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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1절-10절: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오늘은 하나님과 뱀과의 싸움입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부터 마지막 세상 끝 날까지 인류의 역사는 무형적 투쟁과 유형적 투쟁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고로 이 공격전에서 패자의 결과와 승자의 결과가 나오고 있는데 성경에서 보여주고 있다 그 말이요.
에덴동산에서 싸움입니다. 우리가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적 즉 신학적으로만 알면 안 됩니다. 무슨 말인가 하니 계시 면을 모르면 신앙이 안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마지막 시대에 왜 이렇게 어지러운가 하니 신학적으로는 알지만 계시 면으로 모르기 때문에 신앙이 안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렇게도 볼 수가 있습니다.
선악과를 왜 만들었느냐? 대개 하나님의 실패작으로 그렇게 보고 있어요. 하나님이 실패했다. 이 말의 의미가 뭔가 하니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안 따먹었으면 에덴동산에서 아들 낳고 딸 낳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터인데.’ 지금 거의가 보면 교인들의 정신이 거기에 다 집중이 돼 있어요. 그렇게 하려고 하나님이 마음을 먹었는데 인간이 죄를 지었다 그 말이요.
죄를 지은 원인이 문제는 하나님이 다 만들었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하나님 당신이 일차적으로 책임이 있기 때문에 실패했기 때문에 예수를 보냈다’ 이렇게 된단 말이요. ‘예수를 보내가지고 회복으로 들어간다’ 이렇게 돼 있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그 말의 의미가 거기에 하나님의 실패가 들어있다 그 말이요. 대개 그렇게 들어가 있단 말이요. 그걸 우리가 알아야 된다.
그런데 기독교의 기본교리, 성경에서 말하는 기본적인 원인 여기에 비추어 보면 하나님은 실패하실 분은 아니지요. 전지전능자요 만능의 능력자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다 아시는 분이시요. 그러니까 에덴동산에서 되어진 일이라든지 마지막 세상까지 그 전체적인 면을 볼 때에 그게 실패로 돼 들어가지를 않는다 그 말이요. 그런데 원 기본교리를 갖다가 하나님께서 무능자로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 말이요. 보통 보면. 하나님은 실패하실 분은 아닙니다.
그리고 인류의 죄의 시작은 보통 보면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 그러니까 안 따먹었으면 되는데 따먹은 고로 죄다. 다시 말씀드리면 따먹기 전에 그 마음 움직임이 있잖아요. ‘따먹어야 되겠다. 안 따먹어야 되겠다’ 하는 그 마음의 움직임 그게 먼저 선행이 된다 그 말이요. 활동이 나오기 전에 마음의 움직임이 선행이 된다 그 말이요. 그런데 그걸 잘 못 본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따서 먹었기 때문에 죄고 안 따먹었으면 죄가 아니다. 그렇게 되면 뭘 모르게 되지요? ‘따먹고자 하는 마음은 있어도 안 따먹었으면 죄가 아니다’ 이렇게 들어가는 거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느니라’ 한 그 무형적인 그걸 우리는 감지를 해야 되거든요. 마귀는 그런 걸 잘 감지를 해요.
바리새인은 행동보고 그러지요? 행동을 보고. 그 마음을 몰라요. 마음 움직임을 몰라요. 그런데 예수님은 마음 움직임을 보는 거지요. ‘음욕을 품은 자마다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음 움직이는 이게 중요하다 그 말이요. 마음 움직이는 이것을 잘 다스려야 되겠는데 이걸 다스리게 하는 것이 성경이요 진리요 이게 깨우침이란 말이요. 그걸 잘 다스리게 하는 거.
그런데 우리 인간이 그게 있습니까? 마음 움직이는 거 눈에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우리가 알기 때문에 자기가 현재 여기 있으면서 자기가 자기로부터 떠나가는 그 마음 움직임이 있습니까? 그 참 이게 말의 표현이 어렵네요. 자기가 자기로부터 떠나가. 금방 갖다가 돌아오기도 하고. 그런데 자기가 자기로부터 떠났는데 그 자기가 누구인지도 잘 몰라.
