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킴과 버림(상시) 9-3
수행은 나눔으로써 하나됨이다(3)
자기가 친하고 좋아하는 바를 넓혀가고 깊게 해나가는 것이 실천적인 수행의 방도
상주수련에 들어가시는 분들이 모여서 상주수련에 관해 마음을 나눌 때마다 썩 만족할만하다는 마음은 들지 않았습니다. 아라가비님께서 보시기에 가장 바르다고 여겨질 만한 수행준비자세는 어떤 것인 것인가가 큰 질문으로 나왔는데……
유학경에 보면 “친한 바를 친하고” 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것과 동시에 “자기가 좋아하는 바에 따라서 한 쪽으로 쏠리지 말 것이며 자기가 싫어한다 해서 또한 반대로 쏠리지 말 것이며 미워한다 해서 쏠리지 말 것이며” 등등, 자신의 감정과 호오好惡에 의해서 한 쪽으로 치우치지 말 것을 지적하는 구절들이 유학에는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수행을 통해서가 아니라 정서적인 방식으로 그 구절들을 실현하다 보니까 이쪽도 저쪽도 아닌 경우들이 많이 드러납니다.
요즘은 잘 쓰지 않는 용어입니다만, 백대접이라는 말을 연세드신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좋아도 백대접, 싫어도 흰대접하는 식으로 중정中正아닌 중정을 찾아가는 모습이 있는 것 같습니다.
수행에 있어서 중정은 그런 모습이 아닙니다. “친한 바에 의해서 휩쓰리지 말라, 싫어하는 바에 의해서 휩쓸리지 말라”라고 할 때 답은 ‘친한 바’에 있습니다. 자기가 친하면 친한 바에 의해서 엄청나게 휩쓸려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 휩쓸려 들어가는 친한 마음을 넓힘으로써 중정을 찾아가는 것이 수행입니다.
싫어하는 바를 어찌 싫어하지 않고, 좋아하는 바를 어찌 좋아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러한 가운데서도 자기가 친하고 좋아하는 바를 끊임없이 넓혀가고 싶게 해나가는 것이 실천적인 수행의 방도가 됩니다.
그러므로 수행에서 얼마만큼의 결과를 낼 수 있느냐 하는 것은 내가 수행이라는 것과 알마나 친하냐, 내가 한님과 얼마나 친하냐에 달려 있습니다. 예전에 ‘울고 싶어라’라는 노래가 있었죠. 울고 싶어라를 보고 싶어라 라고 바꾸면 비슷해집니다. 보고 싶어라, 보고 싶어라, 내 한님!
한편, 내 한님으로부터 떠나온 바에 대해서 그만큼 더 싫어져야 합니다. 떠나보니까 내 한님이 얼마나 소중한지, 얼마나 보고 싶은지를 느껴야 합니다. 그 절절한 마음으로 점점 한님에게로 다가갈 때 나중에는 묘하게도 자기가 그토록 싫어했던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중정을 찾아가는 것이 실천적 의미의 중정입니다. 그것은 자로 잴 수 있는 양단의 중정이아니라, 저 하늘의 중심을 향해 가고 하늘의 중심으로써 모든 것을 바로 맞추어 가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중정입니다.
그런 의미의 중정을 생각한다면 정말 내가 친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한번 돌이켜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내 혈연에 너무 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 선입견이나 내 가치관에 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니면 나는 정말 수행에 친하고 있는가에 대해 의문을 던져야 합니다. 그리하여 내가 현재 무엇에 친하고 있는지 앞으로는 무엇에 친하고자 하는지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화두입니다. 사람에게서 드러나는 형상은 보편적인 어떤 모양과 소리로서의 성격을 띱니다만, 그 보편적인 소리와 형상 속에 담긴 자신의 친한 바는 화두에 따라 다릅니다. 그래서 친한 바를 더 깊이하고, 깊이 함으로써 더 넓혀가고, 넓히고 깊이 하는 과정을 계속해가는 자세가 수행의 원칙과 방법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한님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친 사람이 수행의 진정한 열매를 얻을 것이다
친한 바, 그리워하는 바, 보고 싶어하는 바 그리고 그것이 안될 때 울고 싶어하는 바를 뚜렷이 하지 않고 그냥 한번 해본다는 마음으로는 결코 수행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공장에서 컨베어시스템이 돌아갈 때 무심하게 나사를 놓는 마음으로 해서는 결코 성과를 낼 수 없는 그런 수행이야말로 원만한 수행이고 대도大道의 수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컨베어시스템에 나사를 놓듯이 해도 저절로 나오는 수행이 있더라도 그와 같은 공장제 수행을 원만한 수행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음 착한 사람, 마음이 더욱 더 원만한 사람 그리고 자기 한님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더 사무친 사람이 마침내 수행의 밝고 진정한 열매를 얻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 드립니다. 수행의 원칙 중 하나도 바로 그와 같은 자신의 진정한 그리움을 키우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리움을 키우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그리움만 자꾸 생각하면 됩니다. 사무치면 병이 되고 병이 되면 바뀝니다. 병이라는 것은, 탈이 나다라는 좁은 의미의 표현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크게 보면 어떠한 기존 질서로부터 벗어나게 됨을 의미합니다. 일단 기존 질서를 벗어나게 되면 새로운 그리움이 생기게 됩니다.
