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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신명기 30:11-14
제목 : 어느 누가 성경이 쉽다고 했나?
일시 : 2018년 6월 22일
여는 말 : 성경이 쉽다고요?
오늘 설교 제목은 “성경은 쉽다”입니다. 저의 오늘 설교에 관해 말하자면, “설교 준비는 쉽다”입니다. 왜냐고요? 제가 「매일성경」에 “모든 사람을 위한 성경묵상법”을 연재하고 있는데, 그 내용의 상당수가 오늘 본문에 빚지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그 연재하고 있는 내용을 가져오면 설교가 얼추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대개 월요일 경에 이번 주 묵상 본문을 휘리릭 봅니다. 그때 대략 결정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다음 주와 그 다음 주 본문을 어느 것을 고를까를 고민하고 있지요.
그렇지만 여러분은 그렇지 않을 것 같습니다. 성경이 쉽다니요, 목사님 같은 분이야 성경이 쉽다고 할는지 몰라도, 저희 평신도 입장에서는 성경은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랍니다. 한켠 마음에는 성경 많이 읽고 싶고 알고 싶고, 믿고 싶지만, 막상 펼치면 왜 이리 졸리는지요. 온 종일 일하고 지쳐 돌아와서 잠깐 숨 돌리고 성경을 읽을라치면 피곤해서도 안 읽히고요, 이것저것 신경 쓸 것 맡아서 잘 안 읽히고요, 무엇보다도 무슨 말인지 잘 몰라서 성경을 못 읽겠더라고요. 특히 목사님이야 공부하는 분이시고 책도 쓰는 분이니 쉽다고 하겠지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오늘 본문을 근거로 설명 드리고, 본문 밖에서 세 가지 이유를 통해 성경은 쉽다는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본문의 배경과 맥락을 간단히 설명 드리겠습니다.
신명기 28장은 무한한 축복과 함께 무시무시한 저주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29장은 신명기 전체를 요약해 줍니다. 그런 다음 오늘 우리가 읽은 30장이 등장합니다. 우리가 집중적으로 읽은 30장 11-14절의 앞과 뒤를 주목해 보십시오. 30장 1-10절에서 주목할 한 단어가 있으니, 바로 돌아오라는 히브리어 ‘슈브’입니다. 이 단어가 도합 7회나 등장합니다. 저주 받은 포로 생활을 속히 끝내려면, 그리하여 고토이자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거든 하나님 말씀대로 실행하라 권면합니다.
그런 다음 15절부터는 다시 선택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 생명과 파멸 사이에서 너희는 선택하라고요.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미래가 달라진다는 것이지요.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이니 닫혀 있다고 하더라도, 그 과거를 반추하고 새로운 미래를 개척하라는 거지요.
그러니까 앞은 과거에 대해서, 뒤는 미래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불행한 과거를 되풀이 하지 않는 법, 행복한 미래를 열어젖히는 법이 그 사이에 있는 본문에 담겨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명령인 말씀을 순종하고 지키라는 거지요. 말씀을 읽고 순종하는 것이 핵심 관건인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설교하는 모세나, 설교를 듣는 청중의 마음속에 한 가지 의문이 생겨난 것이지요. 모세 입장에서는 신명기 전체가 무겁고 힘든 요구가 아니라는 것을 청주에게 확인시켜줘야 할 필요가 있었다면, 청중의 입장에서는 어휴 또 다시 저 힘든 성경의 명령을 무조건 순종하라고 하는구나, 라는 내심 거부감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모세는 자신이 설교하는 신명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쉽다는 것을 환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그럼, 성경이 쉽게 읽히게 하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노하우를 말하고자 합니다.
첫째는 성경 번역본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기 위해 집어든 개역 개정 성경은 아마 수십 년 교회 생활 하신 분들에게는 익숙하실 것입니다. 하도 오랫동안 그 번역본을 읽어왔기에 읽는데 별 어려움이 없습니다. 오히려 다른 번역본을 보면 어색하지요. 그래서 그게 어렵다, 낯설다 하면 어, 그래요? 그냥 읽으면 되는데, 라는 반응을 하게 되지요. 저는 표준새번역을 즐겨 읽지만, 아직도 개역 개정이 더 친숙하니까 말 다한 거지요.