왜 선악과를 따먹었느냐? 그건 2장에 보면 지키지 못했으니 죄다. 그래서 따먹게 된 거다. 성경에 지키고 다스리고, 그 다음에? 정복하고. 그 때 뭘 정복해요? 정복하고 다스리고 땅에 충만하라. 이것이 진리의 삶이요. 그게 그 삶이 타락이 아니에요. 그런데 타락 후에 그 삶으로 안 돼 있고 사건과 환경 즉, 세상이라고 하는 그 밑에서 지배를 받고 있다 그 말이요. 이게 타락이다 그 말이요. 인간은 지배를 해야 되는데 지배를 받고 있다 그 말이요. 세상으로부터 지배를 받고 있다. 그러니까 자유가 안 되잖아요. 세상으로부터 지배를 받으면 죄다. 그렇게 들어가는 거다.
그런데 그 앞서서는 인간이 뱀을 다스려야 합니다. 못 들어오게. 에덴동산 안으로. 그런데 들어왔단 말이요. 다스리고 지키지 못한 고로 따먹게 된다 그 말이요. 자기가 제 마음 못 다스리면 따먹게 돼요. 그런데 따먹는 그 자기가 참 자기인 줄만 알고 있다 그 말이요.
그러면 지키고 다스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그 자가 참자기요, 아니면 그 말씀을 거스르고 따먹는 그 자기가 참 자기요? 기독교 안에서만 그걸 아는 거지요.
아담보고 ‘다스리라’ 할 때에 고맙고 감사했더라면 즉, 은밀계시를 알았더라면, ‘왜 그 명령을 나에게 하셨을까? 무슨 뜻으로 하셨을까’ 이렇게 했더라면 감사가 나오는데 즉, 우리 입장에서 볼 때에 환경과 사건을 주신 것은 명령을 하시는 것은 무엇 때문에? 우리의 신앙실력을 키워주려고. 즉 하나님의 온전성이 거기 붙어있다 그 말이요. 그런데 그 때로 가서 보면 아담과 하와가 그걸 몰랐단 말이요. 그런데 우리는 알지요?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불만이 올 때에 무슨 불만이냐?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대우를 해주는 불만. 대우. 처우. 말하자면 ‘하나님 당신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고’ 뭐 이런, 그리고 현실의 불만 그 말이요. 다스리지 않게 되면 현실에 불만이 나와요. 즉 ‘현실에 불만을 하는 사람은 다스리지 않는 사람이구나’로 되어 있다 그 말이요.
인간 자기는 영육 결합체로 되어 있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자기는 땅에만 있고. 이 무슨 말인가 하니 현실에 불만은 하나님의 뜻을 모르면 나오게 되어 있다. 즉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은밀계시를 모르면 불만이 나온다. 나오게 되어 있다. 은밀계시를 알면 감사가 나오지요. 모르면 어떤 사람에게는 좋은 환경 어떤 사람에게는 나쁜 환경을 줬다 그러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좋은 환경을 주는 사람은 하나님이 이뻐서 그렇게 줬고 나쁜 환경을 준 것은 미웁기 때문에 뭐 이런 차원으로 본다 그 말이요. 성경은 그런가?
모세를 바로 왕에게 잡혀 죽이려고 그 때에 태어나게 했지요? 바로 왕이 모세를 잡아 죽이려고 하는 그걸 하나님이 모를까요? 알지요. 하나님이 알아요. 그러니까 바로 왕이 태어나기 전에 모세를 태어나게 해서 한 평생 살다 가게 할 수도 있고, 그 다음에 그 악한 바로 왕이 태어나서 악한 정치 다하고 죽은 후에 모세를 태어나게도 할 수 있는 거라요. 이해갑니까? 그런데 왜 하필 악독한 바로의 그 때에 왜 모세를 태어나게 했느냐 그 말이요. 왜 한 것 같아요? 그래서 결과적으로 쉡게 말하면 모세를 모세만큼 영광스럽게 올리고 싶어서 그 때 태어나게 했습니까? 그렇게 보여집니까? 그런 걸 못 본단 말이요.
우리는 은밀계시로 그런 걸 볼 때에 어떤 사건 환경을 몰아붙여주던 원망이 안 들어가는 거지요. 절대로. 문제는 자기의 부족성을 찾고 거기에서 지혜가 모자라는지 도덕성이 모자라는지 말씀을 통해서 보충하고 채워서 아닌 말로 남이 다스리지 못하는 그 사건 환경을 자기가 다스린다면 이 사람은 천하를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거지요.
