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諫墓(기31호)(일명 김후직 묘)(경주 황성동)1
이 묘는 신라 진평왕 때 충신인 金后稷의 무덤으로 전해지고 있다.봉분은 지름25m.높이6m로
흙을 둥글게 쌓아올린 형태로 묘의 앞부분에는 후대에 만든 상석이 있고 그좌측에 묘비가 있다.
김후직은 지증왕의 증손으로 진평왕을 섬겨 이찬이 되고 병부령에 임명되었다.삼국사기에 후직
이 병이 들어죽게 되었는데,그 세아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신하가 되어 능히 임금의 나쁜 행동을
바로잡아 구하지 못하였다.왕이 노는 것을 즐거워하니 이를 그만두지 않으면 패망에 이를 것이
다.이것이 내가 근심하는 바다.비록 죽더라도 임금을 깨우쳐 주려 생각하니 내 유해를 왕이 사냥
하러가는 길가에 묻으라고 하였다.왕이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흘리면서 마침내 종신토록
다시 사냥을 하지 않았다 라는 내용이 있다.묘비는 숙종36년(1710년)경주부윤 남지훈이 김후직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서 세웠다.
신라간신김후직묘(新羅諫臣金后稷墓)2
황남 맷돌순두부집3
황남 맷돌순두부집4
2014년11월24일방영 능이버섯두부전골(KBS TV).2016년10월10일방영 명품맛집(KBS2TV생생정보)
2017년1월11일 능이버섯두부전(KBS2TV생생정보) 등에 출연한 맛집에서 회원들이 점심을 먹었다.
경주교촌마을(최부자집 입구)5
경주교촌마을안내(사인보드)6
경주교촌은 신라 신문왕2년(682년)에 설립된 한반도 최초의 국립대학인 국학이 있던 곳이다.
신라의 국학은 고려시대에는 향학.조선시대에는 향교로 이어졌다.마을이름이 교동.교촌.교리
등으로 불린 것은 향교가 있기 때문이다.또한 교촌은 신라의 원효대사와 요석공주가 사랑을
나눈 요석궁이 있던 곳이다.경주 교촌에는 참다운 부자의 모습을 보여준 최부자의 고택이 있
다.경주 최부자는 12대 400년동안 만석의 재산을 지켰고 9대 진사를 배출했다.가난한 이웃을
도우며 모범적인 청부의 윤리인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였다.경주교촌에는 향교.최씨고
택 등 전통한옥이 남아있고 첨성대.월성.계림 등 유적이 분포되어 있고 신라문화와 조선문화
가 함께있는 곳이기도 하다.
경주 최부자댁(崔植家屋) 솟을대문과 행랑채(중민27호)7
경주최씨 최부자의 종가로 월성을 끼고 흐르는 남천 양지 바른 곳에 있다.최부자의 집안은
도덕적의무와 관용을 몸소 실천해 온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12대동안 만석지기 재산을
지켰고 학문에 힘을 써 9대 진사를 배출했다.이 가옥은 조선중기 최언경 대에 경주 내남면
이조리에서 교동으로 이주하여 정착한 1779년경에 건립되었다.원래는 99칸이라 전해지며
문간채.사랑채.안채.사당.곳간으로 구성되어 있다.최부자집의 건축은 향교를 배려해서 사
당을 서쪽에.기둥을 낮게.집터를 낮게 닦은점이 특징이다.일반적인 대문보다 낮게 지었다.
경주 최부자댁은 1947년 경주 최부자 12대손 문파 최준선생이 영대(영남학원)에 기증했다.