그런 일부를 제외하고 대다수 교인들은, 특히 지금의 10대와 20대, 30대까지도 개역 개정은 성경 접근성을 확 떨어뜨리는 장본인입니다. 고어체이고 옛 말투이어서 권위 있어 보이는 장점도 있지만, 너무 멀고 너무 높게 보입니다.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제가 대표적으로 드는 본문이 빌레몬서 19절입니다. 개역과 개역개정, 새번역을 대조해 보겠습니다.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너는 이 외에 네 자신으로 내게 빚진 것을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개역)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네가 이 외에 네 자신이 내게 빚진 것은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개정)
저기서 ‘너는 이 외에 네 자신으로 내게 빚진 것은’이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열이면 열이 다르게 이해할 것입니다. 아니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요, 라며 혀를 내밀며 뒤로 물러서고 말 것입니다. 아, 이런 노랫가락이 귓가에 쟁쟁합니다. ‘성경은 아무나 읽나. 눈으로 읽을 수라도 있어야지. 어느 누가 쉽다고 했나~~’
이번에는 새번역과 공동번역을 볼까요?
“나 바울이 친필로 이것을 씁니다. 내가 그것을 갚아 주겠습니다. 그대가 오늘의 그대가 된 것이 나에게 빚진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굳이 말하지 않겠습니다.”(새번역)
“‘나 바울로가 그것을 다 갚겠다.’고 이렇게 친필로 보증하는 바입니다. 그대가 지금만큼 된 것도 나의 덕인 것이 사실이지만 나는 그대에게서 그 값을 요구하려는 것은 아닙니다.”(공동번역)
어떤 설명하지 않아도 말하는 바를 금세 알 수 있습니다. 저 말투에 느껴지는 희한한 뉘앙스는 이차적인 문제이고요, 먼저, 무슨 말을 하는지를 알아먹을 수 있습니다. 네가 예수를 믿고, 성장하게 된 데 나, 바울의 엄청난 헌신과 수고가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그것이 네가 나에게 빚진 것이라는 거지요. 그러니 오네시모라는 물질적 빚을 내가 갚겠지만, 너는 영적인 빚을 내게 갚아라, 그러지 말고 우리 서로 빚을 탕감하자, 뭐 그런 이야기입니다. 여하튼, 노회한 바울의 수사적 전략이 빛을 발하는 문장입니다.
그러므로 번역본만 바꾸면 성경이 쉬워집니다.
둘째, 이번에는 실제 경험을 들려드리겠습니다.
이 부분 또한 “모든 사람을 위한 성경묵상법”의 3장, “초보자도 따라하는 묵상 실전 매뉴얼”의 일부입니다.
저는 꽤 오랫동안 청소년들과 인문학을 비롯한 다양한 책읽기 모임을 하고 있습니다. 한 번은 초등 6학년인 남자 아이가 로고스서원 역사상 가장 독특한 글을 써왔지 뭡니까. 무지하게 어려운 고전을 읽고 글을 쓴 것도 아니고요, 자신의 내밀하고도 은밀한 사생활을 일기로 써 온 것도 아닙니다. 천재적인 통찰이 듬뿍 담긴 것도, 명문장가의 그것도 아니고요. 그게 뭐냐고요?
나훔서 1장 1-5절을 그대로 카피해서 출력해서 온 겁니다. 글자 포인트는 아마 20정도 되고요, 타이핑했을지 아니면 그대로 죽 긁어서 가져온 건지도 모르겠어요. 아무튼 익히 잘 아는 성경도 아니고, 초등학생들, 중고등이나 심지어 대학생이나 교회를 수년을 다녀도 한 번도 보지 못했을 법한 나훔서입니다.
성경이 과연 쉬운 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안성맞춤이다 싶었습니다. 다른 어떤 설명이나 해설도, 배경 지식이나 정보도 없이 그냥 한글 성경 본문만 주고, 이해가 되는지 아닌지를 실험해 보기 딱지요. 그 아이가 베껴온 묵상집의 제목만 달랑 주어졌습니다. “피의 성읍 니느웨의 죄” 이것뿐입니다. 아, 초등학생들이라 저 글이 구약 성경 나훔서 1장 1-5절이라는 것도 알려주었습니다.