영능의 실력을 키워주기 위해서. 그렇지요? 그런데 그러한 은밀계시를 모르면 이거는 원망불평하게 된다. 물질계를 왜 만들었느냐? 그리고 우리를 왜 그 가운데 두었느냐? 우리를 온전자로 만들기 위해서. 왜 온전자냐?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모르면 죄가 됩니다. 하나님의 은밀계시를 모르면 죄가 됩니다. 그러니까 행동은 하나의 결과입니다. 그러니까 따먹기 이전에 이미 죄는 형성이 됐다 그 말이요. 따먹은 것은 마음에 형성된 대로 눈에 보이게 나타난 하나의 결과다 그 말이요. 이해가 되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행동했다’ 단순히 그걸 보는 게 아니라, 그것만 보는 게 아니라, 결과만 보는 게 아니라 그 결과 이전에 ‘따먹으라’ 그랬을 때에 발이 걸어갔을 거고 손이 나갔을 거고. 이게 뭐요? 마음의 움직임 아니겠어요? 그런 게 다 들어있다 그 말이요.
그런데 아담에게 물었지요. 또 여자에게 묻고. 아담의 말을 들어보면 선악과를 만들지 말던지. 그렇지 않느냐 그 말이요. 또 아니면 선악과는 만들었다 해도 여자를 만들지 말던지. 그리고 하나님이 다 만들어놓고 따먹으라고 그랬을 때에 죄를 짓게스리 만들어 놨으니 그러면 따먹으려고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강권발동을 해서 따먹지 못하도록 했으면 될 거 아니냐? 말하자면 당신 책임이다 그 말이지.
정말 하나님 잘못일까? 선악과를 만든 게 하나님 잘못일까? 뱀을 만든 거 하나님 잘못일까? 강권발동을 안 한 거 하나님 잘못일까? 그런데 하나님은 완전자이시기 때문에 아무리 봐도 실패할 리는 없다. 그러면 우리가 인간의 표현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고 세상 모든 만물 만드는 걸 주먹구구식으로 만든 건 아니란 말이요. 모든 걸 조합을 이뤄가지고 물고 들어간단 말이요. 어떻게 이게 과학적이고 초과학적으로 들어가 있단 말이요. 과학은 창조 속에 들어있는 거지요. 과학 속에 창조가 들어있는 게 아니고 창조 속에 우리의 구원의 법칙인데 안 믿는 세상은 그냥 어떤 이론적 법칙.
하나님은 실패작이 없다. 그래, 인간의 용어로 말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계획을 하셨고 설계를 하셨고 예정을 하셨고 섭리하는 이거 모두 대국적인 구원을 향한 완전을 위한 주권섭리대로 진행이 되고 있다 그 말이요. 그래서 아담인 사람 나는 주권섭리의 모든 역사가 그렇게 진행되어 나가고 있는데 나는 그것에 호응적인가, 대립적인가? 호응을 해도 호응과 함께 그 진행이 계속돼 나가는 거고, 그 면에 대해서 대립을 한다고 해서 진행되는 것이 멈춰졌다가 가는 거냐? 아니요. 대립이던 진행이던 중단됨이 없이 계속 진행이다 그 말이요.
‘따먹었네, 안 따먹었네’ 지금 그걸 살짝 밀쳐놓고 하나님은 완전자로서 대국적인 신령천국의 누림성을 놓고 예정 계획 설계 창조 섭리 죽 해나가고 있다 그 말이요. ‘그 날 6일 동안 딱 만들었다’ 그렇게만 보지 말고 우리의 대 구원을 위해서 진행되고 있단 말이요. 모두 다 시간 속에서 가고 있단 말이요. 쉽게 말하면. 그 날에 이루어지는 그 날을 향해 가고 있다 그 말이요. 가고 있는 사이에 누구는 나고 죽고 누구는 나고 죽고 자꾸 그러고 있다 그 말이요. 그리고 어떤 사람은 뭘 이어받아가지고 또 가고 가다가 죽고, 또 이게 안 되면 새롭게 일어나서 가다가 죽고, 또 가다가 죽고 자꾸 이렇게 변동사항을 일으키면서 가고 있다 그 말이요.