수행에 대한 사랑을 생각하면서 내게 주어진 여건을 따질 수는 없다
요즘 젊은 분들이 부모를 잘 봉양하지 않습니다. 돈이 있어야 부모님께 용돈을 드립니다. 그래서 어떤 부모님이 그랬다고 하죠. “내가 너희들 키울 때 돈 없다고 학교 안 보냈느냐? 빚내서 보냈다. 너희들도 돈 없으면 빚내서 줘라” 그게 맞는 것입니다.
정말 마음이 있다면 지금 현재 내가 할 수 없는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수단과 방법을 따지지 않고 바로 시작해야 됩니다. 자식에 대한 사랑이 있으니까 집에 쌀 한 톨 없어도 어디서 쌀을 빌려오고 심지어 도적질도 합니다. 도적질은 좋은 것도 아니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만 월사금이 없으면 빚이라도 냅니다. 그것이 진정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내리사랑은 인간에 있어서 그만큼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수행에 대한 사랑을 생각하면서 내게 주어진 여건을 따진다면 그것은 아비와 어미가 아들과 딸을 위해서 내리 붓는 사랑에 결코 못 미치는 것이니, 그런 수행으로는 아비와 어미가 자식을 키움으로써 얻는 마음의 경지에도 못 이르겠지요.
수행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을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님이 이 자리에 임해서 그와 함께 하더라도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정말 미쳤으면 형편을 따지지 않습니다. 내가 진정 그리워하고 사랑한다면 된다 안된 다를 따지지 않습니다. 적당하다, 적당하지 않다를 따지지 않습니다.
이 자리에 부모님 모시는 분들도 있겠습니다만, 부모님 모실 때 보면 아무리 자식이 위로 사랑을 해도 자신에게 있는 손가락을 깨무는 것에 불과합니다. 부모는 그렇지 않습니다. 부모는 있는 손가락 아니라 없는 손가락도 내어놓습니다. 자식은 아무리 해 봤자 있는 손가락 깨물어 내놓은 선에서 지극한 것입니다.
부모님 모시고 있는 경우, 돈이 없으면 “아버지 굶읍시다. 우리 없어요. 죄송합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눈물을 펑펑 흘릴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가짜 효도예요. 진정 지극 하려면 눈을 부릅뜨고 어디든 가서 구걸을 해서라도, 빛을 내서라도 쌀을 구해와야 하는 것입니다. 빚을 내서도 안되면 그냥 같이 죽더라도 말입니다. 그것이 참사랑입니다.
누군가를 나의 도반道伴으로 여길 때의 자세 또한 그와 같아야 합니다. 나의 형편을 따지는 마음이 있다면 도반 공부 못합니다. 도저히 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것이 있으면 당장에라도 다 내어놓아야 합니다. 100일 수련을 마치고 그 다음날 불구덩이 속에 들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빚을 내서라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빚 안 주는 신장神將들을 불러와서라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 우주간에 공짜가 어디 있겠습니까? 다만 상업적인 것이 아니며 나를 위한 거래가 아닐 뿐이지 거래는 거래입니다. 신장을 빌려오면 신장에게 되돌려주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세상에 아들한테 빌렸다고 빚이 아니며 어미한테 빌렸다고 빚이 아니겠습니까? 선대 수자修子 분들의 도움이니까 안 갚아도 되고, 신장한테는 시킨 것이니까 안 갚아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똑깉은 거래입니다. 거래에서는 삼라만상이 평등합니다.
어쨌든 그런 마음을 수행에 대해서 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하면 원만한 수행의 싹은 반드시 움을 틔우고 그 싹 속에서 마침내 내 한님은 저절로 이야기를 합니다. 내 한님은 드러납니다. 그러고도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가짜 한님입니다. 한님은 그런 면에서 분명 실상입니다. 내 속에 존재하며 내 속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옳은가 아닌가의 기준은 내가 진정으로 가야 될 길인가 아닌가, 내가 가고 싶은가 아닌가 하는 나의 생명의 기준
《논어》에서 말했습니다. “무적야 무막야 의지여비”無敵也 無莫也 義之與比. “적당하다고 아니함도 없고, 안 된다 된다 함도 없고, 오로지 그것이 옳은가 아닌가에 만 견줄 뿐이다”라는 것입니다.
옳은가 아닌가의 기준은 내가 진정으로 가야 될 길인가 아닌가, 내가 가고 싶은가 아닌가 하는 나의 생명의 기준을 말합니다. 그렇게 수행을 한다면 어찌 수행이 안 될까요? 당연히 그런 마음들을 가지고 계시겠습니다만 노파심 이야기를 보탭니다.
돈이 많을 때 부모님 용돈 다 못 드리는 것은 괜찮습니다. 없을 때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있을 때는 정말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 모릅니다. 물 속의 고기가 얼마나 힘이 있는지는 물 속에서 노는 것을 보고는 모릅니다. 어떤 고기는 물 속에서 굉장히 잘 노는 것 같은데 끄집어내놓으면 파닥거리지도 못하고 죽어버립니다. 물 밖으로 고기를 건져내 봐야 압니다.
모울도뷔 제10호(2001.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