질문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 본문이 뭘 말하지? 다른 하나는, 그래서 뭘 느꼈지? 입니다. 써 온 아이가 한 번 낭독하고, 5분이라는 시간을 주고 요약하고 자기 느낌을 써 보라고 했습니다. 아이들이 기록한 것을 수정 없이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아, 이 아이들의 연령은 대다수가 초등학교 6학년 네 명과 중1 학생이 둘입니다.
1. “죄와 심판을 하겠다는 말”
2. “니느웨가 죄를 지어서 벌을 받는 것 같다. 이걸 통해 죄를 저지르지 않아야겠다.”
3. “1-3절까지는 사람의 죄를 즉, 니느웨의 죄를 이야기하는 것 같고, 4-5절은 그의 죗값인데, 4절에 ‘보아라. 내가 너를 치겠다’가 내가 너를 심판하겠다라고 하는 것 같다.”
4. “니느웨라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의 피를 흘린 이유로 만군의 여호와께서 니느웨라는 사람에게 심판을 하시고 벌을 내리시는 것 같다.”
5. “죄가 많은 니느웨 성을 심판하겠다는 말과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 말하는 것 같음.”
6. “니느웨가 저지른 죄와 니느웨에게 심판을 할 것이라는 글이다.”
정말 놀랐습니다. 익히 아는 성경 본문도 아니고, 난생 처음 보는 성경의 한 단락을, 앞 뒤 맥락도, 배경도 없이 그냥 읽은 것만으로도 본문이 말하는 바를 얼추 파악했습니다. 괜히 어렵다, 내가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해석해, 틀리면 큰일 난다, 등등의 선입견으로 성경이 더 어려워 보이는 것이지요. 그냥 읽으면 됩니다. 그래도 됩니다. 그래야 합니다.
셋째, 이번에는 학문적 논쟁에 관한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앞에서는 한글 성경 번역본을 바꾸어 보라는 것과 제 실제 경험을 갖고 말했다면, 이번에는 신학적인 측면에서 말해 보겠습니다. 종교개혁 당시는 정말이지 뜨거운 시대이었습니다. 엄청난 영적이고 지적인 거장들이 우후죽순처럼 들고 일어나 기독교의 문제를 짚고, 개혁과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불가피하게 논쟁이 많았지요. 그 중 하나를 소개할까 합니다. 바로 마르틴 루터와 에라스무스 논쟁입니다. 이하는 제가 “모든 사람을 위한 성경묵상법” 3장, “초보자도 따라하는 묵상 실전 매뉴얼”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가져 온 것입니다.
이번에는 교회사에서 실제로 벌어진 논쟁을 통해 성경은 쉽다는 것을 설명 드릴게요. 종교개혁 당시 마르틴 루터와 에라스무스는 불꽃 튀는 논쟁을 벌인 적이 있습니다. 외적으로 보면, 인간의 자유 의지에 관한 것입니다. 그 속살을 들여다보면, 성경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에서 벌어진 논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에라스무스는 성경을 주욱 살펴보니, 하나님의 주권과 함께 인간의 자유의지가 골고루 강조되고 있으며, 성경에는 분명한 것이 있지만,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는 모호한 것이 많기 때문에 함부로 해석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나님의 신비함과 성경의 모호성 때문에 딱 부러지게 해석을 결정할 수 없으며, 극단적이고 한쪽에 쏠린 해석은 되도록 지양하고 중용과 중도를 지향해야 한다고 루터를 타이릅니다. 그런 것은 지식인들의 토론 대상이지 교육받지 못한 대중에게 가르치면 안 된다고 합니다「루터와 에라스무스: 자유의지와 구원」, 73-76). 이것이 함축하는 바는, 아무나 성경을 읽으면 안 된다는 거지요.