그러면 우리가 이 대국적인 구원을 염두에 둘 때에 우리가 예수 믿는 인간입장에서 생각을 해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다음에 영이 중생이 되었고, 관계성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고, 인격적 애정적 수수관계로서 이렇게 되어진 것을 우리가 느껴볼 때에 선악과를 따먹기 전보다도 훨씬 나은 겁니까, 못한 겁니까? 그렇게 볼 때에?
에덴동산의 범죄 이전 무죄인으로 있을 때에 죄가 없다고 해서 의인은 아닙니다. 의인은 의를 행해야 의인이고 죄인은 죄를 행해야 죄인이요. 그런데 의를 행치도 않고 죄를 짓지도 않은 그 상태는 무죄인이라 그 말이요. 그러면 무죄인의 그 상태의 영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후의 그 중생된 영혼과 같습니까, 질이 다릅니까? 그걸 기독교에서 잘 생각을 못해요. 다르지요? 왜 다르냐? 무죄인의 상태의 그 영혼은 어떤 방법으로서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어야 돼요. 지음을 받았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본질상 질적으로 그 영이 하나님의 단일성으로 된 게 아니란 말이요.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피조물이로다. 그러니까 중생된 영은 하나님의 본질과 단일성으로 된 거지요. 중생된 영이. 그래서 이제 죽어도 그 중생된 영은 천국은 들어가는 거지요.
그러니까 선악과를 따먹기 전보다도 예수 믿은 후의 그 영을 우리가 생각을 하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무죄상태 그 때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잖아요.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이지요. 그런 면을 이렇게 비교하고 따져볼 때에 가치평가성을 따져볼 때에 선악과 따먹기 전보다고 훨씬 낫지요. 말로 다할 수가 없지요. 그렇다고 본다면 이게 좀 어떻게 보면 그런 면을 염두에 두고 생각을 해보니 선악과를 안 따먹은 것보다도 따먹는 게 좋겠지요? 어때요? 따먹었다고 해서 또 따먹을까? 그러니까 이제 다시 우리에게 이걸 성화구원으로 끄집어 왔을 때에 또 다시 따먹을 수는 없는 거지요. 예수가 또 다시 올 수도 없는 거고.
그렇게 일차적으로 그렇게 된 과정을 봤을 때에 현재적으로 평가를 해봤을 때에 자기에게는 유익이 돼왔단 말이요. 그러면 아담보고 ‘야, 죄 잘 지었다’ 그런 얘기냐? 그런 말은 아니지요. 그러니까 그게 결과는 좋게 되었지만 그 때 당시로 내가 아담이라고 가정을 한다면 다시 따먹겠느냐 그 말이요. ‘잘 따먹었다’ 그게 아니고. 이제는 다시 그 역사를 반복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일차적으로는 말하자면 하나님이 책임을 져주셨다 그 말이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자, 가룟유다나 빌라도 모두 하나님의 예정대로 설계대로 잘 됐지요? 그럼 잘 됐다고 그러면 그들이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대 협조자들이었느냐 그 말이요. 대립자들이었나? 대립을 했다고 해서 대국적인 구원이 중단이 되었나? 하나님의 계획이 변경이 되었나? 안 됐잖아요. 생각하기가 어렵습니까?
그런데 그들의 마음 자체는 대립성을 일으키고 있지요. 그렇지요?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대국적인 그 구원을 위해서 누가 대립을 해도 대립성 그 자체를 갖다가 하나님은 써먹어 버린다 그 말이요. 쉽게 말하면. 중단이 없다 그 말이요. 이게 무슨 말인지 알 수 있겠어요? 하나님은 누가 대립을 해도 그 당신의 선에가 그걸 이용을 다 해버린단 말이요.
그러면 하나님 당신이 선으로 썼다고 그래서 그 자에게 선으로 입히느냐? 지금 그런 의미는 아니에요. 참 묘하지요? 그러니까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대국적인 사역에 거스를 자가 없어요. 거스르면 거스르는 대로 갖다가 잡아 써버린단 말이요. 호응적이면 호응된 그 자는 하나님의 대국적인 구원에 이용당하는 것 같으나 그 결과성은 자기에게 또 오게 돼 있단 말이요. 선으로. 선이 입혀지고. 참 묘하지요.
