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빈센트 반 고흐, [밀밭 위를 나는 까마귀]
‘다가오는 것’들을 어떻게 잘 맞이할 수 있을까?
순간순간 나에게 다가오는 그것들. 과거가 변형되어 돌아오는 것인지 아님 미래의 어떤 것이 찾아오는 것인지 알아챌 수 있을까? 운명과 우연, 혹은 또 다른 무엇으로 부르든, 다가오는 그 모든 것들을 어떻게 잘 다룰 수 있을까?
그럴 줄 몰랐다. 이런 모습, 저런 모습을 다 보고 지내기엔 17년의 교직경험은 그리 짧지 않은 시간이었음에도 이건 아니다 싶었다. 지금의 아이들을 맡은 지 1년 3개월째, 짧은 시간이었고 사춘기 시기의 아이들 아닌가? 하지만 그렇게 변명하기에는 개운하지 않은 구석들이 많았다.
시작은 이러하였다.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 눈 뜰 무렵, 아이들은 독특한 상상들을 펼쳐냈다. 한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서로 사귀는 것처럼 편지를 지어냈고, 이후 편지의 내용들은 성적인 부분까지 확대되었다. 그리곤 상상의 편지들을 여자아이들에게 보여주며 ‘너희들이 썼냐?’ 묻고 확인을 요구했다. 남자 아이들 스스로 써 놓고 말이다. 아마도 당황하는 여자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재밌어했으리라. 그후로도 계속된 편지의 수위는 점점 높아갔다. 결국 담임인 나에게까지 편지는 알려졌고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담임으로서 반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 편치 않았지만, 더 당황스러웠던 점은 누가 쓴 것이냐는 교사의 질문에 계속 부인했던 몇몇 남자아이들의 모습이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미디어에 노출되었고 자연스런 성교육이 부족했다는 당연한 이야기를 하고 싶진 않았다. 단순히 보이는 것을 넘어 무엇인가가 빠져있음을 느꼈다. 무엇일까? 단순히 아이들의 본능, 충동, 욕망이라고, 이를 자아의 힘으로 변화시키겠다고 부모들을 위로하고 안심시키기는 쉬웠지만 그렇게 하진 않았다. 그것이 문제해결의 방법일지는 몰라도, 무엇이 문제였는지 발견하기에 좋은 방법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문제를 발견하고 싶었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만 현상에 대한 해결을 넘어 원인을 알 수 있고 그때서야 아이들이 달라질 수 있다고 믿었다. 증상치료보다는 원인치료. 그런 후에나 아이가 이 문제를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방법들이 찾아질 것이며, 그렇게 하는 것이 교사로서 책임이라 생각했다. 그러기에 부모와 동료교사 앞에서 쉽게 해결책을 말할 수 없었다. 어렵더라도, 일이 쉽게 풀리지 않더라도 솔직하게 문제 앞에 마주서고 싶었다. 그것이 문제를 제대로 다루는 일이라 믿었다.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따로 시간을 갖는 것이 아니라 수업을 통해서 해결이 이루어졌으면 했다. 교사에게 수업은 아동의 삶과 만나는 장이기 때문이다.
2.
구스타프 쿠르베. [자화상 中 일부]
“어머! 강아지를 잘 그렸네. 참 잘 그렸다.” “엄마를 그렸나보네. 잘 그렸다.” 이것은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접하는 광경이다. 그런데 이 ‘잘 그렸다’라는 말에 무언가 심각한 의미가 숨어 있다는 걸, 당신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무언가를 잘 그렸다는 것은 바깥에 존재하는 것을 땅바닥이나 종이 같은 평면에 근사하게 잘 옮겨 놓았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어머니 그림을 본 누군가 그 아이의 어머니를 찾을 수 있다면, 그 그림은 ‘잘 그린’ 그림이라는 것이다. 보통 인문학이나 예술에선 재현(再現, representation)이라는 개념을 자주 사용한다. 어떤 것을 다른 것을 통해 ‘다시(再, re) 표현한다(現, presentation)'라는 의미이다. 미술의 역사에서 이 재현에 가장 높은 가치를 부여했던 사조가 바로 사실주의(realism)다.
