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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단, 도독부, 간도국민회, 대한독립단의 봉오동전투
봉오동전투는
실제 봉오동전투는 1920년 6월 4일에 일어난 강양동 초소 습격사건에서 시작되어 6월 7일 봉오동 상촌 전투를 끝으로 끝이 난다. 그러나 봉오동전투는 하루아침에 우연히 이루어진 전투가 아니다. 간도 조선인들에 의해서 20년 이상 준비된 전투였다. 20년 동안의 준비는 학교 설립, 교회 및 간 종교단체의 활동, 간민교육회와 간민회 활동 등을 통해서 서서히 이루어졌으며 일본과 중국이 맺은 조약과 세계정세가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기폭제가 되었다. 무엇보다 봉오동전투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1919년 용정 3∙13만세시위였다. 만세시위가 무력으로 진압을 당하자 만주의 조선 간민들은 무력투쟁을 결심하였고 무장투쟁 단체를 만들어 일본의 군사시설, 공관과 시설을 파괴하는 국내진공작전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일본 제국주의는 만주를 발판 삼아서 중국 침략을 하고 아시아제국을 세우기 위하여 무엇보다 먼저 간도의 조선 독립군을 섬멸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봉오동전투는 4일간의 전투였지만 실제로는 1900년대 초부터 꾸준히 준비된 전투였다. 봉동전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전투의 서막이 된 용정 3∙13 만세시위와 그 배경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용정의 3∙13만세 시위는 준비된 시위였다.
첫째 고난과 시련 속에서 자치에 대한 의지와 독립에의 욕구가 충만해졌다.
대부분의 조선 이주민들은 1885년 청의 이민실변 정책으로 귀화를 하여 합법적인 중국인이 되었으며 20년 세월동안 피땀 흘려서 명실 공히 만주를 개척하였다. 그러나 1907년에 일제가 간도를 조선의 연장으로 주장하며 조선 교민 보호를 핑계 삼아 용정에 통감부 간도파출소를 세움으로서 새 땅을 찾아서 만주로 나온 그들의 고난이 시작되었다.
1909년 일제는 청나라와 ❰간도협약❱을 맺으며 남만주철도부설권과 무순 탄광 채굴권을 얻는 대가로 간도를 청의 국토로 인정하였으며 “두만강북쪽의 잡거구내에 거주하는 조선인은 중국의 법권에 복종하며 중국 지방관리의 관할과 재판을 받아야한다. “ 지만 통상도시에 사는 조선인에 대해서는 일본이 영사재판권을 가진다고 하여 대다수의 조선인들을 자신들의 관리 하에 두었다. 1910년 한일늑탈 후 일제는 조선이 망했으니 조선인들은 일률적으로 ”일본신민“이라고 주장하면서 동북삼성내의 조선인을 통치하려 하였다. 1915년 일제가 원세개정부와 ❰21개 조약❱을 체결한 후에는 동북의 조선인에 대하여 중국 귀화여부를 막론하고 일본인으로서 ”치외법권“을 가진다고 주장하였다. 중화민국 정부는 일제가 조선인들을 통하여 침략의 마수를 뻗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동북의 조선인들에게 귀화입적을 강제하였으며 귀화입적하지 않으면 조선인으로 취급하여 토지소유권을 주지 않았다. 민국의 귀화입적정책은 민족동화정책이었으며 일제의 핍박을 피하기 위해서 귀화입적한 자에 대하여 아무런 보호조치가 없었다. 그런 가운데 동북의 조선인들은 중국정부에 의거하여 일제의 통치를 벗어나려고 간민교육회, 간민회 등을 조직하여 조선인의 자치를 실시하려 하였으나 민국정부는 조선인의 자치를 허용하지 않았을 뿐 만 아니라 오히려 일제의 종용으로 조선인들의 독립운동을 탄압하였다. 망국민으로서 조선 이주민은 10여 년 동안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침략과 방어의 도구로 이용당하며 고통과 고난, 차별과 학대에 치를 떨며 자치와 독립에의 염원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둘째 교육을 통한 민족의식과 항일정신이 고조되었다.
