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정의 상징인 용정의 우물, 1966년 문화대혁명 이전까지 이용하였으나 혁명기간에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1986년에야 현재의 모양으로 복구. 그러나 더 이상 물을 길어 올리지 않는다. 사진은 기념비.
용정의 명칭이 된 용정 우물
용정 이름의 발상지인 우물은 용정역에서 시작된 ’용정가’와 ‘육도하로’가 만나는 지점 우측에 위치하고 있다.
바로 뒤편에 용정시 인민중의원과 조의원이 있다. 최초의 개척자인 장인석,바윤언,김언삼이 용정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였다.
용정의 원래 명칭은 육도하였다.
1938년 3월 31일 폐관될 때까지 수 많은 독립운동가들을 체포,구금, 고문을 가한 악의 산실이었다.
용정 만세 시위대 공덕흡을 바롯한 10여명의 선열들이중국군과 일경의 발포로 순국한 장소. (1919년 3월 13일) 사상자들은 인근의 제창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좌측의 회색 건물 위에서 총탄이 날라왔다고 한다. 건물이 곧 철거될거라고 한다. 거리 이름은 ’번영로‘ 이다.
건물 자리에서 우측으로 몇 보 걸으면 바로 ‘용정가’이다. 용정가 건너편에 신화서점이 있고 그 잎 길이 번영로이며 일본영사관의 붉은 밤색 담벽이 보인다.
세번째 버드나무가 서있는 지점이 총탄이 난사된 지점. 14 사망자와 수십 명의 부상자가 나왔다.
용정가에서 문화로로 들어가면 우측으로 실험소학교가 보인다. 실험소학교 교사 우측 뒤편이 서전서숙의 자리였다. 빨간 지붕의 정자가 이상설 기념 정자다.
실험소학교 운동장 우편에 이상설 정자, 서전서숙기념비 그리고 심연수 시비가 있다. 2019년 부터 개방을 하지 않고 있다
1919년 용정 만세시위장소. 용정가에서 ‘광희서로’로 들어가면 좌측으로 유치원 건물이 나온다. 그 자리가 만세시위가 주도된 장소.
3만명의 조선인들이 모여 독립 구호를 외치며 사가행진을 하였다. 당시 연변 조선인 인구는 대략 30만명이었다. 인구의 10%가 시위에
참석할 정도로 독립에의 욕구가 폭발하였다. 시위는 카나다장로교 교회를 중심으로한 제 종교와 학생들의 연합으로 진행되었다.
시위 후에 무장독립운동단체 40여개가 조직될 정도로 간도 조선인들의 독립에의 의지와 열망이 컸다.
함석 웉타리 쪽으로 걸어나오면 전면에 용정시인민병원이 보인다. 용정가에 위치해 있다. 그 반대편에는 광희동로가 있는데 입구에서 50미터 정도에 카나다장로교선교부가 세운 명신학교 옛터에 세워진 안민소학교가 보인다.
이상으로 용정가에 위치한 한국인들 관광 포인틀 소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