그러니까 거칠게 말해 세계와 사회를, 그리고 인간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는 것이 미술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19세기 중엽부터 심각한 위기에 봉착한다. 그렇다, 사진이 출현한 것이다. 사진은 정말 문자 그대로 거의 완벽하게 재현을 실현하고 있지 않은가? 캔버스로 그림을 그리던 화가들은 심각한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재현이라는 기준으론 더 이상 좋은 그림이라는 걸 정당화 할 수 없을테니 말이다.
강신주, 마크 로스코, 비극과 아이러니의 예술을 위하여
발도르프 학교에서 수업을 잘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많은 부모님들이 바라시듯, 아이들이 즐겁게 학교를 다니면 훌륭한 수업을 하는 것일까? 아니 발도르프 학교는 사탕을 주는 곳이 아님을, 이가 몽땅 부러질 정도의 딱딱한 호밀빵을 선물로 주는 학교임을 다들 알고 있으니 그에 대해서는 여기서 논외로 하자. 그렇다면 아직 배울 것이 많은 독일 선진학교와 최대한 비슷하게 하는 것이 좋은 수업일까? 아니면 많은 인지학적 지혜들을 잘 전달하는 수업? 이런 수업들 역시도 다른 곳에 존재하는 것을 근사하게 잘 옮겨 놓는 수업이기에 ‘재현으로서의 수업’이라 부르려 한다.
이러한 재현으로서의 수업이 가르쳐야 할 발도르프 교육과정들을 잘 전달할 수 있다는 점을 놓고 볼 때 일면 타당성 있는 수업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대상 그대로를 잘 옮겨내는 것, 사실들을 그대로 잘 전달하는 것이 좋은 수업이라면, 어쩌면 ‘나’란 선생 대신 아이들이 컴퓨터 앞에 앉아서 독일의 최고 선생님들이 수업하는 것을 컴퓨터로 보고 따라하는 것이 더 좋은 수업 아닐까? 언어가 안 된다면 훌륭한 통역자를 구해 번역해서 자막을 넣어주는 것은 어떨까? 컴퓨터는 미디어니까 안 된다면 인간이 마치 기계인 양 배운 그대로를 흉내 내어 교육을 한다면 그것은 충분한 재현으로서의 수업은 아닐까? 그럼 이런 수업이 살아있는 수업일까? 영혼을 가진 존재로서의 인간이 수업을 한다는 것, 그리고 수업을 받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재현으로서의 수업에서는 교육과정은 잘 전달될지는 몰라도 아이와 교사가 수업을 통하여 함께 만나는 살아있는 시간을 만들어내기는 쉽지 않다. 재현 자체가 중점이기에 대상에 대한 관심은 부차적인 것으로 전락한다.
누군가 그린 칠판그림을 인터넷에서 따다 그대로 흉내 내어 그리고, 전에 했던 선생님의 수업을 그대로 전달받아 적절히 잘 버무려서 수업하는 모습들 속에서 수업을 하는 존재로서의 ‘나’는 어디에 있을까? 전달자로서의 ‘나’는 교육예술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예술적으로 잘 전달하는 것을 넘어, 하나의 예술작품을 만들어 내듯 수업을 구성할 순 없을까? 이러한 논의가 재현의 가치를 무시하자는 것은 아니다. 가르쳐야 할 내용의 전달은 그 자체로도 중요하다. 또 그림을 잘 그리기 위해 훌륭한 그림들을 모사하면서 이해하고, 채색을 따라해 보는 과정 역시 중요하다. 그리고 꼭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작품이 창의적인 예술작품일까? 타인의 형상과 방법을 모사하는 것이 예술작품이 태어나는 과정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내가 떠올린 형상이 아니라 다른 이의 형상인 것이다. 따라서 타인의 형상을 따라해 보는 작업은 수업 속에서가 아니라 수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일어나야 할 연습인 것이다. 연습 자체가 수업은 아니지 않은가? 또한 스스로가 소화되지 않은 상태의 연습이 실제 하나의 작품처럼 아이에게 전달되는 수업 역시 좋은 수업은 아니다.
이러한 바로 미루어 볼 때 재현과 사실의 전달로서 수업이 ‘생동하는 예술’로서의 수업일까 자문해본다. 생동하는 예술로서의 수업이란 무엇일까? 일단 배움과 가르침의 두 주체인 교사와 학생이 소외되지 않고 살아있어야 한다. 또 가르치고 배우는 내용들이 아이들의 삶과 괴리되지 않아야 한다. 발도르프 교육과정의 대부분이 다행스럽게도 아이들의 삶과 괴리되어 있지 않다. 아이들의 발달에 맞춰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교육과정을 잘 전달만 하면 되는 것일까?