조선인들이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고 생계가 펴지자 마을마다 서당(서숙) 꾸리기 시작하였다. 서당은 <삼강오륜> 등 봉건유교사상과 윤리도덕을 가르치면서 동시에 민족의식과 항일의식을 심어주었다.
1905년 이후부터 조선의 애국문화 계몽운동의 영향으로 조선 이주민들 사이에서도 민족계몽운동과 항일교육이 시작되었다. 이 운동의 중요한 거점으로서 사립학교들이 흥기하였다. 이에 따라 구식서당은 민족사립학교나 개량식 서당으로 바뀌어서 대중과 청소년들에게 민족정신을 일깨워주었다. 1928년 통계에 의하면 민족교육을 한 개량식서당이 328개나 된다.
1906년에 문을 연 <서전서숙>이 근대민족교육을 시작한 이래로 훈춘의 신풍학교, 와룡동의 창동학교, 명동촌의 명동학교, 광개사 후저동의 정동학교가 속속 들어서면서 항일민족의식에 근거한 교육을 통하여 조선 이주민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1910년 3월, 간민교육회는 학교교육을 주도하여 학생들에게 근대교육과 항일교육을 실시하여 간도를 독립운동의 기지로 건설할 것을 목적하여 세워졌다. <월보>를 발행하며 회원들을 각지에 파견하여 간민교육회 취지를 홍보하였으며 기금을 모아서 학교교육을 발전시키기 위해 힘썼으며 역사 교과서 등을 집필하여 편찬하였다. 간민교육회의 활동으로 소영자의 길동기독학당. 길신여학교가 설립되었으며, 길동학당 중학부가 속성사범으로 개칭되어 교원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간민교육회 뒤를 이은 간민회도 사립학교설립운동을 계속 추진하였다. 회원들은 교육비로 회비 30전씩 납부하였으며 학교들이 근대교육과 항일교육을 하도록 지도, 격려하였으며, 구식서당을 개량시키는데 앞장을 섰다. 간민회가 중국정부에 의해 해산된 이후에도 간민회 회원들은 <간민교육연구회> 이름으로 사립학교 운동을 추진시켜 근대문화와 항일교육을 견지하였다.
1916년 통계에 따르면 연변 4개현의 사립학교총수는 156개, 학생수는 3,700명이나 되었다. 대부분의 학교들이 근대학문과 민족교육을 실시하여 1919년에 이르렀을 때, 연변은 민족의식과 독립운동에 대한 희망과 기대로 청년들의 가슴이 용광로처럼 끓고 있었다.
1920년 일제의<경신대학살>때 이른바 <불령선인들의 소굴>로 지목되어 토벌대상이 된 사립학교만 하여도 41개나 되었다. 사립학교의 발전은 연변 조선인들이 민족의식으로 하나가 되어 항일운동으로 무장투쟁을 전개할 수 있는 사상적, 조직적인 토대를 만들어 주었다.
셋째 기독교를 통하여 간민들의 민족의식과 항일정신이 고양되었다.
카나다 장로교회는 1898년에 연변을 선교구로 정하였고, 1903년에 조선의 이민을 따라서 연변에 들어 왔으며, 1912년에는 용정에 기독교선교부를 세우기 시작하였다. 카나다장로교회 선교사들은 조선 간민들의 반일감정과 독립운동을 지지하며 격려하였으므로 많은 독립투사들이 선교사들과 함께 복음을 전하며 교육과 계몽운동에 참여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 황병길, 오병묵, 남공선, 박무림, 정재면, 강백규, 김약연 등이 있다.
