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춤(가면극)의 미학
1. 탈춤은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가? 탈춤 속에 담겨진 것들은 무엇인가? 춤과 음악 그리고 재담과 몸짓이 어우러져 표현되는 탈춤의 마당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발견할 수 있는가? 탈춤에 대한 사회학적, 문학적 접근을 통해 발달의 과정과 표현의 양식을 이해하고 난 후 우리는 위와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탈춤을 이해하는 핵심이기 때문이다. 정영호는 <탈놀이에 나타난 미의식>을 통해 탈춤에는 ‘① 탈일상성에 의한 전도된 현실 속의 일탈 ②비극적 일상의 사실적 형상화를 통한 해원 ③인간다운 삶의 구현 ④대동놀이적 집단 신명 풀이’가 담겨져 있다고 분석하였다. 그의 설명처럼 탈춤이 벌어지는 마당은 삶의 일상적인 조건을 극복하며 해방의 욕구가 표출되는 장면들로 넘쳐난다. 양반과 노승이 조롱의 대상이 되며, 상민과 노비들이 걸죽한 입담으로 세상을 풍자하는 것이다. 그것은 오랜 시간 속에 억압된 인간의 욕구에 대한 해방적 외침이며, 고통 속에서 쓰러져야 했던 수많은 약자들의 아픔에 대한 해원이었던 것이다.
2. 탈춤은 일상의 전복을 통한 일종의 정서적 해방구였다. 하지만 탈춤은 단지 계급적 긴장과 억압적 상황에 대한 심리적이고 사회적인 관리로만 활용되었을까? 탈춤에는 보다 근원적인 우주에 대한 성찰과 인간의 자유에 대한 욕구가 담겨있는 것은 아닐까? 유교나 불교와 같은 외래사상이 도입되기 이전에 한민족의 정신세계를 관통하였던 우주와 자연 그리고 인간에 대한 철학이 담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탈춤의 미학은 정치적 상황에서 벗어난 예술적, 미학적, 문화적 영역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발표된 것이 김지하의 『탈춤의 민족미학(2008)』이다. 지하는 탈춤 속에는 우리의 전통적인 우주관인 ‘천지인’ 삼재 사상이 기본으로 담겨져 있으며, 그것은 역동적인 카오스의 원리와 안정적인 코스모스 원리 그리고 둘을 연결하는 ‘카오스적 질서’의 종합적인 구현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분석한다.
3. 탈춤의 마당은 평소에는 일상적인 공간이지만 탈춤 공연이 시작되면서 신성시되는 공간으로 변모된다. 일종의 ‘거룩한 것의 지상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탈춤 마당에서 펼쳐지는 갈등과 화해, 긴장과 이완의 연속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 자연의 원리를 체현하고 있다. 우주는 수많은 충돌과 갈등을 통해 확장되지만 어느 순간 원래의 자리로 다시 돌아오는 ‘순환적 확장’의 세계이다. 갈등과 화해는 인간의 방식이기도 하지만 우주를 형성하는 원리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기에 동학의 최제우는 인간의 마음이 하늘의 마음이라고 했고, 인간의 모습에서 하늘의 모습을 찾으려 했던 것이다.