사실 이 문제는 교육학의 오래된 - 그러나 아직도 유효한 질문이다. 살아있는 삶으로서의 아동이 중요한가? 아니면 사실의 전달로서의 교육과정이 중요한가? 물론 둘 다 과거와 미래를 아우르는 수업의 중요한 부분이다. 하지만 실제 가르치는 행위 속에서는 어느 한 지점에 방점을 찍을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는 쉽게 대답할 수는 없다. 발도르프 교육과정은 감추어진 지혜를 포함하고 있지만 그것은 학습을 하는 아이들과의 관련 속에서만 발견될 것이다. 그때서야 아이에게 수업은 지난 삶의 표상을 깨워 현재의 삶을 잘 살아갈 수 있게 할 것이며, 또한 미래의 삶을 위한 살아있는 싹으로 심어질 것이다. 과거로서의 표상을 깨우고 미래의 싹인 의지를 심는 수업. 이러한 일이 어떻게 일어나게 할 수 있을까?
3.
프란츠 마르크. [암소들- 빨강, 초록, 노랑]
인상주의가 출현하고부터 우리는 화가의 외부세계보다 그의 내면세계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가령 갓난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산책을 나온 젊은 부부에 대한 인상은 실연당한 사람과 열애 중인 사람의 시각에 따라 확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이 두 가지의 경우 인상에는 차이가 나지만, 어쨌든 그림에는 유모차에 갓난아이를 태우고 산책하는 젊은 부부의 모습이 그려져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화가들은 자신들의 내면세계로 더 깊이 들어가게 된다. 그들은 가능한 한 외부 세계의 요소들을 증발시켜 버릴 정도까지 내면세계로 파고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캔버스에 담으려고, 정확히 말하자면 표현하려고 했다. 마침내 ‘재현’이 ‘표현(expression)’에 왕좌를 내준 것이다. 표현주의든 상징주의든, 초현실주의, 혹은 다다이즘이라 불리든 20세기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온 현대 미술은 모두 ‘표현’을 왕좌에 앉히고 나머지 회화적 요소들은 신하로 강등시키면서 출현한 것이다.
강신주, 마크 로스코, 비극과 아이러니의 예술을 위하여
수업을 시작했다. 인체생리학. 원래 준비했던 주기집중 수업은 아니었다. 미리 그려놓은 칠판그림 역시 이야기 한 번 해 보지 못한 채 지워졌다. 예기치 않게 다가온 일들에 의해 준비했던 수업은 쉽게 버려졌다. 이철국 선생님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대안학교의 특징 중 하나는 불안정성이에요. 불안함이 아니라 불안정성. 근데 이 불안정성이 우리에게 꼭 필요한 유연함을 가져다주지요.”
말랑말랑한 것들의 힘! 정말 그렇긴 하다. 어디서 어떤 일이 어떻게 벌어질지 모르는 발도르프학교의 생활은 교사에게 늘 유연함을 요구한다. 굳어져 있어서는 절대 일할 수 없는 조건을 만들어준다. 준비했던 수업이 있었지만 그 수업을 미루고 아이들과 인체생리학 중 생식과정에 관해 공부를 해야겠다 싶었다. 지금이 아이들과 이 수업을 나누기에 아주 적당한 때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아이들과 수업 속에서 문제를 발견하고 싶었다. 성이란 것이 단지 남녀 생식기의 결합이라는 단순한 생각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우선 아이들이 갖고 있는 성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바꾸고자 갓난아기를 관찰하는 것으로 수업을 시작하려 했다. 천사 같은 어린 아이를 보고는 그런 생각을 하진 않겠지. 하지만 아쉽게도 그런 기회는 오지 않았다. 이곳저곳 선을 대 보기는 했으나 병원 신생아실에서 가족이 아닌 우리가 아이를 볼 수 없었다. 또 주변에 어린 아이를 찾아가 보기로 하였으나, 얼마 안 되어 다시 거절되었다. 아마도 우리의 현재 모습이 그리 순수하지 못해서는 아니었을까…. 안타까웠지만 넋 놓고 앉아 있을 순 없었다. 아이들에게 부모님의 만남과 결혼, 임신과 출산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적어오라고 숙제를 내 주었다. 다행스럽게도 부모님들 역시 이번 일의 중요성을 잘 공감하고 계셨고 아이들의 숙제를 잘 도와주셨다. 그렇게 준비를 마친 후 폴 고갱의 그림제목으로 첫 수업을 시작하였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우리는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알고 있을까? 내가 태어나기 전에 대해 조금만 주의를 기울인다면, 내가 어디로 가는지 조금만 깨어 알아차릴 수 있다면 우리 삶은 얼마나 달라질 것인가? 또 그 흐름 속을 걸어가는 나는 누구란 말인가?
