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일 (2018. 02. 14. 수) 미야자키 – 벳푸
< 도미인 호텔의 대욕장(大浴場)은 남녀 탕이 따로 구분되어 있다 >
일본의 동네 목욕탕은 남탕과 여탕의 천장 부분이 개방되어 옆 탕에서 대화하는 것이 다 들린다. 굳이 옆의 탕을 보려면 볼 수도 있을 정도로 그 벽의 높이는 절망적이지 않다. 게다가 여탕에 흰 장화를 신은 남자 직원이 수리하러 들어간다든지, 남탕에 아줌마가 불쑥 나타나 남의 목욕 행위에서 부당한 부분을 간섭하는 따위의 일은 일본의 목욕 문화를 모르는 한국 관광객이 흔히 겪는, 일상다반사이다. 우리처럼 수건을 쓰고 싶은 대로 쓰는 것이 아니라 몸을 닦는 큰 수건 한 장과 남녀 구분 부위를 가리는 용도의 작은 수건 한 장이 제공되는데 이것을 모르고 이상하게 쓰면 웬 아줌마가 어딘가에서 살펴보고 있다가 번개같이 나타나 수건을 빼앗아 가기도 하는 불상사가 생기는 것이다. 물론 이때 빼앗기지 않으려는 가여운 발버둥을 쳐보지만 이런 일에 익숙한 일본 아줌마를 당할 수는 없다. 빼앗긴 수건이 지탱하던 숨겨둔 자존심이 박살 나는 순간, 위축되고 쪼그라든 녀석의 슬픈 외눈이 욕탕의 바닥을 응시할 때, 나치 하의 아우슈비츠 유대인이나 겪을 일을 왜 이런 평화롭고 개화된 시대에 당해야 하는지를 슬퍼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중력의 법칙을 거스르는 젊음이 있을 때야 항의라든지 분노와 같은 상승적 반응을 생각할 수가 있겠지만, 이미 중력의 법칙에 의해 처질 것은 처지고 숙일 것은 숙여 이제 농익은 과일처럼 수직으로 하강해 흙과 친구가 될 육신을 가진 존재로서는 이마저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다. 상대는 말이 통하지 않는 일본의 목욕탕 아줌마이다. 게다가 무엇을 잘못해 이런 취급을 받는지 명확하게 모르는 상황이기에 대개 늙음의 지혜로 포기하고 만다. 그것이 현명한 일이기도 하다.
< 우리가 묵은 도미인, 천연온천에 해를 향한 탕이 있다고 자랑하고 있다. 노천탕이 옥상의 대욕장 옆에 있었는데 아마 아침 해가 뜨는 방향이었던 모양이다. 이틀을 묵는 동안 불편함도 없고 참 편하게 지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숙박비는 3인 2실에 2박이었는데 우리 돈으로 378,450원이었으니 1인 1박으로 치면 63,000원 정도이다. >
일어나 세수하고 짐을 챙겨 8시 조금 넘어 체크아웃한 후 이제 익숙하게 버스를 타고 미야자키 역으로 갔다. 일단 9시 36분발 오이타행 기차가 있음을 확인하고 지정석을 끊었다. 물론 자유석으로 가도 좌석은 있지만 가끔은 지정석을 끊어 가는 것도 별스러운 여행의 맛이 있다. 아침은 3대째 우동 가게를 한다는 역 구내 우동가게에서 먹기로 어제저녁 미리 봐두었다. 260엔짜리 달걀 우동을 주문했는데 간이 센 편이었다.
< 소박한 아침, 간이 심심했으면 좋았을 텐데 아침 식사치고 간이 세다. >
< 가끔 지정석을 끊고 차표를 요렇게 꽂아두고 검표원이 표 검사를 하면 자는 척하는 재미도 있다 >
벳푸 가는 열차로 갈아타기 위해 12시 38분 오이타 역에 내렸다. 역 구내식당에서 차슈 덮밥, 명란 덮밥, 볶음밥을 시켜서 맥주와 함께 먹었는데 3가지 다 맛이 좋았다. 3명이 각각 따로 주문하면 세 가지 음식을 맛보는 즐거움이 있고 혹 한 가지가 부실하더라도 나머지로 대체 가능하니 될 수 있으면 이 방법을 권한다. 식사 후 역 구내 마트에서 저녁을 대비한 안주와 맥주, 소주를 구매하니 마음이 든든하다.