카나다장로회는 1906년에 용정교회, 양목정자교회, 광제욕교회를 설립하기 시작하여 1921년에는 63개의 교회를 개척하였다. 대부분의 교회 설립자들이 독립정신으로 무장된 독립투사들이었으며 그들은 선교사들의 협조와 지지를 받아 교회 가까이에 사립학교를 세웠다. 1928년 통계에 의하면 카나다장로회 소속의 신도들이 세운 학교가 44개, 1926년 통계에 보면 외국인선교사들이 세운 학교가 19개 였다. 용정 3∙13 만세 시위에 앞장선 정동학교, 창동학교, 명동학교, 광성학교(길동기독학교) 들이 다 크리스천들이 세운 미션스쿨이었음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3∙13 만세 시위 준비모임이 2월 18일과 20일에 연길 박동원의 집에서 열렸는데 대부분의 참석자가 크리스천이었다. 구춘선, 김영학, 고평, 박동원, 이홍준, 이성근, 박경철, 김순문, 강룡헌, 이성호, 백유정, 최봉렬, 박정훈, 김동식 등을 비롯한 33명이 비밀 회합을 통해서 합의한 내용을 보면 1) 북간도내 각 교회와 모든 단체는 단결, 협력하여 조국독립운동에 힘을 다 바칠 것. 2) 모든 간도 내의 단체는 멀지 않아 연해주에서 협의, 반포할 조선민족독립선언서의 공포와 동시에 시위할 것. 3) 독립선언서가 발표되면 간도 내 각 단체의 유력자는 용정에 집합하여 독립선언을 하여 기세를 올릴 것 등이었다. 준비위원들의 면면과 결의사항 1)에 의하면 기독교가 3∙13만세시위에 끼친 영향이 지대한 것을 알 수 있다.
기독교 뿐 만 아니라 대종교 또한 민족교육과 항일무장투쟁에 앞장선 것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잘 알려진 청산리전투의 주력부대 중의 하나인 북로군정서 부대가 바로 대종교의 지도자 서일이 10년 세월을 쏟아 부어 만든 독립군 부대였으니 당시 대종교의 종지가 조선의 독립이 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천주교의 일부와 원종교, 청림교도 교육과 독립운동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3∙13만세 시위에 참여를 하였다.
넷째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으로 “외교독립론”에 고무되었다.
1919년 1월 파리 강화회의가 열리고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전쟁후 처리의 원칙으로 <14개조 조목>의 내용을 선포하였는데 제 5조는 <민족 자결주의>문제 였다. 이는 약소민족의 해방에 관련되어 있으므로 독립투사들은 이에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11월 중순에 윌슨은 크레인을 특사로 중국에 파견하여 전승국인 중국도 파리강화회의 참석하여 빼앗긴 산동교주만조차지와 산동 등의 이권을 되찾게 함으로써 일본의 중국 침략을 견제하려 하였다. 크레인이 상해에 도착하였을 때 환영회에 참석했던 여운형은 파리강화회의에 중국대표로 참석할 왕정정, 육미상을 통하여 크레인을 회견하고 조선독립을 요청하는 문건을 전달하였다 또한 그는 한국도 일제의 식민지 통치와 압박에서 벗어나 독립을 실현하기 위해 파리강화회의에 우리 대표를 파견하겠다며 중국 대표들이 미국 대표로 하여금 일제 식민지 통치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로 인하여 조선인들은 미국과 중국의 도움으로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여 독립을 실현하려는 환상과 기대를 가지게 되었다.
이런 무드 속에서 연변대표들이 러시아로 떠난 후, 2월 18일, 20일 양일에 국자가 동쪽에 있는 박동원의 집에서 항일지사 33명이 모여서 항일운동방침을 논의하며 <독립운동의사부>를 결성하고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상항을 합의하였다. <독립운동의사부>는 니꼴라스크로 간 연변대표들이 돌아오는 것을 기다려, 간도 각지의 예수교, 천주교, 대종교 및 공교회 유력자들과 서로 연락하며 신도들과 모든 이웃들을 권고, 동원하며<독립선언서> 발표대회에서는 윌슨의 <14개 조목>의 내용인 <정의, 인도>, <민족자결>과 민족 독립을 주장하며 민족독립만세를 부르기로 하였다. 반도와 동북의 조선인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우리의 해방과 독립을 지원한다고 확신을 가졌다.