이런 게 있습니까? 그 왜 사람들이 많이 홍수처럼 밀려가는 그 속에 자기가 끼어있을 때에 막 밀려가는 게 있습니까? 안 가고 싶은데도 밀려가는 게 있습니까? 그 참 묘하지요? 그들 자체는 대립적이었지요.
우리가 교훈적인 면으로 모든 싸움은 요인이 있습니다. ‘먹으라, 먹지 말라.’ 여기서 먹느냐, 안 먹느냐? 그런데 직접적으로 아담에게 ‘먹지 말라.’ 또 간접적으로는 하와에게 ‘먹지 말라.’ 그래서 둘 다 알고 있다 그 말이요. 아담을 통해서 하와에게 먹지 말라고 했으니까 안 먹는 것으로 둘 다 알고 있다 그 말이요. 그런고로 이제는 ‘먹느냐, 안 먹느냐’ 이게 문제가 아니다 그 말이요. 하나님은 진정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사랑에는 인격적 수수관계성이 있습니다. 이걸 만들려고 그런다 그 말이요. ‘먹으라, 먹지 말라’ 그 말 속에는 지금 ‘먹는다, 안 먹는다’ 자꾸 그것만 생각하지 말고 ‘왜 그 말씀을 하셨을까?’ 그거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 자기와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그게 뭐요? 얘기를 걸고 들어온다는 게 뭐요? 관계성을 갖자는 신호가 되는 거지요.
그러면 하나님 마음을 섭섭하게 해드리고 하나님처럼 되면 그게 좋을까요? 참 이 말이 이상하네? 하나님처럼 된다고 해서 하나님이 되느냐 그 말이요. 모든 매사에 그렇다 그 말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이걸 의식을 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의식하고 즉 하나님을 외면하지 말라. 늘 그 속에는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한다는 게 그렇게 산다는 게 그런 생각을 갖는다는 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다. 뭘 일을 크게 만들어서 하는 그걸 자꾸 생각을 하는데 그렇지 않다 그 말이요.
그리고 싸움의 상대는 사람과, 또는 하나님도 되고 그래요. 가만 보면. 또 사람과 뱀, 또 싸우는 걸 가만 보면 하나님 대 마귀. 물론 하나님은 마귀를 못 이긴다 하는 그런 대등한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런데 우리가 신앙의 교훈적으로 보면 그런 면도 있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우리가 보면 안 따먹고 이기는 게 좋지요. 안 따먹고 이기는 것. 즉 이게 무슨 말인가 하니 유인전이 있지요. 그 유인전을 이기고 안 따먹는 것. 그거 있단 말이요. 그런데 자칫 잘못하면 대립은 알지만 유인전에서 넘어가기가 쉬워요. 유인전에서 그만 넘어간다.
하나님과의 자기가 관계성을 바로만 가지면 어느 누가 인간에게 덤비겠느냐? 인간이 자기의 위치가 하나님 다음에 자기 위치거든요. 이 자기 위치에서 떨어지면 뱀이 덤벼든다 그 말이요. 사실은 인간과 뱀과의 싸움의 상대가 되는 겁니까? 싸움의 상대가 아니에요. 사실은. 그런데 뱀과 싸우게 된다 그 말이요. 못된 인간은 길 가는 개잡고 싸웁니까? 인간의 차원이 떨어지면 개잡고 싸워요? 그렇지요. 그런 거와 같다. 왜 이렇게 떨어졌느냐?
우리 인간 자기가 자기 위치를 올려야 합니다. 올라가는 게 하나님의 뜻이요. 안 올라간 상태에서 세상사람들은 뭘 자꾸 가지려고 욕심을 부리잖아요. 올라가야 된단 말이요. 올라가는 게 하나님 뜻이요 하나님 말씀이라. 그러니까 돈과 명예나 존귀 부귀 권세 이런 것 붙잡으려고 싸우지 말고 올라가야 할 자기를 잡고 싸우라 그 말이요. 참 어렵지요? 참 어려워요. 그게. 그런데 오늘날 기독자들이 그걸 잘 몰라요. 너무 무뎌. 이 마음 싸우는 걸 몰라. 정신 싸우는 거. 무뎌. 너무나 무뎌.