아무리 풀어서 이야기했다한들 교사의 질문은 쉽지도, 가볍지도 않았다. 하지만 아이들은 진지했고 알고자 했다. 나 역시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만을 이야기하고 싶진 않았다. 나는 누구이기에, 또 무엇 때문에 이런 일들을 만나고 풀어야 하는지 의문을 갖길 원했다.
아이들이 준비해온 부모님의 만남과 결혼, 출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이들 입학원서에 적힌 이야기들보다 절실하고 구구절절한 사연들이 행간에서 읽혀졌다. 아이가 오기만을 기다리며 몇 년간 건강을 관리해 오신 어머니, 몇 년을 기다리다 포기할 쯤 운명처럼 온 아기를 너무 반가워했던 부모님, 우연처럼 만나 결혼한 분들까지 다양하지만 제각각 소중했던 이야기를 들으며 아이들은 스스로를 소중한 존재로 느끼게 되었다. 그 과정은 정말 단순한 성적 결합 이상의 무엇이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하는데 이를 위해 ‘겁’이라는 시간이 필요하다. 북한산 인수봉만한 바위에 새가 한 번 앉았다가 떠나며 바위가 깎여 평지가 될 때까지의 시간이 ‘겁’이라 한다. 가볍게 스치는 과정들도 이러할진데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얼마나 긴 시간 애쓰며 노력했던 과정이란 말인가? 하지만 우리가 누구를 만난다 하여 다 사랑의 감정이 드는 것은 아니다. 그 무수한 만남들 속에서 단지 몇몇 특정한 사람들에게 영혼의 울림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 경험이 더 간절해 질 때 우리는 수줍은 고백을 하게 된다. 물론 그 고백이 내 진정한 표현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꼭 성사되리란 법은 없다. 성사된다 하여도 그것이 연애로, 연애에서
결혼으로 당연히 이어지지 않는다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또 운좋게 결혼한다 하여도 그것이 임신과 출산의 과정으로 당연히 이어지리란 보장은 없다. 우리의 진실함과 간절함, 그리고 보이지 않는 존재들의 도움이 이러한 과정을 돕는다. 부모님들이 진실함과 간절함으로 만나 결혼과 임신의 과정까지 오게 되는 그 지난한 과정을, 실은 자신들이 도왔다는 것을 아이들은 떠올릴 수 있을까?