< 오른쪽 명란 덮밥이 상당히 짭조름하니 맛있어 앞으로 집에서 좋은 명란을 구해 직접 해 먹어볼 생각이다. >
2시 12분 벳푸로 가는 Express를 탔다. 우리 생각에는 오타와와 벳푸 사이가 상당히 멀 거라 여긴 것이 사실은 한 정거장 다음에 내려야 했는데 지나쳐버렸다. 하는 수 없이 기쓰키 역에 내렸는데 예상치 못한 선물처럼 역 건물이 상당히 단정하고 정갈하다.
< 보존이 잘 된 기와가 단정하다. 오랫동안 잘 관리된 일본 관사를 보는 느낌이다. >
< 작은 시골 역 화장실의 위엄. 비록 면적이 좁지만 어디 사용하는지 모를 정도로 각종 편의시설은 다 갖추고 있다. >
< 하는 수 없이 벳푸 역으로 가는 완행열차로 되돌아가는데 이 기차는 창문이 엄청나게 크다. 관광기차라서 특별 제작한 건지 모르겠다. 이런 것도 나만 눈여겨볼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관광청에서 눈여겨볼 사항이다. >
< 벳푸 역에서 내려 그 옆 주차장에서 대기 중인 스기노이(Suginoi) 호텔 셔틀버스를 탔다. 체크인 후 호텔 방(608호)에서 내려다본 벳푸 시내 전경. 오늘도 날씨가 참 좋다. >
< 태어나서 가장 큰 호텔 방이 아닌가 할 정도로 방이 넓다. 양실에 화실까지 갖춘 4인실인데 전망도 좋고 시설도 훌륭하다. 오른쪽에는 응접세트가 있고 입구에는 작은 욕실까지 있으니 가히 그 넓이를 짐작할 수 있겠다. >
< 오른쪽 안 보인 응접세트 부분. 방의 넓이를 보이기 위해 찍은 사진이지 결코 잘 났다고 자랑하는 것은 아님. 옷을 저렇게 입으니 촌마게(일본식 상투)만 했으면 일본 사무라이로 보아줄 법도 하다. >
스기노이 호텔은 벳푸 대표적 온천 호텔로 웨딩홀, 수영장, 볼링장, 오락실과 운동시설 그리고 노천 대욕장이 유명하고 지하의 대욕장도 있었다. 음식도 양식, 화식, 중식 등의 뷔페식으로 그 가짓수가 매우 다양하여 이곳에 와서야 비로소 첫날과 둘째 날의 피곤함과 짜증스러운 일정에서 벗어난 휴가 여행의 느낌이 들었다. 특히 하나관 옥상의 타나유(층계식) 온천은 노천온천으로 벳푸 시내를 내려다보면서 온천욕을 즐길 수 있게 설계가 되어 시원한 바람과 뜨거운 온천수의 조합이 대단히 좋다고 느껴졌다. 시설 자체가 어마어마하여 객실만 560개 정도이다. 그럼 4인실 기준으로 하면 2,300명의 투숙객을 유치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오는데 종업원과 기타 딸린 사람까지 합하면 그 수는 적어도 2,500명 이상이 되겠다. 요즘 시세로 1박에 4만 엔 정도이니 하루 만실이면 2천 2백4십만 엔이니 우리 돈으로 치면 하루 매출이 2억2천4백만 원이다. 한 달 30일 기준으로 하면 6십7억2천만 원이며 일 년 매출은 806억 4천만 원이 나온다. 물론 이는 단순 계산에 불과하나 온천 호텔 하나가 창출하는 부(富)로서는 대단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사족(蛇足)으로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수많은 가정을 빈곤의 구렁텅이에 빠뜨려 나라 전체를 파탄시킨 무식과 무지의 대통령, 머리에 우동사리를 장착하고 다리만 건강하여 방한(訪韓)한 부시와 조깅에서 대화는커녕 계속 선두를 빼앗기지 않은 것을 자랑으로 삼은 김영삼 대통령과 하시모토 총리(1997년)가 회담을 한 곳이 바로 이 스기노이 호텔이다. 서글픈 사람.