하나님은 인간 가기를 좋게 해주시려고 하는 분이십니다. 자기의 부모형제보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고 더 높이 올리려고 그런다 그 말이요. 그런고로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한다.
패인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입니다. 무지요 불신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패배의 결과는 하나님처럼 된다고 해서 했는데 패배가 돼버렸습니까? 뱀에게. 하나님처럼 오르기는커녕. 그러니까 싸움의 성질을 모르니 유인전에서 패배가 돼버린단 말이요.
그 패배의 결과는 현재의 결과가 나타나 있고 또 미래적으로 미래의 결과가 나타나는데 현재의 결과는 어떻게 나타났느냐? 뭘로 가지고 치마를 만들었지요? 자기 치마 만들고, 또 하나님이 보기 싫고 숨고. 하나님이 보기 싫다 그 말이요. 에덴동산 안이라면 하나님이 거니시는 동산이지요? 에덴동산 안이라면 얼마나 평안하냐? 그런데 고통의 동산이 돼버렸다 그 말이요. 그렇지요? 그 불행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행복의 동산이 아니라 불행의 동산이요 고통의 동산이 돼버렸어.
그리고 두 번째는 쫓겨났다 그 말이요. 쫓겨난 것은 뭔고 하니 밉다 단순히 그 한 가지만 생각을 말고 그래, 네 수준에 맞추자 그 말이요. ‘타락된 네 수준에 맞추자’ 한 것이 에덴동산 밖이야. 참 이 말이 듣기가 좀 어렵지요? 그러니까 ‘너는 에덴동산 밖에서 살 수준이다. 너는 그만밖에 안 된다. 네 분수대로 한 번 살아봐라.’ 참 안타깝지요. 그리고 자손 대대로 전쟁이라 그 말이요. 이게 얼마나 고통이냐? 이제 예수 믿는 것 좀 알겠습니까?
우리가 오늘날 신앙상태 교회상태를 보면 참 캄캄합니다. 우리가 알았더라도 이게 참, 그러니까 우리의 기도가 바울이 기도하는 것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그 자기 마음상태를 보고 그런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단 말이요. ‘누가 나를 이 창살 없는 감옥과 같은 상태에서 건져내랴.’ 그런데 일부 사람들은 기본구원으로서 완전 의인이 돼가지고 ‘어떤 걸 해도 죄가 아니다.’ 이거는 도무지 성경을 모르는 차원이 되는 거지. 그러니까 어떤 부분은 옳은 것 같은데 어떤 부분은 유인이 돼가지고 쏙 빠지고 마귀의 장난이 돼 있다. 그런 게 상당히 많아요.
기도 올립시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희들 이 시대에 태어나게 해서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사건 환경을 겪게 하고 체험하고 저희들이 말씀에 의해서 깨닫게 이렇게 해주시는 거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인간 우리 자기를 이 세상에 만들어놓은 이유, 나그네로 살면서 내가 이 땅에서 살아야 할 존재의 이유, 출생의 이유를 성경을 통해서 알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저희들이 과거에는 깨닫지를 못해서 사건 환경에 얻어맞고 남과 세상에 대해 원망불평하고 하나님에 대해 자기 신세타령하고 하나님에 대해 얼마나 삿대질을 하고 원망을 했는지 생각을 해보면 ‘너무 어리석은 나였구나’ 하고 생각할수록 부끄럽고 말로 다할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이제 저희들에게 영특한 깨달음을 주시고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뜻을 밝히 알아 현실에서 어떤 상황을 주더라도 비록 우리가 잘못해서 또 죄를 지었고 모든 면에서 연약한 상태이지만 그러나 이미 지난 과거가 만족합니다. 이제 더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저희들을 강력하게 붙들어 주시고 이제 살아가는 동안에 하나님 앞에 모든 면에서 자타를 위해서 성화구원을 이루어가고 수종을 들면서 은혜 위에 은혜를 받고 싶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저희들을 영육 간에 온전자로 만들어 주시고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고 기쁨을 드릴 수 있는, 그리고 우리 자신도 주님 안에서 기쁨을 맛볼 수 있는, 아버지가 기뻐하니 나도 기쁘고 내가 기뻐하는 걸 보시고 아버지가 기뻐하시고 이렇게 인격적 애정적 결합자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저희들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고 붙잡아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