다행스럽게도 아이들은 누군가의 진실함과 간절함 속에 태어난 자신들의 소중함을 잘 느껴주었다. 어쩌면 스스로가 무언가를 이루기위해 이 땅에 내려오고자 한 커다란 간절함을 다시 떠 올렸을지도 모르리라. 이전과는 다르게 외적인 수업 태도도 진지했지만, 수업 중 아이들의 눈빛 속에서 내면에서 다르게 반응한다는 것을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 긴 과정들 속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나를 바라볼 수밖에 없던 지점이었다. ‘나’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성(性)적 사고방식들이 아이들에게 보이지 않게 어떤 영향을 준 건 아닐까하는 자책도 들었다. 나란 사람 역시도 한국에 태어나 한국 남자의 사고방식의 영향을 사회와 부단히도 주고받았던 부분을 어떻게 바꾸어낼 수 있을까? 아니 ‘바꾸어내려 하긴 하는가?’에 대한 의구심도 들었다. 이런 ‘나’의 한계를 어디까지 밝혀가며 아이들과 수업을 해야 하는지도 부담스러웠다. 그가 무엇을 알고 있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가 누구인가?’ 가 가장 중요하다는 슈타이너의 말이 떠올랐다. 아이들과 만난다는 것은 쉼 없는 자기교육이며 아이들을 가르치는 동안 교사 스스로가 가장 많이 배우고 바뀌어야 하는 과정이다. 내가 가르치는 내용을 통해 나를 드러내면 낼수록 나 역시도 삶을 달리 살아야 하는 거구나. 그때서 아이들은 잘 배우는 구나. 가르칠 수업 내용을 통해 아이들은 자신들의 발달을 잘 이루어내고, 교사 역시 그 과정 속에서 자신의 나이에 맞는 발달과업들을 풀어나가는 길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수업 그 자체가 아이들을 지혜롭게 만들진 않지만, 아이들이 수업을 받는 과정에서 어떻게 세상을 만나고 받아들이냐에 따라 아이들은 지혜의 길을 걸을 것이다. 혹자들이 비평하는 ‘인성’과 ‘실력’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으려는 욕심이 아니다. 원래 그 둘은 하나이며 하나 안에 들어있는 두 가지 속성인 것이다. 교사인 우리가 세상과 그 속에 존재하는 것들을 어떻게 만나는가, 그리고 아이들에게 어떻게 만나도록 도와주는가가 아이들이 이 땅에서 굳건히 발 딛고 살게 해 주는 열쇠인 것이다. 무엇을 얼마만큼 아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처음 그것을 어떻게 만나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달을 잘 알기위해 분석하고 조사하는 것이 아니라 달이라는 존재를 먼저 사랑하는 법을 가르치는 교육, 그리고 그것을 말로 ‘사랑하라’ 이야기하지 않고 ‘사랑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수업. 그것이 존재가 가지고 있는 비밀을 열 수 있는 열쇠인 것이다. ‘인성’이라는 한 속성을 강조하여 수행의 길을 걷는 대안적인 교육들과 ‘실력’이라는 다른 면만을 중시하여 목적 위주로 달려가는 공교육. 둘 다 조화로워보이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서 아슬아슬 흔들거리며 줄타기를 해 나가고 있는 발도르프 교육. 그 줄을 끝까지 잘 타고 가게 될 지 그렇지 않을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는 그렇게 매일 흔들거리며 수업을 한다. 아슬아슬하게. 흔들흔들 거리면서.
4.
빌렘 데 쿠닝. [gotham news]
달이 차는 순간이 곧 달이 저무는 순간이 아닌가. 현대 미술의 논리적 귀결인 추상표현주의는 철저하게 재현, 즉 구체성을 추방한 대가로 치명적인 후유증을 앓게 된다. 한마디로 화가 본인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듯한 작품들, 심지어 화가 자신조차 무엇을 의미했는지 알기 어려운 작품들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이 자기가 완성한 그림을 혼자 보려하지 않고, 전시회를 개최해 타인들에게 보려 주려고 했다는 점이다. 정말로 아이러니 아닌가. 자신의 내면세계를 철저히 표현했기에 타인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작품을 만들어 놓고 그걸 전시하는 화가나, 시간과 돈을 투자해 그런 곤혹스러운 작품을 보느라 진땀을 빼는 관람객이나……. 아무래도 무언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듯한 느낌이 들기 마련이다. 표현성을 극단으로 추구한 대가는 이처럼 치명적이었던 것이다. 으레 예술가와 관람객 사이에 빚어져야 할 소통의 감동이 전시장에서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통 가능성을 막고 표현성만을 극단으로 추구하는 순간, 화가의 그림은 좀체 알아들을 수 없는 갓난아기의 절규와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은 내면세계를 표현해야 한다는 입장을 강조하느라 자신들의 표현이 타인들에게 던져진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한데 사실 무언가를 표현한다는 것은 타인에게 이해되고 싶다는 무의식적인 욕망을 전제하고 있는 게 아닐까? 결국 표현과 소통은 서로 기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럼 표현성과 소통성을 동시에 확보하는 그림은 불가능하기만 한 것일까?