3∙13 평화시위에 유혈이 낭자해졌어도!
<독립운동의사부>는 만세시위 행사를 <독립선언서반포축하회> 로 명하였으며 곧 다가올 독립선언을 축하하고자 하였다. 3월 13일, 과연 용정에서는 연길, 화룡 등지에서 온 간민 3만여 명이 모여 역사에 길이 빛날 독립선언축하회를 열었다. 오후 1시, 김영학의 사회로 <간도거류조선민족일동>의 명의로 된 <독립선언서포고문>이 낭독되고 배형식, 유례균, 황지영의 연설이 있었고 간민들의 열렬한 환호로 <조선독립만세> 소리가 진동하였으며 태극기 물결이 하늘을 덮었다.
대회가 끝나고 시가행진이 시작되었다. 시위대 맨 앞에 공덕흡이 <조선독립을 성원> 이라고 슨 오장기를 높이 들고 나갔고 그 뒤로는 태극기와 중화민국 국기를 추켜든 정동중학교와 명동중학교의 교원과 학생들로 구성된 300여 명의 충렬대가 질서정연하게 전진하였다. 그 뒤로 일반 민중들이 열을 지어 따랐고 민중들은 <조선독립 만세>, <일제의 침략을 반대한다>, <친일주구를 타도하자> 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일본간도총영사관을 향해서 전진하였다.
그때 중국군경들과 숨어든 일경에 의해 총알이 발사되었고 총 19명이 시위대원들이 순국을 하였다. 오장기 기수 공덕흡을 비롯한 9명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으며, 9명은 제창병원에서 사망하였고 한 분은 제창병원에서 퇴원한 후, 집에서 세상을 떠나셨다. 48명이 부상을 입었고 300여 명이 체포되어 심문을 당하였다. 불완전한 조사 자료들을 종합하면 동북의 조선족 거주지3월부터 5월 1일까지 각종 시위가 73차나 열렸고 참가 인원수는 무려 104,850명에 달하였으며, 15현에 파급되었다. 3월 13일부터 4월말까지 연변(연길현, 화룡현, 왕청현, 훈춘현)에서만 하여도 46차의 항일시위가 열렸고 참가한 인원수는 86,670명에 달했다. 1920년 연변의 조선 이주민의 인구가 192,532명이었다는 감안할 때 거의 절반에 가까운 인구가 항일시위에 참석하였다는 것은 연변의 독립에의 의지와 열기를 보여주고도 남는다.
비폭력 시위로 평화집회를 시작하였으나 중국군경과 일본 경찰의 탄압으로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조선 이주민들은 피 흘리는 전쟁 없이 독립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여실히 깨달았다. <민족독립은 민족의 힘으로>, <폭력에는 폭력으로>라는 의식의 변화가 일어나 이주민들은 신속하게 무장독립단체를 조직하여 자신들의 신변 보호를 위한 자위대와 독립전쟁을 위한 독립군의 창설하였다. 1919년 한 해에 연변에서 창건된 무장독립단체가 30개나 되었으며 1920년 8월의 통계에 의하면 훈춘 한민회를 제하고 그들이 모금한 금액이 50만원이었다. 1910년에 쌀 한 가마에 3원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모금액은 연변 이주민들에게는 천문학적인 숫자라 아니할 수 없다. 무장독립단체들의 독립군 모집, 교육 및 훈련, 보급과 활동이 차츰 자리를 잡으면서 1919년 8월부터 국내진공작전이 자연스럽게 진행되며 단체들의 연합동이 일어났다.