당연히 루터는 반발합니다. 루터는 “성경 안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모호하고 난해한 구절이 많이 있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그 이유가 본문의 어휘와 문법에 대한 우리의 무지에 기인하거나 나태함과 맹목성으로 성경의 의미를 파고들려는 집중력과 열정이 없기 때문입니다(158-59). 사실, 오늘날에는 성경 번역이 시대와 뒤처져서 읽기 어려운 측면이 큽니다. 그리고 루터가 지적한 바와 같이 성경을 사랑하고 그 뜻이 그러한가를 연구했던 베레아 사람 같은 열심히 부족하기에 성경은 모호하게 느껴집니다.
루터에 따르면, 우리에게는 두 종류의 판단이 있습니다(222-26). 그것에 의해서 성경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지요. 먼저는 내적 판단인데, 이를 성경의 내적 명확성이라고 합니다. 내적 명확성이라 함은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성경이 가르치는 교리와 견해를 확실하게 파악하고 분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외적 판단은 ‘성경의 외적 명료성’이라고 하는데요, 태양보다도 더 환한 밝은 빛이기에 누구라도 볼 수 있고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이 애매모호하다는 것은 해석의 권리를 로마 교황청에게 반납하는 것과 다를 바 없으며, 이 보다 더 악한 생각은 없다고 격렬하게 비판합니다. 주를 사랑하라, 서로 사랑하라, 는 말씀에 일절 모호함이란 없습니다. 그것이 모호하다는 사람의 말은 그렇게 살기 싫은데, 그 날카로움과 급진성을 조금은 완화시키려는 속셈이지 그 뜻을 모르지 않습니다. 순종하기 싫으면 싫다고 말하면 그만인데, 어렵다, 모호하다, 고 핑계를 대는 것뿐입니다.
아무튼, 글자를 깨우쳤던, 못 깨우쳤던지 간에 상관없이 듣기만 하면, 읽기만 하면,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주의 복음은 만민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만민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렵다고 자꾸 멀리하니까 더 어렵게 느껴집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의 말씀이니 틀림없습니다.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중략)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신 30:11, 14) 그래도 어렵다고 하실래요? 주님의 말씀에 반대하면서 까지요?
넷째, 그럼 어떻게 읽어야 성경이 쉬워질까요?
14절이 대답을 줍니다. 두 가지인데요, 하나는 입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입니다. 결론을 당겨 말하면, 입으로 읽고 마음에 담으면 된다는 말입니다.
입으로 읽는 것에 관해 말씀드리지요. 제가 쓴 「성경독서법」의 첫 장 제목은 “소리 내서 읽으라”입니다. 성경 읽는 방법은 입으로 소리 내서 읽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시편 1편 2절의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에서 묵상은 중얼중얼거리다는 뜻입니다. 개역개정에서 ‘묵상’이라는 단어가 대부분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로 정정되었습니다. 묵상하다는 말은 가만히 앉아서 골똘히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음독을 하면 리듬이 생기고, 그 리듬에 맞춰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직이는 거지요. 그게 바로 성경 읽는 모습입니다.
두 번째는 마음으로 읽으라고 합니다. 여기서 12, 13절 설명을 좀 해야겠습니다. 실은 12, 13절은 마음뿐만 아니라 입으로 읽으라와도 연동되어 있습니다. 그곳에서 모세는 하늘과 바다 이야기를 합니다. 성경은 하늘 위에 있지도 않고, 저 멀리 바다 건너편에도 있지 않다고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알기 위해 하늘로 올라갈 필요도 없고, 바다를 건너갈 필요도 전혀 없습니다. 그 요지는 네 가까이 있다는 것입니다. 방향으로 말하면, 저 위도 아니고, 저 앞도 아니고 바로 안에 있습니다. 내 입과 마음 말입니다.
마음에 있다는 말은 마음에 새긴다는 뜻입니다. 내면화하라는 겁니다. 입으로, 머리로, 지식으로 아는 하나님이 아니라 전인격적인 말씀으로 대하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입과 마음이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외면과 내면, 지식과 인격, 객관과 주관, 이런 것이 통합되어 있어야 합니다.