강신주, 마크 로스코, 비극과 아이러니의 예술을 위하여
위에서 발도르프교육과정은 감추어진 지혜를 포함하고 있지만 그것을 교사가 발견하고 아이들과 잘 만나게 해 주어야만 살아있는 경험이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하였다. 아이들의 발달과 흥미, 욕구를 중시하면서 아이들로 하여금 발도르프교육과정과 의미 있는 관련을 맺도록 하는 일이 중요하며 이러한 일들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하여 탐험가와 지도에 비유해보자. 탐험가가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일이 마치 아동들이 새로운 내용을 배울 때와 다를 바 없다. 탐험가는 새로운 강이나 산 또는 사막 등을 발견하면서 그 거대함에 놀라고 아름다움에 압도당한다. 그는 탐험 도중 배고픔과 목마름 등 많은 어려움과 고통을 겪게 된다. 그런 과정 속에서 이상한 습관을 가진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호의에 찬 대접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생명의 위협을 받다가 탈출하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다양한 경험들을 겪으며 여행을 끝내고 탐험가가 집으로 돌아오게 되면, 그는 자기가 탐험한 지역에 대한 지도를 그리게 된다. 그가 그릴 지도 속에는 자기가 본 사막이며 산과 강, 그리고 부족들의 이름들을 그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 표시해 넣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지도가 완성되어 탐험가의 손을 떠나면, 그것은 이미 이차원의 종이 위에 표시된 선과 글씨일 뿐이지 탐험가의 흥미진진했던 경험 그 자체는 아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지도를 직접 만들도록 하는 경험을 주거나, 그 지도를 통해 그 안에 들어있을 수많은 이야기를 상상해보는 대신, 이미 만들어진 지도를 무미건조하게 건네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물론 여행자에게는 무미건조한 지도도 유용한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러나 그 지도가 탐험가 자체가 겪었을 생생함을 담고 있지는 못하다. 그것은 전달되는 그 시기부터 죽어있는 지식, 예술, 수업일 것이다. 우리는 그 죽어있는 것을 살려내야 하는 과제를 가지고 있다. 슈타이너는 그것을 아이의 상상 속에서, 아이의 감성 속에서 살리기를 요구하고 있다.
아동들에게 진정으로 의미 있는 수업은 어찌 보면 탐험의 상상 그 자체이다. 아동들에게는 탐험가와 마찬가지로 어떤 교과 영역에서 살아있는 상상을 갖게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자기에게 의미 있는 지도를 그릴 수 있도록 하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물론 이 때에 아동들의 상상의 탐험은 이미 그 지역을 잘 알고 있는 교사에 의해 계획되고 안내되어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그 과정에서 필요한 것이 우리가 발달이라 칭하는 보편적 인간에 대한 이해이다. 그러나 보편적 인간에 대해 이해한다 하여도 개별적인 아이들을 만나는 일은 생각만큼 쉽진 않다. 현대의 아이들을 만나는 과정은 마치 추상표현주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미술관에 감상하러 가는 일과 같다. 물론 어느 정도 현대 미술에 대한 이해가 있는 사람이라면 조금 수월할 테지만 그렇다 하여도 모든 그림을 잘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현대 미술은 우리가 그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 더욱 의지를 내야하는 과정일 것이다. 이전의 그림들처럼 말하고자 하는 바가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아이들을 만난 시간들이 늘어갈수록 알게 된 사실은 현대의 아이들도 이와 비슷하다는 점이다. 내가 교사로서 아이들을 더 이해하려고 의지를 내야만 아이들은 자신들의 삶을 열어준다. 그리고 그 순간에 아이들은 자신들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빛나는 무엇을 보여준다.
