무기징역 선고를 받자, 그 충격으로 어머니 백남의는 세상을 떠났다.
1961년 11월, 미국 케네디 대통령 브리핑 문서
박정희 의장의 남로당 행적에 대한 기록
다만, 박정희만 특별 대우를 받아 사면된 것은 아니고,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이응준이 혐의자들과 일일이 개별 면담한 뒤 상당수를 군문을 나가는 조건으로 훈방 조치했다고 한다. 당시 김창룡의 숙군작업이 엉망진창이었기 때문에, 무고한 피해자가 매우 많았다. 이 때문에 군대 고위층이 최대한 구제하는 방침을 세우면서, 진짜 남로당 비밀당원이었던 박정희도 같이 살아났다.
이후 박정희의 능력을 아깝게 여긴 백선엽의 추천으로, 박정희는 민간인 신분인 군속(군무원)으로 육군 전투정보과 에서 근무하게 된다. 이곳에서 박정희는 훗날 자신의 쿠테타 주축 세력이 되는 육군 8기들과 접촉하게 된다. 그중에서 8기 우등 졸업으로 정보과에 배속된 김종필과 각별한 인연을 맺는다.
또한 훗날 자신의 독재를 공고히 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이후락 역시 이곳에서 만나게 된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육군 포병 소령으 로 복귀하였고 육군본부 작전정보국 제1과장을 거쳐 9월 15일 중령으로 진급하고 대구로 올라가는 육군본부 수송지휘관을 맡았다.
박정희가 여순사건에 연루되고 아들이 죽은 이후, 약혼녀 이현란은 수차례의 가출과 방황을 했고, 박정희는 그때마다 찾으러 다니고는 했다. 1950년 2월, 결국 이현란과 헤어졌다. 6.25 전쟁 발발 이후였던, 8월 하순 부산 피난지에서 송재천 소위의 소개로 맞선을 보았다.
같은 해 11월, 아내 김호남과 협의 이혼으로 갈라섰다. 12월 천주교 대구대교구 주교좌 계산성당에서 허억(許億) 시장(당시 대구 시장)의 주례로 육영수 여사와 재혼한다. 당시 박정희는 친족들의 눈치를 살펴가면서 김호남과의 이혼을 주저하고 있었는데 6.25 전쟁이 발발하자 엄청나게 혼란한 틈을 타서 아주 잽싸게 이혼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육영수와 바로 결혼했다.
1950년 12월 12일, 천주교 대구대교구 주교좌 계산성당에서 진행된 박정희-육영수의 결혼 사진.
1952년 5월 이용문의 주도로 계획된 군부의 이승만 축출 시도에서, 이용문의 보좌관이었던 박정희 역시 정변 계획에 참여하였으나 계획은 미수로 끝나게 되었다. 1953년 11월 25일에는 육군 준장으로 승진하여 장군이 됐고 1955년 7월 14일에는 제5사단 사단 장이 되었다.
1957년 3월에는 소장 진급자 명단에 올랐을 때 과거 남로당 경력을 문제 삼은 진급 담당자들이 백선엽에게 항의하였지만, 그는 '박 장군에 대해선 내가 보장한다.'며 박정희가 진급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 덕분에 박정희는 대통령이 된 후 백선엽을 '백 형'이라고 부를 정도로 그와 가까워졌다.
소장 계급으로 제6군단 부군단장으로 부임한 박정희는 1957년 제7사단 사단장, 1959년 7월 1일 육군 제6관구사령관이 되었으며 1960년 1월 21일 부산군수기지사령부 사령관으로 발령받으며 군내 요직을 거쳤다. 4.19 혁명으로 같은 해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하고 민주당이 집권하자, 박정희는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부장으로 부임했고 이종찬은 장면(張勉) 국무총리에게 박정희의 중용을 건의하면서 출세가도가 열리는 듯했다.
하지만 장면 총리가 이 문제를 미 육군 제8군사령관 겸 UN군총사령관 육군대장 '카터 매그루더'(Carter B. Magruder)와 논의하면서, 박정희의 신원을 육본을 통해 조회했고 김형일 참모차장은 '박정희는 좌익(left)이다'라고 답변했다. 이를 통해 박정희의 남로당 활동 전력이 알려지면서 매그루터는 장면 총리를 찾아가 항의했다.
결국 1960년 12월 15일 김형일는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좌천당한다. 이 일로 당시 박정희를 좌익으로 지목한 김형일은 박정희와 원수 사이가 됐고, 이후 5.16 군정에도 반대하다가 참모차장에서 예편됐다.
이 일로 앙심을 품은 박정희는 이전 상관이었던 이용문처럼 정변을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1961년 4월 19일을 거사일로 잡았다. 박정희는 4.19 혁명 1주년을 기념으로 학생들이 대규모 집회를 할 것으로 예상하였고, 이때 혼란을 틈타 집회를 진압하다는 명분으로 정권을 탈취할 생각이었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공황 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대통령에 오르다
박정희는 나이 만 43세에 군사 쿠데타 정부의 지도자가 되었다. 군은 1961년 5월 16일 해병대 병력 일부를 시작으로 대한민국 제2야전군 상당수와 제1야전군의 일부가 유엔군사령부에서 이탈하여 대한민국 정부 주요 기관 및 시설을 장악하기 시작하면서 실체를 드러냈다. 이는 박정희를 구심점으로 하는 사회에 불만이 가득한 장교들에 의해 계획적으로 이루어졌다.
