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이렇게 생각을 하시었다. “이곳에 문수사리법왕이라는 자(子-공자. 맹자 하듯이 존칭어)는 이미 일찍이 과거세상에 무량(無量-헤아릴 수 없는 수효)한 모든 부처님을 친근(親近-가까이서 섬김. 친(親)은 섬기다의 뜻)해 공양(供養)을 드렸기 때문에, 반드시 이렇게 희유(希有-매우 보기 드문 일)한 모습을 응당 보았을 것이니, 내 지금 당장 물어보리라.”1-32
부작차념 시문수사리법왕지자 이증친근공양과거무량제불
復作此念 是文殊師利法王之子 已曾親近供養過去無量諸佛
필응견차희유지상 아금당문
必應見此希有之相 我今當問
1-부작차념(復作此念)을 자비념(慈悲念)이라 한다. 미륵보살이 법회의 대중과, 법화경을 읽고 외우는 미래의 중생을 가엾게 여겨 다시 질문할 생각을 일으킨 것이다.
2-문수사리법왕지자(文殊師利法王之子)는, 보살의 십주(十住)에 법왕자주(法王子住)와 여기서 법왕자(法王子)는 그 의미가 다르다. 법왕자주는 법왕 즉 부처님의 참된 제자의 위계(位階)에 머물러 있는 것을 뜻하고, 법왕자는 보살일 때 어떤 중생을 법왕 즉 부처님으로 만든 자란 뜻이다. 법화경에서 “일월등명불의 여덟 명의 왕자가 모두 묘광보살을 스승으로 삼아 성불을 하였다.”등의 뜻이다.
3-이증친근공양과거무량제불(已曾親近供養過去無量諸佛)은, 8만 명의 모든 보살 중에서 문수보살을 가리킨 것은, 가까이는 일월등명불 시절을 드러내야 하기 때문이고, 멀리 볼 경우에는 8만 명의 모든 보살도 각기 일월등명불의 내용처럼 법화경을 유통한 전적이 있었음을 알아야한다.
4-필응견차희유지상(必應見此希有之相)은, 부처님이 무량의처삼매에 들어가 무량의처광명을 놓으신 것을 통해 보게 된 시방의 모든 중생과 보살과 부처님을 가리키는 것이고, 희유(希有)하다는 것은 과거 무량의경을 연설하기 전에 8만의 대승경전을 연설하실 때에도 광명을 놓았으나, 지금 놓은 광명은 처음 보았기 때문에 희유하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5-아금당문(我今當問)은 아(我)는 법화경을 지니고 읽고 외우는 일체중생을 가리키니 일승아(一乘我)라 한다.
금(今)은 이금당(已今當)을 뜻하니, 과거에도 물어보았고 지금도 물어보고 미래에도 물어 볼 것이라는 뜻이다. 이금당 하여 과거에도 물어보아 중생이 불도에 들게 되었고, 지금도 물어보게 되면 중생이 불도에 들게 될 것이며, 미래에도 물어 보아서 중생을 불도에 들게 할 것이기 때문에 이를 묘법금(妙法今)이라 한다.
당(當)은 질문을 해서 이익을 얻는 자와, 대답을 듣고 이익을 얻는 자와, 대답을 하는 자가 함께 불도에 이르기 때문에 이를 연화당(蓮華當)이라 한다.
문(問)은 경전을 가리키는 말씀이니, 일체중생이 생사문(生死問)을 깨닫지 못해 삼계를 윤회하며 끝없는 겁을 지내나 부처님을 만나지 못하면 해탈을 하지 못한다. 하지만 부처님이 말씀하신 경전의 가르침을 통해 생사문을 깨달아 해탈을 하게 되니 이를 경전문(經典問)이라 하는 것이다.
6-아금당문(我今當問)의 이익은 첫째 법회의 대중이 의심을 풀 수 있고, 둘째 소승은 대승의 보살을 이룰 수 있고, 셋째 보살은 부처님을 이룰 수 있고, 넷째 미래에 법화경을 읽고 베껴 쓰는 사람은 고해(苦海)를 벗어나 부처님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아금당문의 이익이란 이렇게 큰 것이다.
지금 법화경을 지니고 읽고 외우며 베껴 쓰고 공양을 드리는 모든 사람들은 모두 아금당문의 경지에 머물러 있음을 알아야한다.
7-방등의 보살은 아문(我問)에 빠져 자신이 모르는 것만 부처님에게 물어 깨달음을 얻는다.
반야의 보살은 금문(今問)에 빠져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가르침을 듣고 의문을 일으켜 다시 질문해 대답을 듣고 깨달음을 얻는다.
화엄의 보살은 당문(當問)에 빠져 질문이 바로 대답이 될 수 있음을 깨닫는다.
법화의 보살은 이 세 가지의 문(問) 즉 아문(我問)과 금문(今問)과 당문(當問)을 동시에 깨달아 불도(佛道)에 들어간다.
소승의 나한과 연각은 질문하는 법을 부처님에게 배우고, 부처님이 대답을 하시는 이치도 배워야 깨달음을 얻는다. 마치 유치원 선생님에게 아이들이 질문과 대답의 이치를 모두 배우는 것과 같다.
8-법화경을 통해 이미 문수사리가 법왕자임을 알게 되었다면, 지금 이 법화경을 읽는 모든 사람은 이미 법왕자가 될 것임에 틀림이 없다. 법화경을 읽는 자와 문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따라서 일승자(一乘子)라 하는 것이다. 비유를 들면 스승은 반드시 제자를 자신의 위치에 오르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부처님이 이르시길, “어떻게 해야 빨리 중생을 불도에 들게 할까!”하시었다.
과거에 무량한 제불(諸佛)을 친근하였다면, 현재도 무량한 제불을 친근할 것이고, 미래에도 역시 무량한 제불을 친근해 불도를 이루게 될 것이다. 법화경에서 부처님이 “내가 과거에 무량한 제불에게서 온갖 방편과 신통 등을 닦았느니라.”하시었다. 따라서 지금 법화경을 읽고 외우는 모든 사람은 무량한 제불을 만나 반드시 불도를 이루게 될 것이기 때문에 묘법의 관점에서 부처님과 중생이 둘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법화경을 읽고 외우는 중생을 묘법불(妙法佛)이라 한다. 부처님이 법화경에서 이르시길, “이 법화경을 지니고 읽는 사람을 보거든 마치 부처님을 대하듯 해야 하느니라.”하시었다.
시방세계는 구차하게 부처님이 광명을 놓지 않을 지라도 이미 희유한 모습을 하고 있다. 따라서 이를 연화상(蓮華相)이라 한다.
아(我)는 법화경의 사람이고 금(今)은 시방세계이며 당(當)은 대답이고 문(問)은 경전이 되니, 이를 경전문(經典問)이라 하는 것이다.
-偈頌-
미륵보살이 대표가 되어
문수사리에게
질문을 하시는 것은
사교의 제자들을 가엾게 여겨
이들을 법화경의
일승에 들어오게 하려는 것입니다.
-寶雲法師 法王合掌-
一乘妙法蓮華經
一切諸佛神通力