이렇게 볼 때 수업을 잘 진행하기 위해서는 교사의 ‘알아차림’이 참 중요하다는 점이다.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시피 인간의 발달은 보편적인 것이다. 우리가 독일의 하늘에서 북극성을 바라보나 한국의 하늘에서 북극성을 바라보나 그 대상은 변하지 않는다. 이것이 보편성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 다른 토양, 대지위에 서 있다. 독일에서 북극성을 찾을 수 있는 위치(고도)와 방법은, 한국에서 북극성을 찾는 방법과는 다른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다양성이다. 그리고 그러한 하늘의 북극성을 보며 갖는 의미는 사람마다 다 다를 것이다. 이는 인간이 지닌 개별성 때문이다. 이렇듯 ‘나’라는 존재는 고유하고 개별적인 존재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보편적인 발달을 따른다. 각 지역마다 각 학교마다 나름의 다양한 땅 위에 서 있지만 아이들의 발달은 크게 다르지 않다. 비슷한 성장의 과정을 거치며 비슷한 일들을 겪어가며 아이들은 고유하게 성장해 간다. 발달에 따른 교육이란 아이들의 발달에 따라 무엇인가를 전해주는 일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이 다양성과 고유성(개별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그대로 전달되고 재현된다면 그것을 살아있는 수업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각자가 발 딛고 있는 지역과 아이들의 고유한 특성이라는 맥락 속에서 새롭게 재구성되어야지 단순히 사실의 재현으로 전달되어서는 생동하는 수업일 수 없다. 그것은 완성된 지도를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따라 그리는 수업일 뿐이다. 그 과정에서 아무리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부르며 예쁘게 에포크 공책을 꾸민다 하여도 그것은 ‘수업의 예술화’와는 거리가 있다. 이러한 수업의 순간을 잘 준비하기 위해 아이들이 보편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 ‘나-자신’을 열어 보일 때 그 고유한 속내와 순간을 잘 알아차려야 한다.
아이들은 말로, 행동으로 끊임없이 자신의 발달상황을 이야기한다. ‘나에게 이런 것이 필요해요. 그것을 나에게 채워주세요’라는 말을, 자신의 시기에 맞는 언어로, 나이 또래에 맞는 행동으로 표현한다. 교사로서 우리는 그러한 아이들의 이야기들을 ‘세심하게 헤아리고 잘 알아차려야’ 한다. 여러모로 무디고 느린 내겐 늘 그 지점이 어렵다. 아이들의 요구에 버스 지나간 후 손 흔드는 일이 다반사다. 뒤늦게 헤아려 보건데 이번 일도 그런 일들 중 하나였다.
아이들은 성과 관련된 이번 일들을 통해 자신들이 이 땅에서 채우고자 했던 부분은 무엇이었을까? 이번 일과 그에 따른 수업을 통해 내가 뒤늦게라도 배우게 된 것은 무엇일까? 어느 정도 일단락 된 지금 생각해 보건데 아이들이 원했던 것은 정신적인 것에 대한 갈급함이었다. 일반학교에서 전학 온 아이들로 구성되어 시작된 우리 반인지라 물질 문화에 많이 노출되어 있었다. 아이들 안에 들어온 물질적인 성 관념들 - 아름답지도 않고 맥락 없는 미디어의 잔상들이 아이들을 힘들게 했던 것은 아닐까? 단순한 성기의 결합이 성(性)이 아닐거라고, 더 너머의 것들을 알려달라고 이런 일들이 일어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물질적인 부분을 넘어서는 수업들이 부족했다. 통합학년에 다양한 시기에 입학한지라 교육과정을 체계적으로 밟아오지 못했다. 그렇기에 아이들에 맞는 수업을 진행하기보단 일반학교에서 ‘진도빼기’ 수업을 하듯, 아이들이 이수하지 못한 발도르프교육과정을 수업해 나갔던 것이 사실이다. 물론 개념을 주입하는 수업은 하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아이들에게 필요한 수업을 했다고는 보기 어려웠다.
그래서 아이들은 온 몸으로 나에게 맞는 수업을, 살아있는 수업을 해 달라 요구한 것은 아니었을까? 조금만 섬세했다면 이런 것들을 잘 알아차렸을텐데……. 한 해 두해 학교에 있으며 경력이 쌓인다 해서 좋은 교사가 되는 것은 아닌 듯하다.
이번 수업을 통해 아이들과 많이 이야기한 부분이 ‘보이지 않는 것들이 어떻게 보이는 것으로 변화하는가?’, 또 그 반대로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어떻게 변화하는가’ 였다. 수태와 출산을 통해서도 그러했고, 이후 호흡과정이나 소화과정을 통해서도 아이들이 이러한 부분을 궁금해 하며 묻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면 드디어 화학을 배울 준비가 된 것인가?
이번 일들을 통해 아이들이 어떻게 단단해졌는지 비교해보며 결정과정을 통해 인간이 부패 과정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결정들의 용해를 통해 사랑의 속성을 느끼며, 연소 과정을 통해 희생에 대해 알게 되는, 그런 화학 수업을 준비해야겠다.
첫댓글 도현맘:짝짝짝🎶~ 박수를 보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