최부자댁(사랑채)독립유공자 崔浚선생 생가(경주 교동)8
汶坡 崔浚(1884년-1970년)은 9대진사 12대만석의 마지막 부자로 이곳 교촌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조선국권회복단.대한광복회 군자금을 제공하는 등 독립운동을 지원하였으며 특히
대한광복회 재무를 맡아 총사령관 박상진 의사와 더불어 더불어 항일투쟁을 전개하다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심한 옥고를 치루었다.선생은 白山 安熙濟(1885년-1943년)선생과 함께
백산상회 설립을 결의하고 대표에 취임하여 비밀리에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고 백범 김구
선생에게 군자금을 보내는 등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이밖에 1920년에 경주
고적보존회를 설립하고 1932년 정인보선생 등과 동경통지를 편찬하는 등 신라문화유산을
지키고 알리는데 크게 기여했다.해방직후 계림대학과 대구대학을 설립하니 곧 오늘의 영
남대학교 전신이다.정부는 공적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이제 애국
애족의 일념으로 일생을 항일운동에 헌신한 선생의 숭고한 정신과 실천적 삶을 여기 기록
하고 길이 후세에 귀감을 삼고자 한다.
2006년에 복원했으며 구한말 의병장 신돌석.면암 최익현
스웨덴 구스타프국왕(당시 왕세자).의친왕 이강공 등 당대의 기라성같은 손님들이 머물렀다.
앞에 돌로 된 명료대는 사랑채와 안마당을 밝혀주는 불을 켜놓을 수 있는 그릇을 놓는 자리이다.
최부자댁 사랑채(현판)9
龍庵古宅은 용의 정기가 스며드는 집으로
貞武公 濳窩 崔震立 장군(최부자집1대)의 후손인 崔基永(최부자집 8대)의 호를
따서 지은 집이라고 한다.
최진립장군의 14대 종손인 충의당 주인 崔埰亮의 글씨로 아호는 어리석은 산
이란 뜻의 愚山이다.忠義堂은 최진립의 생가(경주 내남 이조리)(기99호)이다.
정무공 잠와 최진립의
세째 아들집이 최부자집이고,동학의 창시자 수운 최제우는 네째 아들집이다.
大愚軒은 크게 어리석다는 뜻으로 최준공의 조부인 최만희공의 아호로 이
말은 사리사욕을 따지지 않는 공적인 헌신을 강조하는 말이라고 한다.
鈍次는 재주가 둔하다는 뜻으로 최준공의 부친인 최현식공의 호로 둔한 2등
이라 직역되며 1등만 강조하는 현대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문구이라고 한다.
이와같이 경주
최부자는 역대 선조의 호를 통하여 부자이지만 겸손 해야함을 강조하고 있다.
최부자댁 곳간10
좋은 일을 한집에는 반드시 경사가 있다(積善之家 必有餘慶)는 표본인
800석이 들어간다는 최부자집 곳간으로 이런 것이 7채가 있었다고 한다.
1671년 현종 신해년 삼남에 큰 흉년이 들었을 떄 최국선의 집 바깥마당에
큰 솥이 내걸렸다.주인의 명으로 곳간이 열린 것이다.모든 굶는 이들에게
죽을 끓여 먹이도록 하라.그리고 옷을 지어 입혀주도록 하라.소문을 듣고
서로를 부축하며 최부자집을 찾아 몰려들었다고 한다.
최부자댁11
최부자댁 작은 사랑채터.작은쌀통12
경주 최부자집 작은 쌀통이야기는 가훈에도 있듯이 과객을 후하게 대접했다.이렇게 과객을
잘 대접하는 가풍이 있다보니 많은 손님들이 이집을 찾게 되었다.그래서 항상 사랑채는
손님들로 넘쳐나 과객들을 집근처 하인들집에 머물게도 했다.이 때 작은 쌀통에서 쌀을 한점
집어들고 하인집으로가면 하인들은 과객들에게 잠자리와 식사를 제공했다.이 쌀통은 가로
세로 석자에 높이가 넉자 정도 되는 나무로 만든 상자로 위쪽에 지름이 다섯 치 정도의 둥근
구멍이 뚫여 있었다.손님들이 욕심을 부려 두손을 넣어 쌀을 많이 움켜지면 손이 빠지지 않아
적당량을 집을 수 밖에 없다.쌀을 쥐어 빼내는 것은 한번만 허용되었다.(크기를 축소해 재현함)
최부자댁 六訓.가옥배치도(사인보드)13
최부자댁 6훈은
과거를 보되 진사이상 벼슬을 하지마라. 만석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흉년기에는 땅을 늘리지마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주변 100리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 시집옷 며느리들은 3년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최부자댁 六然(修身)은
自處超然(혼자있을 때 초연하게 지내라).對人靄然(다른 사람을 온화하게 대하라)
無事澄然(일이 없을 때는 맑게 지내라).有事敢然(유사시에는 과감하게 대처하라)
得意淡然(뜻을 얻었을 때 담담히 행동하라).失意泰然(일의에 빠져도 태연히 행동하라)
최부자댁 안채14
경주 교동법주(국가무형86-3)15
교동법주는 교동 최부자댁에 전해오는 秘酒로 조선 숙종 때 궁중에서 음식을 관장하던
관직에 있던 崔國璿이 고향으로 내려와 최초로 빚은 것으로 궁중에서 유래된 술이다.