마음에 새기는 방법은 반복 밖에 없습니다. 세 번이고 다섯 번, 열 번이고 백번이고 들입다 읽는 거지요. 그러면 마음에 새겨집니다. 천, 천, 히 소리 내서 반복해서 음미하듯 읽으면 그 말씀이 내 안으로 스며들어 옵니다. 내가 성경의 세계 속으로 빨려 들어가지요.
또 하나의 방법은 상상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저는 ‘이야기적 동일시’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내가 성경 인물이 되어 보는 것이지요. 상상하며 읽기에 관해서는 “모든 사람을 위한 성경묵상법”의 5장, 2018년 9-10월호에 실릴 글, “중급자를 위한 묵상 노하우”를 가져와서 설명하겠습니다. 마침 오늘 주보에 그 원고를 미리 공개했습니다. 5장 4절, “상상해 보세요”입니다.
4. 상상해 보세요
묵상은 분석이 아닙니다. 개구리를 해부하면 죽고 맙니다. 개구리에 대한 정보는 늘어날지언정, 죽여서 그리고 죽어서 얻은 것입니다. 성경을 낱낱이 자르고, 나누고, 쪼개고, 뒤집고 헤집으면, 이미 황금알을 낳는 오리가 아니라 한 끼 식사로 사라지는 죽은 오리고기입니다. 하나님에 관한 객관적 정보량에 반비례해서 하나님을 아는 인격적인 지식은 약해지고 맙니다. 분석은 성경 묵상을 위해 필요하지만, 중심도, 기본도 아닙니다. 말씀을 개구리처럼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살리기 위해서 읽습니다.
유진 피터슨은 ‘묵상은 참여’(「이 책을 먹으라」, 173)라고 힘주어 말합니다. 위험하지 않을 만큼 일정한 거리를 두고 꽃과 정원을 냉철하게 관찰하는 외부자의 시선이 아니라, 그 안을 거닐며, 향기를 맡으며, 흙의 체취를 느끼고, 나비와 벌을 바라보고, 햇볕과 바람을 쐬는 내부자의 관점입니다. 아파트 창문에서 바라본 오솔길과 직접 걸어본 길은 정녕 다른 세상에 속합니다. 묵상은 성경의 세계 속으로 풍덩 뛰어들기 입니다. 직접 먹어보는 것입니다.
말씀이 생명이고, 살리는 것이고, 묵상이 나와 가정과 교회와 사회를 살리는 것이라면, 차가운 분석적 방법을 어느 정도 끌어안으면서도 성경의 세계 속으로 참여하는 방식의 묵상이 절실합니다. 그 방식은 상상하며 읽기입니다. 폼 나는 용어로 ‘이야기적 동일시’(narrative identification)이라고 하지요. 본문의 이야기를 나의 이야기로 읽자는 말입니다. 내가 성경 본문 속 인물이라도 된 듯이, 성경 인물이 마치 나인 것처럼 읽는 방식입니다.
묵상을 자꾸 하다 보니 자연스레 터득한 것인데, 알고 보니 묵상 선배들의 고전적 방식이더군요. 실제 묵상 내용을 보여드리는 것이 좋겠네요. 요셉이 팔려가는 대목입니다(창 37:19-30). 먼저 요셉이 되어 보겠습니다. 자기를 죽이려고 살기등등한 이복형들 한 복판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소년이 보이나요? 잘못한 것을 잘못했다고 말한 것 밖에는, 꾸려고 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꾸게 하신 꿈을 꾼 것 밖에는 잘못이 없습니다. 그것이 잘못이라면요.
그런데도 형들에게 살해를 당할 만치 만장일치의 박해를 당합니다. 생사와 미래를 장담 못할 노예로 파는 형들에 대한 공포와 증오, 불안이 뒤엉킨 아이가 되어 봅니다.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얼마나 미웠을까요. 얼마나 많이 울었을까요. 저 컴컴한 깊은 마른 웅덩이에서 자지러질 듯이 살려 달라 울부짖다 목이 잠겨도 눈물은 마르지 않습니다. 읽는 내내, 요셉도 아닌 내가 왜 이리 서럽고, 시리고, 시큰한지요. 뜨거운 것이 올라옵니다.