육군 중장 장도영 관할 밖의 제1해병여단과 공수단을 비롯해서 서울 인근으로는 서울 동부의 제6군단 포병단, 서울 서부의 제 30 사단, 서울 남부의 제33사단, 서울 북부의 5사단 그리고 춘천, 대구, 광주, 부산에 주둔 중이던 군대들이 궐기하여 이른바 5.16 군사정변을 일으켰다.
이때 박정희는 자신의 이름을 걸지 않고 장도영을 내세워 장도영의 이름으로 일으켰다. 박정희는 머릿속으로 치밀하게 계산을 했는데 성공하면 자기가 먹을 생각이었고 실패하면 장도영에게 뒤집어씌울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어찌 흘러가든 매는 결국 장도영이 다 맞을 것이므로 박정희에게 일절 손해가 없는 장사였던 셈이다. 그랬기에 이렇게 대담하게 쿠데타를 일으키는 게 가능했다.
KBS라디오방송국, 육군본부, 국방부, 6관구 사령부(제 1지휘소로 사용), 서울지방경찰청, 파출소, 중앙전화국, 시청, 도청, 발전소 등이 표적이 되었다. 정부 수반이 머물렀던 반도호텔(현 롯데호텔)에는 육군 특수부대(GDT)의 기습이 가해졌다. 그러나 장면 총리가 호텔 맞은편의 주한미국대사관, 안국동 미국대사관 숙소를 거쳐 혜화동 가르멜 봉쇄수녀원으로 피신하고, 여러 각료 또한 은신함으로써 작전이 실패하고 계엄령 승인을 얻지 못하게 된다.
이에 박정희는 오전 9시 경, 장면 총리에게 피신을 권한 후 체포당한 현석호 국방장관과 연금당한 장도영을 데리고 해군참모총장 해군중장 이성호 제독, 대한민국 공군참모총장 공군중장 김신 장군, 해병대사령관 해병중장 김성은 장군과 함께 청와대로 향해 윤보선 대통령으로부터 계엄령 추인 및 혁명 지지를 요구한다.
하지만 대통령 또한 이를 완강하게 거절하며 오히려 사퇴 의사를 밝혔고, 오전 10시경 국회해산 및 비상계엄을 알리자 곧 북한군이 휴전선에 결집, 10시 18분경에는 매그루더와 주한 미 대리대사 마셜 그린이 장면내각 지지를 선언하는 한편, 국민들이 군사봉기를 딱히 반겨주지도, 반대하지도 않았다.
이에 정권이 군부에 넘어갔구나 하고 국민이나 미국이 믿게 하기 위해 그날 장도영 등을 앞세워 여러 포고문을 쏟아내는데 전국의 모든 정당, 사회단체의 정치활동을 불법으로 하고 정치에 직접 관여하지 않은 대통령을 제외한 모든 정치인과의 협상을 배격할 것 임을 밝히며, 국무위원, 정무위원을 모조리 체포하고, 대의원 헌법기관을 정지시키는 한편, 오후 7시부터 장면 정권의 모든 권력 을 군사혁명위원회가 최종적으로 인수함에 따라 국가 기구의 전권을 행사할 것이고, 오후 8시를 기해 민의원, 참의원, 지방의원 등 국회는 모조리 해산한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이후 오후 10시 30분에 윤보선 대통령으로 하여금 민주당(1955년)원들의 신병을 전부 보장한다는 대가를 주고 대국민 특별담화 방송을 하게 하여 장면과 각료들에게 투항을 권고하였고 17일 내부 불만을 잠재우면서 장면의 동태를 예의주시하다가 그날 저녁부터 18일 아침까지 매그루더로부터 출동명령을 받은 야전사령본부청을 점령하고 대한민국 육군 제1군사령관 이한림의 체포를 단행한다.
그리고 서울대학교 학군단 훈육장교인 전두환 대위가 이 쿠데타에 가담했는데 전두환은 졸업선배 신분으로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을 불러다가 '박정희 지지 퍼레이드를 벌이라'고 지시했다. 이에 육군사관학교 교장인 강영훈이 막았고 전두환은 이를 박정희에게 일러바쳤는데, 박정희는 강영훈을 구속 수감시키고 전두환이 하려고 했던 퍼레이드를 진행시켰다. 이하 생략...
청빈 선생님의 블로그 '주역의 상수학' 에 하락이수로 박정희 대통령의 평생 운명을 풀이해 놓은 내용을 소개합니다.
이 내용을 천천히 읽어 보시고 박정희 대통령의 삶의 궤적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출처 : 청빈 선생님의 블로그 '주역의 상수학'
고 박정희 대통령 서거 43주년 추도식 동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