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목소리
사방에서 꽃 소식이 들려오니 그녀 생각이 난다. 베이지색 바바리코트에 벚꽃무늬 스카프를 두른 그녀가 금방이라도 나를 부르며 달려올 것 같은데 벌써 6년이 지났다. 길을 가다가“선생님, 여기에요.” 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면 나는 반사적으로 뒤돌아보게 된다. 바로 그녀 때문이다.
‘1인 1책 펴내기’ 수업을 하다 보면 여러 부류의 사람을 만나게 된다. 해마다 새로운 수강생과 만나지만 그녀와는 특별한 인연이 느껴졌다. 나보다 나이는 많았지만, 대화가 통했고 차가운 이미지와 달리 따뜻한 성격이 맘에 들었다.
여자로 한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편린이 있다지만 그녀는 나이에 비해 살아온 인생이 정말 질곡 졌다. 유복한 가정에서 나고 자라 고생 한 번 안 하고 살던 그녀의 삶을 결혼이 바꾸어 놓았다.
그녀는 아들, 딸 남매를 두었다. 죽니 사니하며 따라다니던 남자가 평생 자기만 사랑해줄 거라 믿었단다. 죽도록 사랑했던 사람이었기에 배신감도 배로 컸던 남편과 이혼하고 아이들은 그녀가 맡았다고 이야기할 때 습관처럼 물어뜯던 그녀의 손톱에서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1인 1책 펴내기 프로그램이 꼭 자기 같은 사람을 위해 만든 프로그램 같다고 했다. 그녀는 사는 동안 매년 책 한 권씩 펴내 자기 집 작은 책꽂이를 자기가 발간한 책으로 채우겠다며 환하게 웃었다.
직장 때문에 수업 시간을 못 맞추던 그녀와 중앙공원의 우동 집에서 따로 만났다. 수원에서 직장을 다니며 주말에만 청주에 내려오던 그녀는 ‘공원당’ 우동이 먹고 싶어 죽을 뻔했다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그녀의 글은 잘 발효된 된장 같았다. 오래 묵었어도 텁텁하지 않고 조미료를 넣지 않아도 구수한 맛이 났다. 학창 시절에 문학소녀였다던 그녀의 말을 뒷받침하듯 문장 다루는 솜씨가 뛰어났다. 교정 본 글을 보내주면 글을 읽느라 밤을 꼬박 새운다는 그녀는 얼른 책을 만들고 싶다고 보챘다.
그녀의 책이 우수상을 받게 되었다. 상을 받는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설레는 일이지만 작가를 지망하는 그녀한테는 더욱 각별한 상이 될 것 같아 단숨에 전화를 걸었다. 나만의 기우인가. 당선 소식을 접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평소 같으면 홈홈하며 좋아했을 그녀인데 기분이 이상했다. 선생님 덕분이라고 기쁜 내색은 했지만, 모기만 한 목소리로 시상식에 못 갈 것 같다며 전화를 끊었다.
한 달 후 겨우 통화가 되었다. 몸이 아주 아프지만, 꼭 한번 나를 보고 싶다고 했다. 아니, 나를 볼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것이 그녀와 마지막 통화였다.
시상식이 끝나고 며칠 후에 그녀의 사망 소식이 들려왔다. 뇌종양 선고를 받은 지 6개월 만이라고 했다. 이제야 인생이 무엇인지 조금씩 알아갈 나이 고작 쉰다섯 살인데, 겨우 그만큼 살려고 이 세상에 왔나. 무방비 상태에서 두 귀가 찢어지고 나니 다리가 휘청거렸다. 그녀와의 인연이 비록 2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누구보다도 많은 속 이야기를 나누었기에 마음이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서 다시 그녀의 책을 꺼내 들었다. 그녀는 자기의 죽음을 예견하고 나서도 죽을힘을 다해서 글을 썼다. 죽기 전에 책을 만드는 게 소원이었다고 그녀의 딸이 전해주었다.
마지막 희망을 품고 수술실에 들어갔는데 그것이 그녀와 마지막이었다며 그녀의 딸은 오열했다. 수술실에 들어가면서 책 이야기를 해서 알았다는 그녀의 딸은 이럴 줄 알았으면 책이라도 빨리 찾아다 엄마 가슴에 안겨주었을 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책에 남겨진 사진 속의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녀가 얼마나 갖고 싶어 하던 책인가. 무슨 일이 있어도 올해는 꼭 책을 내야 한다며 조바심내던 그녀의 고운 모습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늘 그녀와 만나던 공원당에 갔다. 오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문이 열릴 때마다 자꾸 신경이 쓰였다.
어디선가“선생님, 여기에요.” 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뒷덜미를 잡는 것 같아 나는 자꾸만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2010년 4월)
첫댓글 신(神)께 질문을 해봅니다.
"저렇게 올곧게, 곱고 아름답게 살아가시는 여자분 왜 그렇게 일찍 데려가십니까?" 하고요.
좋은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게요. 착한 사람은 이승에서 고생하지 말라고 그러나 봅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늘 그렇듯 선생님 글에는 어떤 향기가 있어요.
강하지는 않지만, 따스함이 스며있는 선생님 특유의...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 부족한 글에 좋은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