4. 탈춤에는 사회적 권위 뿐만 아니라 우주적인 신성이 나타난다. 우주적 신성은 일상의 추악함을 제거하고 교도하는 역할을 담당하지만, 탈춤의 마당에는 끊임없이 갈등이 반복되며 또한 화해와 이어진다. 갈등의 극단화가 중간에 중지되지만 그것은 또한 계속적으로 반복된다. 어쩌면 그러한 모습은 ‘대립되는 것들’로 통해 생성되고 변화되는 우리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변화는 충돌과 갈등의 변혁의 세계에서 시작된다. 그것은 우리의 유목적 삶을 반영하고 있다. 그럼에도 갈등과 유랑은 지속될 수 없다. 어느 순간 우리는 정착해야만 하고 화해를 통한 안정의 세계를 희구하는 것이다. 탈춤의 세계는 인간의 이러한 근원적 삶의 반복을 보여준다. 저항과 변혁의 힘이 작동하여 긴장이 고조되지만, 어느 순간 서로의 화해를 통해 긴장은 이완된다. 그럼에도 긴장을 조장했던 상황은 변화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갈등은 여전히 현존하고 있는 것이다. ‘갈등’의 급격한 종말, 이것은 고통받는 자들에게는 시급한 과제이지만 결코 바람직한 결말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조급함은 오히려 더 큰 불행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최제우 또한 <탄도유심급>라는 글에서 동학에 참여한 사람들이 사회적 변화에 너무 조급하지 말고 자신의 내면을 수행하라는 가르침을 남기고 있다. ‘탈춤’의 세계 또한 정치사회적 해결이 아니라 우주적 변화에 대한 성찰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5. 그런 이유에서 탈춤의 핵심적 원리는 우주와 지상을 연결하는 인간의 자유인지 모른다. 탈춤에는 운명적인 질서나 자연선택이라는 냉혹한 외부의 질서에 무너지지 않는 인간의 자유가 넘쳐난다. 비록 현실적 어려움을 곧바로 변화시킬 수 없을지라도 결코 그것에 굴복하지 않는 자유가 지속된다면 새로운 세계에 대한 확신과 더불어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자기선택의 원리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세상의 변화는 언제든 올 것이라는 믿음이 담겨있다. “탈춤의 밑바닥의 생성원리, 창조원리는 텅 빈 자유입니다. 이 자유는 반드시 마당 공간에 틈을 만들고 인물과 인물, 상황과 상황, 성격과 성격 사이에 자유로운 넘나듦이 서로와 서로를 인정하면서 이것이 저것 되고, 저것이 이것 되는 것입니다.”
6. 이렇듯 탈춤에는 대립되는 것들이 서로 모여 갈등을 겪지만 또한 그러한 갈등 속에서 화해의 모습을 보이면서 화합과 신명의 마당을 펼친다. “탈춤이 다른 모든 예술 장르보다 가장 집중적으로 솟대(호혜의 원리)의 흔적을 가지고 있고 종합적이고 다양하며 그 밑에 성과 속, 인간과 우주, 환상과 현실, 초자연과 자연, 너와 나, 유목민과 정착민 사이의 서로 역설적이고 상호대치적인 이런 관계를 같이 안고 있는 복잡성, 즉 혼돈 예술의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관객들은 그러한 마당의 대동놀이에 참여하면서 현실의 억압을 망각하는 것이 아니며, 현실과 이상의 괴리와 무게감을 견뎌내면서 인간적으로 성숙함을 배우는 것이다. 그것은 삶을 직시하면서도 폭력적인 수단에 의존하지 않는 변혁의 한 형태인 ‘수동적 응시’의 성격과도 닮아있다. 탈춤은 선동의 무대가 될 수 없다. 열려진 공간은 관객들을 선동하기에는 부적합하다. 오히려 마당에 참여한 관객들은 냉정한 비판적 거리를 두고 마당을 응시한다. 탈춤은 다양한 요소들이 충돌하면서 생성되는 세계를 상징한다. 그곳에는 하나의 목표를 향한 분노와 욕망 대신에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갈등의 세계를 그대로 재현하면서도 갈등의 해소가 단순한 분노로만 해결될 수 없다는 진실을 말해주고 있는지 모른다. 탈춤의 세계는 결코 체념과 달관이자 현실의 수동적 수용이 아니다. 최제우가 말했듯이, 세계의 변화는 시작되었으며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과정이기에 중요한 것은 변화를 준비하는 태도인 것이다. 세계의 생성은 자기선택의 원리이자 자유의 영역이라는 점을 확인하면서 현명한 지혜를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첫댓글 - "억압된 인간의 욕구에 대한 해방적 외침 : 탈춤의 미학은 정치적 상황에서 벗어난 예술적, 미학적, 문화적 영역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
- 김지하의 미학론이 지금은 어디로 스며들고 있는지...... 장일순, 함석헌....... 이제 기억도 가물가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