준비된 첫 승리! 위대한 가능성! 아 봉오동전투
1919년 8월부터 1920년 5월 까지 독립군부대의 수십 차 전투는 모두 두만강을 건너서 조선땅에서 진행된 기습전이었으나 봉오동전투는 독립군연합부대가 중국 연변 땅에서 일본군을 섬멸한 첫 전투였다.
봉오동은 도문시에서 서북쪽으로 15리 떨어진 곳에 있으며 남봉오동과 북봉오동으로 나뉘어 있었다. 남봉오동은 지금의 고려툰과 신선동일대를 말하고 북봉오동은 어구의 수남촌과 토성촌으로부터 동북방향으로 뻗은 20여리의 골짜기를 말한다. 당시 북봉오동골짜기는 하촌, 중촌, 상촌으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봉오동을 개척한 최명록(최진동)의 자위대에 기초된 무장독립단체인 <도독부>가 소재하고 있었다.
봉오동전투전 인근 각지의 무장독립군 부대의 주둔상황을 보면 봉오동에서 동북방향으로 약 70 키로 미터 떨어진 곳에 왕청현 서대파 십리평에 북로군정서가 있었고, 서쪽으로 약 10 키로 미터 되는 석현에 신민단 본부가 있었고, 서북쪽으로 지점인 대감자에 광복단이 주둔하였고, 남쪽 가야하에는 의군단이 있었고, 가야하에서 서쪽으로 50 키로 미터 떨어진 의란구에 국민회본부가 자리 잡고 있었다.
1920년 5월 3일, 봉오동에서 간도국민회의 주도로 <군무도독부>, <신민단>, <군정서>, <광복단>, <의군단>, <국민회> 가 모여서 연합작전에 관한 합의를 하였다. 5월 22일, 대한독립군단과 도독부의 연합으로 군무도독부가 편성되어 홍범도장군이 북로제1군사령관으로 추대되었다. 5월 28일에는 국민회군이 연합에 동의를 하여 <대한북로독군부> 편성되어 홍범도장군이 역시 북로제1군사령관에 추대되었다. 당시 대한북로독군부는 봉오동에 병영을 설치하고 병력을 집결시키면서 강력한 무장투쟁을 계획하였다. 독군부의 산하 독립군은 1,200여 명, 기관총 2문, 보총 약 900정, 권총 약 200자루, 폭탄(수류탄) 약 100개, 망원경 7개, 탄환은 군총 1정당 150발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렇듯 무장독립운동의 의지와 열기가 고조되었을 때, “봉오동전투는 삼툰자 전투가 서막을 열었고, <후안산전투>를 거쳐서 상촌 <봉오동전투>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삼툰자전투
삼툰자전투는 6월 4일부터 6월 6일까지에 일어난 전투 또는 접전으로 1) 독립군의 강양동 초소 습격전, 2)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삼툰자에서 전개된 독립군과 일군의간의 총 싸움 3) 삼툰자 서북방에 와서 숙영하고 있는 일군추격대를 독립군이 기습한 전투를 포함하고 있다.
강양동습격은 6월 4일 새벽 5시경, 신민단 소속 박승길의 부대 30여명이 강양동의 일군 초소를 습격하여 일군헌병군조 4~6명을 일시에 섬멸한 기습전이었다.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일어난 독립군과 일군의 총싸움은 6월 4일, 중국 걸만동 방면으로부터 무기를 갖고 강양동 초소 습격하고자 삼툰자에 도착한 독립군과 일제의 종성수비대 순찰병들 사이에 일어난 접전이었다. 신민단의 박승길 이하 단원들은 강양동 초소를 치고 돌아오고 다른 길에서 다른 독립군 부대가 강양동 초소를 습격하러 들어가다가 일군 순찰병에게 발각되어 교전을 벌인 것이다.