< 저녁으로 일단 회와 푸딩, 국수를 먹었다. 회는 잔뜩 썰어 둔 것을 손님이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주방장이 대기하고 있다가 썰어주는 것이어서 회의 절단면에 칼맛이 묻어 있다. >
< 그리고는 스테이크와 스시를 안 먹을 수가 없었다. 결국 과식하고 말았다. >
< 화실(和室)에 앉아 한 잔의 술로 마지막 밤을 보내는데 내 등 뒤에 공기청정기가 보인다. >
< 오이타에서 구매한 맥주와 소주 - 오이타 특산의 과실주인데 너무 달아 별로다 - 생새우 튀김, 두부 잡채 비슷한 것과 가져간 음식들로 한 상을 차렸다. 오늘도 자기 전 상태는 어제와 같아졌다. >
♠제 6 일 (2018. 02. 15. 목) 벳푸 – 후쿠오카 – 대구
7시 30분에 호텔 식당에서 뷔페식으로 아침 식사를 한 후 모닝커피를 느긋하게 즐기다가 9시 30분쯤 체크아웃하였다. 셔틀버스를 타고 벳푸 역으로 가서 오이타 역으로 가는 Express를 탔다. 오이타 역에서 10시 11분 발 하카타행 Express를 타니 바로 다음 역이 우리가 아침에 출발한 벳푸 역이다. 우린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지?
< 지도를 확대해 보았다. >
어제는 오이타에서 벳푸를 지나쳐 기쓰키에 내려 다시 벳푸로 돌아왔고 오늘은 벳푸에서 그대로 하카타행 기차를 타면 되는데 오이타까지 쓸데없이 내려와 다시 벳푸를 거쳐 가게 되었으니 그래도 다행인 것은 우리가 가진 것이 JR pass라는 것. 시간을 조금 허비했으나 그렇다고 그 시간 동안 별다르게 할 일도 없는지라 다시 즐거운 마음이 되었다.
하카타 역에 도착하니 드디어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일단 코인 라커룸에 가방을 보관한 후 역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메뉴는 그래도 일본 왔는데 한 번 정도는 라멘을 먹어줘야 할 것 같아 라멘을 시켰다. 밥도 조금 따라 나왔다.
< 라멘 맛이 라멘 맛이다. 명란 올린 밥과 친구 하는 라멘의 가격은 우리 돈으로 7,000원이다. 일본은 쌀이 좋아 밥맛이 기름지다. >
식사 후 황선생은 중고서적을 구매하러 가고 남은 둘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기다렸다. 다시 합체 후 주문받은 선물을 구매하기 위해 마트 비슷한 곳에 가서 일본 라면, 일본 국수와 감기약, 위장약, 동전 파스 등을 산 후 지하철로 후쿠오카 공항에 도착했다. 일단 짐을 부치고 출국 수속을 치른 후 면세점에서 어린애들 줄 초콜릿, 곤약 젤리, 용각산 사탕 등을 샀다. 나는 잔돈을 처리한다고 조금 늦었는데 두 사람이 급히 나를 부른다. 가서 보니 규슈에서 그리도 찾던 칸노코(神の河) 소주가 있다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한 병에 천 엔이라니...
다시 면세구역 식당에서 돈가스 등으로 식사를 한 후 19시 30분 TW 234편 항공기를 탔다. 도착은 20시 30분 제 시간에 했으나 짐 찾는 데서 인천 발 대한항공에 밀려 40분이나 걸렸다. 기다리는 가족도 있고 그리고 내일이 구정인 만큼 긴 인사를 할 시간적 여유가 없어 구정 후 만나길 약속하고 각자 떠나온 곳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럼 돌아가기 위해 떠난 것이었나?
< 게으름을 부리다가 여행에서 돌아온 지 4개월이 지난 5월 15일 글을 마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