우리는 적어도 한번쯤 요셉처럼 가족과 형제와 친구들로부터 이해 받지 못하고 버림 받고, 서로를 오해하며, 서로의 말 한 마디에 베이고 말지요. 바로 그때 우리는 요셉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요셉입니다. 요셉은 나이고요.
그러면 이제 요셉의 형들이 되어 볼까요? 우리는 그 형들의 처지가 되어 볼 때, 요셉 스토리를 더 잘 이해하게 됩니다. 그들이 되어 보지 않고서 비난부터 하는 것은 온당치 않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느껴보도록 잠시 눈을 감습니다. 편애하는 아버지와 무시 받은 어머니와 홀대받는 형제들의 상황이 마치 나의 이야기인 양 읽으면, 그만 요셉이 미워집니다, 아주 많이요. 마치 살의를 지닌 형들이 되어보면서 내 안에 그런 악하고 약한 모습이 있다는 것, 나도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다는 것, 등등을 발견합니다.
우리 안에는 요셉만 있는 것도, 형들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둘 다 있습니다. 미디안 상인이 되어 볼 수도 있습니다. 지나가는 상인 입장에서야 괜찮은 노예 한 놈을 헐값에 사서 횡재했겠지만, 파는 자나 팔리는 자의 관계가 심상치 않습니다. 고대 문화에서 저들이 히브리인이라는 것쯤은 익히 알고 있을 터, 소위 교회 다니는 사람들 사이의 갈등과 분열을 바라보는 따가운 시선을 생각합니다.
이야기체만이 아니라 서신서도 상상하며 읽기에 좋습니다. 직접 가지 못하고 대신 편지를 보내는 바울의 절절함은 어떤 것일까, 편지를 받아든 빌레몬의 황망함은 또 어떻고요? 그 편지를 들고 왔으며 문제의 당사자인 오네시모는 어땠을까? 바울과 빌레몬, 오네시모의 자리에서 상대의 마음을 읽는 것은 성경에 대한 풍부하고도 다면적 이해를 얻을 수 있을뿐더러 적용에도 아주 유용합니다. 때로 우리는 바울의 자리에도 서지만, 잘못을 범한 오네시모도 되고요, 누군가를 용서하고 용납하고 품어주어야 할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복음을 좇는 자들을 향해 저주를 선언하는 바울의 심정이 내 것이 되어 내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습니다. 그 마음이 내 마음 되기까지 본문 앞에 계속 머물러 있습니다. 그 마음이 보여야, 그의 분노가 내 것이 될 때, 내 속에 잠자는 복음을 향한 순수한 열정이 되살아날 것입니다. 또한 다른 복음을 좇는 이들도 되어 봅니다. 그들이 이상하고 나쁜 이들로 지레 짐작하고 매도하지 말고, 그들이 왜 그리 쉽사리 유혹에 넘어갔는지를 찬찬히 뒤따라가면, 결국 그들과 하등 다를 바 없는 내 영혼의 민낯을 그대로 보고야 말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이지?” 보다는 “어떤 마음이었을까?”가 동아시아인들에게는 정서적으로 부합하고, 묵상가에게 적합한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묻고 느끼는 묵상은 하나님의 의도와 뜻을 캐묻는 것과 다르지 않으며 더 나아가 그것을 품고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하는데 어찌 그 마음을 알겠습니까.
묵상의 목적이 성경 지식의 증대가 아닌 이상, 성경 묵상에 관한 우리의 표어는 이것입니다. “성경을 알고! 성경을 믿고! 성경을 살고!” 주님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되도록 성경의 인물과 저자가 되어보기는 묵상의 최고이자 최선의 방법입니다. 하여, 묵상이 다다라야 최종 종착지는 이 노래 가사이지 싶습니다.
나의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 알아 / 내 모든 뜻 아버지의 뜻이 될 수 있기를
나의 온몸이 아버지의 마음 알아 / 내 모든 삶 당신의 삶 되기를(“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나의 마음 아버지의 마음으로 가득 차서 저절로 아버지 뜻대로 ‘살아져버리는’ 그런 묵상을 상상해 봅니다. 꿈같은 이 이야기가 그저 한 낮의 꿈은 아니겠지요?