삼툰자전투는 독립군과 일군의 교전 소식을 들은 아라요시중위가 6월 6일, 부하를 거느리고 두만강을 건너옴으로 시작되었다. 그들은 독립군을 추격하여 삼툰자 서북방에 도착하였으나 독립군을 발견하지 못하자 화풀이로 마을의 무고한 조선인들을 학살하였다. 밤 10시경, 그들이 어둠 속에서 독립군 추적을 포기하고 숙영하고 있을 때, 무장 독립군들이 삼툰자 서북방고지에 이르러 보초들을 습격하고 안산방면으로 퇴각하였다.
후안산전투
후안산은 지금의 고려툰(당시는 남봉오동)에서 남쪽으로 약 8리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고려령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며 또 봉오동에서 도문으로 통하는 길옆에 위치해 있어서 당시 독립군들의 주요한 활동거점이 되었다. 후안산전투는 1920년 6월 6일 밤 12시부터 6월 7일 이른 새벽 2시까지 후안산 부근에서 일어난 전투이다.
6월 6일 19사단 소속의 야스가와소좌는 기관총 1소대와 보병 1개 중대의 병력으로 <월강추격대>를 편성하여 밤 9시에 남양에서 가까운 두만강을 건너 후안산으로 진군하였다. 야스가와와 아라요시는 후안산 앞에서 회합하였고 진군 작전을 짰다. 당시 후안산 앞에 집결한 일군추격대의 병력은 대략 300 여 명에 이르렀다. 그들은 봉오동으로 가는 길 안내자를 찾기 위해 정찰병을 마을에 보냈다. 그 시각에 조선에서 의연금을 모아온 최명국 이하 13명의 신민단 단원들이 후안산 최진국의 집에서 비밀회합을 하고 있었다. 정찰병은 불빛을 발견하고 무작정 문을 열었다. 기습에 놀란 최명국 일행은 정찰병을 쓰러뜨리고 북쪽 고려령 기슭으로 후퇴하면서 추격해오는 일군에게 총 사격을 가하였다. 전투는 2시간 정도 진행되었는데 야밤이었으므로 손실은 크게 없었다. 독립군 1명과 여성 1인이 희생되었으며 부녀와 어린 아이가 부상을 당하였고 마을 사람 6명이 체포를 당하였다.
봉오동전투
후안산에서 독립군을 추격하던 일군 추격대가 기세가 등등하여 <대한북로독군부>의 본부가 있는 봉오동을 향하였다. 독군부는 그들을 섬멸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작전을 수행하였다. 가장 큰 일은 추격대 전원을 매복권 내로 유인하는 것이었다.
6월 7일 아침 4시 45분 일군 전위 중대가 고려령 북방 1500 미터 지점에 도착했을 때, 매복하고 있던 이화일부대가 적에게 집중 사격을 가하고 고려툰 뒷산 산등성이를 넘어 북봉오동으로 후퇴하였다. 일군은 퇴각을 하다가 대오를 정비하여 이화일부대의 퇴각노선을 따라 북봉오동으로 진군하였다. 그들은 하촌, 중촌을 지나 오후 1시경에 추격대 전원이 매복권 내에 들어섰다. 동서남 삼면에 매복해 있던 도독부, 대한독립군, 신민단의 군인들의 교차사격을 받고 전의를 상실하였다. 오후 4시 20분경 천둥번개가 치며 하늘이 어두워지고 폭우와 우박이 내리는 기회를 틈타서 그들은 비파동으로 퇴각하였다.
<길장일보>는 일군 150명 소멸, 부상자자가 수십 명이라고 보도하였다. 국민회의 보고서에 의하면, 독립군측은 군의 황하백, 군인 주택렬 양씨가 순직하고 2명이 부상을 당하였으며, 마을주민 5명이 부상을 입었다.
봉오동전투의 정신이여! 영원하라!