술빚기는 9월에서 이듬해 4월까지가 적기이다.원료는 밑술로 밀누룩과 찹쌀을 쓰고
덧술로 찹쌀밥을 넣어빚는데 100여일간 숙성시킨다.숙성된 교동법주는 외관이 맑고
투명한 미황색을 띠며 특유의 향기와 감미를 내는 부드러운 술이다.현재 기능보유자
는 崔梗이며 崔國璿(사옹원 참봉)의 10대손이다.
교동 법주집16
경주향교(유191호) 외삼문17
향교는 훌륭한 유학자를 제사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나라에서 지은 교욱기관이다.
이 자리는 원래 신문왕2년(682년)에 처음 세워진 국학이었던 곳이다.고려시대에는 향학으로 조선시대
에는 향교로 지방교육기관의 역할을 이어왔다.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선조33년(1600년)에 대성전을 비
롯한 제향공간을 다시짓기 시작하여 광해군6년(1614년)에 명륜당을 비롯한 강학공간을 원래모습대로
고쳐 지었다.건물은 위쪽 높은 곳에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대성전과 아랫쪽 낮
은 곳에 공부하고 생활하는 공간인 명륜당과 동.서재를 두는 전형적인 전묘후학의 배치를 취했다.대성
전(보1727호)은 앞이 3칸이고 옆이3칸인 맞배지붕집으로 엄숙함이 있다.경북에서 가장 큰 향교이다.
경주개 동경이18
한복을 입은 관광객과 소요유적답사회원(좌).우물(우측)19
경주향교 대성전(보1727호)(조선시대 선조33년1600년)20
대성전은 공자의 위패를 봉안한 건물로 전면3칸.측면3칸 규모로 맞배지붕을 갖추었다.기단은 장대석을
2단으로 쌓은 곳과 지대석 위에 면석과 갑석을 올린 곳이 혼재되어 있으며 남쪽중간과 동서기단의 남쪽
끝부분에 돌계단이 설치되어 있다.공포는 주심포계 외 1출목 이익공식이다.또한 건물의 4모퉁이 가까이
에 동자주를 세워 지붕일부를 바치고 있다.이 대성전은 중건된 연혁이 분명하며 간결하고 위엄있는 목조
건물로 옛 건축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향교에서 전통혼례(동영상)21
경주향교 신삼문과 대성전.전통혼례장면22
(2018.03.03)
첫댓글 김후직이란 인물이 유명하였구나 잘 몰랐네.황남맷돌 순두부를 사진 열심히 찍느라고 맛 잘 보았는가. 최부자 같은 집안은 정말 존경받을 인물이네.
이번 답사를 가서 처음 알았다네...진평왕 때 김후직이란 충신을...정말 죽어서까지 충절을 지킬 인물이 과연 얼마나 될까?생각해보는 하루가 되었다네...그리고 최부자댁의 선조인 정무공 잠와 최진립장군에서 문파 최준까지 나라에 헌신하는 인물이 되었으니 존경을 받을만한 인물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