닫는 말 : 읽으면 실천하는가?
오늘 저의 설교에 함정이 두 개 있습니다. 하나는 제가 성경이 쉽다고 했는데요, 정확하게 말하면 쉽다고 하면 안 됩니다. 평이하다는 단어를 써야 해요. 플레인 요구르트 할 때의 그 plain인데요, ‘플레인 성경’입니다. 뭔가를 첨가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솔직담백하다, 분명하다, 알기 쉽다 등등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쉽다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크리스토퍼 라이트의 말입니다.
“율법이 ‘어려운 것도 아니요’라는 말은 순종이 쉽다는 뜻이 아니라 율법이 단순하다는 뜻이다. 율법은 모호한 철학이나 뒤얽힌 규범이나 심오한 종교 의식들f 채워져 복잡하거나 산만하지 않으며, 특권을 가진 소수만이 접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UBC신명기」, 411)
우리 식으로 말하면, 한글을 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글 성경을 읽으면 그 내용을 알아들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평이하다는 말로도 볼 수 있고, 저는 여러분을 위해 약간의 오해를 무릅쓰고 쉽다고 한 것입니다. 제가 너무 쉽게 설교를 하려다가 불필요한 오해를 낳을까봐 교정하고 넘어갑니다.
다른 하나는 이 본문의 맥락을 보면, 순종이 초점이지 지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순하다고 해석하든, 쉽다고 해석하든 간에,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실천하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성경을 많이 읽는다고 해서, 입으로 읽고 반복하고, 암송하여 마음에 새긴다고 해서, 그것이 자동적으로 실천이 되느냐는 것이지요. 그게 그렇게 쉽겠습니까. 쉬울 리 만무하지요.
그렇지만, 저는 단언합니다. 반복해서 수십, 수백, 수천을 읽고 또 읽으면, 내가 읽은 그 말씀, 내 속에 들어온 말씀이 결국 나를 움직여서 실천하게 만듭니다. 운동선수들 이야기를 들으니 한 동작이나 자세를 천 번 이상 반복하면, 자동적으로,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답니다. 굳이 하려고 하지 않아도 선천적으로 타고난 무조건 반사 작용과 같이 저절로 외부로 표현되고 표출됩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을 반복해서 읽고 또 읽으면 그것이 내 속으로 들어와 내 것이 됩니다. 이에 가장 걸맞은 단어가 ‘빙의’입니다. 말이 멋있어 보여서 그렇지 빙의는 귀신들림, 귀신 씌움입니다. 내 영이나 내 정신이 아닌 남의 영혼과 정신이 내가 아닌 그가 된다는 거지요. 내가 행동하던 패턴이 아니라 내 속의 어떤 것의 패턴을 따라 행동하게 됩니다. 그러니 내가 빙의한 것처럼, 성경의 정신과 문자를 내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여호수아 1장 8절입니다.
“이 율법책의 말씀을 늘 읽고 밤낮으로 그것을 공부하여, 이 율법 책에 씌어진 대로, 모든 것을 성심껏 실천하여라. 그리하면 네가 가는 길이 순조로울 것이며, 네가 성공할 것이다.”
저 순서를 잘 보십시오. 먼저 읽고, 묵상 곧 공부를 하고, 실천하라고 합니다. 저는 저 세 단계가 각각 분절되어 있다는 해석에도 열려있지만,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쪽입니다. 늘 읽고 입에 달고 살면 자연스레 실천이 된다는 거지요.
자, 이제 마칠 랍니다. 성경이 어렵다고 말하는 당신에게 목사인 제가 드릴 수 있는 처방전은 첫째, 번역본을 바꾸라, 둘째 성경이 어렵다는 네 생각을 바꾸라, 입니다. 세 번째는 성경 읽는 방식을 바꾸라, 입니다. 입으로 소리 내서 읽고, 마음에 두고 온종일 되새김질을 하면, 어느 날엔가 별안간 내 행동과 언어로 갑자기 툭 튀어나옵니다. 어떤가요? 쉽지 않나요? 성경을 소리 내서 주구장창 반복해서 읽기만 하면 됩니다. 참 쉽죠~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