봉오동전투 99년이 되는 해에, 한국이 아베의 망언과 경제전쟁으로 화산처럼 끓고 있다. 마치 100년 전 용정의 3∙13만세 시위가 폭력으로 유혈이 낭자해지고 독립의 길이 막히자, 우리 조상들이 화산처럼 끓어오르는 분노와 애국애족의 열정으로 총칼을 들고 독립전쟁의 현장으로 앞을 다투어 나가고 있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한일 간의 역사전쟁이 앞날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하늘이 어둡다.
봉오동전투는 민초들의 나라의 사랑이 핏빛으로 피어난 꽃이다. 감동이고 가능성이며 우리의 길을 보여주는 안내판이다.
봉오동전투는 역사에서 사라진 조선이 제국의 깃발을 흔들며 전진하는 일본과의 전투였다.
봉오동전투는 역사에 이름을 갓 올린 대한민국과 왜구의 나라 침략자 일본과의 전투였다.
봉오동전투는 민병이자 사병인 독립군과 일본의 정규군인과의 전투였다.
봉오동전투는 동북으로 이주한 약 19만 명 조선인과 일본국민과의 전투였다.
봉오동전투는 최소한의 무기를 갖춘 독립군과의 신식무기를 갖춘 일군과의 전투였다.
봉오동전투는 모금으로 유지되는 독립군과 국가의 공급을 받는 일본군과의 전투였다.
봉오동전투는 일군의 침략과 학살로 부모와 고향과 나라를 잃은 슬픈 조선 청년들과 침략자, 살 등등한 학살자 일본군과의 전투였다.
조선인들의 독립 염원을 담아 15년 긴 세월 동안 준비된 최초의 무장 독립전쟁이여!
조선 독립군으로 연합되어 침략자를 물리친 최초의 위대한 독립전쟁이여!
청일전쟁, 러일전쟁에서 승승장구했던 일군의 오만과 긍지를 무너뜨린 위대한 독립전투여!
우리의 독립이 가능하다는 확신과 희망을 준 어머니 독립전쟁이여!
꽃으로 피소서. 이 땅 우리 후손들의 가슴 속에 아름답게 기억되소서. 우리의 사랑과 흠모를 받으소서.
에필로그
한반도의 소통과 평화의 문제로 치열하게 고민하는 시대적인 양심과 대통령의 평화에의 의지가 실현되길 간절히 바라면서 일제의 정규군과 생명을 걸고 맞붙은 “봉오동전투”가 20년 동안 준비된 조선인들의 뜨거운 독립에의 염원에서 시작되었으며 우리 후손들이 자유롭게, 평화롭게 오가며 만나게 될 때 비로소 전투가 완성된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다.
조선의 노론이 친일파가 되고, 해방정국에서 그 친일파들이 이승만과 손을 잡고 반공과 친미주의 옷을 갈아입고 살아났고, 3공화국에서는 군부독재와 손을 잡고 불사조처럼 살아서 오늘 한국의 우파∙보수주의를 형성하여 한국의 정체성마저 부인하며 우매한 국민들을 지역과 종교로 편을 갈라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고수하고자 쌍심지를 켜고 할퀴고, 찢고, 찌르고, 뒤집고, 왜곡폄하하며 과장하고 축소하는 다양한 권모술수가 가히 천재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속임 당하는 국민들과 남북의 소통과 만남을 원하지 않는 외국(미국, 일본, 중국 등) 정권들이 그들의 눈부신 맹활약에 박수를 치면서 지지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들에게 이용당하는 현실이 수치스럽고 분하기 그지없다.
노론의 후손들아,
친일파의 후손들아,
독재 군부의 후손들아!
너희 자신과 너희 집단의 부귀와 영광을 위해
언제까지 나라와 민족을 세상의 조소거리가 되게 하고
국민들의 평화와 만남, 행복한 미래를 방해하고 파괴하겠는가?
2019.8.31. 토요일에 쓰고 9.8 에필로그 추가하다.
우담초라하니
참고문헌
첫댓글 역사의 진실과 마주하다
즐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