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례의 성경적 근거
침례 - 浸禮(담글 침, 예식 례),
세례 - 洗禮(씻을 세, 예식 례)
침례는 ‘물에 잠기도록’ 하는 것이고, 세례는 ‘씻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나오는 이 단어의 헬라어는 ‘Baptizw(뱁티조)’입니다. 이 뜻은 ‘담근다’라는 뜻입니다. 영어로 ‘Submerge, Dip’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세례(침례)를 줬다’고 할 때 그 말은 다 ‘침례를 줬다(물에 담궜다)’는 의미입니다.
AD 1,300년 이후 종교 개혁이 시작하면서 성경을 번역(독일어, 영어)하기 시작했을 때 헬라어 ‘Baptizw’(뱁티조)라는 단어를 번역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전부 다 세례(물을 뿌리는 것)을 주고 있었기 때문에 ‘뱁티조’를 ‘담근다’라고 번역하면 세례와 의미가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민하던 중에 신조어를 만들어버렸습니다. 그 단어가 ‘Baptize’라는 신조어입니다. 그래서 Baptize라고 쓰고 읽으면서 종교개혁 시기에도 세례를 계속 주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은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요?
막 1:10을 보면 예수님도 침례를 받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물 속에서 막 올라오시는데,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는 것을 보셨다.”
예수님은 침례를 받으실 때 물 속에서 올라오셨습니다. ‘속에서’를 번역한 헬라어 ‘ek’(에크)는 ‘아래서 위쪽으로’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그래서 10절은 예수님께서 ‘물로부터’, ‘물 속에서’ 막 올라오시는데 성령님이 내리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행 8:38을 보면 사도들도 침례를 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빌립’이라는 집사가 성령님의 지시를 받아 광야 길로 갔습니다. 한 행렬이 있었는데 에디오피아 한 고관이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마치고 자기 나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빌립이 가까이 다가가자 성경(구약, 이사야서)를 읽고 있었으나 의미를 알지 못하여 빌립이 마차에 올라 그 구절을 설명해주면서 예수님에 대한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그 고관은 궁금증이 다 풀리면서 예수님을 영접할 생각이 들었고, 마침내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그리고 행 8:36, 38에 이렇게 쓰여있습니다.
“그들이 길을 가다가, 물이 있는 곳에 이르니, 내시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여기에 물이 있습니다. 내가 침례를 받는 데에, 무슨 거리낌이 되는 것이라도 있습니까?’”(36절)
“빌립은 마차를 세우게 하고, 내시와 함께 물로 내려가서, 그에게 침례를 주었다.”(38절)
여기서 침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례였다면 굳이 냇가(강가)에까지 내려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들도 침례를 준 것이 확실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롬 6:2~3에서 침례의 뜻이 의식(세례가 아닌 침례)이 상징하는 것과 일치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만약 세례였다면 이렇게 표현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세례를 받을 때 여러분 머리 위에서부터 물이 흘러내리면서 여러분의 죄가 씻겼다라는 거 기억 안 납니까 근데 왜 자꾸 죄를 짓고 삽니까?” 이렇게 기록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침례이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사도 바울은 씁니다.
“침례를 받아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된 우리는 모두 침례를 받을 때에 그와 함께 죽었다(잠겼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그분이 깨어나는 것 같이 우리가 살아나는 겁니다.”
침례를 고스란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에 ‘침례를 줬다’는 것은 명확한 사실입니다.
또한 ‘디다케’라는 문서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기원후 한 90년경에 쓰여진 교회 규범인데 거기에 침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이렇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 침례는 흐르는 강물에서 해라.
# 추우면 침례탕에서 해라.
# 병약하면 약식으로 줄 수 있다.
그래서 침례가 성경적이다라는 걸 알 수가 있습니다.
또 하나 종교개혁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침례받는 신자들이 큰 고통을 겪게 됩니다. 기독교가 AD 326년 로마 국교로 공인이 되면서 타락하기 시작하다가 중세 1,300년부터 그 타락상이 극에 달합니다. 기독교는 성직자들에게 오직 부와 명예를 얻기 위한 도구였고, 백성들(신자들)을 지배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을 통해서 개신교가 나오게 됩니다. 종교개혁이 시작되면서 구교(카톨릭)와 신교(개신교)라는 명칭이 붙게 된 것입니다. 종교개혁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 개혁자들도 구교(카톨릭)에서 나왔기 때문에 완벽하게 개혁하지는 못했습니다. 처음에 루터가 했고, 그 다음에 좀 더 발전적으로 칼빈이고, 거거서 더 나아간 것이 침례교가 되는 식으로 기독교가 개혁이 되어갔습니다.
침례가 성경적이라는 것을 확신한 개신교 신자들이 특히 유아 세례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유아 세례 받은 사람은 안 되고 믿는 사람은 다시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개신교도 유아 세례를 전통이라고 그냥 묻어두고 있었는데 이것을 문제시 하자 침례교회를 미워하게 된 것입니다. 침례교인들은 카톨릭뿐만 아니라 개신교한테도 미움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침례교인들을 잡아다가 돌에 묶어서 물에 빠뜨려 죽이는 불행한 역사가 있었습니다.
침례교인들이 성경대로 살려고 하다가 받은 아픔이 있기 때문에 침례라는 말은 믿음의 상징입니다. ‘성경대로 살겠다’라는 상징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문제가 된 것입니다. 오늘날 세례받는 분들을 침례교회에서 무시하지는 않습니다. 인정합니다. 그러나 침례교회에서 ‘침례’가 워낙 중요한 신앙의 정체성이자 전통이기 때문에 존중해 달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너무나 소중한 정체성(IDENTITY)입니다.
침례교인은 ‘지금까지는 성경대로 안 살았지만 이제부터는 내가 성경대로 살겠다’라는 하나의 다짐으로 침례부터 시작하려는 것입니다. 침례부터 ‘성경대로 한번 해보자’라는 의미에서 ‘침례를 받아라’고 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침례를 받으면서 ‘성경대로 해 보겠다’라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 죽었습니다. 이것이 침례교회에는 정말로 중요한 가치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침례교회에서는 예수님을 영접하였으면 지체없이 침례를 받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대로 살겠다는 의미로(과거에 세례를 받으신 분도) 침례를 받는 것은 매우 좋은 일입니다. 종교개혁 시대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미 믿고 있었습니다. 믿고 있었고 세례를 받았지만 성경에서 침례를 발견하고 나서 정말로 기뻐하였고, 죽기를 각오하면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성경대로 살겠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시고 우리에게도 큰기쁨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